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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 사악함의 극한을 보여준 ‘만주 731부대’

천사요정 2018. 6. 29. 19:55

[하성봉의 중국이야기 19] 3000여명 산 채로 실험… 세균무기 등 연구개발 ‘식인마굴’

전쟁은 인간을 미치광이로 만든다. 총칼앞에서 인간의 존엄성과 고귀함은 쓰레기처럼 취급된다. 만주땅에서 일본군국주의자들에 의해 지옥보다 더한 처참하고도 잔혹한 일이 벌어졌다. 

바로 ‘만주제731부대’에서 진행된 세균무기 제작과 생체실험장이다. 이곳은 일본제국주의의 잔악함을 낱낱이 보여준다. 현재는 당시의 현장을 일부 복원시킨 ‘침화일군 제731부대유적지’(侵華日軍第七三一部隊遺跡地)로 일반인들에게 개방하고 있다. 위치는 하얼빈(哈爾賓) 핑팡취(平房區) 신장다제(新疆大街) 25호로 하얼빈 시내에서 남동쪽으로 25㎞떨어진 곳에 있다. 731부대는 원래 건물 80여 곳에 총면적이 6.1㎢였으나 현재는 당시의 본부건물을 유적지로 되살려 놓았다. 이곳 건축면적은 2000㎡로 냉동실험실, 시체소각로, 세균보존실 등 19곳의 보호유적이 있다.

이곳을 둘러보면 ‘인간이란 존재가 얼마나 사악해질 수 있는지’, 그 극한을 보여준다. 731부대는 탄저균, 페스트균, 콜레라균 등 20여 종류의 병원체를 세균병기로 개발했다. 

일본은 1931년 9.18만주사변을 일으킨 뒤 1937년 7월에는 중일전쟁으로 확대한다. 일본은 중국대륙을 삼킨 뒤 동남아 나아가 세계를 정복하려는 망상을 품었다. 시대는 영웅을 낳지만 또한 악마도 만들 수 있다. ‘악마’인 731부대는 바로 이때 탄생했다. 일본은 하얼빈외에 창춘(長春), 난징(南京), 베이징(北京), 광저우(廣州)와 싱가포르 등지로 세균부대를 늘려나갔다. 

일본 국왕의 칙령으로 만든 특수부대…살아있는 3천여명을 생체연구 재료로 삼아

만주731부대는 일본 국왕의 칙령을 받아 만든 특수부대로 일제의 꼭두각시 정권이었던 만주국 영토내에 자리잡았다. 만주731부대는 확장을 계속해 1942년에는 부대원 총수가 3천명에 달했으며 헤이룽장성(黑龍江省)내 하이린(海林), 쑨우(孫吳), 린커우(林口), 하이라얼(海拉爾) 등지에 지부를 둘 정도였다. 1939년이후 대규모의 세균 생산을 시작하면서 매달 최대 장티푸스균 800~900㎏, 흑사병균 300~400㎏, 콜레라균 1000㎏중에서 선택해 생산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고 있었다.

이곳은 살아있는 사람을 실험대상으로 삼아 세균무기를 연구개발한 ‘식인마굴’(食人魔窟)이었다. 실험에 사용된 인간들은 ‘마루타’(丸太,’통나무’란 의미)로 불렸다. 지역당국에 이곳 시설을 제재소라고 신고했기 때문에 농담삼아 이렇게 불렀다고 한다.

 

이곳의 제1대 부대장은 이시이 시로(石井四郞) 중장이었다. 그는 유학기간동안 영국,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의 생물의학이 발전된 상황을 살펴본 뒤 세균화생전을 주창한 끝에 육군상층 인물의 지지를 얻게된다. 이시이는 1931년 도쿄 일본육군군의학교내에 방역연구실을 창립하고 세균전에 대한 연구를 시작한다. 그는 대량의 생체실험 재료를 확보하기 위해 1932년 하얼빈시에서 남쪽으로 70㎞떨어진 얼베이인허전(二背蔭河鎭)으로 옮겨온뒤 1935년 만주731부대가 위치한 핑팡(平房)에 자리를 잡고 본격적인 생체실험에 들어간다. 이시이는 야전용 음용수여과기를 만든뒤 대량생산을 위해 군상층부앞에서 자신의 오줌을 여과기로 걸러 마신뒤 예산지원 허락을 받아낼 정도로 철저한 파시스트였다.  

731부대는 1939년부터 패망하던 1945년까지 중국인, 몽골인, 러시아인, 조선인과 미국인 등 인종별로 3천여명을 산 채로 생체실험을 했다. 

처참하고 잔악한 생체실험의 현장…임산부에 3살 어린이까지 처참하게 살해

생체실험은 더 이상 잔악하다 할 수 없을 정도로 처참했다. 그속에는 3살짜리 어린이도 포함돼 있었다. 일본군은 대량의 세균배양과 실험을 위해 쥐와 파리, 모기, 빈대, 이 등 전염병을 옮기는 여러 곤충을 번식시켰다. 인간 생체실험을 위한 혈액재료를 얻기 위해 말, 소, 낙타, 원숭이 등도 사육했다. 

  
731부대는 페스트균을 배양하기 위해 쥐 등 각종 동물을 집중배양했는데 동물사육을 위한 지하실험실 입구이다.출처=중국포털 바이두
 
 


일본군은 배양한 대량의 세균을 살아있는 사람들을 상대로 실험을 했으며 그 방법이 수십 가지가 됐다. 세균액을 주사기로 인체에 주입하고, 입에 들이붓거나, 음식에 섞어 식용이라고 속여서 먹게 한뒤 그 변화를 관찰해 기록했다.

731부대원들이 진술한 바에 따르면 일본이 패망을 앞둔 말기인 1944년 3월에서 1945년 5월까지 9개월동안에 세균에 강제주입당해 죽은 사람이 190여명이었다. 동상실험은 더욱 잔인했는데 옷을 벗긴 사람을 동상실험실 내에 집어 넣고 영하 30~40도 혹은 그 이하의 온도로 낮춘 실험실 내에 넣은 뒤 각종변화를 관찰했으며 신체가 얼어굳은 뒤에는 찬물, 더운물 심지어 펄펄끓는 물에 넣고 가장 ‘이상적인’ 해동방법을 찾는 끔찍한 실험을 했다. 실험대상자는 극도의 고통속에서 현장에서 죽거나 피부와 살이 썩어서 흰뼈가 드러나기도 했다. 

  

  
731부대생체실험 유적지에 전시된 모형으로 부대원들이 실험실에 '마루타'를 발가벗겨 넣은 뒤 내부를 서서히 진공상태로 만들어 시간대에 따른 변화를 기록하고 있다.ⓒ하성봉
 
 

다행히 살아남더라도 치료뒤 다시 실험용으로 재사용하거나 고통스럽게 죽어갔다. 일본군은 증거를 없애기 위해 시체를 태우는 화로를 설치했다. 1939~1945년 731부대에서 3천여명이 잔혹하게 희생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731부대의 심장부로 불리는 동력반의 건물로 발전설비, 난방용 급유시설과 시체소각장장이 있었다.ⓒ하성봉
 
 

생체실험은 임산부에게도 시행이 되었다. 어떤 때는 의사에 의해 수태되고 그 태아는 꺼내어 졌다. 이외에 사람과 말의 피를 서로 수혈하거나 공기로 정맥주사를 놓고 반응을 보기도 했다. 또 소장과 식도를 접합하고 팔과 다리를 절단해 교차 접합하는 실험도 했다.  고속회전기에 넣어 돌리는 실험과 폐에 담배연기를 주사하는 실험도 했다. 두개골을 열고 뇌를 바늘로 찔러 인체의 다른 부위가 어떤 반응을 하는지 보는 실험이 진행됐다. 

중국에서 1988년에 상영한 영화 ‘흑태양731’(黑太陽731)속의 생체실험 장면은 차마 눈을 뜨고 볼 수 없을 정도다. 

냉동실험에서는 영하 50도의 혹한에서 얼음이 언 손을 뜨거운 물에 담궈 해동시켜 살과 뼈의 결합상태를 확인하고, 영하 200도에 가까운 냉동실에 손을 얼려 손가락을 막대기로 두들겨 고드름처럼 부러뜨리는 실험을 한다. 
  

  
동상실험뒤 뜨거운 물에 손을 담궈 근육과 뼈의 부착상태를 실험하는 끔찍한 장면을 보여주는 중국 영화 ‘흑태양731’(黑太陽731)속의 한 장면. 출처=중국포털 바이두
 
 

천진한 어린이가 눈을 말똥말똥 뜬 채 해부대 위에서 여지없이 심장과 간 등 장기가 도려져 알코올 보관병에 담긴다. 두 모녀가 의자와 나무 기둥에 묶인 채 독가스실로 넣어진 뒤 질식사하는 장면을 일본군인들이 눈을 빤히 뜨고 지켜본다. 진공실험에서는 온몸이 팽창하고 내장이 항문으로 탈장하면서 죽게 된다. 731부대원들은 초시계로 모든 상황을 기록한다. 



‘흑태양731’(黑太陽731)


              


중국이 731부대 생체해부의 잔악상을 고발하기 위해 1988년에 상영한 영화 ‘흑태양731’(黑太陽731)의 포스터. 출처=중국포털 바이두

 

실험에는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진행됐다. 수많은 실험과 해부가 살아있는 상태에서 마취없이 이뤄졌고, 이는 실험결과에 영향을 주지 않기 위해서였다.

페스트 균을 인체의 각 부위별로 주사한 뒤 신체변화를 관찰하고 즉시 해부해 세균의 침투정도를 기록으로 남겼다. 2012년 초에는 731부대가 종군위안부를 자식이 보는 앞에서 해부했다는 증언이 나오기도 했다. 백신연구를 위한 혈청을 얻기 위해 산 사람의 몸에서 피를 뽑아 죽였다. 

  
731부대는 수십가지의 세균을 생체의 각 부위에 주사기로 주입한 뒤 해부해 세포의 변화를 관찰했다.출처=중국포털 바이두
 
 

731부대원들은 인간이기를 포기했다. 이들은 마치 인간을 ‘표본실의 개구리’같이 능멸했다.  

  
731부대원들은 세균무기를 개발한 뒤 야외에서 살아있는 사람을 나무말뚝에 묶어놓고 비행기로 폭탄을 터뜨려 생체실험을 했다.ⓒ하성봉
 
 


개발된 세균무기는 실전에 사용되기전 야외에서 살아있는 사람을 대상으로 성능실험을 했다. ‘마루타’들은 나무말뚝에 묶여 비행기가 폭탄을 투하해 심장과 폐가 찢어지고 팔과 다리가 잘려나가 피를 뿌린 채 고통의 비명을 지르며 죽어갔다. 731부대는 실험폭탄 투하를 위해 자체비행기를 보유하고 있었다. 부대원들은 생환자들을 끌고와 바로 해부해 독검사에 들어갔다. 야외실험장은 731부대본부 건물에서 서남쪽으로 4㎞떨어진 핑팡취(平房區) 핑신전(平新鎭) 핑러춘(平樂村)내 9만㎡ 규모로 원래 요(遼), 금(金)시대 고성이 있던 지역이었다. 

세균폭탄 투하로 중국인민 30만명 피해…패망뒤 폭파 도주로 인근주민들 집단으로 숨져 

일본군들은 중국 동북지역에서 아무 지역에서나 세균실험을 임의로 진행했기 때문에 하얼빈, 눙안(農安), 퉁랴오(通遼) 등지에서 흑사병이 발생해 수많은 인명을 앗아갔다. 

일본군이 중국침략을 위한 전면전인 전쟁을 시작한뒤 731부대는 ‘원정대’를 조직해 여러 차례 중국내에 세균폭탄을 투하하고 세균을 풀어 중국인민들이 피해를 입었다. 일본은 닝보(寧波), 진화(金華), 이우(義烏), 인셴(鄞縣), 취저우(衢州), 창더(常德) 등에 세균전을 벌였다. 이들은 죄상을 숨기기위해 ‘방역급수’(防疫給水)라는 이름으로 하얼빈과 난징(南京)에서 세균전을 펼쳤다. 

일본이 패망한 뒤 일본세균부대는 증거를 없애기 위해 연구소 설비를 폭파하고 생존해있던 마루타 400명을 독가스로 독살해 불을 지르거나 마대에 담아 쑹화장(松花江)에 버리는 방식으로 모두 살해해 병균이 확산됐다. 731부대가 있던 하얼빈의 핑팡취(平房區)는 흑사병 전염병이 발생해 수많은 사람들이 참변을 당했다. 하얼빈 핑팡의 농민인 류중(劉忠)의 부모는 731부대의 세균배양 상자를 주워 사용하다 세균에 감염돼 사망했다. 얼다오거우(二道溝) 주민인 징푸(靖福) 일가 13명중 12명이 흑사병에 감염돼 사망했다. 731부대 유적지에는 일본 세균부대가 당시 세균배양과 번식, 실험에 사용한 용기의 일부가 그대로 진열돼 있는데 일본세균부대의 죄상을 보여주는 증거가 되고 있다.  

조선인 항일투사들도 붙들려 참상…심득룡 등 조선인 6명으로 유적지에 한글이름 남아 있어 

일본군은 체포한 항일투사, 애국지사와 무고한 백성들을 생체실험대상으로 삼았다. 잡혀온 민간인들의 대부분은 항일운동을 하던 지하정보원들로 일본 관헌에 의해 연행된 사람들이었다. 

조선인 희생자는 6명으로 심득룡, 이청천, 이기수, 한성진, 김성서, 고창률씨로 731유적지에 한글로 름이 남아있다. 
  

  
항일투사로 일본 관동군에 잡혀 731부대에서 생체실험을 당한 조선인 심득룡씨가 생체실험을 당하기 전 찍은 결혼사진.출처=중국포털 바이두
 
 

일본은 항일투사들을 소탕하고 이들을 무기개발이라는 명목으로 실험도구로 삼는 이중의 효과를 노렸다. 심득룡은 1943년 대련(大連)사건으로 체포당한 항일투사로 관동군에 잡혀 731부대에서 생체실험 당했다.  

  
조선인 희생자는 6명으로 731유적지에 심득룡, 이청천, 이기수, 한성진, 김성서, 고창률씨 이름이 한글로 남아있다.ⓒ하성봉
 
 



  
731부대에서 생체실험을 당한 사람은 3천여명으로 유적지 벽에 희생자들의 이름이 기록돼 있다.ⓒ하성봉
 
 


731부대원들 고학력의 인텔리들로 충격…전후 일본 고위직과 대학총장 등으로 천수 누려 

731부대 세균전연구 인원은 최대 3000명이었고 그중에 장군급이 5명, 그 아래 장교급이 30여명, 중대위급이 300여명이었다. 1936년부터 1942년 7월까지 이시이 시로(石井四郞)가 초대 부대장을 맡았고 1942년 8월-1945년 2월까지는 기타노 마사지(北野政次) 소장이 부대장을 맡았다. 1945년 3-8월까지는 이시이가 다시 부대장을 맡았다. 731부대는 8개부와 4개지부로 나눠져 있었다. 군의관들은 모두 당시 대학 출신의 의학자와 과학자 등이었다. 

부대원들중 이시이 시로, 기요시, 기요사마 등은 도쿄의과대 출신이다. 이들은 전범재판을 받지 않고 전후 일본 후생성 등에서 고위관직에 올라 천수(天壽)를 누렸다.

미국은 실험 자료 교환조건으로 범죄 묵인…부대간부들 한국전쟁때 인공혈액 팔아 갑부가 돼  

미국은 731부대의 실험 자료를 건네받는 조건으로 관련자들의 범죄를 묵인한다. 한국전쟁에 참가한 미군은 병사들이 유행성출열혈에 걸려 치료방법을 찾을 길이 없자 일본에 있던 731부대 출신들에게 도움을 청했다. 731부대는 1938년 세균무기개발을 위해 쥐의 배설물을 통해 감염되는 유행성출열혈을 연구했고 1942년에 이미 연구 성과를 확보한 상태였다 유행성출열혈은 휴전까지 계속됐는데 미군 감염자수는 2600여명으로 사망률은 5%에 달했다. 1951년에 731부대 제1대대장인 이시이 시로와 제2대대장인 기타노 마사지가 한국을 방문하게 된다. 기타노는 유행성출열혈 전문가였다. 이는 731부대원들이 미국과 협력관계를 터는 결정적 계기가 됐다. 이시이 시로는 50년대에 한국전쟁의 지원을 위해 한국을 2차례 극비 방문했다.

  

  
731부대의 총지휘자인 이시이 시로(石井四郞) 중장의 모습으로 한국전쟁때 미군지원을 위해 한국을 두차례 극비 방문했다. 출처=중국포털 바이두
 
 

또 한국전쟁에서 혈액이 부족해지자 일본에서 제조된 인공혈액을 한국에서 비싸게 판매해 기타노마사지와 인공혈액을 연구한 나이또 료이치는 막대한 부를 챙겼다. 이들은 일본 최대의 제약사인 미도리쥬지를 세우고 이후 에이즈 약제 사건의 주범이 된다. 에이즈 약제 사건이란 1980년대에 에이즈에 오염된 혈액을 이용해 만든 혈우병 약을 투약한 일본과 미국 환자 1800여명이 감염되고 이중 400여명이 사망해 파문을 일으킨 것을 말한다. 

  

  
731부대 제2부대장인 기타노 마사지(北野政次) 소장으로 한국전쟁때 인공혈액을 팔아 막대한 부를 챙겼다. 출처=중국포털 바이두
 
 


이들은 부를 쌓자 이시이를 배반했는데 이시이는 은둔생활을 하다가 1959년 67세로 사망한다. 이시이를 따돌린 731부대원 모임은 부대 지명을 따 ‘평방회’(平房會)라는 조직을 만들었으며, 이후 일본 의학계와 교육계의 요직에 진출했다. 731결핵담당이었던 후타끼 히데오는 일본 미도리쥬지(綠十字) 공동설립자가 됐다. 731동상실험 담당 요시무라 히사토는 일본 기상학회 회장이 되었다. 731벼룩사육담당이었던 타나카 히데오는 오사카대 의학부장을 역임했다. 731병리담당이었던 이시까와 다치마루는 가나가와대 의과대학장으로 부임했다. 731결핵균 담당이었던 야나기사와 마코토는 BCG를 개발하고 아사히상을 수상했다. 731방역담당이었던 고바야시는 국립예방연구회 초대회장을 지냈다. 동경대출신으로 731촉탁교수였던 고지마 사부로는 국립예방연구회 2대회장이 됐다. 동경대의 731촉탁교수였던 다미야 다께오는 일본의사회 회장이 됐다.  

미국, 한국전쟁때 북한에서 생균무기 실험…베트남전 파인애플탄 등 냉전에 개량사용 

미국은 오랜 시간 731부대원들을 협박하고 설득한 끝에 방대한 실험 자료를 압수했으며 이를 바탕으로 실제 한국전쟁때 북한에서 세균폭탄 실험을 했다고 중국 자료에는 기록돼 있다. 

미국의 맥아더 사령관은 전범재판이 한창 진행중이던 1947년 5월 6일 “생체실험, 세균병기 정보를 얻기위해 면책이 필요하다”고 워싱턴에 요구했다. 미국은 731부대의 실험자료에 몹시 탐을 냈다. 특히 소련이 이 생물무기를 입수하는 것을 원치않았다. 1945년 9월에 샌더스 보고서에서 일본은 공격용 세균무기 개발은 인정했으나 생체실험은 철저히 은폐했다. 미국이 조사한 2차 톰슨보고서는 1946년 3월에 나왔다. 톰슨은 이 때 세균폭탄의 설계도를 입수한 것으로 기록했다. 미국은 마침내 1947년 4월 로버트 펠에 의한 제3차 펠보고서에서 생체실험 사실 확인을 확인했다. 펠은 이시이에게 “만약 사실대로 말하지 않으면 소련으로 넘기겠다”라고 협박해 진술을 받아냈다. 미국은 1947년 12월 에드윈 힐이 조사해 작성한 제4차 힐보고서에서 생체실험, 표본 자료를 완벽하게 확보했다. 이 보고서에는 인체에 세균을 투입했을 때 세포가 변하는 것을 기록한 자료도 포함돼 있었다. 미국은 3천명의 인간을 대상으로 한 만 9년간의 방대한 실험 결과를 송두리째 확보한 것이다. 미군은 냉전의 분위속에서 1948년 4월 “우리는 모든 정보를 얻었다. 결과는 만족스럽다”라고 워싱턴에 보고했다. 미국은 실제 북한에서 세균폭탄을 사용한 외에 731부대의 가장 커다란 ‘성과’인 도자기 폭탄을 개량해 베트남전에서 ‘파인애플탄’(집속탄)을 사용했다. 731부대의 개발품이 냉전시대의 살상용무기로 거듭난 것이다. 이 폭탄은 ‘모자(母子)폭탄’이라고도 불리는데 한 개의 큰 폭탄이 폭발하면 함께 탑재된 수많은 작은 폭탄이 사방으로 흩어지면서 연쇄폭발을 일으키는 대량살상무기의 일종이다. 
  

  
731부대 부대장 이시이 시랑이 직접 설계한 도자기세균폭탄으로 폭발시 세균이 감소되지 않도록 투하도중 도자기가 자체 분리되는 방식으로 미군이 베트남전에서 사용한 파인에플탄(집속탄)의 모델이 됐다.ⓒ하성봉
 
 

독일 나찌의 전범은 법적 사회적으로 매장당했으나, 731부대원들은 미국과의 거래로 법적으로 전혀 처벌받지 않았다. 이시이가 일본 항복뒤 731부대의 방대한 실험자료를 어떻게 일본으로 운반했는지 경로는 아래와 같다. 

일본군부는 1945년 8월 9일 소련군의 참전으로 731부대가 송두리째 접수될 것을 우려해 즉시 모든 시설을 파괴하고 ‘실험자들을 ‘처분’한 뒤 철수토록 명령했다. 이시이는 완벽한 증거 인멸을 위해 6일동안 밤낮을 가리지 않고 파괴한 부대의 잔재들을 사진으로 담은 뒤 한반도로 남하해 3천t의 화물선 여러척에 방대한 세균전 자료와 부대원을 싣고 부산항을 출발해 8월 25일 야마구치 현의 센자키에 도착했다. 이시이는 부대원들에게 비밀엄수를 지시하며 부대해산을 명하고 자료들은 이미 정해진 보관장소에 극비리에 옮겼다. <출처=한겨레신문 1992.4.15 기사>  

이후 이시이는 731부대의 존재에 대해 부하에게 “무덤까지 비밀을 가져간다”는 다짐을 받았다.  

일본은 731의 존재인정하지만 배상 거부…..중국은 유네스코 문화유산 지정 신청

중국은 일본에 대해 배상을 원하고 있지만 일본은 거부하고 있다. 일본우익들은 731부대의 존재사실조차 부인하고 있으며 역사교과서에서도 전혀 다루지 않고 있다. 1997년 180명의 중국인 피해자와 가족들은 일본 정부에 소송을 제출해 사과와 배상을 요구했다. 도쿄지방법원은 2002년 8월 731부대의 존재와 진행한 생물전의 행위를 인정했지만 배상요구는 1972년 9월 29일 서명한 ‘중화인민공화국정부와 일본정부연합성명’에서 해결됐다며 거부하고 있다. 이런 가운데 일본내에서 뜻있는 양심인사들의 폭로가 이어지고 있다. 1982년 일본작가 모리무라 세이이치(森村誠一)는 ‘악마의 포식’이란 사실기록 소설에서 731부대의 죄상을 폭로해 파문을 일으켰다. 중국이 1988년에 상영한 영화 ‘흑태양731’(黑太陽731)은 일본의 생체실험에 대한 죄행을 다뤄 일반인들의 분노를 자아냈다. 한국에서는 1991-1992년에 방영된 최재성과 채시라 주연의 ‘여명의 눈동자’에서도 마루타 실험이 등장한 적이 있다. KBS는 1997년 8월에 ‘731부대는 살아있다’는 다큐멘터리를 방영한 적이 있다.

  

  
하얼빈(哈爾賓)시 핑팡취(平房區)에 있는 ‘침화일군 제731부대유적지’(侵華日軍第七三一部隊遺跡地)유적지로 당시 본부건물로 사용됐으며 내부에 전람실을 만들어놓았다.ⓒ하성봉
 
 



  
헤이룽장성(黑龍江省) 하얼빈(哈爾賓) 핑팡취(平房區)에 731부대 유적지는 역사적으로 유래가 없는 처참한 생체실험의 현장에 들어서면 평화를 외치는 희생자들의 애절한 목소리가 들리는 듯하다.ⓒ하성봉ⓒ하성봉
 
 


중국은 유엔쪽에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될 것을 신청했으나 승인이 나지 않고 있다. 폴란드의 유태인학살현장인 아우슈비츠는 1976년, 원자폭탄이 투하된 일본 히로시마는 1996년에 지정된 바 있다. 중국은 731부대유적지의 세계문화유산 지정을 통해 다시는 이런 비극이 되풀이되지 말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계속>


원문보기:
http://www.mediatoday.co.kr/?mod=news&act=articleView&idxno=101192#csidx2a531958182751e9fbb2a2aafcf9e3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