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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차 연평해전은 ‘확전 경계’ 초점… 남북관계 경색 없었다

천사요정 2018. 9. 30. 22:33

1차해전 뒤 차관회담·금강산 관광 영향 미미
2차해전 뒤 남측 ‘재발방지’ 요구 북측 “유감”


1·2차 연평해전은  ‘확전 경계’ 초점… 남북관계 경색 없었다


남북이 서해상에서 교전을 한 것은 김대중 정부에서 두 차례 있었다. 1999년 1차, 2002년 2차 연평해전이 있었지만공히 남북관계 경색으로 연결되진 않았다.

 

1차 해전은 99년 6월15일 서해 북방한계선(NLL)을 침범한 북측 경비정들을 남측이 고속정과 초계함 10척으로 밀어내는 과정에서 일어났다. 북측 경비정들이 먼저 기관포 공격을 가했고, 우리 해군은 초계함 함포와 고속정 기관포 등으로 응사했다.


이 전투에서 북측은 어뢰정 1척 침몰, 경비정 5척 파손뿐 아니라 30명 이상 사망한 것으로 추정되는 등 큰 피해를 봤다. 남측은 고속정·초계함 등 5척의 선체 일부가 파손되고 9명이 비교적 가벼운 부상을 입었다. 


2차 해전은 2002년 한·일 월드컵축구 결승전 전날인 6월29일 연평도 서쪽 22.4㎞ 해상에서 벌어졌다. 북한 경비정 2척이 NLL을 통과해 남하한 뒤 퇴거 경고방송을 하는 우리 해군에 기습포격을 가하면서 발생했다. 충돌 25분 만인 오전 10시50분쯤 북한 경비정이 퇴각하면서 끝났지만 우리 측 고속정 참수리 357호가 화염에 휩싸인 채 침몰했다. 또 윤영하 소령 등 6명이 전사하고 18명이 부상했다. 북측은 경비정 1척이 대파되고 사상자가 30여명에 이르는 등 우리 측보다 피해가 컸다.


남북 당국은 1·2차 해전에서 확전을 경계하며 급한 불을 끄는 데 집중했다. 남북관계에도 큰 영향을 주지 않았다. 


1차 해전이 발생한 지 1주일 뒤인 6월22일 중국 베이징에서 남북차관급회담이 열렸다. 회담은 북측의 사과와 재발방지 요구를 남측이 거부하면서 결렬됐다. 하지만 북측은 교전 직후 ‘금강산관광 배를 띄워도 되냐’고 묻는 현대아산 측에 “서해사태는 금강산관광과 무관하다. 정상적으로 (배가) 운항되길 원한다”고 회신한 데서 보듯, 남북관계에 별다른 악영향을 미치지 않은 채 ‘흐지부지’ 끝났다.

               

우리 측 사상자가 대거 발생한 2차 해전에선 당일 북측이 2000년 남북정상회담 결과물인 ‘핫라인’을 통해 “현지에서의 우발적 사고다. 매우 유감스럽게 생각하며 재발되지 않도록 하겠다”고 입장을 밝혔다. 그러나 남측 정부는 공개적 사과와 책임자 처벌, 재발방지를 요구했고, 북측은 이를 수용해 7월25일 정세현 통일부 장관 앞으로 보낸 전화통지문에서 유감을 표명했다. 8월 12~14일 서울에서 제7차 남북장관급회담이 개최되면서 사태는 원만히 마무리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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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0911101817065&code=910302#csidxb0cd9a79a8ef854a9d62ede448f2c7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