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명박 리포트'를 통해 이명박 전 서울시장의 숨겨진 이면을 공개한 김유찬씨. ©브레이크뉴스 |
한나라당 유력 대선후보인 이명박 전 서울시장의 국회의원 시절 비서를 지낸 김유찬씨가 또 한 번 일을 냈다. <이명박 리포트>란 책을 내놓으면서 검증공방 2라운드에 불을 지피고 나선 것이다. 김씨는 지난 4월9일 출판기념회 및 기자간담회를 갖고 “이명박 전 시장의 지지율은 노무현 정권에 대한 반작용이지, 그가 만들어놓은 것이 아니다”며 “이명박 전 시장은 대통령 후보로서 적절하지 않다”고 주장했다.
김씨는 이 자리에서 “이명박 x파일이 존재하는가. 존재한다는 게 제 대답!”이라며 “이명박씨 x파일은 수도 없이 많다. 저도 x파일 중 하나다. 1년 같이 있다 보니 책 한 권 낼 정도 x파일이 생기더라”며 폭포수처럼 말을 쏟아냈다. ‘이명박 x파일’이라는 별칭이 붙은 김씨의 책은 총 488쪽 분량으로 되어 있으며 ‘이 전 시장이 대통령이 돼서는 안 되는 이유 20가지’를 나열해 이 전 시장의 대선가도에 또 한 번의 풍랑으로 작용할 전망이다.
<이명박 리포트>에는 현대건설 사장 재직시절 인턴 여직원과의 염문사건, 에리카 김 이야기, 유부녀 모씨 이야기, 이 전 시장에게 영웅 이미지를 안겨준 에세이집 <신화는 없다>는 대필됐으며 책 마케팅을 위해 엄청난 돈을 쏟아부었다는 이야기 등 그간 알려지지 않았던 ‘비하인드 스토리’가 적나라하게 담겨 있다. 책속에 소개된 내용 중 주요부분을 핵심 발췌했다.
“이명박 x파일 수도 없이 많다!” 재산·인격·도덕성·여자관계…
▲10년간 모신 운전기사를 자른 이유는 전셋돈 200만원 때문
필자가 1998년 제2회 민선 구청장 출마를 준비하고 있을 때의 이야기이다. 하루는 우연치 않게 거리에서 이명박 씨를 모시던 운전기사 이모 씨를 만나게 되었다. 당시 지루한 법정공방으로 심신이 지쳐 있던 때였다. 그리고 캠프 사람들을 만나는 것이 심적으로 부담이 컸을 때였다. 그러나 이 기사가 거리에서조차 반색을 하며 다가왔다. 우리는 지난 이야기나 나누고자 인근 사우나로 자리를 옮겼다.
사우나에서 좀처럼 입을 열지 않던 그가 서서히 입을 열었다.
“김비!(당시 캠프에서는 나를 ‘김비’-김 비서관의 약칭-라고 불렀다) 김비 기자회견하고 난 후 얼마 안 있어서 나도 잘렸어!”
나는 흠칫 놀라 그를 쳐다보았다. 혹여 나 때문에 불이익을 당한 것은 아닐까 걱정되었다. 그러나 다행히 나 때문은 아닌 듯했다.
“왜 형님을 잘랐어요? 형님은 이 의원을 오랫동안 모셨잖아요?”
한참 정적이 흘렀다. 그의 눈에는 눈물이 글썽거렸다.
“내가 생활이 어려워서 이명박 의원에게 200만원만 꿔달라고 했어. 전세금이 올라 200만원을 갑자기 만들 길이 없었어! 바로 다음날부터 그만 나오라고 그러더라고. 그래도 성실하게 이 의원을 7년간이나 모셨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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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명박 그는 왜 참모들에게 재떨이를 던졌나
▲이명박 전 서울시장이 뉴타운에 선정된 지역을 설명하고 있다. |
선거기간 내내 지구당은 전쟁터였다. 나는 기획단에 소속되어 있어서 주로 머리를 쓰는 일에 속하지만 지구당은 야전부대 사령부와 같이 늘 사람이 북적거리곤 했다.
하루 종일 현장을 누비던 주종탁 조직부장, 김익래 청년부장, 신학수 청년부장 및 민원실장들이 저녁이면 활동결과를 가지고 권영옥 사무국장의 주재 하에 일일결산 회의가 열렸다.
나는 기획단 일원으로 선거기간 내내 결산회의에 참석했다. 아침회의에서는 그날 행해야 할 임무가 하달되었고 저녁이면 각자의 임무에 대한 결과를 놓고 종합적으로 결산했다.
하루는 적십자로부터 물난리 수해 때문에 ‘적십자 회비’를 내라는 전갈을 받았다. 주무부장이 이명박 의원에게 보고했다. 보고를 받는 자리에서 주무부장은 중진의원으로서의 무게도 있고 하니 통지받은 적십자비보다는 좀 더 후하게 납부하는 것이 어떻겠는가를 건의했다.
주무부장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이명박 의원으로부터 재떨이가 날아들었다.
“야! 그게 니 돈이냐?”라고 소리 지르며…
▲어? 이명박 재산이 178억뿐?
이명박 전 시장의 공식등록 재산은 178억여 원이었다. 그를 잘 아는 대부분의 참모들은 이것을 믿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내가 사업을 하면서 알게 된 명동 사채시장의 웬만한 큰손들도 모두 이명박 씨의 재산이 178억여 원보다 훨씬 상회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가 등록한 재산보다 훨씬 많을 것이라고 항간에 끊임없이 떠도는 이유는 과연 무엇일까. 그의 공직자 재산등록 과정에서 밝혀진 공식등록 재산만 178억여 원이었다.
서울시장 선거과정에서도 재산형성 과정에 대한 투명성 여부가 도마에 오른 적이 있었다. 그러나 이명박 당시 서울시장 후보는 용케도 그 예봉을 피해갔다. 그러나 도덕성 검증 논란이 있기 훨씬 전부터 최근 이명박 전 시장의 도덕성 검증 논란이 있기까지 재산관련 논란은 끊임없이 제기되어 왔으면서도 속 시원하게 밝혀진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과연 이명박 씨의 진짜 재산규모는 얼마나 될까? 정말 국민들에게 밝혀진 대로 178억이 전부일까?
국회담당비서로 근무하고 있던 1996년 5월 어느 날이었다. 국회감사관실로부터 호출을 받았다. 국회감사관실에서는 국회의원들의 재산등록 업무를 진행하고 있었다. 한 감사관이 내게 서류뭉치를 내밀었다. 토지대장이며 등기부등본 등 제법 두툼한 서류뭉치였다.
“이명박 의원 왜 이건 신고하지 않은 거요?”
“뭔데요???”
“이 의원의 신고재산 중 누락된 부분이 많으니 소명하라고 하세요!”
사뭇 내게 명령조였다. 나는 감사관실로부터 받은 미등록 재산이라는 두툼한 서류뭉치를 들고 사무실로 돌아왔다.
그리고 즉시 보고했다.
“너는 모른 체하고 잠자코 있어! 내가 알아서 할 테니!”
그 후로 이 문제가 어떻게 처리되었는지 전혀 알지 못한다. 다만 감사관으로부터 공직자재산 불성실신고를 하였다는 점을 지적받았다는 사실뿐이다.
최근 재산문제 등이 논란이 되자 한나라당 후보검증위에 소명자료를 제출한 것으로 알려졌다. 샐러리맨에서 거부가 될 때까지의 천문학적인 재산이 어떻게 형성되었는지에 대해 과연 어떠한 소명자료를 제출했는지는 모르지만 철저하게 비밀에 부쳐졌기 때문에 측근에 있는 사람들에게서조차 정확한 정보는 흘러나오지 않았다. 그러나 우연치 않은 것에서 그 실마리를 얻게 되었다.
<이명박 리포트>를 집필하는 과정에서 나는 여러 사람들로부터 제보를 받았다. 다소 황당한 것도 있고 상당히 구체적인 정황을 가늠케 하는 것도 있었다. 만일 이것이 사실이라면 그는 국민들을 감쪽같이 기만하고 재산을 은닉해왔다는 충격적인 내용이 된다.
아마 아래 기술하게 되는 내용은 향후 많은 진위여부 공방과 논란이 나올 소지가 있다. 국민들과 함께 검증이 되기를 바라는 차원에서 여기에 싣는다.
그동안 많은 사람들의 차명에 의해 이명박 전 시장의 재산은 교묘한 방법으로 위장 분산되어 있다는 의혹이 끊임없이 제기되었다.
외형적으로 178억뿐인 것으로 보이지만 빙산의 일각이라는 주장이 그것. 자신의 친형인 이상은 형의 명의로, 처남 김재정의 이름으로 모두 위장 분산해 놓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는 주장이 끊임없이 제기되어 왔다. 그러나 실제로 그 사실을 확인하기 위해서는 형 이상은이나 처남 김재정이 입을 열어 진실을 말하기 전까지는 아무도 실체적인 진실에 접근할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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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명박 전 시장은 현대건설 회장 시절 일을 열심히 해서 정주영 회장으로부터 하사받은 재산이라고 그동안 둘러대었다. 만일 떳떳하게 불린 재산이라면 왜 자신의 이름으로 하지 않고 이처럼 모두 제3자 명의로 돌려놓았을까 하는 의문을 가지게 된다. 그 이유는 단 한 가지뿐이다.
그의 재산형성 과정이 떳떳치 못하다는 것이다. 권영옥 국장을 통해 전해진 이명박 씨의 재산관리인이자 처남인 김재정의 고백은 그것이 사실인 경우 엄청난 후폭풍을 예고하는 대목이다.
나는 종로선거를 마치고 난 후 이명박 대통령 만들기 프로젝트의 일원으로 발탁되어 이명박 전 시장의 개인연구소인 동아세아연구원에 잠시 머무르게 되었다. 그곳에서 이명박 씨의 소유로 되어 있는 서초동 영포빌딩 관리인인 김재정 씨를 소개받게 되었다. 이명박 씨의 처남이라고 했다. 사람을 외모를 보고 판단할 수는 없지만 그는 영락없는 이명박 씨의 집사였다.
세간에 알려진 대로 수천억 재산가라고 보기에는 너무도 초라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훗날 수천억 재산가로 둔갑해 세간에 알려졌다. 나는 이미 그때 단순한 이명박 씨의 빌딩관리인 정도의 인물이라는 것을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그는 절대적으로 이명박 씨에게 복종하였고 이명박 씨에게 매일의 자신의 관리 하에 있는 자금상황을 보고했다.
실제로 종로 불법선거에 대한 양심선언으로 재산관리인인 그가 세간에 주목을 받게 되었을 때 그들 이명박 가족(inner circle member)들은 입을 맞추기 시작했다. 자신이 이명박 씨의 처남으로서 이명박 당시 의원을 자발적으로 도왔다는 둥 금전적으로 여유가 있어서 선거를 지원하였다는 둥 일제히 약속이나 한 듯 입이 맞추어졌다. 당시 캠프에서는 그러한 그들의 입맞춤에 대해 신뢰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단지 이명박 씨를 살리기 위한 계산된 쇼에 불과했다.
그동안 숱한 재산공방에도 불구하고 이명박 씨가 철저하게 피해갈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이들 가족들 간에 입을 맞추고 재산관련 서류를 자신들의 것이라고 우기는 바람에 전혀 세간에 드러날 수 없었다. 기자들이 제아무리 파고들더라도 마지막 벽에 부딪친 것이 바로 이 점이었다. 그들이 입을 열기 전까지는 아무도 이 영역에 접근할 수 없었다.
그러나 상식적으로 형식적인 대표에 불과한 이명박 씨의 재산관리인 김재정 씨는 수많은 부동산을 어떠한 경위를 통해 취득하고 재산을 불렸는지는 의혹이 아닐 수 없다. 그는 이명박 씨에게 매일 재산관리 현황을 보고하는 사람이었고, 철저하게 지시를 받고 있는 그런 입장이었다. 명의상으로 김재정 씨의 것으로 되어 있지만 그렇게 믿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권영옥 국장이 무심결에 ‘김재정씨의 대부분 재산은 이명박의 것’이라고 말한 것은 그러한 의미에서 실체적 진실에 접근하는 중요한 단서를 제공한 셈이다. 아마 함구하고 있던 주변 측근들 간에는 숨기고 자시고 할 것도 없었을 것이다.
▲이명박의 여인들
하루는 국회의원회관 이명박 의원실로 국제전화가 걸려왔다. 나는 이광철 비서관에게 이명박 의원을 찾는 한 여성의 국제전화가 왔다고 이야기했다. 이광철 비선관과 내 자리는 불과 2~3미터 정도의 거리였다.
하루에도 수십 통의 전화가 걸려오는 터라 나는 특별한 느낌이 없었지만 왠지 그 전화만큼은 그렇지 않았다.
이명박 의원에게 전화를 연결하고 나서 누구냐고 이광철 비서관에게 눈짓으로 물었다. 이광철 비서관은 이명박 씨를 현대건설 회장 시절부터 모시던 충복으로 오른팔과 같은 역할을 했다. 그런 만큼 이명박 씨에 대한 사생활 정보까지도 속속들이 알고 있는 사람이었다. 내가 누구냐고 묻는 모습에 그는 빙그레 웃으면서 자신의 새끼손가락을 들어보였다.
이 글을 쓰고 있을 무렵 이명박 씨를 십여 년간 알고 지내던 한 인사와 만나게 되었다. 그는 이명박 씨의 측근 중의 측근이었다. 공교롭게도 그는 이명박 씨의 엽색행각에 대해 누구보다도 많은 정보를 가지고 있었다. 현대건설 사장·회장 재직시절 인턴 여직원과의 염문사건에 대해 입을 열었다. 나는 그에게 이렇게 이야기했다.
“그의 염문에 대해 내게 이야기하지 말게! 나는 그의 숨겨진 여자 이야기나 폭로하는 3류소설 작가가 아니야. 남의 배꼽 밑 이야기나 씹어대는 그런 졸장부가 되기 싫으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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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색을 하는 내게 그는 웃으며 자신이 롯데호텔의 방에서 이명박 씨와 함께 나오는 여인을 목격한 장면이며, 에리카 킴이라는 여인 이야기, 유부녀 모씨와의 염문 이야기 등의 실사례를 열거하며 이명박 씨의 여성편력을 이야기한 일이 있다.
이 글은 내가 경험한 대통령 후보로서는 적절치 않다고 생각되는 그의 비인격과 비도덕성만을 논하는 마당이기에 주변의 강권에도 불구하고 이명박 씨의 여자 이야기는 자세히 쓰지 않는다. 다만 이명박 씨에게 경고하고 싶은 것은 아무리 감추려고 해도 이미 자신이 뿌린 씨앗들이 있으며 그들의 마음에 상처를 주고, 참담하고 아픈 인생을 더 이상은 만들지 말라는 것이다.
아무리 돈이 많고 출세했다고 해도 상대는 인격을 가진 가여운 여성들이며, 약한 인간들이 아닌가 하는 점이다. 돈 몇 푼 주고 그들의 정조를 짓밟고, 또 그 사실을 감추려고 온갖 작전을 다 꾸며도 송곳이 주머니 속에서 삐져나오듯 감출 수 없는 법 아닌가.
더욱이 한 나라의 대통령을 꿈꾸는 자라면 더더욱 자신의 온전치 못한 과거행실이 자꾸 인구에 회자되고 의혹을 증폭시킨다면 국민 앞에 그리고 피해자 앞에 석고대죄하고 정직하길 바랄 뿐이다. 아니 땐 굴뚝에 연기 나겠는가.
“인사관리 스타일 위험천만!‥믿음직한 가신없을 수밖에”
▲그래! 비밀 아지트 하나 만들어 봐!
1995년 10월 중순 어느 날이었다. 곧 있게 될 제15대 국회의원 총선거를 본격적으로 준비하는 회의가 열렸다.
첫 번째 회의에서 mb는 우선 선거를 대비하여 보좌진들의 거주지를 모두 종로로 옮길 것을 지시했다. mb 자신을 포함하여 참모들 중 종로구에 거주하고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종로 지역민들의 입장에서 보면 이른바 ‘외인구단’ 일색이었다.
종로구로 주거지를 이전하라고 지시하면서 mb 자신도 강남구 논현동 자택을 놓아둔 채 평창동의 한 고급빌라로 주거지를 옮겼다. 참모회의에서 주거지 이전문제를 놓고 필요한 경우 전세비용을 6개월간 보조하겠다는 약속까지 곁들였다. 나는 회의를 마치고 난 그 주말에 아내와 아이들의 손을 붙들고 종로 구석구석 방을 얻기 위해 돌아다녔다.
특히 창신동 일대가 이른바 절대 열세지역으로 분류되고 있어서 창신동에서 아파트와 연립주택을 중심으로 방을 보러 다녔다. 4식구가 살만한 20평 남짓한 아파트는 전세가격이 6천만원 선이었다. 나는 시장조사 결과를 보고했다. 그리고 결과를 기다렸다.
그러나 1달이 지나고 2달이 다 되어가도 전세비용을 대겠다던 이명박 의원의 공언은 실천되지 않았다. 다른 참모들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아마도 회의석상에서 이명박 의원이 식언(食言)을 한 것 같았다.
이명박 의원에 대한 참모들의 실망이 깊어 갔다. 왜 지키지도 못할 약속을 참모들에게 쉽게 했을까. 막상 자신의 공언을 모두 지키자니 ‘돈’이 아까워서일까. 나는 구기동 mb선거기획단이 발족된 이후에도 수차례 종로로 주소지를 옮겼느냐는 mb로부터의 확인 질문을 받았다. 나는 곧 옮기겠다는 말로 대신했다. 기약 없는 답변 또한 결국 공언에 불과했다.
mb의 조직관리 스타일은 절대로 어느 한 사람에게 전권을 위임하지 않고 각개전투식 조직관리 스타일이었다. 어떤 경우에는 동일한 임무를 각개 조직에 주고 각각의 이행을 개별점검하는 방식을 채택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러한 조직관리 스타일은 매우 부정적인 결과를 가져왔다. 즉, 조직 내 상호간의 견제와 불필요한 경쟁관계를 초래하여 전체적으로 조직의 단결을 와해시키는 결과를 초래하였던 것이다.
좀처럼 사람을 잘 신뢰하지 못하는 mb의 성격 탓으로 세세한 부분까지 꼼꼼히 간섭하고 챙기려는 통에 전체적인 일이 제대로 진행되지 않는 경우가 비일비재하였다. 또한 듣는 귀가 엷은지 한 번 결정을 내렸다가 느닷없이 번복해 버리는 통에 실무자들이 골탕을 먹는 예가 많았다.
▲여보! 그 여자들에게 한눈 팔면 안돼!
나는 부재자들에 대한 책자발송 업무에는 직접적으로 관여하지 않았다. 전화민원접수실을 통해 파악된 책자 송부 희망자들에 대한 업무에만 직접적으로 개입하고 있었다. 참모들이나 우리 모두는 이러한 책자발송 업무가 선거법에서 금지하고 있는 ‘기부행위 금지규정’에 해당되는 위반이라는 이유를 들어 기획단 참모회의 때 mb에게 건의하였지만 오히려 크게 질책을 받았다. mb는 선거운동 자체도 ‘현대건설식’이었다.
“법 다 지켜가며 선거하다가는 어느 세월에 선거에서 이길 수 있냐.”
mb의 강경론이었다.
박 단장을 포함한 기획단 참모들은 mb의 이러한 선거법 경시풍토를 다 된 죽에 코푼다는 격으로 선거에 이기고도 악영향이 미치지나 않을까 심히 우려하기도 하였다. 수차례에 걸쳐 단장이 직접 건의도 해 보았으나 별로 반응이 없었다.
“쇠대가리 같은 것들이 모여 무얼 한다고 그러냐!”
모멸적인 언사를 들으면서도 대안이 없었다. 그러다가 비책이라고 내놓은 것이 ‘한국양서보급운동본부’라는 유령단체를 만드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 단체 명의로 책자를 발송하기도 했다. 훗날 mb는 부재자들에게 책자를 발송한 사실이 드러나 상대 후보 측으로부터 ‘기부행위 금지규정’ 위반 혐의로 검찰에 고소되기에 이르렀다.
전화민원 접수원들의 뒤치다꺼리도 만만치 않았다. 타 후보사무실과 끊임없이 비교해 가며 ‘처우개선’을 해주는데 만전을 기해야만 했다. 어디 선거사무실은 일당 얼마를 준다더라, 일주일이면 회식을 몇 번 시켜준다더라 등 자체 내의 ‘입방아 통신’이 조직의 분위기를 선도하였기 때문에 신경이 곤두서 있지 않을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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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난히 기획단 일에 비협조적이었던 권 보좌관을 비롯하여 지구당 측이 비아냥대고 비난을 하는데도 불구하고 나는 전화부대의 후생복리에 각별히 신경을 쓰지 않을 수 없었다. 만일 개중에 누구라도 ‘역심’을 품고 ‘양심선언’이라도 하는 날에는 모든 것이 도로아미타불이 될 지경이었기 때문이었다.
종로구민에 대한 전화조사가 끝나고 나니까 선거운동 개시일까지 할 일이 없어진 것처럼 한가해졌다. 그렇다고 전화민원접수 팀을 해체할 수도 없었다. 어떻게 해서든지 선거가 끝나기 전에는 인력을 유효적절하게 활용해야 했다. 그래서 일부는 자필서신 팀으로 발탁하여 서초동 자필서신 작업실로 보냈다. 전화민원 접수 팀을 해체하지 않은 것은 전화홍보 기간인 3월26일까지는 ‘감각’을 잃지 않게 해주어야 했기 때문이었다. 그때 다시 급조(急造)해서 교육하면 안 된다는 것이 전화 팀을 운영하면서 터득한 일종의 노하우였기 때문이다. 이른바 전문가들로 구성된 전화홍보실 운영이 절실하게 필요했던 것이다.
▲이명박에게 ‘사람’은 많아도 정작 ‘사람’이 없다
mb의 측근 중에는 유명세와 달리 ‘사람’이 없었다. ‘신화적인 인물’이라고 알려진 것과는 달리 ‘가신(家臣)’다운 가신이 하나도 없었다. 나는 이것이 mb가 현대건설 회장에 이르기까지 앞만 보고 달려온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동료애고 뭐고 생각할 겨를이 없다. 20대 이사, 30대 사장, 40대 회장이라는 초고속 승진만을 보더라도 주변을 돌아보고 아랫사람을 챙길 만한 마음의 여유가 없었을 것은 당연한 이치가 아니겠는가.
나는 mb의 측근 비서로 있으면서 보고 느낀 것은 ‘주군’이라는 생각보다, 또는 내 인생의 모든 것을 걸고 모셔야 할 ‘충성의 대상’이라고 하기보다는 현대건설 회장의 연장 정도로 생각했다.
심지어는 그의 정치역정(政治歷程)에 나같은 비서관들은 소모품에 불과할 것이라는 생각이 지배적이었다. 충성하고 싶은 마음이 들다가도 mb의 그러한 모습을 문득문득 발견할 때면 정이 뚝뚝 떨어졌다. 오히려 mb 같은 인물이 어떻게 현대건설 회장까지 올랐을까 의아했다. 도대체 정주영 회장이라는 분은 어떤 사람이기에 그런 사람을 기용하고도 대기업을 이끌었는지 미스터리가 아닐 수 없다. 나는 정주영 회장이 아니었으면 오늘날의 mb는 존재하지 못했을 것이라는 생각을 자주 했다. 실제로 그는 그렇게 행동했다.
한마디로 그는 아랫사람을 잘 챙기지 못하는 스타일이었다. 그것이 한 기업체라면 모르되 ‘인’을 모든 것의 근원으로 하는 정치에서는 그야말로 mb와 같은 용인술(用人術)은 ‘충성의 이반’을 초래하기 쉬운, 위험하기 짝이 없는 인사관리 스타일이었다. 그 어떤 미친 작자가 자신을 챙겨주지 않는 ‘주군’을 위해 충성을 바친단 말인가? 나는 그러한 측면에서 이른바 정치9단들이 왜 부하들로부터 ‘충성심’을 보장받고 있는가를 이해하게 되었다. 물론 정도의 차이나 방법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이들은 이른바 ‘아랫것’들에 대하여서는 ‘충성심’을 담보로 철저하게 챙겨주고 있었던 것이다. 가신 없는 ys나 dj 또는 장세동 없는 전두환은 끈 떨어진 갓에 불과했을 것이다.
나는 mb의 측근들이 mb에 대하여 인간적으로 가지고 있는 서운함을 너무도 잘 알고 있다. 아마 내가 아니더라도 제2의 김유찬 비서, 제3의 김유찬 비서관이 나올 수 있는 충분한 조건을 mb는 만들어 놓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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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들이 뭐 한 일이 있다고
정치판에서 가장 중요한 자산은 ‘사람’이다. 사람을 얻으면 천하를 얻는 것이요, 사람을 잃으면 천하를 잃는 것이다. 1996년 이명박씨에 대한 나의 도전 역시 결과적으로는 그가 사람을 얻는 데 실패한 것이다. 사나이란 자신을 알아주는 자에게 목숨도 바친다고 하지 않던가.
이명박 종로 부정선거 폭로사건 후 재판이 진행되면서 수십 차례 캠프 사람들을 접촉하면서 이명박 씨의 메신저 역할을 하였던 주종탁 조직부장과 호형호제할 정도로 가까워졌다. 입장이 입장이니만치 처음에는 경계하지 않을 수 없었지만 인간적인 진실을 알고 나면서 점차 심금을 털어놓을 정도로 허물없는 사이가 되었다.
주 부장 역시 이명박 씨와 함께 일해 오면서 그의 박덕함에 넌덜머리를 내고 있었음을 그의 말 속에서 확인할 수 있었다.
“한 번은 이명박 의원이 주재한 지구당 간부회의 석상이었지. 당시 권영옥 사무국장이 이명박 씨를 위해 헌신적으로 일하는 몇몇 지구당 조직책들의 박봉을 거론하며 한 30만원 정도 인상해 줄 것을 정식으로 건의한 적이 있어. 그 당시 내 월급이 120만원 정도였어. 재력가로 소문난 이명박 의원의 종로지구당 조직부장 월급이 120만원이라면 아무도 믿지 않을 거야. 권 사무국장이 내 급여가 너무 적어 생활에 어려움이 많다고 봉급인상을 건의하니까 일언지하에 거절하더라는 거야. ‘도대체 조직부장이 하는 일이 뭐가 있느냐’고 하며 말이야. 참 그 소리 들으니 밥맛이 없더구만. 이명박 씨는 대부분 자신을 모시는 참모들을 자기가 거두어주지 않으면 오갈 데가 없는 인물들쯤으로 생각하는 것 같아. 실제로 자신이 아직도 현대건설 회장이고, 지구당 조직책들은 오갈 데 없어 자신에게 빌붙어 지내는 식객 정도로 생각하는 것 같아. 그러니 제대로 충성하는 이들이 없는 거야!”
처음의 경계심과는 달리 허심탄회하게 자신의 심정을 토로했다.
이런 일도 있었다.
청년부장을 맡았던 k부장이 지구당에서 어떤 일거리를 특정업체에게 발주하고 진행하다가 특별한 계약해지 이유가 없어서 계약을 갱신하겠다고 보고했다. 그 자리에서 이명박 씨가 대뜸 화를 냈다고 한다.
“당신 그 업체로부터 돈 받아먹은 거 있어? 왜 한 업체만 그렇게 미는 거야?”
k부장은 면박을 당했다.
회의 분위기는 매우 어색해지고 k부장은 매우 불쾌했을 것이다. 박봉에 시달리며 오로지 상사로부터 인정을 받으려는 작은 목적 하나로 목숨을 건 지구당 조직책들에게 이명박 씨는 이렇듯 함부로 대하기 일쑤였다. 결국 주변의 많은 사람들은 하나 둘 이명박 씨의 곁을 떠나버렸다. 마음속에는 서운함을 씻지 못하고 찜찜한 가슴을 움켜잡고 말이다.
나는 일련의 상황들을 보면서 이명박 씨가 매우 박덕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자신을 위해 몸을 던진 그 숱한 참모들에게 따뜻한 말 한마디 못할망정 늘 그들을 의심하고 능욕하니 과연 정신이 제대로 된 사람들이 자존심을 버리고 그 곁에 어찌 단 하루를 버티겠나 싶었다. 심지어는 아주 원수가 되어 떠나는 사람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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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명박 x파일 수도 없이 많다!” 재산·인격·도덕성·여자관계…
▲10년간 모신 운전기사를 자른 이유는 전셋돈 200만원 때문
필자가 1998년 제2회 민선 구청장 출마를 준비하고 있을 때의 이야기이다. 하루는 우연치 않게 거리에서 이명박 씨를 모시던 운전기사 이모 씨를 만나게 되었다. 당시 지루한 법정공방으로 심신이 지쳐 있던 때였다. 그리고 캠프 사람들을 만나는 것이 심적으로 부담이 컸을 때였다. 그러나 이 기사가 거리에서조차 반색을 하며 다가왔다. 우리는 지난 이야기나 나누고자 인근 사우나로 자리를 옮겼다.
사우나에서 좀처럼 입을 열지 않던 그가 서서히 입을 열었다.
“김비!(당시 캠프에서는 나를 ‘김비’-김 비서관의 약칭-라고 불렀다) 김비 기자회견하고 난 후 얼마 안 있어서 나도 잘렸어!”
나는 흠칫 놀라 그를 쳐다보았다. 혹여 나 때문에 불이익을 당한 것은 아닐까 걱정되었다. 그러나 다행히 나 때문은 아닌 듯했다.
“왜 형님을 잘랐어요? 형님은 이 의원을 오랫동안 모셨잖아요?”
한참 정적이 흘렀다. 그의 눈에는 눈물이 글썽거렸다.
“내가 생활이 어려워서 이명박 의원에게 200만원만 꿔달라고 했어. 전세금이 올라 200만원을 갑자기 만들 길이 없었어! 바로 다음날부터 그만 나오라고 그러더라고. 그래도 성실하게 이 의원을 7년간이나 모셨는데….”
하나 ‥비인격 리포트
7년간 그림자처럼 수행하던 운전기사, 모자란 전세금 200만원 꿔달라 요청에 "내일부터 그만 나오지" 가차없이 잘라
"적십자비 많이 내자" 건의에 재떨이 날려
▲이명박 그는 왜 참모들에게 재떨이를 던졌나
▲이명박 전 서울시장이 뉴타운에 선정된 지역을 설명하고 있다.
선거기간 내내 지구당은 전쟁터였다. 나는 기획단에 소속되어 있어서 주로 머리를 쓰는 일에 속하지만 지구당은 야전부대 사령부와 같이 늘 사람이 북적거리곤 했다.
하루 종일 현장을 누비던 주종탁 조직부장, 김익래 청년부장, 신학수 청년부장 및 민원실장들이 저녁이면 활동결과를 가지고 권영옥 사무국장의 주재 하에 일일결산 회의가 열렸다.
나는 기획단 일원으로 선거기간 내내 결산회의에 참석했다. 아침회의에서는 그날 행해야 할 임무가 하달되었고 저녁이면 각자의 임무에 대한 결과를 놓고 종합적으로 결산했다.
하루는 적십자로부터 물난리 수해 때문에 ‘적십자 회비’를 내라는 전갈을 받았다. 주무부장이 이명박 의원에게 보고했다. 보고를 받는 자리에서 주무부장은 중진의원으로서의 무게도 있고 하니 통지받은 적십자비보다는 좀 더 후하게 납부하는 것이 어떻겠는가를 건의했다.
주무부장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이명박 의원으로부터 재떨이가 날아들었다.
“야! 그게 니 돈이냐?”라고 소리 지르며…
▲어? 이명박 재산이 178억뿐?
이명박 전 시장의 공식등록 재산은 178억여 원이었다. 그를 잘 아는 대부분의 참모들은 이것을 믿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내가 사업을 하면서 알게 된 명동 사채시장의 웬만한 큰손들도 모두 이명박 씨의 재산이 178억여 원보다 훨씬 상회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가 등록한 재산보다 훨씬 많을 것이라고 항간에 끊임없이 떠도는 이유는 과연 무엇일까. 그의 공직자 재산등록 과정에서 밝혀진 공식등록 재산만 178억여 원이었다.
서울시장 선거과정에서도 재산형성 과정에 대한 투명성 여부가 도마에 오른 적이 있었다. 그러나 이명박 당시 서울시장 후보는 용케도 그 예봉을 피해갔다. 그러나 도덕성 검증 논란이 있기 훨씬 전부터 최근 이명박 전 시장의 도덕성 검증 논란이 있기까지 재산관련 논란은 끊임없이 제기되어 왔으면서도 속 시원하게 밝혀진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과연 이명박 씨의 진짜 재산규모는 얼마나 될까? 정말 국민들에게 밝혀진 대로 178억이 전부일까?
국회담당비서로 근무하고 있던 1996년 5월 어느 날이었다. 국회감사관실로부터 호출을 받았다. 국회감사관실에서는 국회의원들의 재산등록 업무를 진행하고 있었다. 한 감사관이 내게 서류뭉치를 내밀었다. 토지대장이며 등기부등본 등 제법 두툼한 서류뭉치였다.
“이명박 의원 왜 이건 신고하지 않은 거요?”
“뭔데요???”
“이 의원의 신고재산 중 누락된 부분이 많으니 소명하라고 하세요!”
사뭇 내게 명령조였다. 나는 감사관실로부터 받은 미등록 재산이라는 두툼한 서류뭉치를 들고 사무실로 돌아왔다.
그리고 즉시 보고했다.
“너는 모른 체하고 잠자코 있어! 내가 알아서 할 테니!”
그 후로 이 문제가 어떻게 처리되었는지 전혀 알지 못한다. 다만 감사관으로부터 공직자재산 불성실신고를 하였다는 점을 지적받았다는 사실뿐이다.
최근 재산문제 등이 논란이 되자 한나라당 후보검증위에 소명자료를 제출한 것으로 알려졌다. 샐러리맨에서 거부가 될 때까지의 천문학적인 재산이 어떻게 형성되었는지에 대해 과연 어떠한 소명자료를 제출했는지는 모르지만 철저하게 비밀에 부쳐졌기 때문에 측근에 있는 사람들에게서조차 정확한 정보는 흘러나오지 않았다. 그러나 우연치 않은 것에서 그 실마리를 얻게 되었다.
<이명박 리포트>를 집필하는 과정에서 나는 여러 사람들로부터 제보를 받았다. 다소 황당한 것도 있고 상당히 구체적인 정황을 가늠케 하는 것도 있었다. 만일 이것이 사실이라면 그는 국민들을 감쪽같이 기만하고 재산을 은닉해왔다는 충격적인 내용이 된다.
아마 아래 기술하게 되는 내용은 향후 많은 진위여부 공방과 논란이 나올 소지가 있다. 국민들과 함께 검증이 되기를 바라는 차원에서 여기에 싣는다.
그동안 많은 사람들의 차명에 의해 이명박 전 시장의 재산은 교묘한 방법으로 위장 분산되어 있다는 의혹이 끊임없이 제기되었다.
외형적으로 178억뿐인 것으로 보이지만 빙산의 일각이라는 주장이 그것. 자신의 친형인 이상은 형의 명의로, 처남 김재정의 이름으로 모두 위장 분산해 놓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는 주장이 끊임없이 제기되어 왔다. 그러나 실제로 그 사실을 확인하기 위해서는 형 이상은이나 처남 김재정이 입을 열어 진실을 말하기 전까지는 아무도 실체적인 진실에 접근할 수 없었다.
둘‥재산문제 리포트
공식재산 178억? 명동 사채시장 큰손들 코웃음!
의원시절 미신고 재산 많아 감사관실서 문제제기
부축적 정주영 회장이 하사한 것? 제3자 명의 아리송!
처남은 수천억대 자산가? 이명박 은닉재산 관리인 의혹
이명박 전 시장은 현대건설 회장 시절 일을 열심히 해서 정주영 회장으로부터 하사받은 재산이라고 그동안 둘러대었다. 만일 떳떳하게 불린 재산이라면 왜 자신의 이름으로 하지 않고 이처럼 모두 제3자 명의로 돌려놓았을까 하는 의문을 가지게 된다. 그 이유는 단 한 가지뿐이다.
그의 재산형성 과정이 떳떳치 못하다는 것이다. 권영옥 국장을 통해 전해진 이명박 씨의 재산관리인이자 처남인 김재정의 고백은 그것이 사실인 경우 엄청난 후폭풍을 예고하는 대목이다.
나는 종로선거를 마치고 난 후 이명박 대통령 만들기 프로젝트의 일원으로 발탁되어 이명박 전 시장의 개인연구소인 동아세아연구원에 잠시 머무르게 되었다. 그곳에서 이명박 씨의 소유로 되어 있는 서초동 영포빌딩 관리인인 김재정 씨를 소개받게 되었다. 이명박 씨의 처남이라고 했다. 사람을 외모를 보고 판단할 수는 없지만 그는 영락없는 이명박 씨의 집사였다.
세간에 알려진 대로 수천억 재산가라고 보기에는 너무도 초라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훗날 수천억 재산가로 둔갑해 세간에 알려졌다. 나는 이미 그때 단순한 이명박 씨의 빌딩관리인 정도의 인물이라는 것을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그는 절대적으로 이명박 씨에게 복종하였고 이명박 씨에게 매일의 자신의 관리 하에 있는 자금상황을 보고했다.
실제로 종로 불법선거에 대한 양심선언으로 재산관리인인 그가 세간에 주목을 받게 되었을 때 그들 이명박 가족(inner circle member)들은 입을 맞추기 시작했다. 자신이 이명박 씨의 처남으로서 이명박 당시 의원을 자발적으로 도왔다는 둥 금전적으로 여유가 있어서 선거를 지원하였다는 둥 일제히 약속이나 한 듯 입이 맞추어졌다. 당시 캠프에서는 그러한 그들의 입맞춤에 대해 신뢰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단지 이명박 씨를 살리기 위한 계산된 쇼에 불과했다.
그동안 숱한 재산공방에도 불구하고 이명박 씨가 철저하게 피해갈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이들 가족들 간에 입을 맞추고 재산관련 서류를 자신들의 것이라고 우기는 바람에 전혀 세간에 드러날 수 없었다. 기자들이 제아무리 파고들더라도 마지막 벽에 부딪친 것이 바로 이 점이었다. 그들이 입을 열기 전까지는 아무도 이 영역에 접근할 수 없었다.
그러나 상식적으로 형식적인 대표에 불과한 이명박 씨의 재산관리인 김재정 씨는 수많은 부동산을 어떠한 경위를 통해 취득하고 재산을 불렸는지는 의혹이 아닐 수 없다. 그는 이명박 씨에게 매일 재산관리 현황을 보고하는 사람이었고, 철저하게 지시를 받고 있는 그런 입장이었다. 명의상으로 김재정 씨의 것으로 되어 있지만 그렇게 믿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권영옥 국장이 무심결에 ‘김재정씨의 대부분 재산은 이명박의 것’이라고 말한 것은 그러한 의미에서 실체적 진실에 접근하는 중요한 단서를 제공한 셈이다. 아마 함구하고 있던 주변 측근들 간에는 숨기고 자시고 할 것도 없었을 것이다.
▲이명박의 여인들
하루는 국회의원회관 이명박 의원실로 국제전화가 걸려왔다. 나는 이광철 비서관에게 이명박 의원을 찾는 한 여성의 국제전화가 왔다고 이야기했다. 이광철 비선관과 내 자리는 불과 2~3미터 정도의 거리였다.
하루에도 수십 통의 전화가 걸려오는 터라 나는 특별한 느낌이 없었지만 왠지 그 전화만큼은 그렇지 않았다.
이명박 의원에게 전화를 연결하고 나서 누구냐고 이광철 비서관에게 눈짓으로 물었다. 이광철 비서관은 이명박 씨를 현대건설 회장 시절부터 모시던 충복으로 오른팔과 같은 역할을 했다. 그런 만큼 이명박 씨에 대한 사생활 정보까지도 속속들이 알고 있는 사람이었다. 내가 누구냐고 묻는 모습에 그는 빙그레 웃으면서 자신의 새끼손가락을 들어보였다.
이 글을 쓰고 있을 무렵 이명박 씨를 십여 년간 알고 지내던 한 인사와 만나게 되었다. 그는 이명박 씨의 측근 중의 측근이었다. 공교롭게도 그는 이명박 씨의 엽색행각에 대해 누구보다도 많은 정보를 가지고 있었다. 현대건설 사장·회장 재직시절 인턴 여직원과의 염문사건에 대해 입을 열었다. 나는 그에게 이렇게 이야기했다.
“그의 염문에 대해 내게 이야기하지 말게! 나는 그의 숨겨진 여자 이야기나 폭로하는 3류소설 작가가 아니야. 남의 배꼽 밑 이야기나 씹어대는 그런 졸장부가 되기 싫으네!”
셋‥여자관계 리포트
현대건설 재직시설 인턴 여직원과 염문사건 연루
묘령의 여인과 호텔방에서 나오는 장면 참모가 목격
에리카 킴 · 유부녀 모씨 등 여성편력 놓고 측근들 쑥덕
돈 몇푼 주고 여인들 정조 짓밟은 후 감추려 온갖 작전
정색을 하는 내게 그는 웃으며 자신이 롯데호텔의 방에서 이명박 씨와 함께 나오는 여인을 목격한 장면이며, 에리카 킴이라는 여인 이야기, 유부녀 모씨와의 염문 이야기 등의 실사례를 열거하며 이명박 씨의 여성편력을 이야기한 일이 있다.
이 글은 내가 경험한 대통령 후보로서는 적절치 않다고 생각되는 그의 비인격과 비도덕성만을 논하는 마당이기에 주변의 강권에도 불구하고 이명박 씨의 여자 이야기는 자세히 쓰지 않는다. 다만 이명박 씨에게 경고하고 싶은 것은 아무리 감추려고 해도 이미 자신이 뿌린 씨앗들이 있으며 그들의 마음에 상처를 주고, 참담하고 아픈 인생을 더 이상은 만들지 말라는 것이다.
아무리 돈이 많고 출세했다고 해도 상대는 인격을 가진 가여운 여성들이며, 약한 인간들이 아닌가 하는 점이다. 돈 몇 푼 주고 그들의 정조를 짓밟고, 또 그 사실을 감추려고 온갖 작전을 다 꾸며도 송곳이 주머니 속에서 삐져나오듯 감출 수 없는 법 아닌가.
더욱이 한 나라의 대통령을 꿈꾸는 자라면 더더욱 자신의 온전치 못한 과거행실이 자꾸 인구에 회자되고 의혹을 증폭시킨다면 국민 앞에 그리고 피해자 앞에 석고대죄하고 정직하길 바랄 뿐이다. 아니 땐 굴뚝에 연기 나겠는가.
“인사관리 스타일 위험천만!‥믿음직한 가신없을 수밖에”
▲그래! 비밀 아지트 하나 만들어 봐!
1995년 10월 중순 어느 날이었다. 곧 있게 될 제15대 국회의원 총선거를 본격적으로 준비하는 회의가 열렸다.
첫 번째 회의에서 mb는 우선 선거를 대비하여 보좌진들의 거주지를 모두 종로로 옮길 것을 지시했다. mb 자신을 포함하여 참모들 중 종로구에 거주하고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종로 지역민들의 입장에서 보면 이른바 ‘외인구단’ 일색이었다.
종로구로 주거지를 이전하라고 지시하면서 mb 자신도 강남구 논현동 자택을 놓아둔 채 평창동의 한 고급빌라로 주거지를 옮겼다. 참모회의에서 주거지 이전문제를 놓고 필요한 경우 전세비용을 6개월간 보조하겠다는 약속까지 곁들였다. 나는 회의를 마치고 난 그 주말에 아내와 아이들의 손을 붙들고 종로 구석구석 방을 얻기 위해 돌아다녔다.
특히 창신동 일대가 이른바 절대 열세지역으로 분류되고 있어서 창신동에서 아파트와 연립주택을 중심으로 방을 보러 다녔다. 4식구가 살만한 20평 남짓한 아파트는 전세가격이 6천만원 선이었다. 나는 시장조사 결과를 보고했다. 그리고 결과를 기다렸다.
그러나 1달이 지나고 2달이 다 되어가도 전세비용을 대겠다던 이명박 의원의 공언은 실천되지 않았다. 다른 참모들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아마도 회의석상에서 이명박 의원이 식언(食言)을 한 것 같았다.
이명박 의원에 대한 참모들의 실망이 깊어 갔다. 왜 지키지도 못할 약속을 참모들에게 쉽게 했을까. 막상 자신의 공언을 모두 지키자니 ‘돈’이 아까워서일까. 나는 구기동 mb선거기획단이 발족된 이후에도 수차례 종로로 주소지를 옮겼느냐는 mb로부터의 확인 질문을 받았다. 나는 곧 옮기겠다는 말로 대신했다. 기약 없는 답변 또한 결국 공언에 불과했다.
mb의 조직관리 스타일은 절대로 어느 한 사람에게 전권을 위임하지 않고 각개전투식 조직관리 스타일이었다. 어떤 경우에는 동일한 임무를 각개 조직에 주고 각각의 이행을 개별점검하는 방식을 채택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러한 조직관리 스타일은 매우 부정적인 결과를 가져왔다. 즉, 조직 내 상호간의 견제와 불필요한 경쟁관계를 초래하여 전체적으로 조직의 단결을 와해시키는 결과를 초래하였던 것이다.
좀처럼 사람을 잘 신뢰하지 못하는 mb의 성격 탓으로 세세한 부분까지 꼼꼼히 간섭하고 챙기려는 통에 전체적인 일이 제대로 진행되지 않는 경우가 비일비재하였다. 또한 듣는 귀가 엷은지 한 번 결정을 내렸다가 느닷없이 번복해 버리는 통에 실무자들이 골탕을 먹는 예가 많았다.
▲여보! 그 여자들에게 한눈 팔면 안돼!
나는 부재자들에 대한 책자발송 업무에는 직접적으로 관여하지 않았다. 전화민원접수실을 통해 파악된 책자 송부 희망자들에 대한 업무에만 직접적으로 개입하고 있었다. 참모들이나 우리 모두는 이러한 책자발송 업무가 선거법에서 금지하고 있는 ‘기부행위 금지규정’에 해당되는 위반이라는 이유를 들어 기획단 참모회의 때 mb에게 건의하였지만 오히려 크게 질책을 받았다. mb는 선거운동 자체도 ‘현대건설식’이었다.
“법 다 지켜가며 선거하다가는 어느 세월에 선거에서 이길 수 있냐.”
mb의 강경론이었다.
박 단장을 포함한 기획단 참모들은 mb의 이러한 선거법 경시풍토를 다 된 죽에 코푼다는 격으로 선거에 이기고도 악영향이 미치지나 않을까 심히 우려하기도 하였다. 수차례에 걸쳐 단장이 직접 건의도 해 보았으나 별로 반응이 없었다.
“쇠대가리 같은 것들이 모여 무얼 한다고 그러냐!”
모멸적인 언사를 들으면서도 대안이 없었다. 그러다가 비책이라고 내놓은 것이 ‘한국양서보급운동본부’라는 유령단체를 만드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 단체 명의로 책자를 발송하기도 했다. 훗날 mb는 부재자들에게 책자를 발송한 사실이 드러나 상대 후보 측으로부터 ‘기부행위 금지규정’ 위반 혐의로 검찰에 고소되기에 이르렀다.
전화민원 접수원들의 뒤치다꺼리도 만만치 않았다. 타 후보사무실과 끊임없이 비교해 가며 ‘처우개선’을 해주는데 만전을 기해야만 했다. 어디 선거사무실은 일당 얼마를 준다더라, 일주일이면 회식을 몇 번 시켜준다더라 등 자체 내의 ‘입방아 통신’이 조직의 분위기를 선도하였기 때문에 신경이 곤두서 있지 않을 수 없었다.
넷‥조직관리 스타일
15대 총선 앞두고 보좌진 주소지 이전 지시
전세비용 6개월간 보조 철석같이 약속했건만, 두달 지나도록 모른 척‥참모진 실망 깊어져
사람 잘 믿지 않고 간섭 많아 실무자들 '골탕'
유난히 기획단 일에 비협조적이었던 권 보좌관을 비롯하여 지구당 측이 비아냥대고 비난을 하는데도 불구하고 나는 전화부대의 후생복리에 각별히 신경을 쓰지 않을 수 없었다. 만일 개중에 누구라도 ‘역심’을 품고 ‘양심선언’이라도 하는 날에는 모든 것이 도로아미타불이 될 지경이었기 때문이었다.
종로구민에 대한 전화조사가 끝나고 나니까 선거운동 개시일까지 할 일이 없어진 것처럼 한가해졌다. 그렇다고 전화민원접수 팀을 해체할 수도 없었다. 어떻게 해서든지 선거가 끝나기 전에는 인력을 유효적절하게 활용해야 했다. 그래서 일부는 자필서신 팀으로 발탁하여 서초동 자필서신 작업실로 보냈다. 전화민원 접수 팀을 해체하지 않은 것은 전화홍보 기간인 3월26일까지는 ‘감각’을 잃지 않게 해주어야 했기 때문이었다. 그때 다시 급조(急造)해서 교육하면 안 된다는 것이 전화 팀을 운영하면서 터득한 일종의 노하우였기 때문이다. 이른바 전문가들로 구성된 전화홍보실 운영이 절실하게 필요했던 것이다.
▲이명박에게 ‘사람’은 많아도 정작 ‘사람’이 없다
mb의 측근 중에는 유명세와 달리 ‘사람’이 없었다. ‘신화적인 인물’이라고 알려진 것과는 달리 ‘가신(家臣)’다운 가신이 하나도 없었다. 나는 이것이 mb가 현대건설 회장에 이르기까지 앞만 보고 달려온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동료애고 뭐고 생각할 겨를이 없다. 20대 이사, 30대 사장, 40대 회장이라는 초고속 승진만을 보더라도 주변을 돌아보고 아랫사람을 챙길 만한 마음의 여유가 없었을 것은 당연한 이치가 아니겠는가.
나는 mb의 측근 비서로 있으면서 보고 느낀 것은 ‘주군’이라는 생각보다, 또는 내 인생의 모든 것을 걸고 모셔야 할 ‘충성의 대상’이라고 하기보다는 현대건설 회장의 연장 정도로 생각했다.
심지어는 그의 정치역정(政治歷程)에 나같은 비서관들은 소모품에 불과할 것이라는 생각이 지배적이었다. 충성하고 싶은 마음이 들다가도 mb의 그러한 모습을 문득문득 발견할 때면 정이 뚝뚝 떨어졌다. 오히려 mb 같은 인물이 어떻게 현대건설 회장까지 올랐을까 의아했다. 도대체 정주영 회장이라는 분은 어떤 사람이기에 그런 사람을 기용하고도 대기업을 이끌었는지 미스터리가 아닐 수 없다. 나는 정주영 회장이 아니었으면 오늘날의 mb는 존재하지 못했을 것이라는 생각을 자주 했다. 실제로 그는 그렇게 행동했다.
한마디로 그는 아랫사람을 잘 챙기지 못하는 스타일이었다. 그것이 한 기업체라면 모르되 ‘인’을 모든 것의 근원으로 하는 정치에서는 그야말로 mb와 같은 용인술(用人術)은 ‘충성의 이반’을 초래하기 쉬운, 위험하기 짝이 없는 인사관리 스타일이었다. 그 어떤 미친 작자가 자신을 챙겨주지 않는 ‘주군’을 위해 충성을 바친단 말인가? 나는 그러한 측면에서 이른바 정치9단들이 왜 부하들로부터 ‘충성심’을 보장받고 있는가를 이해하게 되었다. 물론 정도의 차이나 방법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이들은 이른바 ‘아랫것’들에 대하여서는 ‘충성심’을 담보로 철저하게 챙겨주고 있었던 것이다. 가신 없는 ys나 dj 또는 장세동 없는 전두환은 끈 떨어진 갓에 불과했을 것이다.
나는 mb의 측근들이 mb에 대하여 인간적으로 가지고 있는 서운함을 너무도 잘 알고 있다. 아마 내가 아니더라도 제2의 김유찬 비서, 제3의 김유찬 비서관이 나올 수 있는 충분한 조건을 mb는 만들어 놓고 있었다.
다섯‥종로선거 뒷얘기
부재자에 책자발송 '선거법 위반행위' 건의
"법 다 지켜가며 선거에서 다 이길 수 있겠나?"
강경론 펴며 '현대건설식'으로 마구 밀어붙여
"쇠대가리 같은 것들이" 참모에 모멸적 인사
▲당신들이 뭐 한 일이 있다고
정치판에서 가장 중요한 자산은 ‘사람’이다. 사람을 얻으면 천하를 얻는 것이요, 사람을 잃으면 천하를 잃는 것이다. 1996년 이명박씨에 대한 나의 도전 역시 결과적으로는 그가 사람을 얻는 데 실패한 것이다. 사나이란 자신을 알아주는 자에게 목숨도 바친다고 하지 않던가.
이명박 종로 부정선거 폭로사건 후 재판이 진행되면서 수십 차례 캠프 사람들을 접촉하면서 이명박 씨의 메신저 역할을 하였던 주종탁 조직부장과 호형호제할 정도로 가까워졌다. 입장이 입장이니만치 처음에는 경계하지 않을 수 없었지만 인간적인 진실을 알고 나면서 점차 심금을 털어놓을 정도로 허물없는 사이가 되었다.
주 부장 역시 이명박 씨와 함께 일해 오면서 그의 박덕함에 넌덜머리를 내고 있었음을 그의 말 속에서 확인할 수 있었다.
“한 번은 이명박 의원이 주재한 지구당 간부회의 석상이었지. 당시 권영옥 사무국장이 이명박 씨를 위해 헌신적으로 일하는 몇몇 지구당 조직책들의 박봉을 거론하며 한 30만원 정도 인상해 줄 것을 정식으로 건의한 적이 있어. 그 당시 내 월급이 120만원 정도였어. 재력가로 소문난 이명박 의원의 종로지구당 조직부장 월급이 120만원이라면 아무도 믿지 않을 거야. 권 사무국장이 내 급여가 너무 적어 생활에 어려움이 많다고 봉급인상을 건의하니까 일언지하에 거절하더라는 거야. ‘도대체 조직부장이 하는 일이 뭐가 있느냐’고 하며 말이야. 참 그 소리 들으니 밥맛이 없더구만. 이명박 씨는 대부분 자신을 모시는 참모들을 자기가 거두어주지 않으면 오갈 데가 없는 인물들쯤으로 생각하는 것 같아. 실제로 자신이 아직도 현대건설 회장이고, 지구당 조직책들은 오갈 데 없어 자신에게 빌붙어 지내는 식객 정도로 생각하는 것 같아. 그러니 제대로 충성하는 이들이 없는 거야!”
처음의 경계심과는 달리 허심탄회하게 자신의 심정을 토로했다.
이런 일도 있었다.
청년부장을 맡았던 k부장이 지구당에서 어떤 일거리를 특정업체에게 발주하고 진행하다가 특별한 계약해지 이유가 없어서 계약을 갱신하겠다고 보고했다. 그 자리에서 이명박 씨가 대뜸 화를 냈다고 한다.
“당신 그 업체로부터 돈 받아먹은 거 있어? 왜 한 업체만 그렇게 미는 거야?”
k부장은 면박을 당했다.
회의 분위기는 매우 어색해지고 k부장은 매우 불쾌했을 것이다. 박봉에 시달리며 오로지 상사로부터 인정을 받으려는 작은 목적 하나로 목숨을 건 지구당 조직책들에게 이명박 씨는 이렇듯 함부로 대하기 일쑤였다. 결국 주변의 많은 사람들은 하나 둘 이명박 씨의 곁을 떠나버렸다. 마음속에는 서운함을 씻지 못하고 찜찜한 가슴을 움켜잡고 말이다.
나는 일련의 상황들을 보면서 이명박 씨가 매우 박덕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자신을 위해 몸을 던진 그 숱한 참모들에게 따뜻한 말 한마디 못할망정 늘 그들을 의심하고 능욕하니 과연 정신이 제대로 된 사람들이 자존심을 버리고 그 곁에 어찌 단 하루를 버티겠나 싶었다. 심지어는 아주 원수가 되어 떠나는 사람도 있었다.
여섯‥사람관리 스타일
재력가로 소문난 의원‥지구당 조직책들은 박봉
봉급인상 건의하면 "하는 일이 뭐 있다고" 거절
함께 일하던 사람들은 그 박덕함에 '넌절머리'
"제대로 된 인물 그 곁에서 하룬들 버티겠나"
이명박, “인천제철 제게 주시죠”
정주영, “별 미친놈 다 보겠다”
▲이명박 전 서울시장
2006년 나는 우연치 않게 한 사람과 인연이 된 적이 있다. 그는 현대 정주영가의 종손으로 국제경제학 박사였다. 2003년부터 시작한 상암동 137층 건립사업을 추진하면서 나는 정치, 경제, 사회, 문화, 교육 등 우리 사회의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하는 많은 분들과 인연을 갖게 되었다.
편의상 정 박사라고 칭하도록 하겠다.
정 박사와의 인연은 순복음교회 어느 장로의 소개로 이루어졌다. 처음 그를 만나게 되었을 때 이미 그는 나에 대해 어느 정도 정보를 가지고 있었다. 장로님과 함께 찾은 그의 방에는 각종 경제관련 서적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 분은 학자풍의 외모를 가지고 있었으나 성격은 급한 듯했다.
몇 차례 그 분을 만나게 되면서 자연스럽게 정치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다. 나는 그 분에 대해 친밀감을 갖게 되었다. 처음 그 분을 만나게 될 때는 장로님이 함께 배석했지만, 몇 번 만나면서 직접 정 박사와 단 둘이서만 만나는 경우가 많아졌다.
어느 날인가 정 박사는 나를 광화문 부근 한 음식점으로 안내했다. 그 분이 자주 가는 음식점이었다. 음식점 여주인은 정 박사에게 매우 깍듯이 인사를 했다.
정 박사는 내게 이런 이야기를 했다. 자신과 이명박, 그리고 이명박과 현대의 관계에 대한 이야기였다.
요지는 다음과 같았다.
정주영 회장은 살아 생전에 청구동 자택에서 자주 조찬회의를 열었는데 정 박사는 종손의 자격으로 가끔 그 자리에 참석했다.
동생인 정세현 회장과 아들 정몽구 회장, 정몽헌 회장 등이 주 참석자였고 가끔 이명박 당시 현대건설 사장도 참석했다는 것이다. 정 박사는 이명박 사장 바로 옆자리에 앉아 식사를 했다고 한다.
정주영 회장이 정치에 뜻을 두고 있을 무렵이었다. 그 날 이명박 씨가 작심한 듯 정주영 회장에게 인천제철을 자신에게 떼어 달라고 요청했다고 한다.
“별 미친 놈 다 보겠다. 인천제철을 달라니 가당치 않다!”
정주영 회장은 회의가 끝난 직후 매우 화를 냈다고 한다.
30년 동안 입이 닳도록 말한 평생직장이었던 현대를 떠나면서 이명박 당시 회장은 정주영 회장과 빅딜을 시도했다가 이것이 수포로 돌아가니까 결국 30년 정을 끊고 당시 여당인 신한국당의 전국구 의원으로 발빠른 변신을 하였다는 것이다.
이때부터 정주영 일가와 이명박 씨 간에는 팽팽한 긴장감이 형성되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