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출신 많던 오사카, '한신교육투쟁' 더 번질까 우려한 미국
▲ 제주4.3을 그린 독립영화 <지슬>의 한 장면. |
1948년 제주 4.3항쟁은 1947년 3.1절 기념식 때 발생한 어린이 부상 사고에 대한 항의 투쟁에서 시작했지만, 나중에는 미국의 분단정책에 대한 민족주의 투쟁으로 발전했다. 3.1절 기념식장에서 기마경찰의 말이 아이를 걷어찼는데도 경찰이 후속 조치를 하기는커녕 항의하는 시민들한테 도리어 무차별 사격을 가한 데서 발단한 이 사건은 초기에는 항의 시위와 민·관 총파업의 양상을 보였다.
그러다가 미군정청의 토벌대 파견과 유엔 소총회의 '남한 단독선거 결의'를 계기로 이 사건은 분단 반대 투쟁의 성격을 띠게 됐다. 1948년 4월 3일 새벽 2시를 기해 제주도민 350명이 경찰서 및 토벌대 숙소를 공격하면서, 이 사건은 어떻게 보면 한민족 대 미국의 대결이 되는 방향으로 번져갔다.
미국 및 이승만 정권과의 대결에서 제주도는 패했다. 희생자 규모도 상당했다. 정부에서 공식 인정한 숫자는 1만 4000명 정도이지만, 실제는 3만 정도라는 게 정설이다. 희생자 중 상당수를 차지한 여성들이 일반적인 살상에 더해 치욕적인 수모까지 당했기 때문에, 불명예나 보복이 두려워 피해 사실을 숨기는 집안들이 많았다. 살아남기 위해 토벌대원을 사위로 맞이한 집안에서는 더욱 더 그럴 수밖에 없었다.
실제 희생자가 3만 정도라고 한다면, 1948년에 제주 인구가 25만이었으므로 도민의 10% 이상이 세계제국 미국에 의해 희생됐다는 의미가 된다. 민족 분단을 막기 위해 한 지역 주민의 10% 이상이 희생됐다는 것은, 분단의 땅을 딛고 있는 한민족의 발끝을 찌릿하게 만드는 일이 아닐 수 없다.
미국을 긴장시킨 한신교육투쟁
미국은 제주와의 싸움에서 승리했지만, 그것은 마음 편한 승리가 아니었다. 이 섬의 반(反)미국·반제국주의 투쟁은 미국 당국자들을 크게 긴장시킬 만했다. 이 점은 그들이 이북 출신인 서북청년단까지 파견해 잔혹한 살상을 부추긴 사실은 물론이고 이 시기에 일본에서 벌인 또 다른 사건에서도 명확히 표출된다.
해방 직후, 일본에 사는 재일한국인들은 조선인학교라는 민족학교를 통해 한국인 어린이들에게 한국어 및 한국사를 가르쳤다. 이런 학교가 1946년에 500여 곳, 학생 숫자도 6만 명이나 됐다. 1945년 10월 15일 출범한 재일본조선인연맹이 이 사업을 주도했다.
그런데 제동을 걸고 나선 곳이 있다. 1945년 10월 2일부터 1952년 4월 28일(샌프란시스코강화조약 발효일)까지 일본에서 군정 통치를 실시한 연합국최고사령부(GHQ 또는 SCAP)가 바로 그곳이다. 2008년에 <한일민족문제연구> 제15권에 실린 김인덕 성균관대 동아시아역사연구소 연구교수의 논문 '1948년 한신 교육투쟁과 재일조선인 역사교육'은 GHQ의 조치를 이렇게 설명한다.
"GHQ는 1947년 10월 재일조선인 학교도 일본 문부성의 지시를 받도록 했다. 즉 GHQ는 '조선인 모든 학교는 정규 교과(의) 추가 과목으로 조선어를 가르치는 것을 허락하는 예외를 인정하는 것 외에는 일본의 모든 지시를 따르도록 일본 정부에 지령한다'고 했다. 민족교육에 대한 본질적인 탄압의 시작이라고 보여지는 GHQ의 이러한 지시는 조선어를 정규 과목으로 하지 않고 추가 과목으로 즉 과외로 가르친다면 조선인 학교를 예외로 인정한다는 내용이었다."
GHQ의 지령은 문부성이 조선인학교를 탄압하는 명분이 됐다. 일본 정부의 후속 조치는 이랬다.
"일본 정부는 재일조선인 자녀의 경우 법적 기준에 합당한 학교에 취학할 것을 고지했다. 아울러, 교사는 일본 정부가 정한 기준에 합당한 사람만이 강의하도록 했다. 그리고 일본인 학교 건물을 빌려쓴 조선인학교의 철수와, 교과 내용은 학교교육법에 따라 모두 일본어로 교육하고, 조선어는 과외로 학습할 수 있다고 규정했다."
GHQ와 문부성의 조치에 따라 조선인학교들이 운명의 기로에 놓이자, 재일한국인들은 1948년 3월부터 대규모 항의투쟁을 전개했다. 민족학교 폐쇄를 막기 위한 이 투쟁은 오사카(大阪) 및 고베(神戶) 등지에서 가장 인상적으로 일어났다. 그래서 '한신(阪神) 교육투쟁'이라 불린다.
연인원 103만이 참가한 이 시위에는 3만 명 이상이 참여한 경우도 있고, 참가자 1만을 진압하려고 경찰 병력이 8000명이나 동원된 경우도 있었다. 이로 인해 소년 김태일 같은 희생자도 나오고 150명의 부상자도 나왔다. 체포된 한국인은 3076명, 그중에서 재판에 넘겨진 사람은 212명이다. 해방 3년 뒤에 한국인들이 일본에서 이처럼 대규모 투쟁을 전개했던 것이다.
이 사건은 일본인들뿐 아니라 미군정 당국에도 충격을 줬다. 이 점은 1948년 4월 24일 밤에 미군이 취한 조치에서 상징적으로 드러난다.
이날, 고베시와 고베시가 속한 효고현은 시위대의 위세에 눌려 학교폐쇄 명령을 철회했다. 그런데 그날 밤 계엄령이 발포되고 비상사태가 선포됐다. 미군이 일본 지방관청의 조치를 뒤엎은 것이다. 이에 따라 미군과 일본 경찰이 효고현과 고베시의 조치를 뒤집고 한국인들에 대한 무차별 검거에 나서게 됐다.
비상사태 선포를 통해 군부대가 상황 진압에 나섰다는 것은 미군정이 사태를 직접 챙겼음을 의미한다. 1945년 패망으로 일본군이 해체된 상태였다. 그런 상황에서 계엄령이 선포됐다는 것은 미군이 직접 나섰음을 뜻한다. 한신 교육투쟁에 대한 미국의 경계심을 보여주기에 충분하다.
위 논문은 "GHQ에 의해 고베 일대에는 일본 최초의 비상사태가 선포되었다"며 "이 비상사태는 미군의 일본 점령기간 동안 유일한 일이었다"고 말한다. 1945년에 세계 최강으로 등극하고 최전성기를 누리던 당시의 미국을 긴장시킬 만한 요소가 한신 교육투쟁에 내재돼 있었음을 보여주는 증표다.
'작은 제주'로 불렸던 오사카
1948년 시점에서 미국이 오사카 및 고베 지역 한국인들의 동태에 이처럼 민감할 수밖에 없었던 사정이 있다. 그것은 오사카 지역에 제주도 사람들이 특히 많이 살고 있었던 점과 무관치 않다. 1922년에 제주도-오사카 정기 항로가 열린 이래로 제주도 사람들의 오사카 이민이 활발해진 결과라고 말할 수 있다.
▲ 제주도와 오사카. 구글 지도에 약간의 편집을 가한 그림이다. | |
ⓒ 구글 지도 |
제주4.3연구소가 2001년 발행한 <4.3과 역사> 창간호에 실린 문경수 리츠메이칸대 교수의 논문 '4.3사건과 재일한국인'은 "재일 한국인의 출신지는 전국적으로 경상남도가 가장 많은데, 오사카에서는 제주도 출신자의 비율이 가장 높다"고 한 뒤 "재일 제주인은 1만여 명에서 5만여 명으로 불어나 33년에는 제주도 인구의 4분의 1이 일본에 있게 되는 사태에 이른다"고 말한다.
제주도 인구의 상당 부분이 오사카로 이민을 갔고 그중 상당수가 오사카 이쿠노구(區)의 코리아타운에 거주했기 때문에 이쿠노구는 '작은 제주'로 불리기까지 했다. 제주도인들의 오사카 이민은 4.3항쟁을 계기로 한층 격증했다. 미군정과 이승만 정권의 탄압을 피해 이곳으로 밀항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오사카 코리아타운을 집중 취재한 이시바시 히데아키 <아사히신문> 기자는 2018년에 <4.3과 역사> 제18호에 기고한 '어느 일본인 기자와 제주 4.3사건 - 20년 전의 취재 경험을 중심으로'에서 "제주도에서 4.3의 혼란을 피해 고향 사람이나 친족에 의지해서 밀입국으로 오사카에 들어온 사람이 수천 명 이상 있었다고 한다"면서 "오사카에 사는 제주 사람에게 4.3은 바로 자신들이 연관된 사건이며, 털어놓기에는 너무나 고통스러운 기억이었다"고 말한다.
논문에 적힌 이시바시 기자의 취재 경험을 듣다 보면, 오사카에 가서 4.3을 언급하는 일은 신중해야겠다는 느낌이 들 정도다. 논문에 인용된 이시바시의 1998년 8월 13일자 기사에 따르면, 4.3사건 당시 19세 나이로 1년여를 숨어 지내다가 밀항선을 타고 오사카에 잠입한 시인 김시종은 "탈출 직전 마지막으로 만난 아버지는 어머니가 볶은 콩을 굳혀 채운 도시락통을 주며 '너는 살아야 한다'라고 말했다"며 그때를 회고했다고 한다.
냉전 체제 굳히려던 미국의 '걸림돌'
위 문경수 논문에서는 제주도인들의 오사카 이민을 설명하다가 "33년에는 제주도 인구의 4분의 1이 일본에 있게 되는 사태에 이른다"는 표현을 썼다. 한국어에 덜 익숙한 재일한국인이라서 '상황'이 아닌 '사태'라는 단어를 골라겠지만, 1948년 당시의 GHQ 입장에서는 한신교육투쟁이 벌어지는 한신 지역에 제주인이 많은 것은 '사태'라고 불릴 만했다. 이 사건이 같은 시기에 제주도에서 전개되는 4.3항쟁과 연계되지 않을까 하고 미국이 우려했기 때문이다.
1948년에 미국이 동아시아에 대해 가장 크게 신경 쓴 것 중 하나는 한반도 분단을 '연착륙'시키고 이를 발판으로 냉전구도를 정착시키는 것이었다. 이를 위해 중요한 것이 그해 5월 10일의 남한 단독선거를 무사히 치르는 것이었다. 이 상황에서 제주인들의 거점인 제주도와 한신 지역에서 민족주의 투쟁이 벌어졌으니 미국이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두 지역의 사건이 연계될 가능성을 미국이 우려했다는 점에 관해 위 문경수 논문은 이렇게 말한다.
"예컨대 (1948년) 4월 10일의 GHQ의 어떤 문서(GHQ, FEC, Staff Study Operation, 'STRETCHABLE, Edition 1,' 10 April 1948, MacArther Memorial)는 단독선거 이전에 남한에서 대규모 반대운동이 있을 것을 예상해서 '재일한국인 가운데서도 특히 오사카 지구에 거주하는 이단분자는 남한에서의 대규모 폭동과 연대해서 재일 점령군을 곤란에 빠트리게 하는 목적으로 시위운동을 벌이고 폭동을 일으키고 다른 지역의 민중운동을 지원할지도 모른다'고 하고 있다."
문서가 작성된 1948년 4월 10일 시점의 '남한에서의 대규모 폭동'은 제주 4.3항쟁을 가리킨다. "GHQ와 국무성이 단독선거를 의식해서 '남한에서의 대규모 폭동'이라고 할 때, 제주도의 상황을 염두에 두고 있었으리라는 것은 쉽게 짐작할 수 있다"고 위 논문은 말한다.
제주 4.3항쟁과 한신교육투쟁이 연계돼서 '재일 점령군'인 주일미군이 곤경에 빠질 수도 있다는 미국의 우려가 위의 계엄령과 비상사태로 이어졌다고 볼 수 있다. 미국이 4.3항쟁에 대해 얼마나 예민했는지를 보여주는 대목이다.
1948년 5월 10일자 <동아일보>에 '조선은 희랍사태 재연, 좌우 항쟁도 근사(近似)'로 번역돼 게재된 미국 UP통신(훗날의 UPI통신) 서울특파원 제임스 로퍼의 기사에서 확인할 수 있는 것처럼, 유럽의 동쪽 끝자락인 그리스와 아시아의 동쪽 끝자락인 한반도는 공산권에 대한 미국의 투쟁에서 동일한 전략적 의의를 띠고 있었다.
그래서 <4.3과 역사> 제14호에 실린 역사학자 허호준의 논문 '냉전체제 형성기 미국의 제3세계 개입과 역할 - 그리스 내전과 제주 4.3의 비교를 중심으로'에 설명된 것처럼, 미국은 그리스 내전과 제주 4.3에 똑같이 적극적으로 개입함으로써 이 두 곳이 적대세력에 넘어가는 것을 막고자 했다. 두 지역에 대한 개입을 계기로 미국은 유럽과 아시아에서 냉전 체제를 굳힐 수 있게 됐다.
이처럼 제주 4.3항쟁은 미국의 세계지배를 정착시키는 데 걸림돌이 됐다. 바로 그 4.3을 주도한 제주인들의 동향 사람들이 같은 시기에 오사카 및 주변 지역에서 한신 교육투쟁을 벌였기에 미국이 비상사태까지 선포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자라 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 보고 놀란다'는 말이 있다. 제주 4.3항쟁은 '솥뚜껑'만 봐도 놀랄 정도의 두려움을 미국에 심어준 사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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