놋그릇ㆍ엽전 수탈해 무기 만들던 ‘일본육군조병창’
어린 학생 등 강제 동원 조선인 1만명 이상
광복과 동시에 미군에 수용된 후 74년째 미발굴
황량한 땅 위의 낡은 건물은 원래 주물공장이었다. 40~50m 높이의 굴뚝을 둘씩이나 세운 건 놋그릇이며 세숫대야며 하다못해 엽전까지, 전국 각지에서 수탈해 온 쇠붙이를 녹이기 위해 대용량 배기 장치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벌건 쇳물은 강제 동원된 조선인의 손을 거쳐 일본군의 총칼이 되고 폭탄이 됐다. 용광로가 식은 지 벌써 74년, 조선인의 아픔이 서린 ‘일본육군조병창(이하 조병창)’의 잔재는 텅 빈 미군기지 한구석에 버려진 채 잊혀 가고 있다.
서글픈 이야기다. 조병창은 중일전쟁이 한창이던 1941년 군수물자의 원활한 대륙 공급이 필요했던 일제가 인천 부평구 일대 100만평 부지에 문을 연 무기 제조 공장이다. 국사편찬위원회에 따르면 조병창에 강제 동원된 조선인만 1만명이 넘고 이 중엔 12, 13세의 어린 학생도 적지 않았다. 위험천만한 무기 제조 공정 중 목숨을 잃거나 부상을 당한 이들 또한 셀 수 없이 많았다. 광복 직후 미군이 주둔 기지로 접수하면서 조병창과 함께 우리 아픈 역사는 ‘금단의 땅’에 갇히고 말았다.
한국일보 ‘뷰엔(View&)’팀은 지난달 24일 조병창 건물과 시설이 남아 있는 인천 부평구 ‘캠프 마켓’ 내부를 취재했다. 반환 절차를 밟고 있는 기지는 이미 텅 비었지만 주한미군의 허가 없이는 출입이 불가능하다. 이날만은 기지 내 폐기물처리구역(DRMO)에 대한 토양정화사업 주민설명회가 열린 터라 해당 구역 출입이 허용됐고 주물공장 등 조병창 시설 일부를 국내 언론 최초로 카메라에 담을 수 있었다.
이날 현장에서 만난 박명식 향토사학자 겸 부평문화재단 이사는 “지역 원로들의 증언에 따르면 주물공장 앞 공터엔 전국에서 공출해 온 각종 쇠붙이가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고 전했다. 공출 물품을 비롯해 각종 물자를 실어 나르던 철로가 그 자리를 그대로 지키고 있었고, 1920년대 일본군 20사단 훈련장의 출입문에 세워진 석주(기둥)도 조병창 시기를 거쳐 100년째 그대로 서 있었다.
13만평 규모의 캠프 마켓 부지 곳곳엔 조병창의 일부로 추정되는 건물과 시설이 다수 남아 있다. 문화재청은 2012년 조사를 통해 기지 내 건물 34개 동이 1952년 이전에 지어진 것으로 추정했다. 부평역사박물관 관계자에 따르면 당시 미군은 수십 미터 높이의 굴뚝이나 대규모 제조 시설 등 새 건물을 건설할 필요와 여력이 없었고, 기존 건물이나 시설물을 대부분 그대로 활용하는 미군의 주둔 방식으로 볼 때 ‘1952년 이전’은 곧 일제강점기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 미국 국립문서관리청(NARA)으로부터 국사편찬위원회가 입수해 공개한 1954년 미군 항공사진에서도 캠프 마켓에 남아 있는 주물공장과 굴뚝 등이 그대로 등장한다.
두고두고 곱씹어야 할 아픈 역사이지만 미군기지 내에 있다는 이유로 체계적인 조사 한 번 이뤄지지 못했다. 그 때문에 조병창 관련 연구는 강제 동원 피해자의 증언에 의존한 것들이 대부분이다. 국사편찬위원회의 구술자료에 따르면 패망 후 미군 상륙까지 20일 남짓한 기간 일제는 무기와 재료를 파괴 또는 매장하고 관련 서류도 대부분 소각해 버렸다. 부평역사박물관 관계자는 “미군의 관련 문서라도 볼 수 있으면 도움이 될 텐데 그마저도 비공개라서 우리가 파악할 수 있는 부분이 거의 없다”고 전했다.
그래도 기회는 있었다. 1973년 주한미군이 조병창 부지에 들어선 미군수지원사령부(애스컴시티) 내 7개 기지 중 캠프 마켓 한 곳만 남겨 두고 모두 반환한 것이다. 그러나 당시 우리 정부는 일제강점기 근대 유산을 연구, 보존하는 대신 반환 부지를 개발하기 바빴다. 2012년 실시된 문화재청의 조사도 건물 대장과 외관만 살펴보는 약식 조사에 그쳤고 그마저 자세한 내용은 비공개에 붙여졌다. 문화재청은 “주한미군지위협정(SOFA) 문화재보호분과위원회의 승인이 있어야만 조사 결과를 공개할 수 있다”고 밝혔다.
한편으로는 조병창 관련 건물과 시설이 미군 기지 안에 있었기에 그나마 보존될 수 있었다는 논리도 가능하다. 적어도 지난 세월 대한민국의 전 국토를 휩쓴 개발의 광풍으로부터는 격리된 공간이었기 때문이다. 기지 반환이 이루어지고 부지 내 근대 유산에 대한 조사가 제대로 이루어진다면 역사적인 교훈을 담은 뜻 깊은 장소로 거듭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문제는 기지 반환이 몇 년째 지연되면서 귀중한 시간을 허비하고 있다는 사실. 2015년 2월 이미 이전을 완료해 기지는 텅 비어 있고 인근 아파트에서도 기지 내부가 훤히 내려다보일 정도지만 주한미군은 언론을 비롯해 일반인의 캠프 마켓 출입을 여전히 막고 있다. 지난달 뷰엔팀이 캠프 마켓에 대한 취재 협조를 요청하자 주한미군 측은 ‘반환을 앞두고 민감하다’는 이유로 거절하기도 했다.
더 큰 문제는 앞으로 이 같은 상황이 언제까지 이어질지 가늠하기 어렵다는 점이다. 국방부는 캠프 마켓 반환 지연에 대해 “현재 기지 내 오염 정화 비용 및 책임에 대한 한미 간 이견 때문”이라며 “상호 수용 가능한 해결책을 모색해 최대한 조기반환 받을 수 있도록 노력하고 있다”고 밝혔지만 반환 완료 시점은 여전히 불투명하다. 때문에 반환 절차 완료 전이라도 조사를 개시하고 주민과 언론에 진행 상황을 공개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박 이사는 “캠프 마켓은 일제 35년과 아시아태평양전쟁, 남북 분단 등 뼈아픈 우리 근대사가 축적된 역사적 공간”이라며 “후손들이 아픈 역사를 반복하지 않도록 하루빨리 체계적인 조사를 실시해 유네스코 등재 등 다양한 방식의 ‘기억 공간’으로 조성해야 할 것”이라고 지적했다.
박서강 기자 pindropper@hankookilbo.com
김주영 기자 will@hankookilbo.com
윤소정 인턴기자
https://news.v.daum.net/v/201911280443000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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