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교육배움/미국은

731부대장 이시이가 미국으로 간 이유

천사요정 2020. 2. 2. 05:26

<기획> 세균전의 나라 미국 ②



백남주 / 우리사회연구소 객원연구원

 

[연재를 시작하며]

주한미군으로의 탄저균 반입이 뜨거운 논란이다. 전쟁의 목적은 승리이고 이를 위한 수단에는 제한이 없다고 했던가. 하지만 군사적 목적을 위해 인간에게 치명적인 세균을 사용한다는 것은 너무나 잔인한 발상이다.

세균무기는 오늘날 “가난한 나라의 핵무기”라고 불리고 있지만, 원래는 제국주의 침략세력에 의해 처음으로 개발되었다. 이번에 벌어진 주한미군 탄저균 논란도 미국이 어떠한 입장과 목적에서 살아있는 탄저균을 이 땅에 반입하였는지 철저히 규명해야 할 것이다.

탄저균 반입 사건의 중요성과 위험성을 제대로 알리기 위해 <세균전의 나라 미국>이라는 연재를 준비하였다. / 필자 주

<차례>

1. 전염병과 전쟁
2. 731부대장 이시이가 미국으로 간 이유
3. 6.25와 세균
4. 쥬피터 프로그램이란?
5. 끝내 터진 사고
6. 세균, 방어용인가? 공격용인가?
7. 진화하는 세균전
8. 불안한 한국사회
9. 대안은 무엇인가?

 

전염병과 세균으로 인해 전쟁의 승패가 좌지우지 되는 모습을 보면서, 사람들은 세균무기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특히 백신의 개발로 인간이 전염병을 통제할 수 있다는 생각을 갖게 되자, 전쟁에 세균을 이용하려는 욕망은 더욱 커졌다. 아군이 특정 전염병에 대한 백신을 가지고 있다면 인위적으로 특정 전염병을 퍼뜨려 아군의 피해 없이 상대방의 전투력을 무력화 시킬 수 있는 것이다.

이런 세균무기 개발의 직접적 피해자가 바로 우리 민족이었다. '731부대', '마루타(통나무)'라는 말은 분노스럽게도 우리에게 너무 익숙한 말이 되어있다. 살아있는 사람을 대상으로 한 인체실험으로 악명을 떨친 731부대의 차마 입에 담지 못할 만행으로 당시 3000명에 달하는 조선인, 중국인 등이 처참히 목숨을 잃어야했다.


인간이기를 거부한 731부대의 만행

731부대는 2차 세계대전 당시 1936년에서 1945년 여름까지 중국 하얼빈에 존재했던 일제 관동군 산하 세균전 부대다. 1942년에는 부대원 총수가 3천명에 달했으며 헤이룽장성(黑龍江省)내 하이린(海林), 쑨우(孫吳), 린커우(林口), 하이라얼(海拉爾) 등지에 지부를 둘 정도로 규모가 컸다.

일본은 1931년 만주사변을 일으킨 뒤 1937년 7월에는 중일전쟁으로 전쟁을 확대해 갔다. 일본은 거대한 중국대륙을 완전히 장악하고 소련과도 대응하기 위해 되도록 적은 물자와 병력으로 최대한의 효과를 내고 싶어 했다. 그래서 선택된 것이 바로 세균무기다.

731부대는 세균무기를 개발하는 과정에서 조선인과 중국인 등을 대상으로 세균주입, 신체해부 등 경악할만한 반인륜적 생체실험을 자행하였다. 소련의 일제전범재판 결과나 중국의 주장 등에 따르면 1940년 이후 해마다 600명의 ‘마루타’들이 생체실험에 동원되어 최소한 3,000여 명의 한국인·중국인·러시아인·몽골인 등이 희생되었다. 2005년 8월 2일 중국 <하얼빈일보>는 지금까지 밝혀진 731부대 생체실험 대상자 1,467명의 명단을 공개하기도 했는데, 여기에는 조선인 6명의 이름도 포함되어 있었다.


일본에 의한 세균전 피해자도 30만 명에 이를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또한 1945년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자 일본은 자신들의 만행의 흔적을 없애버리기 위해 살아남은 150여 명의 ‘마루타’들까지 모두 살해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 731부대의 생체실험 장면 [통일뉴스 자료사진]


731부대는 정말이지 인간이기를 포기한 잔혹한 방법을 동원해 세균실험을 자행했다. 주사기로 세균을 인체의 각 부위에 주입한 뒤 신체변화를 관찰했다. 세균을 입에 들이붓거나, 음식에 섞어 식용이라고 속여서 먹게 한 뒤 그 변화를 관찰했다. 백신연구를 위한 혈청을 얻기 위해 산 사람의 몸에서 피를 뽑아 죽이기도 했다. 더군다나 세균실험의 효과를 측정하기 위해 생체를 해부했다. 인체에 세균을 침투시킨 후 해부를 통해 세균의 침투정도를 기록으로 남기는 만행을 저질렀다. 죽거나 실험에 필요 없게 된 사람들은 소각로로 보내졌다.


실험은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진행되었고, 임산부에게까지 시행되었다. 수많은 실험과 해부는 산 사람들에게 마취 없이 이루어졌는데, 이는 마취가 실험결과에 영향을 주는 것을 막기 위한 것이었다고 한다.

731부대는 세균무기 실험을 위해 전염병을 옮기는 쥐와 파리, 모기, 빈대, 이 등을 번식시켰고, 인간 생체실험을 위한 혈액재료를 얻기 위해 말, 소, 낙타, 원숭이 등을 사육하는 동물사육반을 설치·운영하였다. 731부대 노무자의 증언에 의하면 731부대가 세균을 전파하는 매개물인 이를 얻기 위해 나이 많은 노무자를 음침한 방에 가두고 겨울이든 여름이든 옷을 갈아입지 못하게 하고 목욕을 못하게 하면서 그들의 몸에서 이가 번식하게 하였다고 한다.


731부대는 세균전을 실험만 한 것이 아니었다. 개발된 세균무기를 실전에 투입하기 전 살아있는 사람을 대상으로 성능실험 까지 진행했다. 사람들을 야외 나무말뚝에 묶어두고 탄저병, 콜레라, 페스트균 등의 세균이 담긴 폭탄을 투하했다. 야외 세균무기 실험으로 일부 사람들은 사지가 찢겨져 죽어갔고, 살아남은 사람들은 다시 부대로 끌고 와 해부를 하고 세균폭탄이 어떤 영향을 주었는지를 관찰했다.


실제 전투에서도 세균무기를 사용하였다. <네이버 지식백과>에 따르면, 1940년 10월 27일에는 난징(南京)의 1644 세균전 부대와 함께 중국 닝보(寧波)에 페스트균을 대량 살포하여 100명 이상을 사망하게 하였고, 1941년 봄에 후난성(湖南省)의 한 지역에 페스트 벼룩을 공중 살포하여 중국인 400여 명을 희생시켰다. 1939년 일제가 몽골과 소련 접경지대인 노몬한에서 소련에 대해 도발하다 대패하자, 소련군의 추격을 막기 위해 강물에 장티푸스균 등을 실제로 살포한 것으로 드러나기도 했다.


그 외에도 731부대에서는 갖가지 잔인한 실험들이 진행 되었다. 사람들의 옷을 벗긴 채 영하 30~40도 혹은 그 이하의 온도로 동상실험실에 집어넣고 각종 변화를 관찰했다. <미디어오늘>에 실린 “하성봉의 중국이야기”를 보면, 731부대는 사람과 말의 피를 서로 수혈하거나, 소장과 식도를 접합하고 팔과 다리를 절단해 교차 접합하는 실험도 했다. 사람을 고속회전기에 넣어 돌리는 실험과 폐에 담배연기를 주사하는 실험도 했다. 사람의 뇌를 직접 바늘로 찔러 인체의 다른 부위가 어떤 반응을 하는지 보는 실험도 진행됐다.


전범 731부대장에게 면죄부를 준 미국

이렇게 끔직한 일을 저지른 일제가 패망을 했으니, 731부대의 지휘관들과 성원들은 전범재판에 회부되고 응당한 처벌을 받는 것이 당연했다. 하지만 결과는 그 반대였다. 731부대 부대장이었던 이시이 시로 (石井四郞)를 포함한 대다수 박사들은 생물학자로서의 명예를 계속 유지했다. 이시이는 도쿄대학 학장까지 역임했다. 부사령관이었던 기타노 마사지는 미도리주지 설립자가 되었고, 또 다른 생체실험 부대 책임자였던 와카마쓰 유지로는 니혼이야쿠 공장장이 되는 등 모두 일본 제약업계를 주름잡았다. 어떻게 이런 일이 벌어진 걸까?

우리는 보통 2차 세계대전이라고 하면 '정의로운' 미국이 포악한 제국주의 '독일', '일본'을 무너뜨린 전쟁이라는 이미지를 떠 올린다. 하지만 미국 역시 해외원료기지 확보 등 철저히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전쟁에 개입했고, 전후 처리과정 역시 마찬가지였다. 세균무기에 관심을 가지고 있던 미국은 일제의 세균전 연구경험과 기록을 활용하고 싶어 했다.

미국은 이전부터 생화학무기를 개발하고 있었다. 2015년 6월 13일 <한겨레신문> 기사(“메르켈처럼 정색하고 따질 문제”)에 따르면 미국은 1차 세계대전 때 아주까리에서 뽑은 독을 포탄에 실어 나른 뒤 1920년 화학전국(CWS)을 만들어 생물무기 개발에 나섰다. 제2차 세계대전 기간 중인 1943년에는 육군 생물학전실험실을 메릴랜드의 포트디트릭에 설치해서 생물무기 개발의 심장부로 삼았다.

참새가 방앗간을 그냥 지나칠 수 없듯이, 1차 세계대전 때부터 세균전에 대해 지속적인 관심을 가졌던 미국으로서는 731부대의 실험 결과들은 결코 놓칠 수 없는 것이었다. 더군다나 자신들의 손을 더럽히지 않고 직접 살아있는 인간을 통해 실험한 자료를 얻을 수 있으니 그야 말로 금상첨화였다.

1947년 미 합동참모본부는 일본의 세균전 증거를 전범재판소에 넘기지 않고 관련자들을 기소면제 하는 대신 세균무기실험 자료들을 미국의 정보기관에 넘기기로 731부대장 이시이와 거래를 했다. 2005년 일본 가나가와 대학의 스나이시 게이치 교수가 미 국립문서보관서에서 발견한 2건의 기밀 해제 문서에 따르면, 미국은 2차 세계대전 종전 2년 후 731부대원에게 생체실험 자료와 교환하는 조건으로 전범재판 기소를 면제해 줬으며, 총 15만∼20만 엔의 돈을 부대원들에게 준 것으로 드러났다. 이 돈은 2005년 화폐가치로 2000만∼4000만 엔(약 4억 원)에 달하는 것이다. 미국은 731부대원들에게 돈 외에도 음식과 선물, 향응 등을 제공한 것으로 나타났다.

미국은 이시이 등 일본의 세균전 관련자들이 처벌받지 않도록 적극적으로 힘썼다. 스티븐 엔디콧 등의 저서『한국전쟁과 미국의 세균전』에 따르면 미국 화학전부대와 극동사령부, 군무국장, 합동참모본부, 전쟁부, 국무부, 법무부, 전쟁범죄 담당 수석검사 등 모두가 이시이와 그 공범자들을 전범 기소에서 면제시켜 주는 데 한몫씩 담당했다. 이시이 개인에 대한 미군 정보 장교들의 평가는 그를 전범에서 면제시키기 위한 길을 닦아 주었다. 정보 장교들은 1947년 한 보고서에서 이시이를 "학구적이고 솔직하며, 인정 많고 친절하다"고 묘사했다. 나아가 "이시이는 친미적이며, 미국의 정신문화와 자연과학을 존경한다"고 적었다.

소련이 731부대원들에 대한 전범 기소를 줄기차게 요구했지만 미국은 이를 거부했다. 소련은 1949년 12월 하바롭스크 전범 재판을 별도로 열어 일본 패망 후 신병을 확보한 생체실험 실무 관련자 12명 전원에게 최고 25년의 중형을 선고했다. 하지만 미국은 이를 두고 ‘보여주기 식 재판’, ‘이미 지나간 이슈’ 등으로 평가 절하했다.

일본과 관련된 전범재판은 2년 반에 걸쳐 진행됐고, 수많은 전범들이 중형을 받았다. 하지만 731부대의 총책임자 이시이 시로는 아무런 처벌을 받지 않았다. 당시 전범재판 총 책임자였던 맥아더 장군은 이시이에 대해 면죄부를 줬다. 1980년 미국의 저널리스트 존 윌리웜 파월은 맥아더 장군이 미 국무부, 전쟁부, 해군부 등의 관련자들과 주고받은 비망록을 입수함으로써 미국과 일본의 검은 커넥션을 폭로하기도 했다.

이시이는 1949년 미국으로 건너가 첨단 시설이 갖춰진 육군기지 ‘포트디트릭’에서 세균무기 개발에 참여한다. 이 기지 정문에는 ‘731’이라는 동판이 붙어 있었다고 한다.


미국으로 건너간 731부대 데이터

이시이 등 세균전 실험자들에게 면죄부를 주고 그 대가로 미국이 가져간 것은 무엇일까?

미국은 모두 4차례에 걸쳐 731부대에 대한 비밀 조사보고서를 작성했다. 1945년 9월 미군 정보장교 머레이 샌더스 중령이 작성한 1차 보고서에 따르면 당시 일본은 공격용 세균무기 개발은 인정했으나 생체실험은 철저히 은폐했다. 1946년 3월에 나온 2차 톰슨보고서에는 세균폭탄 설계도와 제조법, 세균의 대량 배양기술 등이 담겨 있었다. 1947년 4월 로버트 펠에 의한 제3차 펠보고서에 따르면 미국은 이 시기에 일본의 생체실험 사실을 확인했다. 그 이후 1947년 12월 에드윈 힐이 조사해 작성한 제4차 힐보고서에 따르면 미국은 731부대의 생체실험 표본 및 각종 실험 데이터를 완벽하게 확보했다고 한다. 이 보고서에는 인체에 세균을 투입했을 때 세포가 변하는 것을 기록한 자료도 포함돼 있었다.

이 과정에서 미국과 이시이의 검은 커넥션에 따른 이시이의 진술 등은 미국이 731부대의 세균 실험결과를 완벽히 입수하는 데 결정적인 작용을 했을 것이다.

『한국전쟁과 미국의 세균전』의 내용에 따르면, 미국 문서보관소에서 이용 가능한 기록을 보면 이시이 장군과 그의 부하 과학자들에 대해 최소 24차례의 인터뷰가 진행되었다고 한다. 이시이는 자신이 직접 연구한 보툴리누스 중독증, 브류셀라증, 가스 괴저, 비저, 인플루엔자, 페스트, 천연두, 파상풍, 야토병 등에 대해 보고했다. 키타노 마사지 중장은 출혈열, 선페스트, 탄저병, 진드기 뇌염, 발진티푸스, 이질, 장티푸스 등에 대해 진술했다. 파상열, 콜레라, 복어 독, 뮤신, 살모넬라, 쓰쓰가무시병(털진드기병), 결핵 그리고 각종 식물 병 등에 대한 진술도 있었다.

일본 과학자들은 35건 이상의 보고서를 미국에 제출했다. 보고서에는 8백 차례 이상 실시된 인체실험 관련 슬라이드 8천여 개가 딸려있었다고 한다. 인체실험과 관련해서는 350쪽에서 800쪽 이상 되는 비저병, 페스트, 탄저병 등에 대한 3건의 검시 보고서도 포함돼 있었다.

미국은 3천명의 살아있는 인간을 대상으로 한 9년간의 방대한 실험결과를 송두리째 확보한 것이다.

이렇게 세균무기에 관심을 가지고 일본으로부터 실험결과를 입수한 미국이 한국전쟁에서 생화학무기를 실제 사용했다는 주장들이 이곳저곳에서 제기되고 있다.

http://www.tongil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112706


"미국, 731부대에게 배워 한국전 사용?" 니덤 보고서 논란


워싱턴=노효동 특파원 연합뉴스            




연합뉴스

중국 1952년 발간…"미군정서 사면받은 731부대장 한국 방문"

미군이 2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의 생화학전 부대였던 '731' 부대로부터 세균무기 개발과 사용 방법을 배워 한국전쟁에 사용했다는 논란의 보고서가 공개됐다.

미국 심리학자인 제프리 카이는 26일(현지시간) 진보 성향의 온라인 블로그인 '디센터'에 영국의 유명 생화학자였던 조지프 니덤이 1952년 주도적으로 작성한 '한국과 중국에서의 세균전에 관한 국제과학위원회의 사실조사 보고서' 원문을 공개했다.

이른바 '니덤 보고서'로 불리는 이 보고서는 당시 미국과 전쟁 중이었던 중국이 작성한 것으로, 보고서 원문이 일반에 공개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라고 이 학자는 주장했다.

보고서는 1945년 일제로부터 항복을 받아낸 미 군정이 당시 생체실험을 자행해 악명이 높았던 이시이 시로(石井四郞) 731부대장과 공범들을 사면했고, 이시이는 1952년초 한국과 중국 동북부에서 세균전이 사용됐다는 혐의를 받기에 앞서 두 차례 연거푸 방한했고 같은해 3월에도 한국에 있었다는 언론보도를 거론했다. 

 


미국 심리학자인 제프리 카이는 26일(현지시간) 진보성향의 온라인 블로그인 '디센터'에 영국의 유명 생화학자였던 조지프 니덤이 1952년 주도적으로 작성한 '한국과 중국에서의 세균전에 관한 국제과학위원회의 사실조사 보고서' 원문을 공개했다. (온라인 블로그 디센터(http://dissenter.firedoglake.com/) 제공)



보고서는 "일본에 있던 미 군정이 그의 활동을 조장했는지, 또 미군 극동사령부가 실질적으로 일본식인 세균전 기술을 사용하는데 관여했는지가 조사위원들의 마음에 의문으로 남아있다"고 밝혔다.

보고서는 또 '한국에서의 사고(전염병)' 부분에서 "위원회로서는 모든 관련 사실을 종합해볼 때 미 공군이 일본이 2차대전 당시 전염병을 확산시키는데 이용한 것과 유사한 세균전 기술을 한국에서 사용했다는 결론을 내리지 않을 수 없다"고 주장했다.

보고서에는 세균전을 어떻게 구사할 것인가에 대한 미군 조종사 전쟁포로들의 브리핑을 받았다는 진술들이 포함돼있다고 이 학자는 밝혔다. 그러나 미국 중앙정보국(CIA)은 적군에 의한 고문과 '세뇌'로 인해 허위진술을 한 것이라고 밝히고 있다고 그는 전했다.


“미군, 한국전쟁 때 생물 무기 썼다”


프랑스 월간 신문 폭로…‘중국군 참전 후 박테리아 살포’설 제기
‘중국은 52년 미국이 한국전쟁에서 생물 병기를 사용했다고 유엔에 제소했다. 그러나 이런 주장을 확실하게 뒷받침할 증거는 나오지 않았다.’ 세계적인 권위를 인정받고 있는 영국 백과사전 <브리태니카>의 ‘생물학 무기’ 항목에 들어 있는 구절이다. 그런데 파리에서 발행되는 월간 신문 <르몽드 디플로마틱>은 올 7월호에서 이를 정면으로 부정하는 글을 실었다. 요지는 미국이 한국전쟁을 생물 병기의 실험 무대로 삼았을 뿐 아니라 영국과 캐나다도 여기에 가담했다는 것이다.

캐나다 요크 대학에서 아시아 역사와 군사 사학을 연구하고 있는, 이 글의 공동 저자 엔디코트와 하거만 교수는 지금껏 공개되지 않았던 자료, 예를 들어 미국의 생물전 자료를 보관한 미군 사료실, 중국이 외국인에게는 개방하지 않았던 중국군 문서실, 또 캐나다 중앙사료실 등에서 이같은 결론을 뒷받침하는 자료를 찾아냈다고 한다. 두 교수는 이 분석 결과를 정리해 올해 초 <미국과 생물 전쟁: 한반도와 냉전 초기의 비밀>이라는 책을 펴냈는데, 그 요지를 <르몽드 디플로마틱>에 다시 소개한 것이다.

<르몽드 디플로마틱>은 20여 쪽 밖에 안되는 신문이다. 그러나 국제 문제를 집중 분석하는 이 신문은 말 그대로 ‘글로벌 시대’를 실감케 한다. 그도 그럴 것이 프랑스어말고도 독일어· 스페인어·그리스어·이탈리아어 등 유럽의 5개 국어와 아랍어로 번역되어 70만부나 발간되기 때문이다. 또 영어·일어 판은 인터넷을 통해 구독해 볼 수 있다. 따라서 이번 호를 통해 그동안 가려졌던 한국전쟁의 단면이 다시금 국제적으로 알려지게 된 셈이다.

“마셜 국방장관, 박테리아 무기 개발 계획 주도”

미국 정부는 한국전쟁에서 미국이 생물 병기를 사용했다는 설을 지금껏 일관되게 부인해 왔다. 중국의 요구에 따라 52년에 구성된 국제조사단이 생물 병기 사용 가능성을 확인했을 때도 미국은 그 결과를 인정하지 않았다. 미국은 생물전의 증거로 제시된 자료들이 하나같이 조작된 것이라고 반박했다. 그리고 미국 내에는 이같은 정부 입장에 동의하는 학자층도 두터웠다. 지난해 우드로 윌슨 연구소가 펴낸 <국제 냉전사>는 미국의 생물 병기 사용설이 ‘철저하게 조작된 정보’에 근거하고 있음을 입증하는 자료로 인용되고 있기도 하다. 그러면 캐나다의 두 교수가 소개한 생물 전쟁의 비밀은 과연 무엇인가. 그들의 분석에 따르면, 한국전쟁 중에 생물 병기 사용 계획의 첫 테이프를 끊은 인물은 조지 마셜 당시 미국 국방장관이다. 그는 50년 10월27일 박테리아 무기 개발 계획을 세웠는데, 이는 중국 의용군이 한국전쟁에 참전하고 나서 2주일 만에 내린 결정이었다. 그 후 51년 12월21일 마셜의 후임으로 부임한 로버트 로베트 국방장관은 참모들에게 박테리아 무기를 실전에 투입할 준비를 서두르라고 재촉했다. 이에 따라 참모부는 52년 2월2일, ‘지금까지 실전에 사용되지 않은 강력한 공격 무기를 개발한다’는 방침을 확정했다. 참모부는 미국 정부가 핵무기를 사용한 전례에 따라 박테리아 전쟁도 비밀리에 준비해야 하며 무기를 실전에 투입하는 데는 대통령의 승인이 필요하다는 조건을 덧붙였다. 그렇다면 지금까지 박테리아를 공격 무기로 사용하는 전략이 없었다는 미국 정부의 주장은 설득력을 잃게 된다.

그러면 미국은 한국전쟁에서 어떤 생물 병기를 사용했을까? 두 교수의 분석에 따르면, 주로 미국 공군의 하청을 받은 연구진과 군수 업체들은 콜레라·이질·티푸스 등 전염병과 농작물 오염을 확대하는 박테리아를 개발했고 여기에 캐나다와 영국도 3자 협정을 맺고 참여했다. 캐나다는 박테리아를 옮기는 곤충과 이 곤충을 살포하는 방법을 연구했다. 또 심리전용으로 살포하는 전단에 유독성 포자(胞子)를 묻혀서 일종의 ‘분사 폭탄’으로 사용한다는 계획도 있었다. 박테리아 무기는 52년 3월부터 전투 부대나 병참 지원 차원에서 사용되었는데, 핵무기와 생물 무기를 동시에 사용하는 작전 연구가 이 무렵 끝났다.

미국이 실제로 생물 병기를 사용했는지 오랫동안 판단을 유보하던 중국은 52년 2월에야 확신을 갖게 되었는데, 이는 중국 의용군에 속해 있던 조선족 의사들이 제시한 자료에 따른 것이라고 한다. 그 후 중국 과학자들이 확인한 사실은 무엇보다도 그 지역에서 보기 힘든 해충이 미국 공군의 항로에서 집중적으로 발견되고 그동안 나타나지 않았던 전염병이 발생했다는 것이다. 특히 중국 북동부에서 간헐적으로 발생한 전염병은 한반도에서는 오래 전에 근절된 것이었다, 예를 들어 콜레라는 12년에, 페스트는 46년에 근절된 것으로 기록되어 있었다. 52년 3월 한달 내내 북한과의 국경 지역에서 뇌염이 유행한 것도 이같은 사례에 속한다. 중국 북동부에서 뇌염은 보기 힘든 전염병이 아니었다. 그러나 이때 유행한 뇌염은 해충이 전염시켰던 과거의 중국 뇌염과 달리 호흡기를 통해 전염된 것으로 추정되었다. 이런 사실은 중국에서 유행한 전염병이 미국에서 집중 연구한 대상이었을 뿐만 아니라 미국 공군이 에어러졸을 살포해 호흡기를 통한 감염을 실험했다는 사실과도 맥이 통한다.

“한국을 생물 병기 실험장으로 활용”

또 중국에서 발견된 추위에 견디는 해충(절족 동물)도 미국의 생물 병기 가운데 하나로 지적되었다. 미국은 한국전쟁이 끝날 때까지 이런 종류의 해충을 생물 무기로 연구하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새로 공개된 자료에 따르면 그 발언을 한 옌킨스 박사가 한국전쟁 당시 캐나다 정부 연구소에서 중국에서 발견된 것과 같은 종류의 해충을 연구한 것으로 드러났다. 미국의 생물전 실시에 대해 국제적인 의혹이 일 때 미국 정부는 중국에서 발견된 전염병이 일본이 개발한 생물 병기와 관련이 있다고 반박했다. 실제로 일본은 2차 세계대전에서 생물 병기를 개발하고 중국 포로를 생체 실험 대상으로 사용한 악명 높은 731부대를 거느리고 있었다. 이 부대가 세계에 알려진 것은 49년 소련 하바로프스크에서 열린 전범 재판을 통해서였다. 그런데 731 부대 책임자들은 전쟁 범죄를 사면받는 조건으로 미국에 정보를 넘기고 미국의 생물 병기 연구에 합류했다. 미국은 요코하마·교토에 있는 일본의 생물 병기 연구 시설도 고스란히 접수했다. 이 사실이 80년에 알려지자 미국은 또 다른 방어 논리를 폈다. 생물 무기 개발 분야에서 일본으로부터 그다지 얻은 바가 없어 일본과는 다른 방법을 모색했으며, 이 연구는 한국전쟁이 끝나고 나서 시작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트루먼 대통령은 53년에 남긴 편지에서 ‘태평양 전쟁이 45년 8월에 끝나지 않았다면 미국은 생물·화학 무기를 사용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는 미국의 생물 병기 개발이 한국전쟁과는 무관하게 시작되었음을 입증하는 기록이다. 엔디코트와 하거만 두 교수가 내린 결론은, 생물 병기 전쟁이 미국의 군사 전략에서 뗄 수 없는 부분이고, 한국전쟁은 그 실험 무대였다는 것이다.

실제로 미국은 40년대 초부터 생화학 무기뿐만 아니라 핵무기 개발에 필요한 연구를 하고 있었고, 그 방법의 하나로 미국 내에서도 ‘생체 실험’을 진행하고 있었다. 예를 들어 미국 국방부와 에너지부의 위탁을 받은 과학자들은 플루토늄과 같은 독성 방사능 물질을 민간인들에게 주사했다. 미국의 핵무기개발계획 (맨해튼 계획)에 참가한 과학자들은 핵전쟁에 대비해 방사능의 부작용을 파악한다는 목적으로 걸인·중환자·정신병 환자들을 생체 실험 대상으로 삼았다. 미국의 대학은 국방부의 자금 지원을 받아 암환자들에게 방사능 실험을 했다. 또 에너지부는 죄수들의 고환에 방사능을 쬐는 실험을 했다. 이런 생체 실험은 하버드·캘리포니아 등 유명 대학의 연구진들에 의해 70년대까지 진행되었다. 생물 병기를 개발한다는 명목으로 민간 주거지나 공항·지하철에 박테리아를 살포하는 실험도 있었다.

미국, 국내에서도 민간인 대상으로 생체 실험

이런 사실이 93년 11월 미국의 일간지를 통해 알려지고 미국 의회가 조사 작업에 나섰을 때 클린턴 대통령은 각 부처에 생체 실험을 지시했거나 자금을 댄 사례를 찾아 보고하도록 지시했다. 그 결과 에너지부는 48~52년 방사능 가스를 주거지에 살포한 것으로 드러났다. 또 50년대부터 수천 명에게 마약과 환각제를 복용시킨 중앙정보국(CIA)이 73년에 관련 문서를 파기한 사실도 있다. 당시 에너지장관은 기자회견에서 “어째서 미국에서 이런 일이 가능했는가? 이런 생체 실험을 하는 인간들은 도대체 어떤 인간들인가? 나는 독일 나치스를 떠올릴 수 밖에 없다”라고 말했다.나치의 생체 실험은 특정 민족을 말살하는 정책과 연결되어 있다. 따라서 미국의 생체 실험은 나치의 생체 실험과는 분명히 차원이 다르다. 그러나 무언가 목적을 위한 수단으로 ‘질이 떨어지는 인간’을 골라 본인 모르게 실험했다는 점에서는 다르지 않다.

방사능에 아무런 위험성이 없는 것으로 알고 있었다면 왜 사회적인 약자들만 골라 실험한 것일까? 또 방사능의 위험성을 몰랐다면 더더욱 실험을 하지 말았어야 한다. 그런데 그 위험성이 알려진 70년대까지도 생체 실험이 지속된 이유는 무엇일까? 또 미국 정부는 93년, 생체 실험 사례를 마지 못해 인정할 때까지 피해 보상을 거부할 목적으로 변호사 비용으로만 5천만 달러를 쏟아붓기도 했다.

미국의 원폭 실험은 생체 실험의 또 다른 측면을 보여준다. 에너지장관은 기자회견에서 미국이 90년까지 2백4회에 걸쳐 몰래 핵무기 실험을 했다고 공개했다. 미국은 태평양에서 핵실험을 하고 나면 주민들의 신체 검진을 빠뜨리지 않았다. 이 때가 방사능의 ‘효과’를 측정하는 절호의 기회였기 때문인데, 에너지부 문서에는 ‘방사능 오염도가 최고도에 이른 지역의 주민들은 실험용 쥐보다 쓸모가 많았다’고 적혀 있다.

미국 내에서 생체 실험의 실체가 드러나기 시작하고 미국 정부가 그 사실을 마지 못해 인정하자 미국 언론이 보인 반응 또한 볼 만했다. 이들은 ‘충격과 동시에 안도감’을 느낀다고 했다. 정부 스스로 비밀을 털어놓은 것은 냉전이 실제로 끝났음을 알리는 징조로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겉으로 ‘진실 보도’ ‘탐사 보도’를 구호로 내건 그들은 80년대 초에 생체 실험 문제가 처음으로 여론화할 때 침묵하고 있었다. 현 미국 부통령 앨 고어는 81년에 방사능 실험 피해를 다루는 의회 청문회에서 의장을 맡았지만 피해자들에게는 아무런 성과도 주지 못했다. 언론과 정계 모두 레이건 시대의 신냉전 조류에 역행하기를 포기했던 것이다.

한국전쟁에서 미국의 생물 병기 실험설을 부정하는 측은 아직도 그것이 충분한 증거를 갖고 있지 않다고 본다. 이들은 캐나다의 두 교수가 정해진 결론을 갖고 이 결론을 합리화할 생각에 빠져 있었기 때문에 중국측의 정보가 사실인지 의심해 보지도 않았다고 비난한다. 그런데 앞에서 살펴본 미국 국내의 생체 실험을 이들은 어떻게 해석할까. ‘평화시’에 국내의 약자를 생체 실험 대상으로 삼는 권력이 전쟁시에 국외의 인종을 실험 대상으로 삼지 않았다면 그것이 오히려 이상한 일이 아닐까?

출처 : 시사저널 http://www.sisajournal.com/news/articleView.html?idxno=8756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