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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친일파 후손의 기억
1. 2015년 7월 14일, 서울
미국 유명 대학교 MBA 출신의 글로벌 투자회사 임원 김준호(가명) 전무는 평소와 다름없이 회사 이메일 수신함을 확인하다 낯선 메일 한 통을 발견했다. 발신인은 심인보, 처음 보는 이름이다. 제목은 “김준호 본부장님, 뉴스타파 심인보 기자입니다.”
‘뉴스타파 기자라?’ 그는 메일을 열었다.
저는 한국 탐사저널리즘센터‘뉴스타파’에서 일하고 있는 심인보 기자라고 합니다...중략...올해는 역사적인 광복 70주년입니다.
뉴스타파는 광복 70주년을 맞아 친일 청산을 주제로 한 프로그램을 제작하고 있으며 그 주제 가운데 하나는 친일파 후손들의 현재입니다.
‘이건 무슨 소리지?’ 아래로 더 읽어 내려갔다.
지난 2009년 ‘대통령소속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발표한 친일반민족행위자 1006명의 명단에 김 전무의 외증조부(어머니의 할아버지)가 포함돼 있는 것으로 확인됐다는 내용과 함께 메일을 보낸 이유가 상세히 이어졌다. 어투는 정중하고 공손했다. 편지 말미엔 모두 9가지의 질문이 있었다. 김 전무는 질문을 하나하나 살펴봤다. 메일을 다 읽고 나서 그는 이 기자가 자신을 어떻게 찾아냈는지 궁금해졌다.
다음날 오후, 그는 컴퓨터 앞에 앉아 뉴스타파 기자에게 보낼 답장 내용을 다시 한 번 확인했다. 답변을 쓰는데 꽤 시간이 들었다. 9개 질문에 대한 답변서는 별도 문서 파일로 만들었고, 메일 본문은 간단하게만 적었다.
안녕하세요. 우선 어떻게 저한테까지 연락이 닿았는지 궁금하긴 하네요. 부디 제가 생각하는 의도의 방송은 아니었으면 하는 바람으로 조금 적어 보았습니다.
말미에 답변은 익명으로 처리해 달라는 부탁을 추가했다. 그리고 4쪽 짜리 답변 문서 파일을 메일에 첨부한 뒤 보내기를 눌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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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부 친일 후손, 그 성공의 비밀
1. 1957년, 미국 메사추세츠 주 웰슬리(Wellesley) 대학
서울대 사학과를 3학기까지 마치고 이곳 웰슬리 대학으로 유학을 온 지 이제 1년이 지났다. 방학 중이라 남의 집에 들어가 ‘아이 돌보기’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다. 방학 동안 번 돈으로 학기 중의 책값과 생활비를 충당한다. 이곳 미국은 나의 조국 한국과는 비교할 수도 없는 세상이다. 한국은 폐허에서 겨우 벗어난 반면, 이곳 미국은 그림 같은 집들이 있는 나라다.
한국의 국민 소득이 50에서 60달러인데, 내가 다니는 대학의 학비와 기숙사비는 한 해 2천 달러가 넘는다. 나도 전액 장학금을 받지 않았다면 유학을 오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아르바이트를 하느라 힘들기는 해도, 지금의 이 시기는 나를 위해 쓸 수 있는 가장 소중한 시간이고 지금까지 태어난 뒤에 제일 운이 따랐던 게 웰슬리 대학의 장학금을 받은 일인 것 같다. 지난주에는 할아버지의 편지를 받았다. 할아버지는 내가 베이비시터를 한다는 얘기를 듣고 ‘네가 남의 집살이를 한다니 무슨 일이냐’며 속상해하셨다.
할아버지는 오늘의 내가 있기까지 큰 도움을 주신 분이다. 할아버지는 유명하고 영향력 있는 유학자이시지만 교육에는 남녀 차별을 두지 않았다. 어린 시절에는 내게 한글을 가르쳐주시기도 했다. 집에는 책이 많았다. 덕분에 나는 어릴 때부터 많은 독서량을 쌓을 수 있었다. 을유문화사에서 나온 방정환 선생 동화라든가 요즘 아이들이 읽는 피터팬과 백설공주, 소공녀 같은 책을 읽을 수 있었다. 어린이 책이 성에 안 차면 집에 있는 어른들 잡지를 읽었다. 아버지 서재에 있던 역사소설과 역사책도 읽었다. 그게 아마 내가 역사를 전공으로 선택하는 데 영향을 주었을 것이다.
1. 일제 강점기, 강원도 영월
온 마을이 떠들썩하다. 널찍한 가설무대가 세워졌고, 당대 최고의 명창과 고수가 등장했다. 춘향전에 이어 가야금 가락에 승무가 펼쳐지고, 경기민요가 흥을 돋군다. 마을 사람들은 구경에 신바람이 났다. 잔치는 여러 날 계속됐다.
일제 강점기 어느 날, 강원도 영월에서 열린 큰 잔치 풍경이다. 고 안비취 명창은 지난 93년 이 잔치에 초청 공연을 갔던 기억을 술회한 바 있다. 자신을 비롯해 조선 말기 판소리 5대 명창인 이동백, 산조 명인 정남희, 춘향모 역의 당대 1인자였던 박초월, 가야금 병창의 명인 오태석, 줄타기의 명고수 이정업, 조선의 마지막 무동이었던 김천흥, 나중에 중요무형문화재 제27호로 지정받는 강선영 등이 가설무대에 올랐다고 한다. 말 그대로 당대 최고의 연예인들이 총출동한 셈이다. 얼마나 돈이 많으면 이들을 죄다 불러 잔치를 벌일 수 있었을까? 잔치를 마련한 이의 권세와 재력을 짐작할 수 있다.
그 주인공은 장준영, 아버지를 위해 거창한 잔치를 마련했다고 한다. 장준영은 1942년 조선총독부 자문기구인 중추원 참의 자리를 차지했다. 그리고 2009년 대통령 소속 친일반민족진상규명위(이하 반민규명위)는 그를 친일반민족행위자 1,006명에 포함시켰다.
당시 결정보고서를 보면 장준영은 평북 후찬군 일대 100만평의 광업권을 설정할만큼 큰 부자였다. 또 ⟨강원神社(신사)⟩ 공사에 1만원, 육영 사업비에 6만 원, 국방헌금 1천원을 내기도 했다. 그는 1949년 반민특위에 체포됐지만, 보석으로 풀려났다. 당시 그의 재산은 국가에 귀속되거나 몰수됐다는 기록은 없다.
시인, 목사, 정치인...친일 후손의 고백
1. 1941년, 경상남도 하동군
1941년 경남 하동군청에 약관 26세의 청년이 군수로 부임해 온다. 한 해 전인 1940년 경성제대 법학과를 졸업한 직후 조선총독부의 고등문관 시험에 합격한 이항녕이 그 주인공이다. 서울대의 전신인 경성제대 예과에 들어갈 때만 해도 그는 작가가 되겠다는 꿈을 키워갔다. 하지만 문학도의 길을 포기한 뒤 본과에 올라가 법학을 전공하게 되면서 이항녕은 그 자신의 표현을 빌자면 ‘타락일로’를 걷게 된다.
후일 그는 자전적 수필집에서 일제 때 법학을 공부하고 고등문관 시험에 합격해 군수가 된 과정을 이렇게 술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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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의 파수꾼은 살아 있다.
1. 2015년 8월 18일, 뜻밖의 전화
항의든 격려든 보도 후에는 으레 반응이 온다. 취재 대상이나 시청자, 독자로부터. 반응이 거의 없다면 그건 실패한 보도라고 할 수밖에 없다. 광복절 사흘 뒤 친일 후손 2명이 연락해 왔다. 8월 18일 오전에 전화를 걸어온 분은 한 대학의 노 교수였다. 그와는 이미 몇차례 이메일을 주고 받았으나 직접 통화는 처음이다. 이 교수는 지난 6월 말 ‘친일과 망각' 제작진이 보낸 이메일 질문에 대해 역시 교수인 동생과 상의 후 두 차례 답변을 보내왔다.
조부께서 일제시대 때 고위직인 지사를 역임하셨으니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의 친일파 명단 발표는) 올바른 결정입니다. (선대의 친일행적에 대한 후손들의 공개사죄는) 용기있는 행동이라고 생각합니다.
- 2015년 6월 29일 ◯◯◯ 교수 이메일 답변 중
앞으로도 간단한 질문에는 서면으로 대답을 하겠습니다. 그러나 나서서 인터뷰까지 하는 마음의 준비는 되지 않았으니 이해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 2015년 6월 30일 ◯◯◯ 교수 이메일 답변 중
메일과 마찬가지로 통화를 하면서도 익명을 요구했지만 노 교수의 생각은 이전과는 좀 달라졌다. 그는 뉴스타파 프로그램을 본 후 생각이 조금 바뀌었다고 말했다. 조부의 친일행적을 사죄하고 싶다고까지 했다. 다만 공개적인 사죄까지 할 용기는 아직 없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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