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실은밝혀진다/자한새누국힘그들

[시사변두리]이슈vs이빨 - 심재철이 또!

천사요정 2019. 5. 2. 23:25

그동안 격조했다. 4월 마지막 주 <이슈vs이빨>을 시작한다.

 

 

쫄보가 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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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1일, 유시민 작가가 예능프로에 출연해 옛일을 회상했다. 80년 민주화운동 당시 소위 ‘서울역 회군’이라 일컫는 때의 분위기와 감상, 경찰에 체포되어 고문받으며 한 대라도 덜 맞기 위해 자술서를 하루 100장씩 썼던 일화들이었다.

 

그러자 22일, 심재철 의원이 자신의 페이스북을 통해 “1980년 합수부에서 쓴 A4 용지 90쪽 분량에 이르는 상세한 운동권 내부 동향 자백진술서는 사실상 그가 진술서에서 언급한 77명의 민주화운동 인사를 겨눈 칼이 됐다”며 “그중 3명은 김대중 내란음모 사건의 공동피의자 24인에 포함되는 등 검찰이 재판부에 제출한 핵심 증거로 활용됐고, 유시민의 진술은 김대중 내란음모 사건 판결문에서 증거의 요지로 판시됐다"고 주장했다. 또한 서울대 총학생회장이었던 자신의 재판에 핵심 증거물로 제출돼 유죄 선고 증거로 채택됐다며 “역사적 진실을 예능으로 왜곡해서는 안 된다”고 일갈했다.

 

아... 심재철. 39년이나 흘러 강산이 네 번이나 바뀌었지만 여전히 그에겐 80년이 ‘버튼’이다.

 

그걸 유시민이 환히 웃으며 TV에 나와 말하니 ‘울컥’했을 게다. 안쓰러움을 넘어 애틋하기까지 하다.

 

1980년 5월 15일 약 10만 명의 학생들과 시민들이 12.12 군사반란으로 ‘서울의 봄’을 찍어누르는 전두환 신군부를 규탄하기 위해 서울역 앞에 집결했다. 공수부대가 투입된다는 소문이 퍼지자 시위대 해산 여부를 두고 지도부 사이에 논쟁이 벌어졌다고 한다. 당시 서울대 총학회장이었던 심재철은 해산을 주장하는 온건파, 당시 서울대 복학생협의회 회장이었던 이해찬은 해산을 반대하는 강경파였단다.

 

결국, 시위대는 해산을 결정한다. 그 이틀 후 신군부는 국회를 해산하고 비상계엄을 전국으로 확대한다. 그리고 이튿날인 5월 18일. 광주에 공수부대가 투입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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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엔 가정이 없다고 하지만, 서울역에서 회군하지 않았더라면 어떻게 됐을까. 광주를 고립시키고 학살을 자행한 신군부는, 역시 서울역에서도 10만 군중을 향해 발포했을까. 알 수 없는 일이다. 그러니 회군 자체를 두고 잘했느니, 못했느니 평가할 일은 아니라고 본다.

 

당연한 수순이었지만, 그 후 유시민도, 심재철도, 이해찬도 잡혀간다. 그리고 모진 고문을 당한다. 심재철과 이해찬은 ‘김대중 내란음모 사건’ 재판정에 나란히 서게 된다. 자술서에 '이거 다 그 사람이 시킨 거예요! 내가 봤어요.' 라고 썼다. 고문이란 게 그런 거다.

 

난 돌 몇 번 던져본 적 없고 경찰에 잡혀가 고문 당해본 적은 더더욱 없다. 술 먹고 새벽에 기어들어 왔다고 다음날 마누라에게 효자손으로 혹독하게 고문 당해 본 게 전부다. 누구랑 어디서 술 마셨냐고 시작된 고문은, 내가 베란다에 있는 공구통 전동드라이버 박스 안에 숨겨둔 5만 원 권 지폐 4장의 존재를 불고 나서야 겨우 끝난다. 얘기가 잠깐 샜는데, 어, 잠깐 눈물 좀 닦고...

 

여튼, 고문이란 게 그런 거다. 인간성을 말살하고 극단의 공포를 심어준다. 하지만, 여기서부터 ‘선택’이 갈린다. 대부분의 이들은 그 순간을 모면키 위해 거짓 진술서를 썼다 해도, 법정에서는 ‘고문’ 사실을 폭로하며 진술을 뒤집는다. 그리고 심재철은, 이들과 다른 ‘선택’을 한다. 공소사실을 인정한 것이다. 이해찬은 법정에서 “너 미쳤어? 너 왜 그래?” 라고 울부짖었지만 김대중은 “심동지, 고생 많았지?” 라며 손을 내밀었다는 얘기가 전해진다.

 

이 ‘선택’은 오롯이 심재철의 몫이다. 이유여하를 불문하고 어쨌든 그는 그 자리에서 빤스를 내렸고 ‘똥’을 쌌다. 이 사실은 바뀌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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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사실들은 역사에 박제되어 아프게 남는 법이다.

 

 

그렇다면 그것으로 끝인 걸까. 결코 아니다. 사람은 누구나 실수를 할 수 있고 자신의 과오를 바로잡을 기회는 주어지게 마련이다. 끝끝내 기회가 주어지지 않는다면 반성하고 자숙하며 겸손하게 남은 생을 살면 된다. 허나 심재철은 그러지 않았다. 심재철은 MBC 기자를 거쳐 1995년 신한국당 부대변인으로 정계에 입문한다. 당시 그가 민주당에 입당하고 싶어 했는데 거절  당했다는 풍문이 돌았다고 한다. 사실여부는 나도 모르겠다만, 상식적으로 민주당에 수두룩한 옛동지들이 품 넓게 안아줬다면, 민주당을 마다하지는 않았을 것 같다. “선생님. 농구가 하고 싶어요”라면서 질질 우는 슬램덩크 정대만 짤처럼 말이다.  

 

기실, 진짜 문제는 이제부터였다. 그래, 앞서 얘기했듯 서울역 회군을 심재철 탓으로만 모는 것은 문제다. 그리고 모진 고문에 나가떨어진 것도 일견 이해의 여지가 있다고 본다. 하지만 정파를 달리한 이후, 그가 쏟아낸 증오의 언어들은 어떻게 생각해도 여지가 없다. 공안몰이엔 단골 감별사로 활약했다. 망언 퍼레이드도 이어졌다. “이념적으로 문제 있는 사람들이 민주투사로 위장하고 있다”거나 “국가유공자보다 몇 배나 더 좋은 대우를 해달라는 게 세월호 특별법”이라거나. 

 

가장 최근에 그가 도드라지게 똥볼을 찼던 건 ‘청와대 업무추진비 유용 의혹’이었다. 작년 10월경, 한국재정정보원의 취약한 보안을 뚫고 정부부처의 업추비 내역을 입수해 폭로, 청와대의 도덕성에 치명타를 입히고자 했지만 외려 심재철 본인의 국회부의장 시절 업추비가 여론의 도마에 오르면서 망신살이 뻗친 것이다.

 

그 당시 이해찬 민주당대표의 짧은 논평이 인상적이다. 

 

 “심재철 의원은 제가 잘 아는 사람이다. 위법한 사실이 겁이 나서 하는 과잉 행동”

 

아아... 심재철. 39년을 초지일관한 쫄보.

 

39년 전에 본의 아니게 바지에 똥을 싸고 어정쩡하게 어찌할 바를 모르던 쫄보는, 그 후 오만군데를 돌아다니며 똥을 싸지르는 걸 본분으로 여기는 용감한 쫄보가 되었지만 ‘옛 동지’가 TV에 나와 ‘그 시절’을 얘기하는 걸 보고 저도 모르게 애써 외면하며 잊고 살았던 ‘버튼’이 눌려 또 바지에 똥을 싸며 울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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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학자 전우용은 자신의 페이스북에  “(심재철의 주장을 보면) 심재철이 왜 심재철인지를 한 번 더 확인시켜 줄 뿐”이라고 야속하게 평했지만 난 조금 결이 다르다.

 

심 의원 본인은 58년생, 우리 나이로 환갑 넘어 진갑이다. 그동안 싸지른 똥이 솔찮아서 경로 의존성에 의해 유턴이 만만치 않은 거, 이해한다. 굳이 무리하며 유턴할 필요 없다. 그냥 살던 대로 사시라.

 

그저, 이제 그만 39년 전 기억을 내려놓으시라. 열폭도 내려놓으시라. 유시민이 TV에서 떠드는 게 싫으면 그냥 채널을 돌리시라. 국회 부의장까지 지내셨으면, ‘버튼’을 끄고 바지춤을 올리실 때도 되었다.

 

심재철 의원의 건강을 빈다. 

 

http://www.ddanzi.com/ddanziNews/557648932



심재철과 유시민의 질긴 인연... '80년 봄' 놓고 다른 목소리


심 의원, <대화의 희열2>에 출연한 유 이사장에 해명 요구...'서울역 회군'에 대한 기억도 달라



 심재철 자유한국당 의원(오른쪽)이 유시민 노무현재단 이사장에게 발끈했다. 유 이사장이 지난 21일 KBS 2TV <대화의 희열 2>에 출연해 한 발언을 문제 삼은 것. 그렇다면 심 의원이 지적한 유 이사장의 발언은 무엇일까.
 심재철 자유한국당 의원(오른쪽)이 유시민 노무현재단 이사장에게 발끈했다. 유 이사장이 지난 21일 KBS 2TV <대화의 희열 2>에 출연해 한 발언을 문제 삼은 것. 그렇다면 심 의원이 지적한 유 이사장의 발언은 무엇일까.

ⓒ 남소연


[기사 수정 : 24일 오후 5시 20분]

심재철 자유한국당 의원(경기 안양동안구을)이 유시민 노무현재단 이사장에게 발끈했다.

그는 22일 보도자료를 통해 "유시민은 역사적 진실을 예능으로 왜곡해서는 안된다"며 해명을 요구했다. 유 이사장이 지난 21일 KBS 2TV <대화의 희열 2>에 출연해 한 발언을 문제 삼은 것. 그렇다면 심 의원이 지적한 유 이사장의 발언은 무엇일까.

유 이사장은 방송에서 1980년 '서울의 봄' 등 당시 민주화 운동, 특히 '서울역 회군(1980년 5월 15일)'과 그 이후 상황 등을 회고했다. 유 이사장은 '서울역 회군' 당시 서울대학교 총학생회 대의원회 의장으로 현장에 있었다.
 

"(체포됐을 때보다) 무섭기는 그 이틀 전 서울역에서 집회할 때가 진짜 무서웠다. 선배들이 버스 위에 올라가서 '해산하면 안 된다'고 이야기를 하라고 했다. 올라가서 그 이야기를 했다. 나는 속으로는 무서워 죽겠는데, '해산하면 안 된다, 여기서 계속해야 한다'라고 하고 내려왔는데 너무 무서웠다. '군인들이 들어오면 나는 죽겠지'라고 생각했다." - 서울역 회군 당시를 회고하며  <대화와 희열2>


유 이사장은 그 외에도 계엄군사령부 합동수산본부에 끌려가 구타당하던 당시를 회고하며 "글 쓰는 걸 잘 하는 걸 그 때 알았다"고도 말했다.

그러면서 "진술서를 쓰면 안 때려서 하루에 100장을 쓴 적이 있다"며 "최대한 창작을 해야 한다, 기억이 안 나는 건...나는 한 대라도 덜 맞아보려고, 최대한 상세하게 그 사람들이 원하는 누구를 붙잡는 데 필요한 정보는 노출 안 시키고 학생회 말고 다른 비밀조직은 노출 안 시키면서, 모든 일이 학생회 차원에서 이뤄진 걸로, 언제 어디에서, 어느 대학, 어느 대학 누구가 신촌 어느 중국집에서 밥을 뭘 먹었는지 다 쓴 거다"고 말했다.

유 이사장은 이 과정에서 누군가의 실명을 거론하진 않았다. 그럼에도 심 의원이 민감하게 반응한 까닭은 그 역시 관련 사건들의 당사자였기 때문이다. 심 의원도 '서울역 회군' 당시 서울대학교 총학생회장으로서 거기에 있었다. (80년 서울역 회군에 대해서도 심 의원은 24일 페이스북을 통해 "서울역 회군은 당시 철수하지 않았어야 하고 희생을 불사하고라도 청와대로 진군했어야 한다는 일부 급진적인 운동권 논리가 만들어낸 말"이기 때문에 '서울역 철수'가 맞는 말이라고 주장했다.)

1980년 5월 '서울역 회군'과 5.18

'서울역 회군'은 박정희 전 대통령 사망 이후 사회 전반에서 거세게 불거졌던 민주화 요구를 상징하는 역사적 사건이다.

1980년 5월 14일, 고려대에 모인 서울 지역 대학교 학생회 지도부는 12.12 군사반란을 통해 실권을 움켜쥔 전두환 신군부를 규탄하는 총궐기를 결의했다. 그리고 그 다음날인 15일, 약 10만 명의 학생들과 시민들이 서울역 앞에 모여 '계엄령 해제'와 '유신헌법 개정'을 요구했다. 그러나 신군부가 공수부대 등을 투입한다는 얘기가 전해지면서 해산 여부를 두고 학생 지도부 사이에서 논쟁이 벌어졌다. 심 의원은 해산을 주장하는 온건파, 당시 서울대 복학생협의회 회장이었던 이해찬 더불어민주당 대표는 이에 반대하는 강경파였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결국 서울대를 비롯한 16개 서울 소재 대학교 총학생회장들은 격론 끝에 해산을 결정했다. 그러나 이는 혹독한 결과로 이어졌다. 전두환 신군부는 '서울역 회군' 이틀 후 5.17 쿠데타를 감행, 비상계엄을 전국으로 확대하고 국회 해산을 선포했다. 그리고 바로 다음날인 5월 18일 광주 일대에 공수부대를 투입했다. 1980년 5.18 광주민주화운동과 김대중 내란음모 조작 사건도 이 때의 일이다.

그로 인해 민주진보진영에선 당시 학생운동 지도부의 '서울역 회군' 결정이 잘못됐다는 평가도 나오기도 했다. 심 의원 역시 이러한 평가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상황. 이런 가운데, 유 이사장이 방송을 통해 자신이 기억하는 '서울역 회군'을 거론하고 나서자 불편한 심기를 드러낸 것이다.

이에 대해 심 의원은 유 이사장이 '서울역 회군' 등 민주화 운동 당시 자신의 행동을 일방적으로 미화했다고 주장했다.

일단, 심 의원은 '서울역 회군' 당시 자신이 버스 위에 올라가 해산에 반대했다는 유 이사장의 발언은 사실과 다르다고 주장했다. 구체적으로 "당시 서울역 광장에 마이크 시설이라고는 이수성 서울대 학생처장의 주선으로 확보한 마이크로버스 한 대에 달린 소형 확성기뿐이었다"면서 "당시 마이크를 쥔 사람은 서울대 총학생회장이었던 본 의원뿐이었다"라고 강조했다.

특히 그는 유 이사장의 진술서 탓에 본인을 비롯한 많은 민주화 운동 인사들이 고초를 겪었다고도 밝혔다.

심 의원은 "1980년 합수부에서 쓴 A4 용지 90쪽 분량에 이르는 그(유시민)의 상세한 운동권 내부 동향 자백진술서는 사실상 그가 진술서에서 언급한 77명의 민주화 운동 인사를 겨눈 칼이 되었다"라며 "그 중 3명은 김대중내란음모조작사건의 공동피의자 24인에 포함되는 등 검찰이 재판부에 제출한 핵심 증거로 활용됐다"라고 설명했다.

그는 "1995년 내란음모조작 사건고발인 진술서를 작성할 때 비로소 1980년 유시민 진술서의 내용을 알 수 있었다"며 "(앞서는) 침묵했지만 국민의 세금으로 운영되는 공영방송에서마저 거짓을 역사적 사실로 왜곡하는 모습을 보고 진실을 공개하기로 했다"고 밝혔다. 

유 이사장이 방송에서 웃으면서 이야기한 진술서가 당시 민주화운동에 참여한 학생들을 체포, 고문하는 데 활용됐다는 요지다. 이는 심 의원 본인에 대한 얘기이기도 하다. 그는 '서울역 회군' 후 김대중 내란음모 조작 사건 등에 휘말려 징역형을 선고 받았다. 공교롭게도 심 의원은 4월 23일 재심을 통해 '김대중 내란음모 조작 사건'에 대해 39년 만에 무죄를 선고 받았다.

'서울역 회군' 이후 두 사람의 인생 역정도 정치적으로 확연히 엇갈렸다.

심 의원은 1985년 영어교사를 거쳐 MBC 기자로 입사했다. 그리고 1995년 12월, 신한국당 부대변인으로 본격적인 정치 활동을 시작했다. 복학 후에도 학생 운동을 계속했던 유 이사장은 1985년 '서울대 프락치 사건'으로 징역형을 선고받았다. 당시 그가 쓴 '항소이유서'는 그의 이름을 널리 알리는 계기가 됐다. 이후 독일 유학에서 돌아온 유 이사장은 1988년 13대 총선에서 평화민주당 소속으로 당선된 이해찬 대표의 보좌관으로 일하면서 정치에 입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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