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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쉽게 빌려주고…"은행장들에 폭발한 노무현

천사요정 2022. 6. 13. 21:49

"돈쉽게 빌려주고…"은행장들에 폭발한 노무현

 

중앙일보

입력 2012.03.16 00:00 업데이트 2012.03.16 16:08

탄핵 정국이 끝난 2004년 6월, 노무현 대통령은 본격적으로 경제 현안을 챙기고 나섰다. 은행장들을 불러 가계부채 대책을 촉구한 것도 그중 하나다. 사진은 2004년 6월 16일 청와대에서 열린 금융기관장 간담회. 이날 노 대통령(오른쪽)은 은행장들에게 “가계부채에 금융권도 책임이 있다”고 질책했다. [중앙포토]

2004년 6월 16일 청와대 회의실. 20여 명의 은행장과 금융 관련 협회장들이 둘러앉았다. 하나같이 얼굴이 굳어 있었다. 노무현 대통령이 직접 주재한 금융기관장 간담회. 내가 두 번이나 말렸던 간담회다. 시작은 비교적 차분했다.

 “부총리는 자꾸 하지 말자고 하시는데, 도저히 그냥 갈 수 없어서 제가 소집했습니다.”

 

 5월 14일, 탄핵이 기각되자마자 노 대통령은 작심한 듯 경제 현안을 직접 챙겼다.

업무 복귀 1주일 만인 21일 중소기업 대표 20여 명과 관계부처 장관들을 청와대로 불러 간담회를 열었다.

“중소기업 대책을 직접 챙기겠다”는 것이었다.

 

청와대 정책실이 부랴부랴 회의를 준비했지만 알맹이가 없었다. “중소기업 정책이 어떻게 하나도 준비가 안 돼 있습니까.” 대통령은 대놓고 역정을 냈다.

나도 회의가 끝난 뒤 정책실 김영주 비서관에게 짜증을 냈다. “미리 얘기해서 부처 간에 준비할 시간을 줘야지 이렇게 허술하게 회의를 엽니까.” “갑자기 회의를 소집하시기에 제대로 말씀을 못 드렸습니다.” 김영주가 미안해 했다.

당시 나는 김석동 금융정책국장에게 중소기업 실태조사를 시켜놓고 있었다.

 

 그런 대통령이 이번에는 “직접 은행장들을 만나 가계대출 문제를 얘기하겠다”고 나선 것이다. 나는 두 번이나 말렸다.

“직접 하실 일이 아닙니다. 필요하면 금융감독위원장을 시키십시오. 아니면 제가 하겠습니다.” 대통령은 듣지 않았다. 2003년 카드사태를 겪으며 그는 너무 마음을 졸였던 것이다. 신용불량자 수는 한때 397만 명까지 치솟았다.

‘내 임기 중에 위기가 오지 않을까’. 그 조마조마했던 마음의 응어리를 풀고 싶은 것이다. 대통령은 바로 본론을 꺼냈다.

 

 “97년 위기에 여러 원인이 있겠지만 금융쪽 책임이 없다고 하기 어렵습니다. 지금 겪고 있는 가계대출, 신용불량자 문제도 결국 금융권에서 출발한 것 아닙니까. 정부가 감독을 잘못했다고도 하고, 빌려 쓴 사람이 잘못했다고도 하는데, 빌리기 쉬우니 많이 빌린 것으로 돼 있습니다.”

 

그건 사실이다. 외환위기가 지나가고, 은행들은 돈벌이 수단이 마땅치 않았다. 기업들은 예전처럼 돈을 쉽게 빌리지 않았다. 빚 무서운 줄을 알게 된 것이다. 그런 와중에 은행마다 경영효율화 정책을 도입했다. 핵심이 성과급 시스템이었다. 실적이 좋은 직원은 월급을 더 받는다. 지점마다 경쟁적으로 가계대출을 늘렸다. 경기 회복세와 맞물려 대출은 눈덩이처럼 불었다.

 

 대통령의 목소리는 점점 높아졌다. 내가 본 노 대통령은 굉장히 합리적인 사람이었다. 다만 한번 감정이 폭발하면 말리기 힘들어진다.

 

 “빌리게 해놓고 문제가 생기니까 ‘나 먼저 살자’고 해서 자기 회사 위기관리만 했지요. 한국 금융권이 연대의식을 가지고 국가적 위기관리를 해야지, 개별 회사 생각만 합니까! 개별 회사 주주는 박수를 쳤겠지만 전체적으로 어느 회사에도 득이 안 된 거 아닙니까.”

 

 왜 이런 일이 일어났을까. 금융당국, 은행, 가계 모두에 책임이 있다. 가계대출이 걷잡을 수 없이 불어나자 금융당국이 견제에 들어갔다.

은행에 “부실채권(NPL)을 줄여라” “자기자본비율을 지켜라”며 다그쳤다.

감독당국이 조여 오면 은행의 대응은 기계적일 수밖에 없다. 문제가 생길 것 같은 대출부터 거둬들인다.

만기 연장도 잘 안 해준다.

 서민 가계로선 황당할 일이다. 2002년까지 은행은 너무 쉽게 돈을 빌려줬다. 그래서 빌린 돈으로 집도 사고 가게도 냈다.

그런데 갑자기 “당장 돈을 갚으라”고 독촉한다. 없는 돈을 어떻게 만들어 낸단 말인가. 은행 돈줄이 막혔으니 저축은행, 대부업체를 찾게 된다. 이른바 ‘풍선 효과’다. 이자 부담은 훨씬 커진다. 결국 빚의 고리를 끊지 못하고 사채까지 쓰게 된다. 이렇게 신용불량자들이 양산됐다. 원칙을 앞세운 감독당국과 기계적으로 대응한 은행 창구가 서로 상승작용을 일으킨 셈이다.

 다시 청와대 회의실. 노 대통령은 속내를 털어놨다. 위기에 대한 두려움이었다.

 

 “내가 경험한 금융위기가 두 번째입니다. 꼭 물어보고 싶은 건 세 번째 위기가 안 오느냐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아무도 책임을 지는 사람이 없습니다. 빌린 사람에게 책임을 물어도 화내고, 빌려준 사람에게 책임을 물으면 정부 바라보고, 정부는 더 이상 관치를 안한다고 하니 국민은 누구를 믿고 한국에서 사업을 하느냐고 합니다.”

 

 은행장들만 들으라고 하는 얘기가 아니다.

관료들도 들으라고 하는 얘기다.

가계대출과 신불자 사태를 놓고 정부는 은행 탓을, 은행은 정부 탓을 했다.

신불자로 몰린 서민들만 “감당 못할 빚을 낸 대책 없는 사람”으로 낙인찍혔다.

대통령은 이를 꼬집는 것이다. 언뜻 직감했다.

‘대통령이 이정재 금융감독위원장을 교체할 결심을 굳혔구나. 더 이상 막아줄 수 없겠구나’. 내가 취임한 직후부터 금감위원장을 교체하자는 의견이 청와대에서 내려왔다. “지금은 이정재처럼 차분한 사람이 있어야 한다”고 나는 계속 반대해 왔다. 이정재는 결국 7월 말, 내가 제주도에 세미나 참석차 내려가 있는 사이에 사의를 표명한다.

 

 이날 은행장들에게 언성을 높이는 대통령을 보며 나는 역설적으로 자신감을 느꼈다. 위기 한복판에선 아예 위기란 말조차 삼가게 되는 법. 대통령의 ‘위기 경고’는 아직 그 정도 큰 위기가 아니란 방증인 셈이다.

실제로 5월에 접어들며 카드사태와 신용불량자 문제는 눈에 띄게 진정되는 모습을 보였다.

한숨 돌린 노 대통령은 본격적으로 경제 현안을 챙겼다. 자유무역협정(FTA)과 부동산 대책에 속도를 내기 시작한 것이다. 어찌어찌 급한 불을 끄고 나니 그 두 문제가 모두 내 앞에 떨어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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