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긴축재정’ 트라우마에 갇힌 정부
가계빚 늘고 기업 투자처 못찾아도
국가부채 강박증 탓 재정지출 꺼려
2008년 금융위기 뒤 장기 저성장
IMF, 지속성장 위한 재분배정책 강조
한국에 매년 “적극적 재정 운용” 권고
“재정 여력이 있는 나라마저도 국가채무를 줄이려는 게 바람직한가. 이런 나라들은 부채와의 공존을 선택하는 게 좀더 나은 경제적 성과를 기대할 수 있다. 또 불평등은 지속가능한 성장에 심각한 훼손을 가져온다. 각국 정부는 불평등을 줄이기 위해 적극적인 재분배 정책을 펴야 한다.”
지난 2016년 6월 국제통화기금(IMF)의 조너선 오스트리 조사국 부국장은 ‘신자유주의는 과대평가됐나’란 보고서에서 이런 주장을 폈다.
아이엠에프가 지난 수십년간 교리로 받들던 시장만능주의(신자유주의) 사상에 따라 각국에 제시한 권고에 대한 자기반성을 담았다는 평가를 받았다. 아이엠에프의 변화는 2008년 세계 금융위기 이후부터 서서히 시작됐다. 재정 건전성 확보에 목소리를 높이기보다 침체된 경제와 불평등 해소를 위해 재정의 적극적 역할에 무게를 둔 것이다.
그러나 20년 전 아이엠에프로부터 구제금융을 받으면서 재정 긴축과 시장 개방, 노동 유연화 등의 이행을 핵심으로 한 굴욕적인 양해각서를 체결했던 우리나라는 당시 아이엠에프가 강요했던 정책 기조의 상당부분을 답습하고 있다. 아이엠에프 위기 때 만들어진 트라우마가 깊숙이 박혀 있는 탓이다.
■ 과도한 부채 강박증이 낳은 후유증 아이엠에프에서 돈을 빌린 뒤 불과 3년여 만인 2000년 12월4일 한국 정부는 ‘아이엠에프 조기 졸업’을 선언한다. 아이엠에프에서 빌린 돈을 예정된 일정보다 앞서 모두 갚아버렸기 때문이다. 여기에는 외환위기 이후 세계 경기 회복세에 올라타 수출이 크게 늘면서 달러가 국내로 쏟아져 들어온 영향이 컸지만 양호한 국가재정 상태도 한몫을 했다. 금융과 산업 부문에서 발생한 거대한 부실을 재정으로 메우면서 ‘위기의 장기화’를 막을 수 있었다. 1998년 3월 기준 금융기관이 떠안은 부실 여신(3개월 이상 연체 대출)은 118조원으로, 당시 국내총생산(GDP)의 20%에 이르는 규모였다. 여기서 ‘건전 재정’의 신화가 탄생했다.
이후 정부의 예산 당국자들은 입버릇처럼 복지예산 확대 등에 대한 요구가 빗발칠 때마다 “소규모 개방경제인 한국에선 재정이 최후의 안전판”이라며 재정적자와 국가부채가 늘어나는 것을 꺼렸다. 이런 기류는 잠재적 통일비용과 미래의 공적연금 지출까지 염두에 둬야 하는 만큼 다른 나라보다 더 많은 재정 여력을 비축해야 한다는 논리로 더 공고해져왔다.
그러나 과도한 재정 보수주의는 부작용을 낳았다. 이런 부작용은 2008년 금융위기로 시작된 최근 10년여간의 ‘장기 저성장’ 국면에서 도드라졌다. 가계는 빚더미에 짓눌리고 기업은 투자처를 찾지 못해 현금을 쌓아놓고만 있을 때도 정부는 ‘부채 증가’에 강박증을 보이며 ‘재정 건전성’에 집착했다. 자연스레 가계와 기업에다 정부까지 경제의 3대 주체가 모두 돈 쓰기를 주저하면서 저성장의 골은 더욱 깊고 넓게 파였다. 전직 금융당국 고위 관계자는 “(가계와 기업, 정부의 한해간 지출과 수입을 한눈에 보여주는) 자금순환표만 보면 한숨만 나왔다. 재정은 안 쓰고 (대출규제 완화로) 가계에 빚을 내도록 해 경기를 끌고가려는 구상 자체를 받아들이기 힘들었다”고 털어놨다.
급기야 아이엠에프도 금융위기 이후 주요 선진국이 앞다퉈 재정을 풀어 경기에 활력을 불어넣은 데 견줘 세계 어느 나라보다도 ‘건전한 재정’을 갖고 있는 한국 정부가 ‘돈 쓰기’를 주저한다고 판단했다. 이 기구는 매년 내놓은 한국경제연례협의보고서(Article Ⅳ)의 핵심 권고 사항에 빠짐없이 ‘적극적 재정 운용’을 담았다.
국가채무(D2)비율 추이는 한국 재정당국의 재정 보수주의가 얼마나 과도한지를 여실히 드러낸다. 한국은 2008년 이후 저성장 위기를 지나오면서도 40%대 수준에 머물고 있다. 반면 오이시디 회원국 평균은 2008년 위기 전에는 60% 수준이었으나 현재는 90% 수준에 이른다. 많은 나라들이 나랏빚을 내서라도 실업 구제 등에 재정을 적극 투입했다면 한국 정부는 금고를 움켜쥐고만 있었다는 뜻이다. 그 결과 저소득 가구의 소득 여건은 개선되지 못했다.
■ ‘달러가 최고’ 인식 속 수출기업에 쏠린 정책
1997년 위기는 말 그대로 ‘환란’이었다. 달러가 부족해 국가부도 사태가 초래됐다는 의미다. 1990년대 국내 금융기관들은 해외에서 낮은 금리로 단기자금을 빌려와 국내 기업에 고금리로 장기대출을 해주는 방식으로 돈을 벌었다. 그러다 1997년 초부터 타이, 말레이시아 등 동남아 국가에 위기가 터지면서 국내 금융기관의 돈줄이 막히게 됐고 국내 기업들은 극심한 자금난을 견디지 못하고 하나둘 부도사태를 맞았다. 그해 12월3일 아이엠에프와 양해각서를 맺은 뒤 정부가 주력한 모든 해외 협상은 단기자금의 상환 연장이나 탕감, 아이엠에프 등이 주기로 한 달러를 약속한 일정보다 더 빨리 들여오는 것에 집중됐다.
자연스레 정부 당국자들로선 ‘묻지마’에 가까운 달러 확보에 나서게 됐다. 단기외채에 견준 외환보유액은 1990년대엔 0.4~0.7배 수준에 머물렀으나 2000년대 들어 급격히 증가해 2016년 말 현재 3.5배에 이른다. 외환보유액이 1년 내 갚아야 할 외채를 모두 갚고도 두배 남짓 더 많다는 뜻이다.
성태윤 연세대 교수(경제학)는 “2008년 위기 당시에도 순식간에 외환보유액이 수백억달러나 크게 줄어드는 등 기축통화국이 아닌 한국으로선 비교적 외환보유액을 넉넉히 갖고 있을 필요는 있다”며 “그러나 과도한 외환보유액은 그 자체로 (채권 발행에 따라) 줘야 하는 이자와 같은 직접 비용 외에도 다른 곳에 쓸 수 있는 재정 여력을 쓰지 못하는 기회비용도 크다”고 말했다.
달러 부족에 대한 트라우마로 인한 문제점은 적정 외환보유액 수준을 둘러싼 비용과 편익 논란 외에도 한국 경제를 좀더 불균형적으로 몰아가는 양상을 낳는다. 달러를 벌어 오는 수출 기업에 대한 국가 자원의 쏠림이 그 예다. 재정이나 정책금융 외에도 각종 세제 혜택이나 보조금 정책은 지난 20년간 수출 제조업에 쏠려 있다. 이런 자원 쏠림은 상대적으로 내수 산업의 경쟁력 약화를 가져오고 국내 수요 기반을 떨어뜨리는 결과를 낳는다.
달러 유출에 대한 과도한 경계심은 통화정책에도 영향을 준다. 한국 경제가 2008년 위기 이후 장기 저성장 국면에 빠져들고 있을 당시에도 2014년까지 한국은행은 자본 유출을 우려해 기준금리 인하에 매우 소극적인 태도를 보인 게 한 예다. 당시 김중수 한은 총재 등은 “미국이 제로금리 상황이라고 하더라도 자본 유출 가능성을 염두에 두면 최소한 미국보다 2%포인트 정도 더 높게 기준금리를 유지해야 한다”며 금리인하 여론에 맞서 버텼다. 소극적 통화정책이 장기 저성장을 부추긴 것은 두말할 필요도 없다.
임일섭 예금보험공사 연구센터장은 “자본 유출이 현실화될 경우에는 그 부정적 파급이 큰 것은 분명한 사실이지만, 현실 가능성이 낮은 과도한 우려는 통화정책의 실기를 가져와 전체 국민경제의 고통을 늘릴 수 있다”며 “과거 물가 수준이 0% 수준에 수렴하고 경제성장률이 크게 낮아진 상황에서도 한은은 자본 유출 우려를 앞세워 공격적인 통화정책을 펼치는 데 소극적이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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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보기:
http://www.hani.co.kr/arti/economy/economy_general/821578.html?_fr=sr1#csidx3cdcc015f38aa47bb15e9671d7171b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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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www.hani.co.kr/arti/economy/economy_general/821578.html?_fr=sr1#csidx0ac6b215a707771bdffe71efbefe9e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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