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관은 헌법과 법률에 의하여 그 양심에 따라 독립하여 심판한다. (대한민국 헌법 103조)
선서서에는 「양심에 따라 숨김과 보탬이 없이 사실 그대로 말하고 만일 거짓말이 있으면 위증의 벌을 받기로 맹세합니다」라고 기재하여야 한다. (형사소송법 157조 2항)
양심에 따라 재판 업무를 수행하는 판사들. 최근 또 다른 이유로 양심을 갖춰야 하는 일이 생겼습니다. "숨김과 보탬이 없이 사실 그대로" 말해야 할, '증인'으로서의 양심이 필요해졌습니다. 이른바 '사법농단' 사건 재판에 최대 100명이 넘는 판사들이 증인으로 나오게 됐기 때문입니다. 법대에서 이젠 증언대로 내려와 양심을 발휘해야 하는 판사들. 이 이례적인 법정에서 나온 '양심적 증언'과, 대화의 요모조모를 기록해 둡니다.
스물 두 번째 순서로, '사법농단' 사건 공범으로 기소된 이민걸 전 법원행정처 기획조정실장(사법연수원 17기·現 대구고등법원 부장판사)의 재판에 2020년 2월 20일 증인으로 출석한 나상훈 수원지법 부장판사(사법연수원 31기·前 서울서부지법 기획법관 및 공보관)의 증언을 살펴봅니다.
나 부장판사는 '사법농단' 사건의 공소장 곳곳에 등장하는 인물입니다. 그는 2013년 2월부터 2년 동안 법원행정처 기획조정실에서 기획1·2심의관으로 근무했습니다. 당시 그의 직속 상관인 기획조정실장이, 바로 사법농단 사건의 핵심 인물인 임종헌 전 법원행정처 차장이었습니다. 임 전 차장은 기조실장 시절 나 판사에게 특정 판사의 성향을 파악해보라거나, 대한변호사협회에 대한 압박 방안을 검토해 보고하라고 지시한 것으로 조사됐습니다.
2년 간의 행정처 근무를 마친 이후 나 판사는 2015년 2월 서울서부지법으로 발령이 났고, 이듬해인 2016년 2월부터 1년 동안 이곳에서 '기획법관' 및 '공보관'으로 일했습니다. 재판을 주업무로 하는 대부분 판사와 달리, 법원장과 수석부장판사를 보좌해 국정감사나 법원의 각종 행사 등을 준비하고, 법원 출입기자단과 소통하는 사법행정 업무를 맡았던 것인데요. 이 시기에 나 판사가 했던 일을 문제 삼아, 지난해 5월 김명수 대법원장은 나 판사에 대해 징계를 청구했습니다. 당시 나 판사를 포함해 '사법농단'에 연루된 판사 10명이 대법원 법관징계위원회에 회부됐고, 징계위의 판단은 2020년 3월 현재 아직 나오지 않은 상태입니다.
#1. 실장님을 위한 '취재'
증인이 서울서부지법 기획법관·공보관 시절 대체 무슨 일을 했길래, 대법원장은 징계가 필요하다고 판단한 걸까요?
이야기는 2016년 당시 박선숙, 김수민 국회의원이 연루됐던 이른바 국민의당 '리베이트' 의혹 사건에서 시작됩니다. 현직 의원 두 사람에게 검찰이 두 번이나 구속영장을 청구해 언론의 큰 관심을 받았지만 영장은 모두 기각됐고, 결국 3년 뒤 법원에서 무죄가 확정된 그 사건인데요. 증인이 근무하던 서울서부지법에서는 2016년 8월 31일 첫 재판을 시작으로 리베이트 의혹 사건에 대한 1심 재판이 진행됐습니다.
증인은 검찰이 영장심사를 위해 법원에 낸 김수민, 박선숙 의원의 구속영장청구서를 확보해 법원행정처에 이메일로 보내주는 등, 이미 검찰 수사단계부터 윗선에 이 사건을 열심히 보고해 왔습니다.
- 검사: 증인이 이처럼 박선숙, 김수민 의원에 대한 검찰의 구속영장청구서와 기각 사유를 행정처에 송부한 이유는 무엇인가요?
- 증인: 각급 법원의 기획법관은 사회적 이목이 집중되는 중요한 사건이나, 법원의 신뢰에 영향을 미치는 사건이나, 언론이 관심을 가지고 있을 만한 사안에 대해서는 보고를 하도록 교육을 받았습니다. (후략)
증인은 또 "당연히 행정처에서 (국민의당 관련 사건에)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있을 거라 생각해 (영장청구서를) 보내주게 됐다"고도 설명하면서, 보고 행위의 근거로 법원 내부 예규(중요사건의 접수와 종국 보고)를 들기도 했는데요. 법원행정처는 '사법농단' 사건이 드러난 이후인 2018년 9월, 이 예규를 대폭 정비하고 구속영장심사 결과 등 중요 사건에 대한 접수·종국 보고, 긴급 보고를 각급 법원에서 더이상 받지 않겠다고 밝혔습니다.
이 사건의 재판이 진행 중이던 2016년 10월 25일경. 증인은 법원행정처의 한 간부에게 걸려온 전화를 받았습니다. 임종헌 전 차장에 이어 행정처 기조실장을 맡았던 이민걸 실장었습니다. 이 실장이 당시 어떤 지시를 했냐는 검사의 질문에, 증인은 이렇게 답했습니다.
- 증인: 국민의당 사건이 어떻게 진행되고 있는지, 주심 판사로부터 들은 것이 있느냐고 해서 제가 들은 게 없다고 말씀을 드렸고.[…] 제 기억으로는 제가 알아보고 보고를 드리겠다고 말씀을 드렸고, 그 이후에 (왕주현 당시 국민의당 사무부총장의) 보석은 어떻게 될 것 같냐고 물어보셔서 알아보고 보고드리겠다 하고 전화를 끊었던 기억이 있습니다.
증인은 이 실장이 이같은 지시를 한 이유에 대해 "국민의당 쪽에서 많이 물어보시나보다"라고 추측했다면서 "기조실장이라는 자리가 아무래도 대국회 업무를 책임지는 자리이기 때문에, 국회의원 상대하실 일이 많이 있다" "그런 상황에서 국민의당에서 궁금해하는 것이 아닐까,
그냥 조심스럽게 추측만 해봤다"고 증언했습니다.
증인은 이후 이 실장에게 다음과 같은 이메일을 보냅니다.
증인이 사건의 주심 판사를 직접 찾아가 '취재'한 결과물이라는 건데, "보석은 허용할 생각이 없다고 합니다"라는 문장이 단연 눈에 들어옵니다. 판사가 사건에 대한 중요한 심증을 제3자에게 단정적으로 말해준 것처럼 보이기 때문입니다. 증인은 자신의 의견이 섞여 있는 문장이라고 설명했습니다.
- 증인: (주심인) 유○○ 판사님은 "보석에 대해 특별히 검토하는 바가 없다"고 말한 걸로 기억하고, "보석을 허용할 생각이 없다"라는 내용은 좀더 센 워딩인데, 그 부분은 제 개인적 의견이 들어가 있는 내용입니다.
증인은 "구속영장이 발부된 이후 특별한 사정 변경이 없으면 일반적으로 보석 가능성은 극히 낮다고 생각하고 있었다"면서 '(실장님이) 보석에 대해서는 왜 궁금해하실까, 가능성이 없는데'라는 생각을 했다고도 말했습니다. 그래도 답변은 해야 하니 주심 판사에게 추후 재판기일을 물어보면서 "지나가듯이" 보석에 대해서도 물어봤다고 증언했습니다.
#2. '취재 기법' 고심…입단속까지
증인의 취재 활동은 여기에 그치지 않았습니다. 한 달여 뒤, 증인은 이 실장에게 또다시 아래와 같은 이메일을 보냈습니다.
첫 메일보다 더 내용이 구체적인데요, 이런 보고를 하게 된 경위를 증인은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 증인: 2016년 11월 28일 오전 경에 전화를 하셔서... "국민의당 사건 관련해서 변경된 진행상황이 있느냐" 이렇게 여쭤보셨던 것으로 기억을 하고. 그래서 제가 그 부분은 체크 안 하고 있었기 때문에 없다고 말씀드리고, 바로 확인해서 보고 드리겠다고 말씀 드렸던 걸로 기억합니다. 그리고... 그리고 "국민의당 사건이 어떻게 될 것 같냐"고 물어보셨던 것으로 기억하고, 그것도 제가 확인해서 말씀드리겠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증인은 이민걸 실장이 '명시적으로' 주심 판사의 유·무죄 심증을 확인해달라고 한 것은 아니라면서도, 보석 관련 사항을 주심 판사에게 확인해 보고했는데 추가로 '국민의당 사건이 어떻게 될 것 같냐'고 하는 걸로 봐서 결국 '사건의 결론이 어떻게 될 것 같냐'를 묻는 것으로 생각했다고 증언했습니다.
사건에 대한 심리가 이미 후반부에 접어든 시점에서, 주심 판사에게 유·무죄 심증을 물어보는 것은 상당히 어려운 취재였던 것 같습니다.
- 증인: 이민걸 실장님 전화를 받고 상당히 고민을 많이 했던 것은 사실입니다. 이 부분은 묻지 않고 제가 모르는 것처럼 답변을 할까. 아니면 주심 판사님께 여쭤보러 가야 하나. 뭐 어떻게 여쭤봐야 되나. 심증에 대해서는 어떻게 확인할 수 있는 마땅한 말도 생각나지도 않고... 여러 가지 조심스러운 부분이 있어서 걱정과 고민을 좀 많이 했습니다. 근데 마찬가지로, 저도 '물어보는 모양새는 갖춰야 된다'. 뭐 적절한 말인지는 모르겠습니다만은 모양새는 갖춰야 된다고 생각을 해서, 고민 끝에 주심판사님께 가서 변경된 절차에 대해 여쭤봤고 […] 고심 끝에 선고기일에 대한 얘기가 나오면서, 그 끝에 지나가는 말로 조심스럽게 "어떻게 될 거 같냐"라는 정도로 물어보게 됐습니다.
어쨌든 취재는 '성공'했습니다.
- 검사: 그 질문을 받고 유○○ 판사의 반응은 어떠했나요?
- 증인: 유○○ 판사님도 조금 약간 의아한 표정을 지었던 것으로 기억을 하고, 그런 표정을 잠깐 지었던 것이고.. 그 다음에 메일에 적혀 있는 내용(피고인 측 변명이 완전히 터무니 없어 보이는 것은 아니라는 점, 만약 유죄로 인정된다면 의원직을 유지하기는어렵지 않을까 싶다는 점)으로 말씀을 해주셨습니다.
임무를 완수한 뒤에는 '취재원 입단속'도 잊지 않았습니다.
- 검사: 증인은 […] 답변을 들은 뒤 "재판장님께 (이 일을) 말씀드리지 마세요"라고 말한 사실이 있나요?
- 증인: 그게 첫 번째 여쭤봤을 때인지 두 번째 여쭤봤을 때인지는 잘 기억은 안나는데, 그런 말씀을 드린 것은 맞습니다.
- 검사: 그렇게 말한 이유는 무엇인가요?
- 증인: 굳이 그런 내용을, 재판을 주재하시는 재판장님께 (그런 얘기가) 굳이 들어가서... 좋을 것은 없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오히려 재판 진행하시는 데 뭐 불쾌감이라든지.. 이런 걸 드릴 수도 있기 때문에, 그런 말씀은 드리지 말아달라는 취지로 말씀드렸습니다.
#3. 부적절함은 인정…"내치기 쉽지 않았다"
증인은 이처럼 일선 재판부의 심증을 확인하는 일종의 '취재' 활동에 대해, "적절하지 않은 부분이 있다는 점은 인식하고 있었다"고 증언했습니다. 특히 유·무죄에 대한 심증을 알아보는 것은 "그야말로 너무나 부적절한 일"이라고 생각했다고도 말했습니다. 검사의 추궁이 바로 이어졌습니다.
- 검사: 그런데도 증인은 재판부의 보석 허가 여부에 대한 심증을 확인해서 보고해 달라는 취지의 피고인 이민걸의 지시를 거부하지 않은 이유는 무엇인가요?
- 증인: [10초 정도 뜸들이다] 이민걸 실장님은 제가 행정처 기획조정실에 근무할 당시에, 사법정책실장님으로 근무를 하고 계셨습니다. 그리고 그때 직무상 관계를 맺어서 잘 알고 있는 분이였고. 저때 당시에는 기획조정실장님으로서, 각급 법원의 기획법관·공보관에 대해서 여러 지시나 감독을 할 수 있는 그런 부분이 있어서, 마냥 그 지시를 거부할 수는 없는 그런 입장이기는 했습니다.
- 검사: 다시 한번 물으면, 그럼 피고인 이민걸이 기획법관들을 업무적으로 감독하는 역할을 했고, 그렇기 때문에 증인이 부적절한 지시임에도 거부할 수 없었다, 이런 취지로 증언하는 건가요?
- 증인: [5초 정도 침묵] '기획법관을 감독할 권한'이라는 말이 조금 적절치는 않은 거 같고요. 평소에 기획법관·공보관 업무 관련해서는 각급 법원의 기획법관이 기획조정실의 기획조정심의관에게 중요한 사안에 대해서는 보고를 하도록 돼 있기 때문에. 그런 관계를 고려해서, 마냥 그 자리에서 요청을 내치기에는 쉽지는 않았습니다.
증인은 당시 자신의 행위를 두고, "면피" "맞을 매는 빨리 맞는 게 낫다"는 표현을 쓰기도 했습니다.
- 증인: 저도 이민걸 실장님의 지시를 받고 그것이 적절한 지시라고 생각하지는 않았고 부적절하다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최대한 조심스럽게 면피하자라는 차원에서, 사건의 전망에 대해서 여쭤보게 됐습니다.
- 좌배석 판사: 증인께서 피고인으로부터 전화를 받은 이후, 유○○ 판사에게 찾아가 확인하는 데까지 걸린 시간이 얼마 정도나 될까요?
- 증인: 어.... [뜸들이다가] 반나절씩 고민하고 이랬던 거 같진 않고요. 고민도 하면서 생각도 정리하고... 아까 말씀드렸던 그런 여러 생각들이 복잡하게 들면서... 근데, 어차피 맞을 매는 빨리 맞는 게 낫다고 생각을 해서 상대적으로 오래 시간이 걸리진 않았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여기까지의 내용을 놓고 보면, 증인이 이민걸 실장의 지시를 받고 일선 재판부의 심증을 확인했다는 공소사실은 증인의 증언과 상당 부분 일치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이에 대해 변호인 측은 가상의 시나리오까지 구상하면서 적극적인 탄핵에 나섰습니다.
증인을 여러 차례 당황하게 했던 변호인의 반대신문 내용은 다음 기사에서 살펴보겠습니다.
https://news.v.daum.net/v/20200323070305346
연재 보러가기
https://media.daum.net/series/16425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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