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11월 대통령 직속 대한민국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는 '국가공인 친일파' 1005명을 발표했다. 이중 김백일, 신응균, 신태영, 이응준, 이종찬, 김홍준, 백낙준, 신현준, 김석범, 송석하, 백홍석 등 11명은 현충원에 잠들어 있다. 오마이뉴스는 대한민국 101주년을 맞아 현충원에 잠든 국가공인 친일파들의 실상을 소개한다. <편집자말>
국립대전현충원 장군1묘역 최상단 바로 아랫줄에 잠든 친일파 김석범의 묘비 내용 중 일부다.
▲ 해병대 2대 사령관 김석범. |
ⓒ 해병대 전우회 중앙회 홈페이지 캡처 |
1915년 11월 평안남도 강서에서 태어난 김석범은 1934년 중국 신징 사범학교를 졸업한 후 1936년 봉천군관학교에 입학한다. 견습사관을 거쳐 1937년 12월 만주국군 소위로 임관한 김석범은 1939년 4월 졸업성적 우수자로 발탁돼 일본 육군사관학교에 입학하게 된다. 만주국 신징군관학교를 거쳐 일본 육사를 졸업한 박정희 대통령과 유사한 경우다.
1940년 9월 일본 육사를 졸업한 김석범은 12월 만주국군 중위로 진급해 간도특설대 정보반 주임(책임자)으로 활동했다.
위원회는 김석범이 책임자로 활동한 간도특설대 정보반에 대해 "1944년 열하성 유수림자에서 정식 성립했다"면서 "정보반의 목적은 팔로군, 지하공작원, 민병의 활동과 군중의 사상동태를 정찰해 (간도)특설대가 소탕활동과 항일군민을 체포하고 살해하는 것을 위해 정보를 제공하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정보반은 각 연(중대)에서 13명의 골간분자를 뽑아 조직하였으며 변절분자 중에서 약간 명을 흡수해 정보활동을 진행했다. 주요 임무는 정보를 수집하고, 반공선전을 전개하며 체포된 항일연군과 혁명군중을 직접 심문하고 기타 정보활동을 조직하는 것이었다."
▲ [현충원 안장 친일파] 김석범 묘지 우리가 잘 몰랐던 해병대 사령관 김석범의 비밀친일파 김석범의 묘는 국립대전현충원 장군1묘역에 잠들어 있다. 대전현충원 상징인 현충탑을 끼고 우측으로 난 길을 따라 들어가면 역삼각 형태로 배치된 장군1묘역을 확인할 수 있다. 김석범은 장군제1묘역 최상단 바로 아래줄 우측에 위치한 묘에 잠들었다. |
ⓒ 김종훈 |
김석범의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 보고서에는 재중사학자 차상훈씨가 남긴 기록도 첨부됐다.
민족문제연구소가 발간한 <친일인명사전>에도 "간도특설대가 중국 허베이성 석갑진 일대에서 활동할 때, 정보반의 활동에 힘입어 '토벌'한 횟수는 34건이나 되었다"면서 "토벌로 팔로군 군정 인원과 주민 39명이 학살됐고, 체포된 자는 62명에 이르렀다"라고 기록됐다.
김석범은 1943년 9월 15일 간도특설대에서 활동한 공로를 인정받아 만주국 정부로부터 훈장을 받았다. 이듬해엔 만주국군 상위(대위)로 진급했다. 1945년 무렵 만주국군 제6관구 보병 7단으로 전출돼 연장(중대장)을 맡았다. 당시 만주국군 7단은 후방진지 구축과 군용도로 건설을 맡은 부대였다.
민족문제연구소는 "김석범은 1945년 6월경 보병 제30단과 합동으로 경박호 서측지구 진지를 구축하다 8월 12일 명령에 따라 원대복귀 하던 중 소련군을 만나 무장해제를 당했다"면서 "일제가 패망한 후 신징으로 가 조선인 출신 만주국군 장교들이 주축이 돼 만든 신징보안사령부에 참가해 봉천군관학교 동기생인 정일권에 이어 사령관을 맡았다"라고 <친일인명사전>에 밝혔다.
김효순 기자가 쓴 <간도특설대>라는 책에 따르면 "일본의 패전 이후 중국인의 약탈과 보복행위로부터 한인 거류민을 보호한다는 명목으로 만군과 관동군 복무자들이 중심이 돼 만든 단체가 신징보안사령부"다. 해방 후 신징보안사령부 사령관이 된 김석범은 1946년 4월 신징보안사령부 소속 전원을 인솔해 인천으로 귀국했다. 당시 신징보안사령부에 참여한 인물에는 훗날 전두환의 장인이 되는 만주국군 경리관 출신 이규동도 있었다.
▲ [현충원 안장 친일파] 김석범 묘지 우리가 잘 몰랐던 해병대 사령관 김석범의 비밀친일파 김석범의 묘는 국립대전현충원 장군1묘역에 잠들어 있다. 대전현충원 상징인 현충탑을 끼고 우측으로 난 길을 따라 들어가면 역삼각 형태로 배치된 장군1묘역을 확인할 수 있다. 김석범은 장군제1묘역 최상단 바로 아래줄 우측에 위치한 묘에 잠들었다. |
ⓒ 김종훈 |
해방 후인 1946년 김석범은 대한민국 해군으로 보직을 바꿨다. 이후 해군통제부 참모장과 방위사령관 등을 지내다 한국전쟁 중 해병대로 전과했다. 1953년부터 친일파 신현준에 이어 해병대 2대 사령관으로 4년 동안 재임했다. 민족문제연구소에 따르면 김석범이 해병대로 전과하는 데는 봉천군관학교 동기이자 간도특설대 전우인 신현준의 추천이 크게 작용했다고 한다.
해병대 사령관을 마친 김석범은 국방대학원과 국방부장관 특별보좌관을 거쳐 1960년 해병대 중장으로 예편했다. 이후 재향군인회 부회장과 국군 장성들의 예비역 모임인 성우회 부회장을 지냈다.
1998년 2월에 사망한 김석범은 국립대전현충원 제1장군묘역 최상단 바로 아랫줄에 안장됐다. 그의 무덤 옆에는 만주 관동군 헌병으로 활동하며 항일무장세력을 소탕하던 김창룡이 잠들어 있다. 1949년 6월 김창룡이 방첩대장을 할 때 그의 직속 수하인 안두희가 백범 김구 선생을 암살했다.
그러나 "장성급 장교"라는 이유로 1998년 2월 20일 국립대전현충원에 안장된 김석범은 '국가공인 친일파'로 선정된 지 10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그 자리를 지키고 있다.
'광복군'으로 신분 바꿔 박정희와 함께 돌아온 만주군 장교
https://news.v.daum.net/v/202004061127006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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