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사 100년의 혈사와 통사 51회] .
당초 이승만 독재체제에 부역했던 사법부가 혁명재판을 맡은 것은 비극이거나
희극이었다
[오마이뉴스 김삼웅 기자]
▲ 서울 이승만 기념관인 이화장 마당에 있는 이승만 동상. 배재대학교에 다시 세워질 이승만 동상도 이와 모양과 크기가 비슷하다 |
ⓒ 김종성 |
허정 과도정부에 의해 부정선거 관련자 처벌과업이 한창 진행되고 있을 때인 60년 5월 29일 상오 부인 프란체스카만 동반하고 미국 CAT전세기 편으로 비밀리에 김포공항을 떠나 하와이로 망명하였다.
미국 정부가 주선한 것이다. 국민에게는 출국 뒤에 알렸다. 임시정부에서 탄핵된 데 이어 두번째의 망명이었다.
과도정부 수반은 외무장관 허정이 맡았다.
승계권자인 장면 부통령이 이승만의 사임을 촉구하면서 사직한 터여서 수석 국무위원인 허정이 맡은 것이다. 이승만은 퇴임 후 자신의 신변 보호를 위해 측근인 허정을 승계권자 1순위의 국무위원으로 임명하였다.
내각책임제 개헌은 4사5입 개헌파동을 거쳐 범야 신당운동의 결과로 태어난 민주당의 오랜 강령이자 정치적 이상이었다. 4월 민주혁명으로 자유당 정권을 붕괴시킨 시민ㆍ학생들도 독재정치에 신물을 느껴서인지 내각책임제의 개헌을 요구하기 시작했다.
허정 과도정부 수반은 취임 초 기자회견에서 시국수습을 위해 내각책임제의 개헌을 기필코 실현시킬 것을 다짐하면서, 개헌이 성취된 후에 대통령 선거와 국회의원 선거를 최소한 빨리 실시하겠다고 약속했다. 또 자유당 혁신파 의원들도 내각책임제의 개헌을 위해 움직이기 시작했다.
4월 26일 이승만의 하야성명이 발표되자 수만 명의 시위군중들은 의사당 앞에서 내각책임제의 개헌을 촉구하는 등 6개항의 결의문을 채택했었다.
이처럼 4월혁명 후의 정치사회적 분위기는 내각책임제의 개헌으로 국민의 공감대가 형성되고 있었다. 다만 집권이 예상된 민주당의 신ㆍ구파 사이에는 개헌을 둘러싸고 정치적인 이해가 첨예하게 대립하였다.
신파는 장면이라는 인기 있는 정치지도자가 있기 때문에 종래의 내각책임제 강령에도 불구하고 대통령 중심제를 고수하려는 입장을 보인 데 비해, 구파는 조병옥의 사망으로 리더를 잃은 상태여서 내각책임제로의 개헌을 완강하게 주장했다.
그러나 신파 역시 도도한 여론의 흐름에 따르지 않을 수 없어서 내각책임제로 개헌 방침을 정하게 되고, 양측은 5인 소위를 구성, 개헌 초안을 만들도록 합의했다. 신파의 엄항섭 의원과 구파의 정헌주 의원이 도맡아서 만든 개헌초안의 요강은,
① 국정은 국무총리를 중심으로 하는 내각이 책임지고 수행하며
② 대통령은 명목상의 국가원수로서 국군통수권과 영예수여권, 공무원임면권, 국무총리 제청권, 법률공포권 등 내각을 통해 수행하는 형식적인 권한만을 갖고
③ 국회는 내각 불신임권, 내각에는 국회해산권을 갖게 하여 상호견제를 한다는 것이 주요 골자였다.
개헌특위는 연일 회의를 거듭하여 그 과정에서 엄 위원장이 과로로 졸도 사망하고 후임에 정헌주 의원을 뽑는 등 불상사를 겪으면서도 개헌안 작성에 열성을 보였다. 내각제 개헌은 4월혁명기의 시대정신이었다.
▲ 4월 혁명 당시 모습. |
ⓒ 4.19혁명기념회 |
개헌특위의 협의과정에서 민주당측 개헌요강 중에서 크게 달라진 내용은,
① 선거권자의 연령이 21세에서 20세로 낮추어지고
② 정당에 대한 국가의 보호조항이 강화됐으며
③ 언론ㆍ출판ㆍ집회ㆍ결사에 있어서 허가 및 검열제가 폐지됐으며
④ 국회는 상하 양원제로 하되 참의원은 서울특별시 및 도 단위로 하는 중선거구제로 하고
⑤ 경찰중립화를 위해 특별한 헌법상의 기구가 마련되었다는 점 등이었다.
이 개헌안은 전문 103조로 돼 있던 제1공화국의 헌법 중 무려 52개 조항이 고쳐진 것으로 사실상 제헌이나 다름없는 것이었다. 개헌안의 확정과정에서 자유당 잔재 세력에 의한 저지 방해 등 몇 차례의 고비와 곡절을 거듭한 끝에 확정되어 60년 6월 10일, 30일 간의 공고기간을 거쳐 마침내 6월 15일 재적 211명 중 가 208표, 부 3표로 개헌안이 통과됨으로써 제2공화국의 모태가 된 헌법이 만들어졌다.
허정 과도정부가 들어서면서 국민의 관심은 자연히 4ㆍ19혁명의 뒷처리에 쏠렸다. 혁명적 분위기에 들떠 있던 시민들은 3ㆍ15부정선거의 원흉, 주동자들과 4ㆍ19혁명 과정에서 살상행위를 자행한 발포 책임자들의 처벌을 요구하고 나섰다.
국민들의 요구는 대체적으로,
① 부정선거 원흉들의 처단
② 발포 책임자의 색출과 처단
③ 부정축재자 척결
④ 정치깡패의 처벌 등이다 .
▲ 4월 혁명 뒤에 재판을 받는 홍진기(왼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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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서 박찬일 경무대 비서관, 임흥순 서울시장, 최응복 부시장, 김용진 내무국장, 강남희 시경 사찰과장, 고상원 시경 보안과장, 조인구 치안국장, 유충렬 시경국장, 곽영주 경무관, 백남규 시경 경비과장, 이상국 치안국 특정과장 등을 차례로 구속했다.
그러나 이들 3ㆍ15 부정선거의 원흉과 발포책임자, 정치깡패 등에 대한 사법부의 재판은 지지부진하여 허정 과도정부에서 장면 정권으로 다시, 박정희 군사쿠데타 정권으로 넘겨졌다. 당초 이승만 독재체제에 부역했던 사법부가 혁명재판을 맡은 것은 비극이거나 희극이었다.
박정희 군사정권은 극소수의 부정선거와 발포책임자, 정치깡패들에게만 중형을 가하고, 대부분 피의자들은 면책하였다. 특히 기업인들에 대한 재판은 솜방망이였다. 쿠데타 세력과 재계가 유착한 것이다. 이로써 해방 후 친일파 면책에 이어 다시 한 번 헌정 유린과 부정선거 관련자들이 구제되는 역사의 오점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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