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중 패권전쟁은 없다 ①] 한광수 미래동아연구소 소장
미중 대결시대, 한국의 활로는 어디에서 찾을 것인가? 최근 <미중 패권전쟁은 없다: G2 시대 한국의 생존전략>(한겨레출판 펴냄)을 펴낸 중국 전문가 한광수 전 인천대 교수는 미중 관계의 본질이 전쟁이 아닌 경쟁이라면서 한국은 '친미냐, 친중이냐'라는 이분법적 사고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강조했다. 미중은 현재 지구 최대의 이익공동체로서, 서로 대립하면서도 협력할 수밖에 없는 '협력성 경쟁'을 벌이고 있다는 것이다.
한 교수는 또한 최근 6년간 한국이 대중국 수출 1위를 지켜오는 등 한중은 '자연스런 무역 파트너(Natural Trade Partner)'이며 중국과의 경제협력은 한국경제의 필수 요소라고 지적했다. 따라서 막연한 반공의식에 기초한 중국 혐오는 위험하며 중국을 제대로 알기 위한 노력이 중요하다고 지적했다.
한광수 교수는 서울대 동양사학과와 대학원 경제학과를 거쳐 베이징대학교 경제학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1979년 해외경제연구소에서 중국경제 연구를 시작했다. 1991~96년 베이징에 체류하며 중국의 경제 발전을 현지에서 관찰했고 주중 한국대사관, 무역협회, SK, 한솔제지, 현대건설의 현지 고문으로 일했다. 귀국 후 인천대 교수를 지냈으며 박태준 포스코 명예회장의 중국 고문, <KBS 스페셜> 중국 프로그램 자문 등을 맡았다. 현재는 미래동아시아연구소를 운영 중이다.
지난해 12월 13일 프레시안 회의실에서 진행된 한광수 교수와의 인터뷰를 두 차례로 나누어 연재한다.
1부는 미중 관계 외 중국경제의 발전 과정,
2부는 미중 대결 시대 한국의 진로에 관한 내용이다.
인터뷰 진행은 박인규 프레시안 이사장이 맡았다.
1부
미중 관계의 본질은 전쟁이 아닌 경쟁
프레시안 : 책 제목이 <미중 패권전쟁은 없다>이다. 또한 미국과 중국이 '21세기 지구 최대의 이익공동체'라고 했다. 무역전쟁 등 미중 갈등을 강조하는 일반적 인식과는 큰 차이가 있다. 최근에는 사드 배치나 남중국해 문제 등으로 미중 간 안보 갈등도 심화하고 있다는 인식이 일반적인데, 이와도 사뭇 다르다. 미중 관계의 본질은 무엇이라고 보나?
한광수 : 최근 미중 양국 간 갈등이 이전보다 거칠고 험악해진 것은 사실이다. 그렇다고 전쟁은 아니다. '전쟁'은 함부로 써도 되는 용어가 아니다. 양국이 지난 수십 년 간 벌여오고 있는 대립과 타협의 반복은 전형적인 '경쟁'의 필수 구성 요소다.
미중관계를 이해하는데 멀리 갈 필요가 있는가? 한국은 미중 양국 관계에 접근하는 데 가장 좋은 사례일 것이다. 우리처럼 그들로부터 직접적인 영향을 받는 나라는 없다. 최근 이주열 한국은행 총재는 미중 무역 갈등으로 작년 우리 국내총생산(GDP)이 0.4%포인트 감소하는 영향을 받았다고 추산했다.
하지만 미중관계를 갈등이나 대립 위주로만 보면 위험하다. 사실이 아니다. 대립과 협력의 양면을 모두 살펴야 한다. 그들의 협력 규모는 거대하며, 트럼프의 관세 폭탄 속에서도 협력의 틀은 계속 발전하고 있다. 당장 우리가 그들 양국관계의 틈새를 활용하며 살고 있지 않은가?
지난 40년 동안 우리의 중요한 생존 방식은 한편으로 한미동맹을 목청껏 부르짖고, 다른 한편으로는 중국시장에 올인하는 것이었다. 그렇게 해서 일인당 GDP 3만 달러에 올라섰다. 물론 순조롭지는 않았다. 한쪽은 '한중밀착'을 겨누고, 다른 한쪽은 '한미동맹'을 겨눈다. 그 바탕에 적대적 남북 분단이 가로놓여있다. 한반도 분단의 현상유지가 미중화해의 사전 밀약 사항이었음을 잊으면 안 된다(1971.10). 그들에게는 그들의 관계발전이 우선이 아니겠는가?
우리는 미국의 첨단무기도 들여와야 하고 중국시장 눈치도 봐야 한다. 혼란스럽고 불안한 곡예다. 우리는 그들 탓에 1997년 외환위기 같은 국가적 재앙도 감수했다. 안타깝게도 이 점을 제대로 인식하는 이는 매우 드물다. 앞으로 중국의 추격이 진행될수록 미국의 견제는 가열되겠지만, 그것은 어느 누군가가 우리를 위해 풀어줄 매듭이 아니다.
격변기일수록 큰 그림과 큰 흐름을 놓치기 쉽다. 17세기 명청 교체기와 19세기 일본의 발흥 등 과거 역사를 돌아보면, 우리는 격변기를 오판하여 재앙을 불러들인 뼈아픈 역사를 되풀이한 전과가 즐비하다. 현재 한국의 주류적 상황 인식도 자칫 위험의 경계를 넘나든다. 허술한 인식 탓이다. 서로 '할퀴면서 껴안는' 희한한 모습의 미중 양국관계를 편협한 시각으로 보는 것은 금지된 장난이다. '중국을 갈기갈기 찢어야 한다'며 관세 폭탄을 휘두르는 트럼프 미 정부는 최근 시진핑 중국 정부와 1단계 무역합의에 도달해가고 있다. 왜 그들은 할퀴면서 껴안기를 수없이 반복하는 걸까?
사실, 1940년대 이래 미중관계는 불안정한 롤러코스터를 벗어난 적이 없다. 2차 대전 때는 연합하여 항일전쟁을 치른 그들이지만, 한국에서는 무력으로 충돌했다. 1972년 화해 이후에도 앞에서는 창과 방패를 번뜩이지만 뒤에서 우회 전략을 찾아 협력을 모색했다. 그것이 미중관계의 기본 틀이다. 화해 이전보다 성숙해졌다.
그들은 이익을 앞에 두고 대결만 일삼는 바보들이 아니다. 그들은 서로 엄청난 구조적 보완 잠재력이 있음을 잘 알고 있다. 이미 상호 의존구조도 깊이 자리 잡았다. 세계 최대 선진국 시장과 최대 개도국 시장의 만남이 아닌가? 신냉전을 꿈꾸는 것은 일부의 생각일 뿐이다.
미중 협력은 가속화하는 글로벌 경제의 이익을 배분하는 거대한 통로다. 이익 배분의 열쇠는 무엇인가? '직접투자'라는 카드다. 지금까지, 미중 양국은 근 4천억 달러의 상호 직접투자에 집중해왔다. 거대 규모다. 이런 협력에는 치밀한 전략이 있기 마련이다. 단순한 장터가 아니다.
중국은 1840년 아편전쟁 이후 서방의 침략으로 백년 이상 잿더미가 되었던 악몽을 지닌 나라다. 중국이 강요당한 불평등조약만 2천 개가 넘는다. 잠들지 못한 영혼들이 대륙을 떠돌았다. 전쟁은 곧 파멸로 통한다. 미국이 냉전을 앞세워 대륙을 봉쇄하자 중국은 3차 대전 불가피론을 내세워 맞서왔다. 그것을 '가피론'으로 바꾸는 데 열쇠가 된 것이 해외직접투자다. 상대국가 영토 안에 수천 개의 자국 기업 공장들이 즐비하다면 전쟁은 불가능하다. 서방에서도 해외직접투자 시대가 열린 것은 2차 대전 이후부터다. 탐욕으로 빚어진 두 차례 대전의 참상에 대한 반성의 산물이 직접투자였다. 단순한 상거래가 아니다. 미중화해에 맞추어 상하이국제문제연구소가 이점을 상세하게 정리하여 밝혔다.
직접투자는 개혁개방의 이론적 주춧돌이 되었다. 전쟁과 투자를 맞바꾼 것이다. 누가 전쟁을 좋아하는가? 그러나 지금도 동아시아 지역은 시도 때도 없이 첨단무기를 과시하며 군사적 긴장을 이어가는 현장이다. 미국은 연간 국방예산의 60%, 3600억 달러 이상을 세계경제의 중심으로 떠오르는 이 지역에 쏟아 붓고 있다. 중국도 미국의 포위 전략에 굽히지 않고 맞선다. 전쟁은 아니더라도 그 그림자는 지속적으로 어른거릴 것이다. 그것은 약자가 치르는 대가이며, 강자로 가는 시험대다. 하지만 동아시아는 이제 전쟁이 아니라 시장으로 떠오르고 있다.
중국의 부상에 박수치는 서방국가는 없다. 그러나 그들 중에 중국시장을 외면하는 나라도 없다. 중국이 택한 직접투자 유치를 놓고 과거 한국의 정부 차관을 연상하면 안 된다. 차관은 한국 정부가 외국 돈을 빌려와 정부 책임 아래 경제발전을 도모하는 방식인 반면, 직접투자는 외국인 투자기업이 직접 손익을 챙기는 것이다. 조지프 스티글리츠 교수의 말처럼, 처음 중국은 가공임 정도를 얻는 소박한 전략으로 출발했다. 그것이 곧 오늘날 가공무역을 토대로 한 글로벌 밸류 체인 네트워크로 발전해왔음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그 결과 세계시장을 휘젓는 미국의 초국적기업들이 2천억 달러가 넘는 투자로 중국에 공장을 짓고 밀려들었다. 그리고 중국을 미국 소비자들에게 ‘값싸고 질 좋은’ 생필품 조달을 위한 하청공장으로 삼았다. ‘세계의 공장’이라는 이름은 '빛 좋은 개살구'였다.
중국시장에 1조 달러가 넘는 직접투자가 유치된 지도 시간이 제법 흘렀다. 중국이 벌어들이는 무역흑자의 태반도 이들 직접투자의 주역인 미국 초국적기업의 몫이라고 미국의 금융 황제 그린스펀이 일찍이 지적했다. 미국은 행복을 누리고 있다고 목청을 높였다. 대통령 빌 클린턴도 같은 입장이었다(이 책의 5장). 중국의 추격이 가시화되기 전까지 미국은 이처럼 느긋했다. 문제는 무역적자가 아니다. 추격이다.
21세기 초, 미국은 중국에 두 차례 협력을 요청하는 희한한 일을 벌였다. 하나는 2001년 9.11 뉴욕 테러이고, 다른 하나는 2008년 뉴욕발 금융위기다. 두 사건 발발 직후, 미국 정부는 즉각적으로 중국정부에 손을 내멀었다. 하나는 미증유의 군사적 위기였고, 또 하나는 경제적 위기였다. 중국은 미국의 요청에 흔쾌히 응했다. 그리고 글로벌 경제의 2인자로 올라서는 기회를 잡았다. 이처럼 위기에 서로 손잡고 협력하면서도 '패권전쟁'이 가능할까??
미중은 이 거대하고 치열한 경쟁을 위해 수많은 대화 채널을 가동 중이다. 그들에 따르면, 크고 작은 대화 채널이 거의 100개에 이른다. 그것은 경쟁을 위한 것이지 전쟁을 위한 것이 아니다. 빈번한 정상 간 접촉 이외에도 안보, 경제, 사이버, 인문 등 각 분야별로 대화가 번창하고 있다. 한국도 미국과 중국에 대해 이런 대화 채널을 가동하고 있는가?
미중 양국은 공동 군사훈련도 실시 중이다(책 2부 참조). 북한 핵문제에 대해서도 양국 군 최고 수뇌부가 나서서 협력한다. 남중국해의 군사적 긴장에 대해서도 만일의 사태에 대비한 안전 관리 시스템을 가동한다.
그들은 글로벌 질서를 바꾸어간다. 일부 원하는 세력도 없지 않겠지만 냉전시대로 돌아가기란 불가능하다. 앞으로도 그들은 '할퀴고 껴안으며' 그들의 이익을 추구할 것이다. 그것은 전쟁이 아니다. 경쟁이다. 새로운 세상에는 새로운 시각이 필요하다.
▲ 마오쩌둥은 세간의 인식과 달리 미국을 동경했다. ⓒ위키백과
조지 워싱턴을 존경한 마오쩌둥
프레시안 : 책의 1부는 지난 100년간 미중 관계와 중국의 개혁개방 과정을, 2부는 현재의 미중관계를 다루고 3부는 미중 대치의 최전선인 한국의 활로를 모색하고 있다.
'중국, 미국을 사랑한 100년'이란 제목의 1부에서 중국의 국부인 마오쩌둥이 미국의 국부 조지 워싱턴을 존경했고, 이미 1944년 무렵부터 미국과의 협력을 공개적으로 열망했다는 대목이 흥미로웠다. 미중 관계는 1972년 2월 닉슨의 방중을 경계로 대립에서 협력으로 전환했다고 보는 일반적 인식과는 차이가 있다.
한광수 : 좋은 지적이다. 미국 정부와 중국공산당이 처음 손을 맞잡은 것은 1944년이었다. 중국국민당에 염증을 느낀 루스벨트 정부가 제안했다. 스탈린과 협의를 거친 결과였다. 미중 화해 28년 전 일이다. 협력의 명분은 항일전을 위한 연합전선이었다. 당시 대통령 4선을 앞둔 루스벨트는 중국공산당에 기대를 거는 국내 여론을 의식하며 행동했다. 4선을 이룬 루스벨트는 곧 서거했다.
후임자는 텍사스 석유 재벌들이 끌어올린 해리 트루먼이었다. 백악관에 들어선 그는 곧바로 일본에 핵폭탄을 투하했다. 이어 중국 내전과 미군의 대륙 철수, 냉전 선언과 마셜플랜, 마오쩌둥의 건국, 그리고 한국전쟁이 숨 가쁘게 이어졌다. 잠시 동안의 미중 협력 뒤를 이은 이 사건들이 기존의 세계 질서를 송두리째 뒤엎는 대격변의 단초였음은 물론이다. 유럽 열강이 잿더미로 변하자, 빈자리는 새롭게 떠오른 미국과 소련이 차지했다. 그들은 새롭게 재편되는 동아시아에 군침을 흘렸다. 혁명을 등에 업은 중국 대륙이 이들 양국에 맞서기 시작했다. 미-중-소 3각 관계에 불이 붙었다.
당시는 미국 정부가 파시즘과의 대결을 위해 공산주의 국가들과도 연합했던 시절이었다. 미국 대통령 프랭클린 루스벨트와 소련 서기장 이오시프 스탈린은 개인적으로도 절친이었다. 머리를 맞대고 새로운 세계 구도를 짜기 시작한 루스벨트와 스탈린은 중국에 대해서 공동 관리로 방향을 잡았다(한반도 분단의 씨앗이기도 했다). 접근 방식은 간단했다. 스탈린이 장제스와 손잡고 루스벨트는 마오쩌둥과 연합하여 대륙 양분을 도모했다. 양국의 음모는 항일전 막바지에 구체화되었다.
루스벨트는 '국공연합정부'라는 명분으로 중국공산당과 연합했으며(1944~46), 소련은 종전 이전부터 장제스와 준비해온 군사우호협정을 일본 항복 전날 맺었다(1945.8.14.). 양국이 심혈을 기울인 대륙 분할의 꿈은 3년간의 국공 내전에 달려 있었다. 이 모든 상황은 마오쩌둥이 이끈 ‘양쯔강 도하작전’의 성공으로 종료되었다.
유의해야 할 또 다른 하나는, 마오쩌둥이라는 인물이다. 그는 젊어서부터 조지 워싱턴을 비롯한 미국의 영웅들에 심취했다. 마르크스보다 워싱턴을 먼저 알았고 존경했다. 당시 중국 젊은이들의 풍조이기도 했다. 중국혁명 내내 마오가 조지 워싱턴의 게릴라 전략을 가슴에 품었다고 <뉴욕타임스>의 대기자 해리슨 솔즈베리는 술회했다.
"권력은 총구에서 나온다"는 마오의 유명한 발언도 조지 워싱턴을 염두에 뒀다. 무장 게릴라 투쟁으로 영국으로부터의 독립을 쟁취한 데 감명 받았다. 1944년 옌안을 찾아온 미국 기자에게 그는 이렇게 말했다.
"외국인들이 보기에 옌안의 모든 사정이 너무 낙후한 것이 사실이지만, 이는 마치 조지 워싱턴의 사령부가 초라했던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외국인들이 만약 워싱턴의 사령부를 보았다면 승리를 외치는 워싱턴의 주장을 믿지 않았을 것입니다. 워싱턴은 비록 기계설비나 전기시설이 전혀 없었지만 올바른 정치사상으로 인민이 무장하면 총구에서 정권이 나온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조지 워싱턴은 현대 게릴라전의 새로운 학설을 창안했습니다."
마오쩌둥이 우리에게 반미주의자로 알려진 것은 한국전쟁 참전 탓이다. 그에게 친미 반미는 전략이 아니었다. 그리고 미국이나 소련을 진정한 친구로도, 진정한 적으로도 보지 않았다. 굳이 말하자면 그는 '중국주의자'였다.
마오의 일화를 하나 더 소개한다. 1944년 미국 사절단의 옌안 방문 당시 미국인 통역이었던 시드니 리텐버그는 마오가 가장 좋아한 나라는 미국이었다면서 "마오는 마르크스와 레닌을 알기 전에 프랭클린과 제퍼슨을 연구했다"고 말했다.
실제로 마오는 공산주의를 접하기 이전에 미국식 실용주의에 심취했었다. 1920년 5월에는 당시 중국을 순회 중인 미국 실용주의 철학자 존 듀이의 강연을 상하이에서 직접 듣기도 했다. 듀이의 제자인 후스와도 좋은 관계였다. 훗날 그는 "우리 중국은 자본주의 단계를 거치지 않았기 때문에 미국을 활용할 필요가 있다"(1947.7)거나 "러시아의 혁명 열정과 미국의 실용 정신을 결합해야 한다"(1959.2)고 강조했다.
미국은 1943년 12월부터 중국 공산당과 접촉을 시작했고 전략첩보국(OSS, CIA의 전신)의 수장인 윌리엄 도노반은 옌안의 마오쩌둥을 직접 만났다. 미국 정부는 1944년 7월, '딕시 사절단'이란 이름의 공식 사절단을 옌안으로 보내 항일전 수행을 위한 국공합작을 추진했다. 당시 중국 현지의 미국 외교관들은 본국 보고에서 공산당의 정권 장악 가능성이 크다고 판단하고 마오쩌둥과의 협력을 건의했다. 마오쩌둥은 워싱턴을 방문하여 루스벨트와 회담하고 싶다는 의사를 1944년부터 여러 차례 밝혔다. 미국과 국교를 맺으면 소련과 관계를 끊겠다는 의사까지 밝혔지만 마오의 워싱턴 방문은 끝내 성사되지 못했다.
마오가 닉슨과 만나 화해한 것은 1972년 2월, 그가 서거하기 4년 전이었다. 젊은 시절 그가 좋아한 미국과 마침내 화해하여 오늘날 미중시대의 초석을 남기고 떠났다. 마오 이후, 지금까지 중국 지도자들 중에 미국을 중시하지 않는 지도자는 없다.
▲ 미국과 중국의 관계는 단순히 경쟁 구도로 재단할 수 없다. 둘은 '할퀴며 껴안는' 사이다. ⓒpxhere.com
소련 붕괴에 환호한 중국 지도부
프레시안 : 책에서는 중국의 경제 발전을 세 번의 계기로 나누어 설명했다. 1978년 12월의 개혁개방 결정, 1992년의 사회주의 시장경제 도입, 2001년 세계무역기구(WTO) 가입이 그것이다. 미중은 1972년에 화해했지만 정작 수교는 6년이 지난 1979년 1월 1일에나 이루어진다. 중국의 문화혁명, 미국의 워터게이트, 대만 문제 등 등 여러 사정 때문이었다.
첫 번째 계기에서 중국의 개혁개방 결정이 미중 수교 협상 타결 직후에 나왔다는 점이 인상적이었다. 1978년 12월 15일 덩샤오핑의 결단으로 수교의 마지막 장애물이었던 미국의 대만 무기 판매를 용인한 바로 다음 날(중국 시간 12월 16일 오전 10시) 중국은 양국 수교 방침을 발표했다. 이틀 후인 12월 18일 덩샤오핑은 중공 11기 3중 전회에서 "당의 노선을 계급투쟁에서 경제발전으로 바꾸고, 개혁개방으로 체제변혁을 착수하겠다"고 선언했다. 즉 미중 수교로 미국의 안보 위협이 사라졌다는 확신이 서자 곧바로 개혁개방 결정을 통해 경제 개발에 본격 나섰다.
미중 수교는 중국이 경제 개발에 나설 수 있게 만든 가장 주요한 외부적 요인이었다. 역시 안보가 확보된 이후에야 경제개발을 할 수 있다는 철칙이 확인된 셈이다. 중국, 베트남과 달리 북한이 개혁개방에 나서지 못하는 것도 바로 미국과의 관계 정상화가 이뤄지지 못한 때문 아닌가. 이와 함께 대만에 대한 미국의 무기 판매를 감수할 정도로 중국 지도부가 미국과의 관계 정상화를 대단히 중시했음을 알 수 있었다. 미국의 대만 무기 판매는 '하나의 중국' 원칙을 사실상 부정하는 것임에도 덩샤오핑은 이를 받아들였다.
둘째는 1992년의 사회주의 시장경제 도입이다. 책에 따르면 덩샤오핑은 소련 붕괴(1991년 12월 25일) 24일 후인 1992년 1월 18일부터 2월 22일까지 36일간 우한, 선전, 주하이, 상하이 등을 순회하며 시장경제를 역설했다(남순 강화). 이후 '중국 특색의 사회주의 시장경제'는 1992년 10월 14차 당대회에서 채택됐고, 1993년 3월에는 전국인민대표대회에서 헌법에 명기됐다.
이 대목에서 의문이 떠오른다. 1989년 6월 톈안먼 사태와 그해 가을 동구권 붕괴로 위기에 처했던 중국 지도부가 1991년 12월 소련 붕괴에 환호했고, 그 직후 시장경제 도입을 결정했다고 했는데 소련이라는 존재가 중국의 개혁개방에 그토록 중요한 변수였나?
한광수 : 중소 관계는 본래 좋지 않았다. 소련의 스탈린은 미국과 손잡고 장제스를 지원하며 중국 분할을 꿈꾸었던 인물이다. 중소관계가 틀어진 결정적 계기는 핵무기였다. 마오쩌둥의 핵 개발 지원 요청을 소련의 흐루쇼프가 거절했기 때문이다(1954.10.3).
1960년대에 들어와서는 거의 모든 교류가 중단됐다. 1964년 중국의 핵실험을 막기 위해 소련은 핵공격을 계획했고, 급기야 1969년에는 중소 국경에서 무력 충돌이 빚어졌다. 한마디로 중국과 소련은 사이가 좋았던 적이 거의 없다. '사회주의 형제'는 서방에 보여주기 위한 허울에 불과했다. 1991년 12월, 구소련체제가 붕괴하자 중국 입장에서는 4천 킬로미터에 달하는 중소 국경 방위 부담이 크게 줄어들게 되었고, 미국과 직접 소통하는 길이 열렸다. 중국 지도부에는 희소식이 아닐 수 없었다.
당시 한국을 비롯한 서방 언론들은 중국 공산당의 미래도 소련처럼 어둡다는 기사를 경쟁적으로 내보냈다. 실상과 거리가 먼 '가짜 뉴스'였다. 소련 국기가 모스크바 크렘린 광장에서 내려진 1991년 12월 25일, 베이징 자금성 옆 중난하이에서 중국 지도부와 고위 관리들은 손에 손을 잡고 환호하며 감격했다. 이는 당시 중난하이 현장에서 함께 환호했던 한 고위 관리가 내게 전해준 내용이다. 소련의 붕괴로 중국은 중요한 안보 부담 하나를 덜게 된 것이다.
중국, 대약진운동 실패 이후 30년간 시장경제 준비
또 하나 지적해야 할 것은, 중국의 시장경제 도입이 임기응변이 아니었다는 점이다. 당시 미국과 서방은 중국의 시장경제 도입을 당면한 체제 위기를 벗어나기 위한 미봉책으로 보았다. 그러나 그보다는 그동안 준비해오던 시장경제를 공식화하는 계기로 삼았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시장경제를 향한 중국의 노력은 결코 짧지 않았다. 하버드 대학의 에즈라 보걸 교수의 지적처럼, 대약진의 재앙을 수습하던 1960년대 초 마오쩌둥 치하에서 당시 당 서기장이었던 덩샤오핑의 주도로 시장경제를 향한 노력이 진행되고 있었다. 덩은 1961년 '공업 17조'의 이름으로 선진국 교류와 경제발전을 제창했다. 그 후, 덩은 문화혁명으로 잠시 실각했지만 1973년 국무원 부총리로 복귀해 자신의 시대를 열어 나갔다. 수많은 덩샤오핑 지지자들은 모두 처절하게 낙후한 현실을 직시하는 실용주의자들이었다.
그들의 노력으로 중국의 시장경제는 1961년에서 1975년까지 15년의 힘겨운 기초 작업과 1978년 개혁개방에서 1992년까지 상품경제라는 이름의 15년 과도기를 거쳤다. 도합 30년의 준비를 거친 결실이 '중국 특색의 사회주의 시장경제'임을 유의할 필요가 있다. 트럼프 정부가 매서운 눈총을 보내는 '중국제조 2025'도 그보다 50여 년 전인 1961년에 수립한 '공업 17조'에서 출발했다. 시장경제는 결코 우연히, 또는 돌발적으로 튀어나온 것이 아니다. 그 같은 시각은 중국에 대한 무지에서 나왔다. 키신저가 중국을 "하청공장 대하듯 하지 말라"고 강조한 배경이기도 하다.
▲ 중국은 2001년 WTO 체제에 편입하며 고속 성장의 전기를 마련했다. ⓒwto.org
프레시안 : 중국 경제발전의 셋째 계기로 2001년 중국의 WTO 가입을 들었다. WTO 가입이 중국의 경제 발전에 커다란 기여를 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인가? 시장경제를 도입하고 국제 시장에 참여한 것으로 충분하지 않나?
한광수 : WTO 가입으로 중국은 미국이 주도하는 서방 경제권에 참여하는 문을 열고 들어가게 되었다. 그 통로의 열쇠를 쥔 미국을 설득하는 협상이 3년 반에 걸친 미중 무역협상이었다(1996∼1999). 이후 중국 경제는 대외무역과 해외직접투자의 가속화로 급부상하기 시작했다. 이때부터 중국내 암적 존재였던 거대 국유기업에도 개혁의 채찍이 본격화하기 시작했다.
당시 미국은 WTO에 가입한 중국의 미래를 낙관했다. 중국을 미국의 '말 잘 듣는 영원한 하청기지'로 치부하는 한편, 중국이 결코 미국의 경쟁상대나 위협이 될 수 없다는 견해가 상식으로 통했다. 그러나 WTO 가입을 토대로 중국은 시장규모를 빠르게 확장해 나가면서 미국을 추격권내로 끌어들였다. 이런 추격이 WTO 가입 18년을 지나는 중국의 현주소다.
중국이 걸어온 가시밭길 중에 미국과의 'WTO 가입을 위한 무역협상'을 소개한다. 전쟁을 방불케 하는 난항이었다. 가입을 원하는 중국이 보유한 무기는 인내였다. 비상식과 조작, 경멸이 판치는 속에서 중국은 마침내 1999년 유고 주재 중국대사관에 대한 미국의 폭격도 감수해야 했다. 가입 신청으로부터 무려 15년이 걸린 일이다. 1986년에 WTO의 전신인 GATT(관세 및 무역에 관한 일반협정)에 가입을 신청하여, 1999년 11월 15일, 클린턴 정부가 협상을 완료하기까지 걸린 시간이다. 협상은 마무리되었으나, 2001년 집권한 조지 W 부시 정부는 중국의 WTO 가입에 부정적이었다. 당초 부시는 대선 후보였을 때만 해도 중국의 WTO 가입에 찬성 입장이었다. 하지만 집권하자 '중국 길들이기'로 태도를 바꿨다.
2001년, 중국 부상의 결정적 계기
그런데 집권 첫해 미국 역사상 전대미문의 9.11 뉴욕테러가 터졌다. 그 전에 미 첨단 정찰기의 하이난도 불시착 사건도 있었다. 부시는 태도를 바꿔 곧바로 중국과 손을 잡았다. 중국의 WTO 가입을 지지하는 한편, 반테러 전쟁에 중국의 협조를 얻어냈다. 그리고 아프간-이라크 전쟁으로 빨려 들어갔다. 이런 미국의 정책 변화가 중국의 경제 부상에 순풍을 안겨주었음은 물론이다.
전쟁의 수렁에 빠지게 된 미국은 중국 견제가 어려워졌다. 2001년 이후는 중국의 '나 홀로 성장'이 시작된 시기다. 반면 미국의 과도한 군사비 지출은 2008년 금융 위기의 촉매로 작용했다. 미국 전문가들은 이라크에 퍼부은 전쟁 비용이 4조7000억 달러에 달한다고 추정했다. 미국발 금융위기가 발생한 2008년 오바마는 대통령 선거에서 아프간-이라크 전쟁 종식을 공약하고 당선되었다. 그리고 2011년에 이라크 전쟁 종식을 선언했다.
'더러운 전쟁'에서 빠져 나온 오바마는, 곧바로 중국 포위작전에 착수했다. '아시아로의 회귀(Pivot to Asia)'라는 이름이었다. 미국의 전략 목표를 중동에서 중국으로 다시 바꾼 것이다. 오바마는 미국이 자랑하는 항공모함을 앞세워 중국 포위에 연간 국방예산의 60%를 할당하기 시작했다. 거대한 중국 대륙, 급부상하는 경제 대국인 중국을 전면적으로 포위하겠다는 웅대한 계획에 착수했다. 마리오 쿠오모 뉴욕 주지사의 말처럼 '힘센 사춘기 소년 같은 나라'가 아니고서는 생각하기 어려운 일이다.
트럼프 정부도 오바마 정부의 중국 포위작전을 그대로 이어받았다. 트럼프 정부가 발표한 인도·태평양 전략이 그 연장선이다. 중국의 추격에 가장 초조한 나라는 미국이다. 미국이 중국과 동아시아에 총력을 쏟아 붓고 있는 이유다. 그러나 키신저는 말했다. "중국의 발전은 운명이다." 그리고 "견제보다 협력이 미국의 국익에 이롭다"고 덧붙인다.
"서방이 전하는 중국 얘기는 하나도 믿지 말라" 2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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