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덕윤리환경/역사는

이제는 아이들에게 역사를 바르게 가르쳐야 된다고 본다

천사요정 2017. 12. 23. 05:44




친일 매국노 식민사관자들의 우상 '이병도와 이완용'

 

이완용과 이병도 두 매국노는 조선총독부가 만든 '조선사편찬위원회'에 참여하여 한국의 역사를 왜곡 일제 식민통치에 기여하는 공훈?을 세우며 한민족의 혼인 역사를 파괴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이완용이 몸이라 할 수 있는 국체를 팔아먹었다면

이병도는 정신이라 할 수 있는 역사를 팔아먹었으니 두 매국노가 가히 쌍벽을 이룬다 하겠다.

조선사편수위의 실체를 들여다 보면 나라를 팔아먹은 이완용, 박영효, 권중현등 부일한 친일 매국노들이 총집결하였고 위원장은 조선총독부의 정무총감이 맡아 조선총독부가 진두지휘를 하여 한민족의 역사를 왜곡하는 대사업을 총지휘하였다.

최남선,이능화,어윤적,정만조등의 당대 국내 학자들도 매수등으로 참여하였고 해방후 식민사관을 주창하여 학계의 거목이 되었으며 당시는 일본으로부터 황국사관을 전수받은 신진 매국노세력인 신석호,이병도등은 수탈한 자료조사등 세부적인 일의 진행을 맡은 수사관보,수사관등의 역할을 하였다.

조선사편수위는 나라를 뺏은 일제가 한민족의 정신마저 뺏어 영원한 식민지로 만들기 위해 설치한 일제하 최고의 한민족말살 프로젝트의 전위기관이었으며 여기에는 조선총독부의 중추를 이루는 핵심관료들과 역사조작의 대가들인 일본의 황국사관을 대표하는 학자들과 식민지 치하에서 물력,권력, 금력등에 의해 매수되거나 이용된 내노라하는 매국노들이 총동원되었다.

한마디로 조선사편수위는 한민족말살의 첨병이었고 그들이 만들어낸 조선사36권은 한민족을 영원히 노예로 만들 그들만의 바이블이었다.

현재, 우리의 교과서 또한 이들이 만들어낸 조선사 36권의 축약본에 지나지 않으니 그 해악이 아직까지 그치지 않고 있으며 강단의 학자들은 대부분 신석호,이병도등 일제치하에서 부일하여 '조선사 36권'이라는 한민족말살프로젝트에 공헌을 세운 매국노들의 후계들로 아직까지도 반도사관이 진실인양 자신들이 민족사학자인양 떠벌이고 있다.

대표적인 인물이 이기동,이기백등이며 식민사학 2대라 하는 이들은 대부분 죽었지만 이들이 구축한 세력을 그들의 제자들이 다시 이어받아서 단군은 신화라는 망언을 하며 잃어버린 고토에서 쏟아져나오는 엄청난 단군조선유물과 그 이전의 배달국시대의 유물조차도 부정하며 그것을 차이나민족의 것이라 외면하고 그들의 학계에서의 권위를 유지하기위해 사료나 유물조차도 부정하며 오로지 삼국사기만을 그것도 초기삼국사는 부정하면서 한국은 독자성이 없는 차이나문화의 아류라고 강변하며 현재까지도 강단내에서 그들만의 철옹성을 지켜나가고 있다.

 

[직제 및 직원 명단]


1. 조선사편찬위원회 (1922~1925) 1기

<위원장>

위원장직은 조선총독부 정무총감이 겸임하였다.

아리요시 주이치 (1922년 6월 15일 ~ 1924년 7월 4일)
시모오카 주지 (1924년 7월 4일 ~ 1925년 6월 8일)

<고문>

이완용 (1922년 12월 28일 ~ 1925년 6월 8일)

박영효 (1922년 12월 28일 ~ 1925년 6월 8일)
권중현 (1922년 12월 28일 ~ 1925년 6월 8일)

<위원>

나가노 모토키 (1922년 12월 28일 ~ 1924년 12월 1일)
오다 미키지로 (1922년 12월 28일 ~ 1923년 3월 29일)
유맹 (1922년 12월 28일 ~ 1925년 6월 8일)
이능화 (1922년 12월 28일 ~ 1925년 6월 8일)
어윤적 (1922년 12월 28일 ~ 1925년 6월 8일)
정만조 (1922년 12월 28일 ~ 1925년 6월 8일)

이마니시 류 (1922년 12월 28일 ~ 1925년 6월 8일) : 이병도의 스승중 하나다. 일제황국사관주찿
이나바 이와키치 (1922년 12월 28일 ~ 1925년 6월 8일)
마쓰이 히토시 (1922년 12월 28일 ~ 1923년 8월 16일)
가시와라 쇼조 (1922년 12월 28일 ~ 1923년 8월 16일)
이병소 (1922년 12월 28일 ~ 1925년 6월 8일)
윤영구 (1922년 12월 28일 ~ 1925년 6월 8일)
현채 (1922년 12월 28일 ~ 1925년 2월 3일)

홍희 (1922년 12월 28일 ~ 1925년 6월 8일)
이상영 (1922년 12월 28일 ~ 1923년 3월 25일)
후카가와 덴지로 (1923년 4월 18일 ~ 1924년 6월 8일)
오쓰카 쓰네사부로 (1924년 12월 12일 ~ 1925년 6월 8일)
이진호 (1924년 12월 12일 ~ 1925년 6월 8일)
야마자키 마사오 (1924년 12월 12일 ~ 1925년 6월 8일)

<간사>

이나바 이와키치 (1922년 12월 28일 ~ 1925년 6월 8일)
김동준 (1922년 12월 28일 ~ 1925년 6월 8일)

<서기>

가네코 마사키요 (1922년 12월 28일 ~ 1925년 6월 8일)
가쓰라기 스에지 (1922년 12월 28일 ~ 1925년 6월 8일)
김용적 (1922년 12월 28일 ~ 1925년 6월 8일)

<촉탁>

이나바 이와키치 (1922년 12월 1일 ~ 1925년 6월 6일)
마쓰이 히토시 (1922년 12월 1일 ~ 1923년 7월 31일)
홍희 (1922년 12월 31일 ~ 1925년 6월 6일)
가시와라 쇼조 (1922년 12월 10일 ~ 1923년 8월 16일)
이능화 (1923년 12월 31일 ~ 1925년 6월 6일)
다카하시 다쿠지 (1924년 6월 30일 ~ 1925년 6월 6일)
세노 바유 (1924년 11월 30일 ~ 1925년 6월 6일)
구로이타 가쓰미 (1924년 11월 30일 ~ 1925년 6월 6일)


2. 조선사 편수회 (1925~1945) 2기

<회장>

회장직은 조선총독부 정무총감이 겸임하였다.

시모오카 주지 (1925년 6월 6일 ~ 11월 22일)
유아사 구라헤이 (1925년 12월 3일 ~ 1927년 12월 23일)
이케가미 시로 (1927년 12월 23일 ~ 1929년 4월 4일)
고다마 히데오 (1929년 6월 22일 ~ 1931년 6월 19일)
이마이다 기요노리 (1931년 6월 19일 ~ 1936년 8월 5일)
오노 로쿠이치로 (1936년 8월 5일 ~ )

<고문>

이완용 (1925년 7월 20일 ~ 1926년 2월 12일)
권중현 (1925년 7월 20일 ~ 1934년 3월 19일)
박영효 (1925년 7월 20일 ~ 1939년)[5]


나이토 도라지로 (1925년 9월 22일 ~ 1934년 6월 26일)
핫토리 우노키치 (1925년 9월 22일 ~ )
구로이타 가쓰미 (1925년 9월 22일 ~ )
야마다 사부로 (1933년 9월 8일 ~ 1936년 1월 16일)
이윤용 (1934년 4월 17일 ~)
하야미 히로시 (1936년 3월 7일 ~ )

<위원>

이쿠타 세이자부로 (1925년 7월 20일 ~ 1929년 11월 8일)
시노다 지사쿠 (1925년 7월 20일 ~ )
이진호 (1925년 7월 20일 ~ 1929년 1월 19일)
오다 쇼고 (1925년 7월 20일 ~ )
유맹 (1925년 7월 20일 ~ 1930년 3월 21일)
어윤적 (1925년 7월 20일 ~ 1935년 3월 7일)
이마니시 류 (1925년 7월 20일 ~ 1932년 5월 20일)
야마자키 마사오 (1925년 7월 20일 ~ 1928년 3월 30일)
이능화 (1925년 7월 20일 ~ )
이병소 (1925년 7월 20일 ~ )
윤영구 (1925년 7월 20일 ~ )
고타케 마사요시 (1928년 5월 22일 ~ 1929년 10월 28일)
최남선 (1928년 12월 20일 ~ )
이마무라 다케시 (1929년 12월 4일 ~ 1931년 7월 22일)
다케베 긴이치 (1929년 12월 5일 ~ 1931년 7월 1일)
하리마 겐시로 (1930년 1월 18일 ~ 1932년 2월 12일)
하야시 한조 (1930년 7월 15일 ~ 1937년 10월 30일)
우시지마 쇼조 (1931년 11월 7일 ~ 1936년 5월 21일)
하야시 시게키 (1931년 11월 7일 ~ 1933년 8월 4일)
오타니 쇼신 (1931년 11월 7일 ~ )
마쓰모토 이오리 (1932년 3월 4일 ~ 1934년 11월 5일)
후지타 료사쿠 (1933년 4월 13일 ~ )
와타나베 도요히코 (1933년 9월 8일 ~ 1936년 5월 21일)
오타케 주로 (1936년 6월 3일 ~ )
도미나가 후미카즈 (1936년 6월 3일 ~ 1937년 7월 3일)
나가타 나오마사 (1937년 11월 9일 ~ )

<촉탁위원>

최남선(崔南善)
이병도(1927년 이후)

<간사>

이나바 이와키치(稻葉岩吉)

<수사관>

홍희(洪熹)
신석호(1938년부터)
이나바 이와키치(稻葉岩吉)
후지타 료오사쿠(藤田亮策, 1926년)

<수사관보>

신석호
이병도 (1925 ~ 1927년)



[간행 서적]

《조선사》 전 37권, 1938년
《조선자료총간》
《조선자료집진》

아래 1970년대까지 있던 이완용의 묘를 1979년 이장할때 나온 관뚜껑을 원광대박물관으로 옮겨왔는데 이완용의 후손이라는 자가 가졌갔다고 한다.

그런데, 당시 원광대 박물관장이던 박순호씨가 증언하기를 자신이 이병도의 친척이라며 이병도씨가 와서 원광대 총장의 양해를 얻은뒤 당시 돈 5만원을 주고 가져갔다고 하였다. 79년이면 500원짜리 지폐가 있었고 1,000원이면 초등학생 소풍갈 돈으로 충분하였다. 현재 돈가치로로 보면 100~150만원정도 될 것이다.

자신이 이병도친척도 아니라면 쓸모도 없는 이완용 관뚜껑은 왜 가져갔을까?

이완용 관뚜껑에는 백작 이완용이라는 명문과 함께 다른 글이 새겨져 있었는데 아마 이완용가계에 대한 설명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자신의 가계의 비밀을 영원히 은폐하고자 이병도는 그 쓸모없는 관뚜껑이 꼭 필요하였던 것이 아닐까?

원래, 이완용은 자신의 아비와 피 한방울 안섞인 양자로 외부에서 이호준이 입양한 것은 천하가 다 아는 사실이다. 그런데, 이병도를 변론하는 자들은 이호준가계와 이병도가계는 다르다면 그것으로 말을 끝낸다.

누가 그걸 모르냐? 생부인 이석준과 이병도가계와의 관련성을 묻는 것이지~

하여튼, 말로만 실증타령하는 엉터리 식민사학자들의 수준을 알만하다.

해당 보도기사 일부 발췌

 

<이완용, 첩첩산중 땅 왜 약탈했나>

"........주민들에 따르면 이완용의 묘는 지난 79년 후손들에 의해 파묘(破墓.개장하기 위해 원래 무덤을 파냄) 처리됐다. 파묘를 지켜본 주민들은 "당시 이완용의 시신은 이미 썩어 흙이 돼 있었으며 검 정 옻칠을 한 은행나무 관에서 밀봉된 석재 항아리 1개와 시신을 쌌던 색동 옷감, 금니 2개가 나왔다"고 회고했다. 이완용 후손들은 항아리만 챙겨 자리를 떠났고, 금니는 인부들이 금은방에 팔아 품삯으로 나눠가진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또 두께가 10㎝ 가량 되는 은행나무 관 뚜껑은 주민이 바둑판을 만들려고 갖고 있던 것을 원광대 박물관으로 옮겨왔지만 1년 정도 보관(79-80년)하던 중 이완용의 후손이 되찾아갔다. 당시 원광대 박물관장이던 박순호(사범대) 교수는 "당시 5만원을 주고 사온 관 뚜껑에는 붉은색의 큰 글씨로 `우봉 이씨 이완용 백작"이라고 적혀 있었다"고 말했 다. 박 교수는 또 "관뚜껑은 이완용의 친척으로 알려진 역사학자 이병도씨가 원광대 총장의 양해를 구한 뒤 가져갔다"면서 "관 뚜껑의 길이가 165㎝정도에 폭이 꽤 넓었 던 기억으로 미뤄 이완용은 키가 작고 뚱뚱했던 것으로 추정된다"고 덧붙였다...."

 

 

이병도가 자신의 이름으로 명문이 새겨진 이완용 관뚜껑을 가져가면서 자신이 이완용의 친척이라 했는데 더 이상 무슨 말이 필요한가?

이병도가 이완용의 조카질손이라는 것이 거의 맞다고 본다.

다만, 참조로 이완용의 자손중 이병철은 삼성회장이었던 이병철이 아니다.

이름만으로 오인하시는 분들은 혼동이 없기 바란다. 잘못된 정보로 부일식민사관들의 변명의 꺼리를 만들어주는 분이 없기를 바란다.

문제의 이완용 손자들은 모두 해외로 망명아닌 망명을 하였다.

가끔씩 조부가 친일하면서 모아놓은 땅찾기 소송하러 돌아오는 역적들이 있을 뿐이다.

다만, 이완용의 질손인 이병도가문은 대대로 떵떵거리면서 국립중앙박물관장과 서울대총장과 문화재청장들을 하면서 한국의 역사학계와 문화계에 아직도 지대한 영향을 미치고 있다.

사실, 국체를 팔아먹은 매국노보다 더 나쁜 매국노가 민족을 혼을 팔아먹는 행위를 하는 자이다.

민족의 혼인 역사를 잃으면 그 민족은 다시 일어나기 어렵다.

그래서, 조선이라는 나라, 즉 국체를 팔아먹은 이완용보다 민족의 혼을 팔아먹은 이병도가 더 흉악한 매국노인 것이다.

생각해보라. 몸이 불편하도 굳굳이 살수 있지만 혼이 사라져 없어지면 어떻게 되는가?

그래서. 이병도는 우리민족에 있어 만고의 역적이며 매국노라 할 것이다.

 



요정이 생각

왜 역사를 바르게 알지 못했는가

의문점을 찾다 보니 이런 사람들이 아직도 있음에

눈과 귀를 가리고 왜곡된 역사관을 여태 외우고 배웠나 봅니다

우리세대는 우리세대고 미리를 열어가는 우리 아이들에겐

바른 역사를 가르쳐야 할 것이다

히루라도 빨리...


이 논란이 일어 났던 이유는 이병길 장남 이윤형씨가 1997년 증조부

이완용토지 반환소송 승소함으로 밝혀진 것 같습니다

그 당시 소송담당 판사가 지금 현 국회의원 나경원씨로 알려졌네요

참 몹쓸 사람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