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덕윤리환경/역사는

“늦게나마 참 좋은 분 만나 일생 뜻있게 살았어요”

천사요정 2018. 9. 25. 15:49

[길을 찾아서]

‘고난의 길, 신념의 길’ 이희호 평전 79회
제7부 동교동의 날들-4회 이별

:2016-10-28 14:38수정 :2017-01-09 11:05



2009년 2월16일 추기경 김수환이 선종했다. 추모행렬이 명동성당을 둘러쌌다. 이희호와 김대중은 2월17일 명동성당을 찾아가 추기경의 ‘천국 영생’을 빌었다. “참 훌륭한 삶을 사신 분이었지요. 추기경님은 우리와 함께 오랫동안 민주화 투쟁을 하셨지요. 남편이 3·1민주구국선언 사건으로 진주교도소에 있을 때도 면회하시고, 내란음모 사건으로 청주교도소에 있을 때도 찾아가셨어요. 우리가 어려울 때 생활비를 주시기도 했고요.”


이명박 정부의 검찰이 전임 대통령 노무현 주변의 비리 의혹에 대한 총력 수사를 벌였다.


태광실업 회장 박연차의 정관계 로비 수사가 실마리였다.

수사의 방향이 노무현의 가족과 측근으로 향했다.

검찰이 혐의를 흘리면 언론이 받아 경쟁하듯 보도했다.

참여정부의 핵심 인사들이 줄줄이 구속되고 노무현의 부인·아들까지 조사를 받았다.


노무현의 검찰 소환을 이틀 앞둔 4월28일 민주당 고문 김근태는 성명을 내

“노무현 전 대통령에 대한 검찰 수사의 본질은 정치 보복”이라고 말했다.

성명은 “노 전 대통령은 검찰권을 검찰에 돌려줬으나 검찰은 돌려받은 검찰권을 다시 이명박 대통령에게 헌납했다”고 이명박과 검찰을 비판했다.


430일 노무현은 대검찰청 특별조사실에서 다음날 새벽 2시까지 조사를 받았다.

그 뒤로도 검찰은 노무현의 가족과 측근에 대한 혐의 내용을 누설하며 노무현을 압박했다.


참여정부 시절 ‘대북 송금 특검’으로 구속됐던 민주당 의원 박지원은 노무현 구속 반대 서명운동을 벌여 민주당 의원 50여명의 동의를 받았다.


5월23일 아침 노무현이 봉하마을 뒷산 부엉이바위에서 투신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노무현은 컴퓨터에 남긴 유서에서 이렇게 말했다.


“너무 많은 사람들에게 신세를 졌다. 나로 말미암아 여러 사람이 받은 고통이 너무 크다. 앞으로 받을 고통도 헤아릴 수 없다. 여생도 남에게 짐이 될 수밖에 없다. 건강이 좋지 않아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책을 읽을 수도 글을 쓸 수도 없다.”


이희호와 김대중은 노무현의 투신에 큰 충격을 받았다. “그날 아침 남편은 집에서 독일 시사주간지 <슈피겔>과 인터뷰를 했어요. 인터뷰를 마친 직후에 노무현 대통령이 서거했다는 소식을 들었지요. 남편은 ‘내 몸의 반이 무너지는 것 같다’고 했지요.


” 김대중은 일기에 이렇게 썼다. “그간 검찰이 너무도 가혹하게 수사를 했다. 노무현 대통령, 부인, 아들, 딸, 형, 조카사위 등을 마치 소탕작전을 하듯 공격했다. 그리고 매일같이 수사기밀 발표가 금지된 법을 어기며 언론플레이를 했다. 결국 노 대통령의 자살은 이명박 정권에 의해 강요된 것이나 마찬가지다.”


2009년 5월28일 서울역 광장의 노무현 전 대통령 분향소에서 조문을 마친 김대중은 기자회견을 열어 영결식 추모사도 못하게 한 이명박 정부를 향해 “한국의 민주주의가 후퇴하고 있다”며 울분을 토했다. <한겨레> 자료사진
2009년 5월28일 서울역 광장의 노무현 전 대통령 분향소에서 조문을 마친 김대중은 기자회견을 열어 영결식 추모사도 못하게 한 이명박 정부를 향해 “한국의 민주주의가 후퇴하고 있다”며 울분을 토했다. <한겨레> 자료사진

 

전국의 분향소에는 500만명에 이르는 조문객이 찾아와 노무현의 죽음을 애도했다.

5월28일 이희호와 김대중은 서울역에 마련된 분향소를 찾았다.


조문을 마친 김대중은 “노무현 전 대통령이 좀더 견뎌야 했다는 심정도 있지만, 그분이 겪은 치욕과 좌절, 슬픔을 생각하면 나라도 그런 결단을 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고 울분을 토했다.


29일 경복궁에서 영결식이 열렸다.

“남편은 한명숙 총리의 부탁을 받고 추도사를 준비했어요. 그런데 정부에서 막는 바람에 할 수 없었지요.”

영결식장에서 김대중은 권양숙의 손을 붙잡고 통곡했다.


김대중이 쓴 추도사는 7월에 나온 책 <노무현, 마지막 인터뷰>에 추천사 형식으로 실렸다.

김대중은 추도사에서 이렇게 말했다.

“서거 소식을 전해 듣고 나는 ‘내 몸의 반이 무너진 것 같다’고 했습니다.

왜 그때 그런 표현을 했는지 생각해봅니다.


나는 노 대통령 생전에 민주주의가 다시 위기에 처해 있는 상황을 보고 아무래도 우리 둘이 나서야 할 때가 머지않아 올 것 같다고 생각해 왔습니다. 그러던 차에 돌아가셨으니 그렇게 말했던 것입니다. 노무현 대통령 당신, 죽어서도 죽지 마십시오. 우리는 당신이 필요합니다. 노무현 당신이 우리 마음속에 살아서 민주주의 위기, 경제 위기, 남북관계 위기, 이 3대 위기를 헤쳐 나가는 데 힘이 되어주십시오. 당신은 저승에서, 나는 이승에서 우리 모두 힘을 합쳐 민주주의를 지켜냅시다. (…) 노무현 전 대통령의 서거 소식을 접하고 우리 국민들은 엄청난 충격을 받았고 조문객이 500만에 이르렀습니다. 나는 그것이 한과 한의 결합이라고 봅니다. 노무현의 한과 국민의 한이 결합한 것입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은 억울한 일을 당해 몸부림치다 저세상으로 갔습니다. 우리 국민들도 억울해하고 있습니다. 나도 억울합니다. 목숨 바쳐온 민주주의가 위기에 처해 있으니 억울하고 분한 것입니다.”



시민들의 애도 속에 노무현은 봉화마을에 묻혔다.

6월10일 500여 시민사회단체와 민주당을 포함한 다섯 야당, 4대 종단이 ‘6월항쟁 계승과 민주회복을 위한 범국민대회’를 열어 이명박 정부의 강압통치 중단과 남북의 평화적 관계 회복을 요구했다. 6월11일 6·15남북공동선언 9돌 기념행사가 열렸다.


“남편은 그날 아침부터 몸이 좋지 않았어요. 행사장에 조금 늦게 도착해 혼신을 다해 연설했지요.” 김대중은 민주주의 후퇴에 대한 안타까움을 이야기했다.


“여러분께 간곡히 피맺힌 마음으로 말씀드립니다. ‘행동하는 양심’이 됩시다.

행동하지 않는 양심은 악의 편입니다. 독재 정권이 과거에 얼마나 많은 사람을 죽였습니까.

그분들의 죽음에 보답하기 위해, 우리 국민이 피땀으로 이룬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서 우리가 할 일을 다해야 합니다. (…) 이번에 노무현 대통령이 돌아가셨는데, 만일 노 전 대통령이 그렇게 고초를 겪을 때 500만명 문상객 중 50만명만 나섰어도 노 전 대통령은 죽지 않았을 것입니다. 저는 여러분께 말씀드립니다. 진정 평화롭고 정의롭게 사는 나라가 되려면 행동하는 양심이 되어야 합니다.” 김대중의 이 말은 사실상 유언이 되었다.


삶의 끝자락에 선 김대중에게 가장 걱정스러운 것은 나라와 민족의 명운이었다.

김대중은 외교의 중요성을 자서전에 이렇게 기록했다.


“한국처럼 4대 강국에 둘러싸여 있는 나라는 지구상에 없다. 그러므로 우리나라는 세계에서 외교가 가장 필요한 나라다. 외교가 운명을 좌우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 우리에게 외교는 명줄이나 다름없다. 한반도는 4대국의 이해가 촘촘히 얽혀 있는, 기회이자 위기의 땅이다. 도랑에 든 소가 휘파람을 불며 양쪽의 풀을 뜯어먹을 것인지, 열강의 쇠창살에 갇혀 그들의 먹이로 전락할 것인지 전적으로 우리에게 달렸다.”


김대중은 죽음을 앞두고 일기를 썼다.

“남편은 밤에 안방으로 오기 전에 서재에서 일기를 썼어요.”

김대중은 지나온 삶을 이렇게 회고했다.


“나는 누명을 쓰고 박해를 받을 때 예수님의 삶을 떠올렸다. 악의 무리에 비폭력으로 저항하면 그 저항이 상대를 깨우치게 해서 결국 세상을 바꾼다는 것을 믿었다.

권력을 가진 자들은 무조건 나를 핍박하고 저주했다.

나를 알려고도 하지 않았다.

무조건 매도했다.

그럴 때마다 예수님의 최후를 떠올렸다.

군중들이 침을 뱉고 욕하며 돌을 던졌다.

그때 예수 편에 서려면 목숨을 걸어야 했다.

나는 감히 예수 편에 서려고 했다.

진정한 용기는 성격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진리에 대한 헌신에서 나온다.”



1997년 1월6일 동교동 사저에서 아들 3형제 부부와 손주들이 모두 모여 김대중의 생일을 축하하고 있다. 가족들은 유난히 손님이 많은 신년초 대신 김대중의 생일날 모이곤 했다. 왼쪽이 맏이 윤혜라·김홍일 부부, 이희호 오른쪽이 큰손녀 지영, 할아버지와 하이파이브를 하는 아이는 김홍업의 둘째아들 종민이다. 김대중평화센터 제공
1997년 1월6일 동교동 사저에서 아들 3형제 부부와 손주들이 모두 모여 김대중의 생일을 축하하고 있다. 가족들은 유난히 손님이 많은 신년초 대신 김대중의 생일날 모이곤 했다. 왼쪽이 맏이 윤혜라·김홍일 부부, 이희호 오른쪽이 큰손녀 지영, 할아버지와 하이파이브를 하는 아이는 김홍업의 둘째아들 종민이다. 김대중평화센터 제공



2009년 큰인물들 줄이은 ‘비보’
2월 김수환 추기경 선종에 애도

이명박 정권 내내 검찰 압박받던
5월23일 노무현 전 대통령 ‘투신’
“남편 ‘내 몸 반이 무너졌다’ 충격”
정부가 추모사마저 막아 더 울분

‘6·15’ 9돌 김대중 혼신의 연설
“행동하지 않는 양심은 악의 편”

7월13일 김대중 가벼운 폐렴증세
“입원할 때는 별걱정 안했는데…”
8월18일 낮 가족들 마지막 인사
“홍일의 ‘아·버·지’…남편도 눈물”


2009년 8월18일 오후 1시35분 김대중은 85년 8개월의 삶을 마쳤다. 20일 빈소가 마련된 서울 연세대세브란스병원에서 이희호와 휠췌어를 탄 큰아들 김홍일 등 가족과 측근들이 입관미사로 김대중의 안식을 기원하고 있다. <한겨레> 자료사진
2009년 8월18일 오후 1시35분 김대중은 85년 8개월의 삶을 마쳤다. 20일 빈소가 마련된 서울 연세대세브란스병원에서 이희호와 휠췌어를 탄 큰아들 김홍일 등 가족과 측근들이 입관미사로 김대중의 안식을 기원하고 있다. <한겨레> 자료사진


7월13일 김대중은 연세대세브란스병원에 입원했다. “그날 남편이 유난히 식사를 조금 하고 쉬어야겠다고 누웠어요. 오후 3시쯤 주치의가 가벼운 폐렴 증상이 있다고 입원하시는 게 좋겠다고 했지요.” 이희호는 큰 걱정을 하지 않았다.


김대중은 집을 나서기 전 중국 국가부주석 시진핑과 전 국무위원 탕자쉬안에게 보내는 편지에 서명했다.

“그런데 입원하고 사흘 만에 중환자실로 옮겼어요. 그 다음날 인공호흡기를 부착했고요.” 김대중은 병세가 나아져 18일 호흡기를 뗐다. 22일에는 일반 병실로 옮겨졌으나 23일 병세가 나빠져 다시 중환자실로 옮겨졌다. 이희호는 병원을 지켰다. “그래도 희망을 잃지는 않았지요. 그런데 중환자실로 다시 들어간 뒤 29일 목을 뚫고 기도삽관을 했어요. 그때부터는 대화를 할 수 없었지요.” 대기실에서 이희호는 김대중을 위해 털실로 양말과 장갑을 짰다. “발과 손을 만져봤는데 얼음장같이 차가워요. 그래서 급히 짜기 시작했는데 그걸 다 짜지 못하고 돌아가셨지요.” 8월1일 김대중의 민주화 투쟁 동지인 전 필리핀 대통령 코라손 아키노가 세상을 떠났다. 8월10일 김영삼이 김대중이 입원한 세브란스병원을 방문했다. 8월11일에는 대통령 이명박이 병문안을 했고, 8월14일에는 전두환이 세브란스를 찾았다.

중환자실의 김대중은 기력을 회복하지 못했다. 8월18일 의료진은 가족에게 이별을 준비할 것을 알렸다. 오전 11시10분 가족과 비서들이 마지막 인사를 했다. 둘째아들 홍업이 흐느꼈다. “죄송합니다. 용서해주십시오. 책임지고 화목한 가정을 만들겠습니다.” 12시쯤 휠체어를 탄 첫째아들 홍일이 도착했다. 파킨슨병으로 말을 하지 못하는 홍일은 아버지를 바라보았다. 홍일의 입에서 세 마디가 튀어나왔다. “아, 버, 지.” 온 힘을 다한 마지막 인사였다. 이희호가 작별의 말을 했다. “정 그렇게 가시려거든 여기는 걱정하지 마시고 편히 가세요.” 김대중은 눈을 뜨고 이희호를 바라보았다. 김대중의 눈가에 눈물이 흘렀다. 오후 1시43분 김대중은 눈을 감았다. 85년 8개월의 삶이었다.


김대중의 입관 때 이희호는 남편이 병원에서 쓰던 성경·덮개·손수건과 함께 친필 편지를 마지막 선물로 함께 넣었다. 김대중평화센터 제공
김대중의 입관 때 이희호는 남편이 병원에서 쓰던 성경·덮개·손수건과 함께 친필 편지를 마지막 선물로 함께 넣었다. 김대중평화센터 제공

 


김대중의 장례는 이희호의 뜻대로 국장으로 치러졌다. 장지는 동작동 국립현충원으로 정해졌고, 여의도 국회의사당 앞뜰에 빈소가 차려졌다.

“남편은 의회민주주의자로서 평생을 살았기 때문에 국회에 빈소를 차리는 것이 맞다고 생각했어요.” 나라 안팎에서 애도의 물결이 일었다.


미국 시사주간지 <뉴스위크>는 2009년 9월23일 김대중을 중국의 덩샤오핑, 남아프리카공화국의 넬슨 만델라와 함께 ‘조국을 변혁시킨 지도자’ 11명 가운데 한 사람으로 꼽았다.


입관하기 전날 이희호는 김대중에게 마지막 편지를 썼다. “사랑하는 당신에게. 같이 살면서 나의 잘못됨이 너무 많았습니다. 그러나 당신은 늘 너그럽게 모든 것 용서하며 아껴주었습니다. 참 고맙습니다. 이제 하느님의 뜨거운 사랑의 품안에서 편히 쉬시기를 빕니다. 너무 쓰리고 아픈 고난의 생을 잘도 참고 견딘 당신을 나는 참으로 사랑하고 존경했습니다. 이제 하느님께서 당신을 뜨거운 사랑의 품안에 편히 쉬시게 하실 것입니다. 어려움을 잘 감내하신 것을 하느님이 인정하시고 승리의 면류관을 씌워주실 줄 믿습니다. 자랑스럽습니다. 당신의 아내 이희호. 2009. 8. 20.” 이희호는 편지를 성경책·손수건과 함께 남편의 관에 넣었다.



2009년 8월21일 북한 특사조의 방문단이 김대중의 국회의당의 빈소를 찾아 김정일의 조화를 전달했다. 단장 노동당 비서 김기남이 이희호의 손을 잡고 조의를 표하고 있다.                             <한겨레> 자료사진
2009년 8월21일 북한 특사조의 방문단이 김대중의 국회의당의 빈소를 찾아 김정일의 조화를 전달했다. 단장 노동당 비서 김기남이 이희호의 손을 잡고 조의를 표하고 있다. <한겨레> 자료사진

 


김대중의 장례가 치러지는 동안 북한이 조문단을 파견했다.

노동당 비서 김기남을 단장으로 한 특사조의방문단은 8월21일 오후 김포공항을 통해 입국해 국회 빈소에서 조문하고 국방위원장 김정일의 화환을 봉정했다. 김기남 일행은 이희호를 만나 조의를 표했다. 북한 조문단은 이틀을 더 머문 뒤 대통령 이명박을 면담하고 김정일의 메시지를 전했다.

이 자리에서 남북정상회담 개최 문제가 논의됐다.

그 뒤 남북이 몇 차례 비밀접촉을 했으나 정상회담은 끝내 이루어지지 못했다.

김대중의 죽음이 가져온 남북관계 개선 기회를 날려버린 꼴이었다.



2009년 8월23일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국장으로 영결식을 마친 김대중의 운구행렬은 동교동 사저를 거쳐 서울시청 광장에 도착해 시민들과 마지막 이별을 했다. 이희호는 가족을 대표해 꿋꿋한 목소리로 시민들에게 감사 인사를 했다.                     <한겨레> 자료사진
2009년 8월23일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국장으로 영결식을 마친 김대중의 운구행렬은 동교동 사저를 거쳐 서울시청 광장에 도착해 시민들과 마지막 이별을 했다. 이희호는 가족을 대표해 꿋꿋한 목소리로 시민들에게 감사 인사를 했다. <한겨레> 자료사진


23일 오후 김대중의 영결식이 국회에서 열렸다. 이희호와 김대중의 민주화 동지 박영숙이 조사를 읽어 내려가는 동안 이희호는 참았던 눈물을 쏟았다. 큰아들 홍일은 휠체어에 앉아 아버지를 보냈다. 셋째아들 홍걸도 눈물을 훔쳤다. 영결식장을 나온 영구차가 서울시청 앞 광장에 멈추었다. 이희호는 단상에 올라 시민들에게 감사 인사를 했다. 슬픔 중에도 노구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목소리에는 힘이 있었다. “사랑하고 존경하는 국민 여러분. 대단히 감사합니다. 제 남편은 일생을 통하여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피나는 고통을 겪었습니다. 많은 오해를 받으면서도 오로지 인권과 남북의 화해 협력을 위해 노력해왔습니다. (…) 남편이 추구해온 화해와 용서의 정신 그리고 평화를 사랑하고 어려운 이웃을 사랑하는 행동하는 양심으로 살아가기를 간절히 원합니다.”



2009년 8월23일 국장 영결식을 마친 김대중은 김대중도서관과 동교동 자택을 영정 사진으로 둘러봤다. 영정을 든 손자가 김대중·이희호 문패가 나란히 걸린 사저 대문을 빠져나오고 있다.                    <한겨레> 자료사진
2009년 8월23일 국장 영결식을 마친 김대중은 김대중도서관과 동교동 자택을 영정 사진으로 둘러봤다. 영정을 든 손자가 김대중·이희호 문패가 나란히 걸린 사저 대문을 빠져나오고 있다. <한겨레> 자료사진

 

시청 앞을 빠져나온 영구차는 동교동 집에 멈추었다.

박정희·전두환 독재 정권 시절 6년이나 연금을 당했던 그 집이었다.

김대중과 이희호의 문패가 나란히 걸린 집이었다. 서재에는 김대중이 입원하기 직전까지 읽던 <제국의 미래>와 <조선왕조실록>이 책상에 놓여 있었다. 이날 오후 김대중은 국립현충원에 묻혔다. 생전에 정적으로 맞섰던 이승만·박정희의 묘지에서 멀지 않은 곳이었다. 이희호는 47년 동안 함께한 ‘동역자’를 보냈다. “우리는 정말 서로 인격을 존중했어요. 늦게 결혼했고 결혼할 때 많은 사람들이 반대했지만, 참 좋은 분을 만나서 내 일생을 값있고 뜻있게 살았다고 생각합니다.”

김대중이 떠나고 20여일 뒤인 2009년 9월10일 이희호는 김대중평화센터 이사장에 선임됐다. 취임 인사말에서 이희호는 “남편의 유지를 받들어 김대중평화센터의 설립 목적인 한반도와 동아시아를 비롯한 세계 평화, 남북의 화해 협력을 위해 노력하겠다”고 말했다.

10월21일 이희호는 노무현의 고향 봉하마을을 찾았다. 남편을 잇달아 잃은 이희호와 권양숙은 서로 끌어안았다. 이희호는 노무현의 묘소를 참배하는 자리에서 울음을 터뜨렸다.

권양숙도 이희호와 함께 오랫동안 울었다. 이희호는 해마다 봉하마을을 찾았다. “5·18을 앞두고 광주에서 인권포럼이 열려요. 거기에 참석하고 5·18묘지를 참배한 뒤에 봉하마을로 가서 노무현 대통령 묘지에 참배하지요. 권양숙 여사는 남편 서거일에 찾아오시고요. 권양숙 여사가 못 오시면 아들 노건호씨가 대신 오기도 하고요.”



글·인터뷰 고명섭 논설위원 michael@hani.co.kr

원문보기:
http://www.hani.co.kr/arti/politics/politics_general/767804.html#csidx6a91b49a9c918dca0951d949b9dac5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