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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J, 2002 월드컵 8강전에서 울어 버린 까닭은?

천사요정 2018. 9. 25. 18:24

[김대중 평전 '새벽'·48] 잔인한 날들


잔인한 날들


어느 날 보니 권력이 기울고 있었다. 2001년 연말부터 권력형 비리가 터져 나왔다.

자고 나면 새로운 사건이었다.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소위 가신이나 측근이라는 사람들은 갑자기 생겨난 권력을 주체하지 못하고 이를 아무 데나 흘리고 다녔다.

'게이트 공화국'이라 해도 할 말이 없었다. 곁을 지키고 있던 사람들이 의혹에 휩싸여 하나 둘 떠나갔다. 신용보증기금 대출 보증 외압 의혹, 동방금고 불법 대출 사건, 진승현 게이트, 한빛은행 불법 대출 사건, 이용호 게이트, 윤태식 게이트 등이 연이어 터졌다.

그럴 때마다 어김없이 동교동계 측근이나 정권 실세의 연루설이 나돌았다.

국민의 정부는 이렇듯 허무하게 스스로 무너지고 있었다.

죽음과 싸우며 지켜온 명예와 지조도 손을 탔다. 민심도 돌아서기 시작했다.

'끼리끼리 해먹는' 권력형 비리는 용서받을 수 없었다. 여기에 국민의 정부는 다시 보수 언론과의 전쟁을 치러야 했다.

국세청 세무 조사를 통해 5000억 원이 넘는 세금을 추징하고 중앙일보, 조선일보, 동아일보 사주를 구속했다.


사주와 그 일가가 언론을 치부의 도구로 악용했음이 드러났지만 거대 언론사를

'법대로 처리'하기에는 부담이 컸다.

더구나 임기 말이었다.

과거 정권은 세무 조사를 하고서도 결과를 발표하지 않았다.

권력과 언론은 서로 눈싸움만 벌이다 꼬리를 내렸다.

'권언(權言) 유착'이었다. 김대중은 고민을 거듭했다.

그리고 이내 결론을 내렸다. 언론이 더 이상 성역일 수 없었다.

김대중은 퇴임 후 곧잘 이런 말을 했다.


"언론과 적당히 타협하면 내가 죽을 때 후회할 것 같았어요. 생에 오점을 남길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역사도 나를 겁쟁이로 기록할 것이고 무엇보다 내 양심이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언론이 강력하게 반발할 것이라 예상했지만 이를 피하지 않았어요."


김대중이 이끄는 국민의 정부는 이후 보수 언론으로부터 뭇매를 맞았다.


그래도 그는 후회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언론이 바로 섰을 때 자신의 고민과 결단을 평가해주리라 믿었다.

일생에 우호적인 언론에 목이 말랐지만 그렇다고 권력과 흥정하고 거래할 수는 없었다.

권력형 비리는 끊임없이 터져 나왔다.


2002년 새해 연두 회견에서는 사과부터 해야 했다.

시종 고개를 숙였고, 죄송하다 미안하다는 말을 여섯 차례나 했다.

그러나 그것이 끝이 아니었다. 더욱 잔인한 시간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두 아들의 비리 연루 의혹이 불거졌다.

김대중은 아침 신문 보기가 겁날 정도였다.

먼저 미국에 있는 셋째 아들 홍걸의 의혹이 불어났다.

소위 최규선 게이트에 연루되었다는 것이다. 김대중은 자식들을 믿었다.

청와대에 들어오기 전에도 처신을 잘해 달라고 신신당부했다.

김대중이 보는 홍걸이는 아직도 천진한 아이였다.

죽음을 앞에 둔 감옥에서도 너무나 착해서 눈에 밟혔던 막내였다.

"거짓말하는 것을 본적이 없고, 남의 흉을 보거나 고자질하는 것을 들어본 일이 없"기에 믿기지 않았다.


부속실장 김한정을 막내가 있는 미국에 보내 혐의가 사실인지 확인해 보라고 했다.

미국에 다녀온 김한정은 고개를 숙이고 더듬거렸다. 김대중은 낙담했다.

"귀국해서 수사에 성실하게 응하라 이르시오. 죄가 있으면 받아야지."

김대중은 하루하루가 가시방석이었다. 사람 만나는 것이 괴로웠다.

아내 이희호 또한 기도로 겨우 버텼다. 어떤 때는 토하는 모습을 보였다.

이희호는 정신적 충격을 받으면 토하곤 했다.


어머니의 간절한 기도에도 막내는 5월 16일 구속됐다.

세상은 푸른 잎이 무성해졌지만 청와대는 침묵 속에 잠겼다.

김대중과 이희호는 서로 말을 하지 않았다. 말하면 아플 뿐이었다.


언론은 다시 둘째 아들 홍업을 겨냥해 기사를 쏟아냈다.

둘째는 이권 개입 혐의로 6월 21일 구속됐다.

재임 중 아들 둘을 감옥에 보냈으니 그런 아비는 세상에 없었다.

국민들 볼 낯이 없었다.


이날 오후 다시 대국민 사과문을 발표했다.


"지난 몇 달 동안 저는 자식들을 제대로 돌보지 못한 책임을 통절하게 느껴왔으며, 저를 성원해주신 국민 여러분께 마음의 상처를 드린데 대해 부끄럽고 죄송한 심정입니다. 제 평생 많은 어려움을 겪었지만 이렇게 참담한 일이 있으리라 생각조차 못했습니다. 이는 모두가 저의 부족함과 불찰에서 비롯된 일입니다. 거듭 죄송한 말씀을 드립니다." 아들과 측근들 비리는 김대중의 공든 탑을 일거에 무너뜨렸다.


대통령을 퇴임한 노무현은 한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김대중 대통령은 큰 업적을 가지고 있지만 임기 말에 성을 방어하고 있는데 (아들 문제로) 북문이 뚫려 버린거죠. 그래서 언론에 짓밟혀 버렸거든요. 그래서 견뎌 나갈 수가 없었죠."


여당이 내분에 휩싸였다.

10월 25일 실시된 재·보선 선거에서 참패를 하자 그 책임이 김대중에게 돌아왔다.

대선 주자들은 김대중을 자극하는 발언들을 함부로 쏟아냈다.


정동영 등 쇄신파는 노골적으로 동교동계를 공격했다.

그들이 쏜 화살이 청와대에 수북이 쌓였다.

사태 수습을 위해 민주당 지도부를 만났다.

대통령 앞에서 아무나 아무렇게 수습책을 말했다. 김대중이 듣기에는 모두 공허했다.

그들의 말속에는 뼈가 들어 있었다. 김대중이 이를 모를 리 없었다. 총재직을 버리기로 했다.


권 다툼에, 또 정쟁의 한 복판에 자신이 서 있음은 정권 창출에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판단했다. 11월 8일 총재직에서 물러났다.

민주당 대통령 후보를 뽑는 국민 경선이 전국을 순회하며 펼쳐졌다. 갑자기 노무현 바람이 불었다. 광주에서는 돌풍이었고, 이후에는 태풍이었다. 단번에 민심을 사로잡았다.

노무현은 거침없이 대통령 후보로 뽑혔다.


노무현이 청와대로 들어와 말했다.

"국민의 정부가 제대로 평가받지 못해 아쉽습니다. 저는 국민의 정부를 당당하게 평가해왔고, 그렇게 소신껏 얘기하면서 후보로 뽑혀서 자부심을 느낍니다."


김대중은 다시 민주당을 탈당하기로 했다. 선거 중립을 지키고 국정에만 전념키로 했다.

인기 없는 대통령은 후보에게 아무런 도움을 줄 수 없었다. 5월 6일 탈당 성명을 발표했다.

그해 6월에 월드컵 축구 대회가 열렸다.

대통령 김대중은 21세기 첫 월드컵 대회 개막을 선언했다.

6월 4일 한국과 폴란드의 예선전을 관람했다. 한국이 2 대 0으로 승리했다.

월드컵에서의 첫 승이었다. 한국은 2승 1무로 예선전을 통과, 꿈에 그리던 16강에 올랐다.

한국은 이탈리아를 꺾고 다시 8강에 올랐다. 8강전은 광주에서 열렸다. 그리고 승부차기 끝에 무적함대라 일컫는 스페인을 격침시켰다. 그날 김대중은 울고 말았다.

그 울음 속에는 여러 가지가 들어 있었다.

4강에 오른 기쁨도 있었지만 자식들에 대한 회한도 있었다.


법무장관 송정호는 흡사 자신이 죄인인 것처럼 그런 모습을 안타깝게 지켜봐야 했다.

하지만 두 아들의 구속으로 선거 국면에서 대통령 주변의 부정 부패가 더 이상 이슈가 될 수 없었다.

ⓒ프레시안(손문상)


붉은 악마의 거대한 응원 물결은 세계를 감동시켰다.

언론들도 비상한 관심을 보였다. 붉은 색은 더 이상 불온한 색깔이 아니었다. "


응원의 상징 색깔 '빨강'에 대한 세대 간의 미묘한 의식 차이도 월드컵 축구대회 열기로 감춰지고 말았다.

한국에서도 오랜 기간 '빨강'은 공산주의의 상징이었다."


(일본 <닛케이(日經) 신문>) 붉은 악마들이 포효하던 길거리와 광장을 촛불이 점령했다.


미군 장갑차에 깔려죽은 여중생 효순, 미선 양을 추모하는 집회였다. 친구 생일 파티에 가던 두 소녀는 도로가 좁아 뒤에서 덮쳐오는 장갑차를 피할 수 없었다.

그런데도 미 군사법정은 공무 중에 발생한 사건이라며 범인들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소녀들의 '억울한 죽음'은 삽시간에 인터넷을 타고 퍼졌다.

시민들은 "살인 미군 처벌"과 "불평등 조약 SOFA(한미주둔군지위협정) 개정"을 외쳤다.

밤마다 거대한 촛불의 물결이 출렁거렸다.

수만 명이 촛불을 들고 미국 대사관을 향해 행진을 벌이기도 했다.

외국 언론들은 이를 비상하게 보도했다.

한국에서 반미 감정이 일고 있다고 했다.

AFP의 기사 제목은 사뭇 자극적이었다.

"반미 시위 현장의 촛불 바다가 미국 대사관을 삼키다."


김대중은 촛불 집회가 반미 시위로 번지는 것을 경계했다.

"미국 정책에 대한 건전한 비판은 할 수 있지만 무차별적인 반미 풍조는 국익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성명을 발표했다.


그러나 미국 내 보수층 일각에서는 대통령 김대중을 의심했다.


급기야 2003년 1월 <워싱턴포스트>에 로버트 노박(Robert Novak)의 '김대중 대통령은 반미주의자'란 칼럼이 실렸다.

"1981년 한국 군부에 처형되기 직전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에게 구출된 김 대통령은 한국 역사상 가장 반미적인 대통령임이 입증되었으며, 노무현 대통령 당선자는 한 술 더 떠 엉클 샘(미국)의 수염을 잡아당기고 있다."


김대중은 즉각 항의 서한을 보냈다.

한국 국민들은 반미가 아니라 미국 정책에 반대하고 있다는 점을 분명히 했다.

SOFA 개정을 요구하는 것 자체가 반미가 아니라고 지적했다.

"반미라 하면 미군을 철수하라고 하지 왜 불평등 조약을 개정하라고 하겠는가."

국민의 정부는 촛불 집회에 어떤 제약도 가하지 않았다.


그것은 한국인의 자존심이 걸려 있는 문제였다.

촛불 집회는 12월 14일을 고비로 차츰 사그라졌다. 하지만 이어서 제16대 대통령 선거가 있었다. 양자 구도의 치열한 선거전에 촛불 집회는 분명 지대한 영향을 끼쳤음이 분명하다.


월드컵 폐막식을 하루 앞둔 6월 29일 오전 연평도에서 교전이 일어났다.

북한 경비정의 기습 포격으로 해군 병사 6명이 전사했다. 김대중은 세계가 열광하는 월드컵 축제에 왜 도발을 했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제1차 연평 해전에서 무참히 패했던, 북한 군부의 복수극이라는 분석이 유력했다.

하지만 햇볕 정책의 위력은 여전했다.

그날 밤 터키와의 월드컵 경기에 수백 만 명이 길거리 응원을 했다.

금강산 관광선은 태연하게 동해의 물살을 갈랐다.

그해 여름 남북 관계는 서해교전에도 불구하고 순조로웠다.

8월 통일부 장관 정세현과 북측 단장 김령성이 제7차 남북 장관급 회담을 가졌다.

 남북체육회담, 민간 차원의 8·15 민족통일대회 등이 잇달아 열렸다. 또 부산 아시안 게임에 북한 선수단과 응원단이 참가하기로 합의했다.


남과 북의 끊겨진 철도와 도로를 잇는 공사를 9월 18일 동시에 착공했다.

김대중은 철도 연결 사업을 '철의 실크로드'라고 명명하며 많은 의미를 부여했다.

9월 20일 덴마크 코펜하겐에서 열린 제4차 ASEM 회의에서 세계를 향해 자랑스럽게 연설했다.

"남북한 간 철도 연결의 또 하나 의미는 유럽과 한국을 육로로 연결하는 '철의 실크로드'가 이룩된다는 사실입니다. 유럽 각지에서 출발한 기차가 유라시아 대륙을 관통하여 한국의 서울과 부산까지 도달하게 됩니다. 그리고 세계 제3의 컨테이너 항구인 부산항을 통해서 태평양 전역으로 이어집니다. 물론 한국을 출발한 기차도 서유럽까지 이르러 대서양과 연결되게 됩니다."


화해의 기운이 솟구치는 한반도에 다시 먹구름이 몰려왔다.

이번에도 미국 대통령 부시에서 비롯됐다.

 9월 말 북한에 고위급 특사를 파견하겠다는 전화가 왔다.

그리고 10월 초 미 국무부 아태담당 차관보 제임스 켈리를 평양으로 보냈다.


김대중은 미국이 북한과의 관계 개선을 적극 모색하는 것으로 믿었다.

그러나 북한을 방문하고 돌아온 켈리 특사 일행은

"북한이 고농축 우라늄을 보유하고 있다고 시인했다"고 밝혔다.

세계가 깜짝 놀랐다.

미국 측이 고농축 우라늄 계획이 실재하냐고 묻자 기다렸다는 듯이 그렇게 답했다는 것이었다.

"미국이 우리를 '악의 축'이라며 선제공격을 하겠다고 위협하는 마당에 우리도 국가 안보를 위한 억제력으로 핵무기는 물론 그보다 더 강한 것도 가질 수밖에 없지 않느냐. 전쟁을 하자면 할 용의가 있다."


북미 관계는 파국으로 갈 수밖에 없었다.

김대중은 미국 네오콘들의 북미 관계 흔들기에 북한 지도부가 넘어가버렸다고 생각했다.

그대로 가면 남북 관계도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마침 장관급 회담을 하러 평양에 가는 통일부 장관 정세현을 통해 김정일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대량 살상 무기의 개발과 보유는 용납할 수 없습니다. 미국에 대화를 제의하고 특사를 보내시오."

김대중은 다시 부시를 설득했다.

10월 26일 멕시코 로스카보스에서 열린 APEC 정상 회의에서 간곡하게 말했다.


"외교적 협상을 통해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습니다. 북한에게 동결된 핵시설을 재가동하는 빌미를 주어 핵무기를 개발케 하는 결과를 초래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그러자 부시는 선제공격은 하지 않겠다고 말했다.


"북한에 대한 공격이나 침공 의도는 없습니다. 나는 쌍권총을 아무 데나 쏘아 대는 텍사스 카우보이 같은 사람이 아닙니다."


김대중 혼자서만 발을 동동 굴렀다.

북한에 얘기하면 반응이 없고, 미국을 설득하면 듣는 시늉만 냈다.

김대중의 가슴만 타들어갔다.

이후 미국은 네오콘들이 조종하는 대로 대북 정책이 흘러갔다.

핵을 포기해야 대화에 응하겠다는 입장을 고수했다.

김대중은 이런 국면을 개선해보려고 최선을 다했다.

그러나 대통령 임기가 끝나가고 있었다.


http://www.pressian.com/news/article.html?no=67822#09T0


연제

http://www.pressian.com/news/review_list_all.html?rvw_no=1483  


퇴임, 그리고 특검 앞에 놓인 김대중



대통령 선거가 다가왔다. 3파전을 벌이던 선거판은 노무현과 정몽준이 단일화에 합의, 양자 대결로 재편됐다. 노무현과 이회창은 박빙의 접전을 벌였다. 그리고 노무현이 제16대 대통령에 당선됐다. 김대중은 기뻤다. 비록 당적은 없었지만 엄연한 여당의 승리였다. 12월 23일 대통령 당선자 노무현이 청와대로 찾아왔다. 노무현은 햇볕정책을 계승하겠다고 다짐했다.

2003년 새해가 밝았다. 떠날 때가 다가오고 있었다. 김대중은 주변 정리에 나섰다. 우선 동교동계를 해체하겠다고 천명했다. 정치권이나 언론에서도 '동교동계'라는 호칭을 사용하지 말라고 주문했다.

아태평화재단도 연세대에 기증하기로 했다. 재단의 건물 신축과 운영 등에 대한 잡음이 일고 야당은 정치자금 조성의 온상이라고 공격했다. 그대로 끌고 갈 수 없었다. 김대중 사상과 정책의 산실이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연세대 측은 아태재단을 인수하여 '김대중도서관'을 만들겠다고 발표했다. 아시아 최초로 대통령 이름이 붙은 도서관이 탄생했다.

임기 말에 다시 악재가 튀어나왔다. 북한이 핵확산금지조약(NPT) 탈퇴를 선언했다. 1월 10일 성명을 발표했다.

"NPT 탈퇴는 우리 공화국에 대한 미국의 압살 책동과 그에 추종한 국제원자력기구의 부당한 처사에 대한 응당한 자위적 조치이다."

김대중은 낙담했다. 부시 행정부의 적대정책에 북한이 '벼랑 끝 전술'을 선택했다. 다시 임동원을 찾았다. 특사 임동원 일행은 마지막 북행길에 올랐다. 눈 오는 날이었다. 하지만 어느 때보다 스산한 행로였다. 김대중은 국방위원장 김정일 앞으로 친서를 보냈다. '미국과의 관계를 개선하고 핵 의혹을 해소해 달라'는 내용이었다.

김정일은 나타나지 않았다. 임동원은 사흘을 기다리다 남으로 돌아왔다. 다시 미국은 네오콘이, 북한 또한 강경파가 득세할 것이 뻔했다. 김대중은 김정일과 부시가 야속하기만 했다. 하지만 이제 김대중의 권력은 서산에 걸려있었다. 실로 노루꼬리처럼 작았다.

다시 '대북 송금사건'이 터졌다. 야당은 "현대상선이 4억 달러를 불법 대출받아 정상회담의 대가로 북한에 보냈다. 그 배후에는 청와대가 있다"고 주장했다. 언론들은 경쟁적으로 이를 중계했다. 노무현 당선자 측에서도 검찰수사가 불가피하다며 "김대중 정권이 털고 가라"고 압박했다. 김대중이 직접 나서는 수밖에 없었다. 2월 14일 '국민에게 드리는 말씀'을 발표했다.

"정부는 남북 정상회담의 추진 과정에서 이미 북한 당국과 많은 접촉이 있던 현대 측의 협조를 받았습니다. 현대는 대북 송금의 대가로 북측으로부터 철도, 전력, 통신, 관광, 개성공단 등 7개 사업권을 얻었습니다. 정부는 그것이 평화와 국가 이익에 크게 도움이 된다고 판단했기 때문에 실정법상 문제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수용했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공개적으로 문제가 된 이상 정부는 진상을 밝혀야 하고 모든 책임은 대통령인 제가 져야한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여기에 대한 책임을 지겠습니다."

김대중은 여야 정치인에게 "국익을 위해 각별한 정치적 결단을 내려주기 바라며, 여러분의 결정에 남북관계의 미래와 민족과 국가의 큰 이해가 걸려 있다"고 간곡하게 호소했다. 현대의 대북 송금은 북한과의 '7대 경협사업'에 대한 현대가 30년간 독점권을 행사하는 대가로 5억 달러를 지불한 것이지 정상회담의 대가가 아니라는 점을 분명히 밝혔다.

그럼에도 거대 야당의 공세는 조금도 수그러들지 않았다. 마침내 특별검사를 통한 진상규명을 요청하기에 이르렀다.

2월 10일 공동정부에서 여당 대표를 지낸 민주당과 자민련 인사들을 초청해서 만찬을 했다. 아내 이희호가 처음으로 남편 이야기를 꺼냈다.

"지난 5년을 돌아보니 아쉬움이 많습니다. 남편은 나라와 민족을 위해 최선을 다했습니다. 남편이지만 저도 찬사를 보내고 싶습니다. 제가 옆에서 지켜본 바에 의하면 항상 밤잠을 설쳐가면서 나라와 민족을 진심으로 사랑해온 것만은 사실입니다."


ⓒ프레시안(손문상)


아내의 칭찬이 쑥스러웠다. 하지만 세상은 몰라도 아내는 알고 있었다. 김대중은 열심히 일했다. 밤늦게 홀로 관저에서 보고서를 읽었다. 나라를 위한 인재들의 노력과 고뇌를 대통령이 직접 확인했다. 어느 때는 새벽까지 잠들지 못했다. 아내는 "제발 오늘 안에 주무세요"라고 말했다. 원 없이 일했지만 그래도 아쉬움이 남았다.

청와대 출입기자 일동이 '대통령님께 드리는 글'을 새긴 기념패를 보내왔다.

'지난 5년 정말 고생하셨습니다. 당신은 절망의 IMF 외환 위기에서 '대한민국'을 건져냈습니다. 평양 남북 정상회담은 환희 그 자체였습니다. 노벨평화상 수상은 감동의 물결이었습니다. 월드컵은 온 국민을 하나로 묶었습니다. '역사'에 남을 대통령님을 우리 모두는 사랑합니다.'

돌아보니 숨 가쁜 날들이었다. 둘러보니 여러 업적들이 쌓여있었다. 외화 위기를 극복했고, 남북정상회담을 통해 6·15공동선언을 끌어냈다. 한반도 주변 4대국과 선린의 외교망을 설치했다. 4대 부문을 개혁하여 경제 체질을 바꾸었고, 국민기초생활보장법을 만들어 굶주림을 추방했다. 여성부와 국가인권위원회를 설치했고, 의문사진상규명특별법·제주 4·3사건진상규명특별법 등을 제정했다. 2700만 명의 인터넷 인구를 지닌 IT강국을 건설했고, 그렇게 해서 전자정부를 완성했다. 또 거센 반대에도 4대 보험을 완성시켰다. 시위 현장에서는 최루탄과 폭력이 사라졌다. 취임 당시 39억 달러에 불과했던 외환보유고가 1200 달러가 넘었다. 과거 50년 동안 외국인 투자가 246억 달러에 불과했지만 국민의 정부 5년 동안에는 무려 600억 달러의 자본을 유치했다. 온 국민의 열기를 뭉쳐 월드컵 축구 4강 신화를 이뤘다. 그리고 가장 귀한 상, 노벨평화상을 받았다.

그래도 아쉬운 것들이 있었다. 지역감정은 그렇게 노력했는데도 기승을 부렸다. 또 학연(學緣) 또한 심각한 부작용을 낳고 있었다. 학연을 없애라고 그렇게 일렀어도 끼리끼리 눈을 깜박거리며 똘똘 뭉쳐 있었다.

김대중의 임기 말은 참담했다. 자식들과 측근들의 비리는 모든 것을 삼켜버렸다. 지지자들도 속이 타들어갔다. 나는 그렇게 무너져 내리는 김대중이 무척 안쓰러웠다. 이제 김대중을 평가는 역사만이 할 수 있었다. 모든 것을 버리고 정치를 떠나 평범한 할아버지로 살아가기를 바랐다. 남은 생에 평화가 깃들기를 바라며 '할아버지 김대중'이란 칼럼을 썼다.

'이제 떠나야 한다. 그가 늘 목마르게 불렀던 '존경하고 사랑하는 국민'' 속으로 들어가야 한다. 그가 대통령으로서 성공했는지, 실패했는지는 역사가 대답해줄 것이다. 대통령직을 그만두는 그에게 다시 몇 가지를 당부하고 싶다. 외환위기 극복, 햇볕정책, 정보기술(IT) 강국 건설, 월드컵 4강 등 그가 임기 내 이룬 것들을 마치 자신의 공인 양 자랑하지 않았으면 한다. 그리고 여러 가지 실정에 대해서도 변명하지 말았으면 좋겠다. 또 누구처럼 자신이 권력이 되려는 생각은 추호도 하지 말기를 바란다. 떨어진 인기를 만회하려는 그 어떤 노력도 하지 말았으면 좋겠다. 그것은 비루한 구걸이며 측은한 파닥거림일 뿐이다.

나라를 위해 무언가 큰일을 하겠다는 생각도 버려야 한다. 당신의 시대는 갔다. 여러 가지를 버릴 때가 되었다. 버리면 가볍다. 당신이 눈물로 쌓았던 '아태재단'도 속절없이 무너졌지 않은가. 남아있는 전(前) 대통령의 삶에 부디 때가 묻지 않기를 바란다. 성공한 시민이 되기를 바란다.

한 시대가 저물었다. 명예도 바래고 권좌도 늙는다. 당신의 역할도 끝났다. 이제는 할아버지로 돌아가야 한다. 고향 하의도나 아니면 마포에서 인자한 이웃집 할아버지로 살아갔으면 좋겠다. 이제는 '비범'을 버리고 평범을 배워야 한다. 당신의 용기와 정의를 샘솟게 만든 이 땅의 지극히 평화롭고, 진정으로 가난한 사람들 곁에 머무르며 진정으로 가난해졌으면 좋겠다.

지난날은 숨 가빴지만 때가 되었다. 당신이 그토록 좋아한다는 꽃을 돌보고 책을 읽으며, 이웃에게는 인생경험을 얘기하고, 손자들에게는 옛날얘기를 들려주는… 아름다운 노년을 그려본다. 김대중을 알고, 그를 연호했던 지난날이 눈물겨웠는데… 아, 정말 한 시대가 지나가고 있다.'

2월 24일 그날이 왔다. 김대중은 '위대한 국민에의 헌사'라는 퇴임인사를 했다.

"일생 동안, 특히 지난 5년 동안 저는 잠시도 쉴 새 없이 달려왔습니다. 이제 휴식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앞으로도 저의 생명이 다하는 그날까지 민족과 국민에 대한 충성심을 간직하며 살아갈 것입니다.

저는 우리 민족의 장래에 큰 희망을 가지고 있습니다. 대한민국은 반드시 세계로부터 존경받는 위대한 국가로 성장 할 것입니다. 우리 국민은 그러할 자격이 있습니다. 경제 대국의 꿈도 이룰 수 있을 것입니다. 남북 간의 평화적 통일도 언젠가는 실현시키고 말 것입니다.

존경하고 사랑하는 국민 여러분! 우리 모두 하나같이 단결합시다. 내일의 희망을 간직하고 열심히 나아갑시다. 큰 대의를 위해 협력합시다."

오후 5시 청와대를 나왔다. 시민들이 몰려나와 연도에서 태극기를 흔들었다. 동교동 골목에 이르자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젊은이들이 김대중을 연호했다. 인터넷 팬클럽 'DJ 로드' 회원들이 입을 모아 외쳤다.

"대통령님 수고하셨습니다."
"대통령님 사랑합니다."

김대중은 그들을 향해 골목에서 즉석 연설을 했다. 대통령 김대중이 사저로 들어섰다. 언론들이 아방궁이라는 대대적으로 보도한 집이라 김대중 자신도 궁금했다. 그러나 아무리 봐도 아방궁은 아니었다. 여전히 좁았다. 침실은 침대 하나로 꽉 찼다.

다음 날 아침 노무현 대통령 취임식에 참석했다. 가고 싶지 않았지만 가야했다. 김대중의 발걸음은 무겁기만 했다. 비서들이 마음을 졸이며 이를 지켜봤다. 이미 김대중의 몸에는 큰 병이 들어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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