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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몰랐던 '정전협정'의 숨겨진 비밀들

천사요정 2019. 10. 14. 00:52



북한이 '정전협정'을 백지화하겠다고 밝혔습니다. 조선중앙통신은 3월 5일 조선인민군 최고사령부 대변인 성명을 통해 "미국과 한국 등이 북한의 평화적인 인공지구위성 발사와 자주권을 수호하기 위한 제3차 핵실험에 대북제재를 가하고 한미간 합동군사훈련을 진행하고 있다"고 비난하며 '정전협정'을 백지화하고, 판문점 대표부 활동도 전면중지하겠다고 발표했습니다.

북한은 "이번 전쟁연습이 본격적인 단계로 넘어가는 3월 11일 그 시각부터 형식적으로 유지해오던 조선정전협정의 효력을 완전히 전면 백지화해버릴 것"이라고 밝혔는데, 이렇게 되면 60년 동안 유지하던 '정전'이 깨질 수 있는 위험이 생깁니다.

제 1 조 군사분계선과 비무장지대
1. 한 개의 군사분계선을 확정하고 쌍방이 이 線으로부터 각기 2km씩 후퇴함으로써 適對 군대간에 한 개의 비무장지대를 설정한다. 한 개의 비무장지대를 설정하여 이를 완충지대로 함으로써 적대행위의 재발을 초래할 수 있는 사건의 발생을 방지한다.
6. 쌍방은 모두 비무장지대 내에서 또는 비무장지대로부터 비무장지대에 향하여 어떠한 적대행위도 감행하지 못한다. (정전협전문 중에서)

1950년 일어난 한국전쟁은 1953년 7월 27일 정전협정을 통해 겨우 평화가 찾아옵니다. 정전협정은 말 그대로 전쟁을 일단 멈추는 것을 말합니다. 정전협정문에는 군사분계선을 확정하고, 이 선으로부터 각기 2km 후퇴한 후 비무장지대를 설정, 이 비무장지대 내에서는 물론이고 이곳을 향한 어떠한 적대행위를 감행하지 못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북한이 '정전협정'을 백지화한다는 말은 이러한 적대행위 금지 조항에 대해 더는 신경 쓰지 않겠다는 의도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물론 북한이 이런 적대 행위를 감행하지는 않겠지만, 그러나 이런 그들의 위협을 통해 우리는 '정전협정'에 숨겨진 비밀을 더 알아야 할 필요성이 있습니다.

' 정전협상을 제안한 나라는 소련이었다'

정전협정을 제안한 나라를 우리는 북한이나 미국,유엔군으로 알고 있지만 사실 정전협상을 공식적으로 제안한 나라는 엉뚱하게 전쟁 당사국이 아닌 소련입니다.

맥아더는 1950년 10월 2일 전 부대에 북진작전 명령을 하달합니다. 맥아더 사령관은 인천상륙작전 이후에 북한을 점령할 수 있다는 강한 자신감을 보였는데, 이런 그의 오판은 트루먼과의 회담에서 잘 나타나 있습니다.

▲태평양의 웨이크섬에서 만난 트루먼 미 대통령과 맥아더 사령관


트루먼은 맥아더 사령관을 만난 자리에서 중국이 개입할 가능성을 물었고, 이에 맥아더는 "(중공군) 개입의 공산은 극히 적다. 그들은 공군이 없기 때문에 만일 평양을 확보하기 위해 남하할 경우에는 사상 최대의 섬멸전에 의해 희생되고 말 것이다. 전쟁은 11월 23일의 추수감사절까지는 끝을 내고, 크리스마스 때까지는 제8군을 일본으로 복귀시키고 싶다"고 호언장담했습니다.

맥아더는 트루먼 대통령에게 전쟁을 추수감사절까지 끝내겠다고 장담했고, 이는 유엔군의 "추수감사절 공세"로 이어졌습니다.

▲추수감사절 공세 계획과 중공군의 1차공세 상황도(좌) 장진호 전투에서 희생된 미군의 합동 매장소(우)


추수감사절에 칠면조 오리를 먹고 크리스마스는 고국에서 보내겠다는 꿈은 중공군의 개입으로 처참히 무너집니다. 중공군의 공세로 한국군 1사단,8사단,6사단,7사단,2군단,미군제8기병연대는 물론이고 터키여단까지 심각한 피해를 당합니다.  

결국, 맥아더 사령관은 북한에서의 철수 명령을 내렸고, 유엔군과 한국군은 평양을 떠나 38선까지 후퇴하게 됩니다.

▲한국에서의 정전을 논의하는 내용을 담은 유엔 총회 결의 384(V)


북한 지역 내에서의 총공세가 실패로 돌아가자 1950년 12월 14일 유엔은 한국에서 정전될 수 있는 총회결의를 했고, 중국과 교섭에 들어갔습니다. 중국과의 정전협상이 실패로 돌아가자 미국은 1951년 6월 유엔주재 소련대사와 만나 정전을 논의했고, 형식적으로는 소련이 먼저 정전협상을 제안하는 것으로 합의를 보았습니다.

1951년 6월 16일 트뤼그베 리 유엔사무총장은 휴전을 보장하는 성명을 발표합니다.


유엔이 휴전보장 성명을 발표하자 뒤이어 말리크 유엔주재 소련대사와 소련 외무차관이 휴전 제안 성명을 발표하고, 이후 리지웨이 장군이 유엔군 총사령부 방송을 통해 휴전협상을 제안합니다. 이후 1951년 7월 1일 김일성과 중국인민지원군 총사령관 팽덕회(펑더화이)가 공동명의로 휴전협상을 동의하면서 '정전협상'이 시작됩니다.

전쟁 당사국도 아닌 소련이 정전협상에 중요한 제안자로 등장한 배경을 보면 결국, 한국전쟁은 단순히 북한과 남한의 전쟁만이 아닌 여러 강대국 간의 사이에서 논의될 수밖에 없는 약소국 전쟁 중의 하나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 정전협상을 반대했던 이승만 제거 '에버레디 작전'

이승만은 '정전협상'을 반대했습니다. 1951년 소련 외무차관이 휴전 제안 성명을 발표했지만 이를 거부했고, 계속해서 북진 통일을 주장했습니다. 어떤 이들은 이승만의 이런 모습을 통해 그가 진정한 한국의 대통령이라고 주장하고 있지만 다른 각도로 보면 그의 북진통일이나 정전협상반대는 현실을 무시한 채 오로지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한 정치적 행동에 가깝습니다.

이승만은 자신을 통일된 나라의 지도자로 남아 있기 원했지만, 사실 미국과 유엔군의 입장에서는 그의 정치적 입장까지 고려할만한 상황이 아니었습니다.

정전협상이 개시되기 전까지 전쟁 일 년 만에 무려 78.800명의 인명손실과 100억 달러가 넘는 전쟁비용을 감당하는 트루먼 미국 대통령은 한국전쟁으로 재선까지 위협받는 상황이었습니다.


▲ 북진 무력통일을 주장했던 이승만.


미국이 처한 상황은 아랑곳하지 않고 오로지 북진통일을 외치는 이승만이 미국은 꼴 보기 싫었고, 그를 제거하고 새로운 정부를 수립하기 위한 "에버레디 작전"까지도 수립했었습니다.

이승만의 북진 무력 통일이 얼마나 현실성이 없었는지 , 왜 그가 그토록 '정전협상'을 반대하는지를 보여주는 몇 가지 사례가 있었습니다.

■ 부산 정치 파동

1950년 이승만은 예정됐던 5.30총선에서 패배가 예상되자 이를 12월로 연기하려다 미국의 경고를 받고 어쩔 수 없이 선거를 치릅니다. 예상대로 이승만의 '대한독립촉성국민회'는 14석밖에 의석을 확보하지 못합니다. 이런 상황에서 이승만은 재선이 어려워지자 대통령 직선제 개헌안을 국회에 제출했지만 부결됩니다.

이승만은 직선제 개헌안이 국회에서 부결되자 1952년 5월 25일에 국회를 강제로 해산하고 계엄령을 선포합니다.

▲헌병대가 국회의원을 버스에 태워 연행하는 모습.


부산정치파동에서 알 수 있듯이 이승만은 전쟁이 계속되길 원했고 이는 자신의 재선을 위해 반드시 필요한 조건의 하나였습니다. 이승만이 미국과 사이가 안 좋았지만 재선 이후 회복됐다는 사실을 통해 우리는 이승만이 진정한 통일보다는 전쟁 협상을 반대함으로 자신의 정권 유지를 꾀했다는 사실을 엿볼 수 있습니다.

■ 이승만, 망명정부 구상

이승만은 한국전쟁이 터지자 곧바로 일본에 한국 망명정부를 수립하는 방안을 검토했다고 합니다. 야마구치현 다나카 지사는 "미국의 외교관계"라는 책에서 이승만 정권이 한국과 가까운 남부 야마구치현에 망명정부 수립을 타진했으며, 이에 따라 일본 정부는 자신에게 6만여 명을 수용할 시설 및 식량을 준비하라고 지시했다고 밝혔습니다.

1950년 6월 27일 전쟁이 난 지 이틀 만에 이승만 정권은 망명정부 수립을 주한 미국대사에게 문의했고, 미대사는 이승만 정권의 망명정부 수립 계획을 미 국무장관에게 보고했다고 합니다.

▲일본 산케이 신문 기사를 인용보도한 조선일보.


전쟁이 나기 전부터 북진통일을 주장했던 이승만은 진짜 전쟁이 나자마자 미국을 통해 일본에 망명정부 수립을 계획했다는 사실만으로 이승만이 진짜 통일을 원한 것이 아닌 그저 말로 국민을 현혹했던 인물임을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누가 통일을 싫어하고 반대하겠습니까?

중요한 것은 미국과의 협상을 위한 카드였던 '북진 통일'을 가지고 표를 사고, 국민을 기만했던 그의 정치적 의도가 심각한 문제라는 사실입니다.

' 정전협정문 어디에도 없었던 대한민국'

우리가 정전협정을 착각하고 있는 가장 큰 사실 중의 하나가 정전협정을 한국도 참가했다고 믿는 사람이 많다는 사실입니다. 대다수 국민이 착각하고 있지만 '정전협정문' 어디에도 대한민국은 없었습니다.

 

▲정전협정문에 서명하는 중국의 팽덕회(좌)북한의 김일성(중간)믹국의 클라크(우)


정전협정문에 보면 북한의 김일성과 중국의 팽덕회,미국 클라크의 서명이 있습니다. 북한의 남일과 미국의 해리슨이 참석해 정전협정문을 최종 서명했습니다. 서명한 사람도 참석자 어디에도 대한민국 국군이나 정부 관료는 없었습니다.

이는 대한민국에서 일어나 전쟁의 중요한 결말이 전쟁 당사국인 한국을 제외하고 일어났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결과입니다.

정전협정은 대부분 평화협정으로 이어지는 것이 국제관례입니다. 그러나 한반도에서 일어난 정전협정은 60년이 넘도록 유지되고 있는데, 이는 전 세계적으로 한반도가 유일합니다.

▲정전협정문에 나온 서명들


정전협정에서 이어지는 평화협정이 체결되지 못했던 이유 중의 하나가 북한이 정전협정에 한국은 서명하지 않았기 때문에 평화협정은 오로지 미국과 체결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승만의 '북진 통일'을 잠재우기 위해 미국은 부담이 컸지만 '한미 상호방위조약'을 체결했습니다. 이승만의 '허세'를 파악했지만, '반공'이라는 무기 속에 미국이 한걸음 물러난 것입니다. 

'정전협정문'을 통해 우리는 대한민국이 한국전쟁이 일어난 지 60년이 됐지만 아직도 스스로 힘으로 우리의 땅을 지키지 못하고 있다는 아픈 현실을 깨달아야 합니다.

이승만이 엉터리 '북진 통일'을 주장했지만, 사실 한국이 힘이 있었다면 단순한 허세와 비현실성이 아닌 실제로 통일이 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강대국 사이에 있는 한국은 미국이 없다면 아무것도 할 수 없었고, 전쟁 당사국이지만 정전협정문조차 참여하지 못했습니다. 

▲전작권 이양 불가를 주장한 성 김 주한 미대사의 말을 보도한 중앙일보.


성 김 주한 미대사는 한국정부가 준비되지 않으면 '전시작전통제권'을 한국에 이양하지 않겠다고 밝혔습니다. 국방부는 2015년 전작권 이양을 목표로 준비되고 있다고 하지만 북한의 핵위협과 어제 나온 북한의 '정전협정문' 백지화로 보수주의 박근혜 정부는 오히려 '전작권' 이양을 연기할 가능성이 높습니다.

북한이 핵위협,정전협정,전쟁 위기론을 들고 나올 때마다 보수주의자들은 북한을 비난하면서 그들을 응징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당연히 북한이 자꾸 전쟁 위협론을 가지고 협박하면 막아야 합니다. 문제는 무엇을 가지고 그들을 막을 것인가 하는 점입니다.

정전협정문에 서명한 당사자도 아니기에 평화협정도 못 맺고, 전작권이 없으니 북한의 도발에 대해 응징도 할 수 없습니다. 도대체 대한민국이 휴전하고 60년이 지나도록 한 것이 무엇입니까?

이승만이 내세운 '북진 통일'과 '휴전반대'가 답답했던 이유가 현실성 없는 공허한 말장난에 불과했기 때문입니다. 진짜 보수라면 강력한 국방력을 염두에 두고 전쟁을 막아야 하건만, 어떻게 된 것이 60년 내내 '미국이 없으면 아무  것도 못한다'는 말뿐이었습니다.

▲북한 정전협정백지화를 다룬 6일 아침 조중동 기사 1면,중앙은 '국지도발 가능성'조선일보는 '불바다'동아일보는 '박근혜 정부'와 연관시킨 보도를 했다.



북한의 '정전협정문 백지화'라는 기사가 나오면서 또다시 보수주의자와 박근혜 정부는 '반공'과 '안보'를 내세우며 국민을 불안에 떨게 하고 있습니다.  

수십 년이 지나도 전쟁의 위협에서 아무것도 할 수 없으며 '반공'을 내세우는 모습은 립싱크에 불과합니다. 진정한 가수는 가창력으로 승부하듯 대한민국의 안보는 우리 스스로를 지킬 때나 가능한 것입니다.



65년 유예된 평화…눈앞에 온 종전선언


1953년 7월27일, 전쟁 멈춘 날
정전협정 맨 앞에 이렇게 썼다
“최후의 평화적 해결 달성때까지
일체 무력행위 완전한 정지 보장”
하지만 현실은 적대적 대립의 시간

2018년 남북·북미 정상 만난 날
종전선언 꺼내 다시 희망의 불씨

이제껏 가보지 않은 길에 선 지금
항구적 평화로 바꿀 절호의 기회

1953년 7월27일 판문점에서 유엔군 수석대표 윌리엄 해리슨 중장(왼쪽 앉은 이)과 북한 쪽 수석대표인 남일 대장이 휴전협정에 서명하고 있는 모습.  한겨레 자료사진
1953년 7월27일 판문점에서 유엔군 수석대표 윌리엄 해리슨 중장(왼쪽 앉은 이)과 북한 쪽 수석대표인 남일 대장이 휴전협정에 서명하고 있는 모습. 한겨레 자료사진
“북진통일 고토회복의 최선봉!”


“북진통일 고토회복의 최선봉!”


군사분계선에 인접한 강원도 고성군 봉포항 근처 해변에 “수상한 사람, 물건 신고 1338”이라고 적힌 펼침막을 내건 군부대가 펼침막 양쪽 상단에 써놓은 자기소개 문구다.


겉만 보면, “북한은 괴뢰”라 “북진통일”을 해야 한다며 정전협정에 서명을 거부한 이승만 한국전쟁 당시 대통령의 인식과 다를 바 없다.


“평화통일”을 명시해 무력에 의한 통일을 원천 배제한 대한민국 헌법 정신에 반한다. 하지만 남북 정상이 한달여 만에 두차례나 직접 만나 평화와 번영을 논하는 세상에, 이 부대의 모든 장병들이 전쟁이 터지자 하나뿐인 한강 다리를 폭파하고는 대전으로 내뺀 이승만의 북진통일론을 진심으로 숭상하지는 않을 터. “북진통일” 펼침막은 시대와 어긋난 냉전 적대의 타성, 동틀 무렵 미처 다 사라지지 않은 어둠의 다른 얼굴이다.


“북진통일” 펼침막에서 멀지 않은 해변에서 얼굴이 검게 그을린 젊은 아비와 어린 아들이 아침 식사를 준비한다. 자전거 두 대를 세워놓고, 보글보글 끓는 찌개 그릇을 살핀다. 서쪽 끝 강화에서 시작해 비무장지대(DMZ)를 지나 동쪽 끝 고성군 통일전망대까지 이어진 ‘평화누리길’을 달리는 중이다.


피로와 자부가 묘하게 얽힌 이 젊은 아비와 어린 아들의 아침 식사 대화에 ‘북진통일’은 등장하지 않는다. ‘북진통일’과 ‘평화누리’가 한 공간에서, 물과 기름처럼 겉도는, 2018년 7월 한반도를 달구는 폭염만큼이나 기묘한 풍경.

1950년 6월25일. 이날이 무엇을 뜻하는지 모르는 한국인은 없다. 흔히 ‘6·25 전쟁’이라 불리는 3년 전쟁이 시작된 날. 그날로부터 1127일 동안 한반도 전역에서 총포 소리가 멈추지 않았다. 남과 북에서만 521만8480명이 죽거나 실종되거나 다쳤다(남 189만8480명, 북 332만명). 남녘땅 곳곳에서 한마을 사람끼리, 국군과 민간인이 서로를 총과 죽창으로 죽였다. 슬픔이 바다를 이루고 원한이 하늘 끝에 닿았다.


1953년 7월27일 한국이 빠진 채 북한·중국·유엔사(미국) 대표이 서명한 정전협정의 모습. 한겨레 자료사진
1953년 7월27일 한국이 빠진 채 북한·중국·유엔사(미국) 대표이 서명한 정전협정의 모습. 한겨레 자료사진


1953년 7월27일, 총포 소리가 한반도 전역에서 일순 멈췄다. 65년 전 오늘이다. ‘정전’이다. 그날 우리 앞에는 두 갈래 길이 있었다. 적대냐, 화해냐. 전쟁 당사자들은 화해가 아닌 적대를 확대 재생산하는 길을 택했다.

하지만 정전협정은 서언에 “최후의 평화적 해결이 달성될 때까지 한반도에서의 적대 행위와 일체 무력 행위의 완전한 정지를 보장하는 정전을 확립할 목적”을 명시해, 명백히 교전 쌍방에 화해와 평화를 권고했다.


아울러 서언에서 이 협정이 “순전히 군사적 성질에 속하는 것”이라고 한정한 뒤, “한반도 문제(Korean question)의 평화적 해결을 보장하기 위해 쌍방 군사령관은 관계 각국 정부에 정전협정이 조인되고 효력이 발생한 후 3개월 내에 각기 대표를 파견하여 쌍방의 한 급 높은 정치회담을 소집하고, 한반도로부터 모든 외국 군대의 철수 및 한반도 문제의 평화적 해결 등의 문제에 합의할 것을 건의한다”(4조 60항)라고 적시했다. ‘한 급 높은 정치회담 소집’을 규정한 정전협정에 따라, 1954년 스위스 제네바에서 정치회담이 열렸다.


하지만 한반도의 화해·평화·통일과 관련해 어떤 합의도 만들어내지 못했다. 그리고 베트남을 북위 17도 선을 경계로 남북으로 분할했다. 냉전 적대의 어둠이 아시아의 동쪽 끝에서 남쪽으로 번져갔다.


남과 북은 오래도록 적대했다. 6월25일, 학생들은 “무찌르자 공산당, 쳐부수자 괴뢰군”을 외치는 웅변대회에 나섰고, 머리에 뿔이 달린 늑대가 주인공인 ‘반공 포스터’를 그려야 했다. 정부와 학교와 방송은 ‘6·25’를 쉼없이 상기시켰다. 누가 ‘적’인지 생각하라고 강압했다. 근현대 전쟁사에 유일무이하게 전쟁 발발일을 이름(6·25전쟁)으로 삼은 이유다. ‘6·25’ 앞에서 한국인은 파블로프의 개처럼 반응한다.


아무도 ‘7·27’의 의미를 묻지 않았다. 우리가 사는 세상인 ‘끝나지 않은 전쟁 위에 구축된 불안정한 평화의 기원’을 살필 기회, 곧 “최후의 평화적 해결”(정전협정 서언)을 도모할 시민의 힘을 결집할 기회를 차단하려 했다. 5·16 쿠데타, 유신독재, 12·12 쿠데타, 5·17 쿠데타 등이 ‘6·25’의 다른 이름이기도 한 ‘적대의 정치’의 아이콘이다. 반면 4·19, 5·18, 6·10, 촛불 등은 ‘7·27’(정전체제)이라는 ‘불안정한 평화’를 딛고 화해와 평화의 너른 바다로 나아가려는 시민 열망의 아이콘이다. 6·15, 10·4, 4·27, 5·26 남북 정상회담은 그 시민 열망이 진창에서 피워올린 연꽃이다.

2018 남북정상회담이열린 27일 오전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판문점에서 만나 인사를 나누고 있다. 김경호 선임기자

2018 남북정상회담이열린 27일 오전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판문점에서 만나 인사를

나누고 있다. 김경호 선임기자



원문보기:
http://www.hani.co.kr/arti/politics/defense/855133.html#csidx5a2c23b306b0585b4366ad729f47d76



한국이 당사국 아니라고? 정전협정 66주년, 진실은



[the300][런치리포트]전쟁을 멈춘 시간 '정전협정' 66주년(종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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①평화협정 하려해도 당사국이 없다? 정전협정의 진실은

오는 27일은 한국전쟁을 '일시멈춤'으로 바꾼 1953년 정전협정 체결일이다. 이날 이후 60년 이상 고착된 '1953 체제'는 큰 변화를 맞았다. 문재인정부 들어 남북, 북미간 적대 관계를 바꿔 이 낡은 협정을 평화협정으로 대체하려는 노력에 힘이 실렸다. 그러자 대한민국이 빠져있는 정전협정문은 종전선언과 평화협정의 당사국이 누구냐 하는 논란의 진원이 됐다.

만일 정전협정을 평화협정으로 바꾼다면 실제 당사자는 북한과 유엔군 뿐이란 시각이 있다. 협정문 명칭에 있듯 마크 W. 클라크 유엔군 총사령관이 한 쪽에, 다른 쪽에 김일성 조선인민군 최고사령관과 팽덕회(펑더화이) 중국인민지원군 사령원(사령관)만 있다.

한국군은 미군 주도 유엔군의 일원으로 싸웠지만 서명엔 빠졌다. 당시 이승만 대통령은 중국군 철수, 북한의 무장해제, 유엔 감시하의 총선거 등을 내세우며 휴전반대 목소리를 냈다. 미국이 유엔군을 주도하긴 했지만 명목상 직접당사자가 아니다.  

중국 또한 자세히 보면 정규군인 인민혁명군이 참전한 게 아니다. 당시 신생국인 중국은 UN군과 전쟁을 벌인다는 양상을 꺼렸다. 인민지원군이라는 묘안을 짰다. 실상은 인민해방군이지만 직제를 바꿔 보냈다. 사령관인 팽덕회의 직함도 '사령원'이다. 결국 군 사령관이자 국가원수로 김일성이 서명한 북한과, 유엔군만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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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북 정상 간 평화협정, 기술적 난관…유엔 조처 따라야"

한반도 전문가 "한국, 정전협정 당사국 아니라 한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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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뉴시스】전진환 기자 = 남북정상회담 준비위원장인 임종석 대통령비서실장이 17일 오후 청와대 춘추관에서 남북정상회담과 관련해 브리핑을 하고 있다.  임 실장은 "판문점 회담은 그 평가에 따라 남북이 서로 오가는 정상회담과 별개로, 판문점 회담이 정착될지 여부가 중요하다"고 말했다.2018.04.17. amin2@newsis.com




서울=뉴시스】박상주 기자 =

오는 27일 열리는 남북정상회담에서 양측이 한반도 안정을 위한 어떠한 새로운 평화협정에 합의하더라도 “기술적 난관(technical roadblock)”에 봉착할 것이라는 분석이 제기됐다. 북한과의 새로운 협정을 위해서는 정전협정 당사국인 유엔의 조처를 필요로 한다는 것이다. 

 미국 싱크탱크인 헤리티지재단의 브루스 클링너 동북아시아 담당 선임연구원은 17일(현지시간) CNBC와의 인터뷰에서 "기술적으로 한국은 정전협정 체결국이 아니다. 평화협정을 맺으려면 유엔의 조처가 필요하다"라고 말했다. 

 미 중앙정보국(CIA) 한국 부지부장 출신인 클링너는 김 위원장이 현재 휴전상태인 한국전쟁의 공식적인 종료를 선언하는 데 동의를 하더라도 북한은 한국을 평화협정 상대로 간주하지 않을 것이라고 전망했다.  

 1950년 6월 25일 시작된 한국전쟁은 기술적으로는 현재까지 68년 동안 지속되고 있는 셈이다. 3년 동안 이어진 한국전쟁의 포성을 멎게 한 것은 유엔과 북한 간 정전협정이었다. 이를 평화협정으로 전환하기 위해서는 당사자인 유엔의 개입을 필요로 하는 것이다.

 한국전쟁 종전협정은 1953년 7월 27일 판문점에서 마크 W. 클라크 국제연합군 총사령관과 김일성 북한군 최고사령관, 펑더화이(彭德懷) 중공인민지원군 사령관 간 서명으로 체결됐다.  

클링너는 “지난해 내가 북한 관계자들을 만났을 때, 그들은 한국이 평화협정 협상에 참여할 자격이 없다고 말했다. 북한은 한국이 정전협정에 서명하지 않은데다가 현재 전시 작전통제권도 없다는 사실을 지적했다”라고 말했다. 그는 이어 “북한은 그동안 (정전협정 당사국인) 북한과 중국, 미국이 휴전·평화협정에 서명해야 한다는 입장을 밝혀왔다”라고 덧붙였다.  

 클링너는 “문 대통령이 김 위원장과의 회담에 열의를 보이고 있지만 진보 성향의 전임 대통령들보다 더 큰 국제적 제약을 받고 있다"라고 덧붙였다.

 남북 정상회담은 2000년 6월 김대중 대통령-김정일 국방위원장, 2007년 10월 노무현 대통령-김정일 위원장 간에 열린 데 이어 이번이 3번째다. 남북정상이 11년 만에 다시 한 테이블에 마주 앉게 되는 것이다.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은 이날 플로리다 주 팜비치의 마라라고 리조트에서 열린 아베 신조(安倍晋三) 일본 총리와의 정상회담 자리에서 남북정상회담과 관련해 "한국전쟁 종전 문제를 논의하고 있다. 이를 축복한다"라고 말했다.

 트럼프 대통령의 이같은 발언과 관련해 청와대 고위 관계자는 18일 "한반도의 정전협정 체제를 평화체제로 바꾸는 방법, 그 가능성을 검토하고 있다"라고 시인했다.

이 관계자는 '남북 간 합의를 거쳐 북미 단계에서 종전선언을 마무리하는 것이냐'는 질문에 "여러분이 상식적으로 생각하고 있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한반도의 안보 상황을 좀 더 궁극적인 평화적 체제로 발전시켜 나가기 위한 다양한 방안을 검토·협의하고 있다. 물론 우리 생각만으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관련 당사국들과 협의 과정이 남아있다"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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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휴전협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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