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한용 선임기자의 정치 막전막후 235
5일 만에 팔 자르고 목숨 건진 '127시간' 연상
전원책, "태극기 부대 극우 표현 지나친 왜곡"
김병준, "전체를 통합해야지 선 그으면 안 돼"
조선일보 김대중 고문, 탄핵 공개적 사과 요구
[한겨레]
대니 보일 감독, 제임스 프랭코 주연의 ‘127시간’이 개봉된 것은 2011년입니다. 홀로 등반에 나섰다가 바위에 팔이 낀 사람이 5일 만에 칼로 자신의 팔을 자르고 탈출에 성공해 목숨을 건진다는 내용입니다.
영화가 개봉했을 당시는 이명박 정부였습니다. 집권여당 한나라당에는 박근혜라는 유력한 차기 대통령 주자가 있었습니다. 당시 한나라당 사람들은 7년 뒤 자신들이 이 영화의 주인공 아론과 똑같은 상황에 처할 것이라고 상상도 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현재의 자유한국당은 아론입니다. 태극기 부대는 암벽에 낀 아론의 팔입니다. 아론의 팔이 아론의 일부이듯이, 태극기 부대는 자유한국당의 일부입니다.
자신의 팔을 잘라내는 것은 목숨을 건 결단이 있어야 가능합니다. 또 극심한 고통을 견뎌내야 합니다. 그래야 목숨을 건질 수 있습니다. 그런데도 자유한국당은 지금 태극기 부대를 잘라내지 못하고 있습니다.
조직강화특위 위원으로 당협위원장 교체 권한을 가진 전원책 변호사는 태극기 부대에 상당한 미련이 있는 것 같습니다. 10월 22일 아침 <케이비에스> ‘정준희의 최강시사’ 인터뷰에서 이런 말을 했습니다.
“태극기 부대라는 말은 말이죠. 왜 우리가 촛불 시위는 이 정부는 촛불 혁명이라고 부르고 태극기 들고나오시는 분은 자꾸 태극기 부대라고 표현합니까? 그분들 개개인의 말씀을 들어보았어요. 감각이 없는 분들 아녜요. 나라 걱정하는 분들이고 직전 대통령을 구속해서 추락한 국격을 걱정하는 분들입니다.
그분들이 마치 무기를 들고나와서 쿠데타를 일으킬 것 같은 위협 세력으로 간주하는지는 모르겠는데 그걸 자꾸 태극기 부대다, 태극기 부대다 이렇게 얘기를 하고 마치 태극기 부대는 극우다, 이런 식의 표현을 하고, 그리고 그렇지 않은 보수는 건전한 보수다, 이런 식의 표현을 한다는 것은 저는 지나친 왜곡이라는 생각을 해요.
그분들이 극우도 아닐 뿐 아니라 또 그분들이 이 정권, 더 나아가서 박근혜 전 대통령을 두고 어떤 잘못된 그릇된 판단을 무조건 하고 있다, 이렇게 생각하는 것은 나는 오히려 아주 잘못된 시각이라는 생각을 합니다.
물론 강경한 쪽은 맞아요. 객관적으로 볼 때 좀 강경한 쪽이라는 것은 나는 맞는다고 생각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분들을 그러면 이분들은 보수가 아니라고 배신을 할 것이냐 하는 생각은 한번 해봐야 합니다. 그분들 빼고 뭐 빼고 하면 어떻게 합니까?
그리고 그분들 입장에서 보면 자신들이 가장 이 나라의 보수의 중심이라고 생각하고 있는데 물론 객관적으로 봤을 때 조금 지나친 부분이 있긴 있어요. 시위 때 나온 얘기, 하지만 그 말들이 그분들의 생각이 전부는 아닌 거거든요. 그래서 좀 더 넓게 봐주셨으면 합니다.”
김병준 비상대책위원장도 마찬가지입니다. 10월 17일 광주를 방문했을 때 기자들이 태극기 부대와의 통합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묻자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통합의 의미를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달렸는데 제 입장에서는 한국당이 전체 보수적인 생각을 가진 사람들 사이에서 중심성을 강화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일종의 통합이 물리적 통합을 해서 한 당으로 간다는 것도 있지만 중심성 강화에는 네트워킹이 들어 있다. 무슨 통합을 이야기하는지 몰라도 전체적으로 묶고 연결하는 작업을 했으면 좋겠다.”
“어떤 집단이든 같이 대한민국의 지난 이야기보다 미래를 이야기할 필요가 있다. 미래 비전을 내놓고 새로운 꿈을 이야기하면서 전체를 통합해야지, 누구랑 이야기 못 한다고 선을 그을 것이 아니다. 새로운 것을 이야기하고 당면한 외교 안보의 어려움이나 산업 경제의 어려움을 어떻게 하면 벗어날까를 놓고 이야기하면 어떤 생각을 갖든 하나가 될 수 있다. 원론적 이야기 같지만 중요한 이야기다.”
자유한국당 혁신에 기대를 걸었던 사람들로서는 매우 실망스러울 것 같습니다. 보수주의의 창시자라고 할 수 있는 영국의 에드먼드 버크는 전제적, 반동적 보수를 비판하고 “보존을 위한 변화”를 주창했습니다. 과거 한나라당 정치인 중에서도 “보수(保守)를 보수(補修)해야 한다”고 주장했던 사람이 많습니다.
태극기 부대는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의 정당성을 부정하는 사람들입니다. 변화를 거부하는 전제적, 반동적 보수입니다. 보수(保守)를 보수(補修)하지 않겠다는 사람들입니다.
자유한국당이 태극기 부대와 결별하지 못하는 것은 어쩌면 자유한국당의 정체성이 사실은 보수(保守)가 아니라 수구(守舊)이기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제 표현이 너무 심한가요?
자유한국당이 태극기 부대와 결별하지 못하는 이유 중에는 <조선일보>의 무시할 수 없는 영향력도 있는 것 같습니다. 10월 23일 치 ‘김대중 칼럼’의 제목은 “'문재인 對 反문' 전선”입니다. 이런 내용이 있습니다.
“당의 분열과 과거 무사 안일주의에 대해 책임 있는 사람들의 전면 퇴진으로 당의 면모를 일신해야 한다는 주장이 있다. 그러나 무작정 퇴진과 2선 후퇴는 도움이 되지 않는다. 탄핵에 관여한 측의 공개적 사과와 친박 측의 대승적 수용이라는 과정이 선행돼야 한다. 지금 보수 통합 과정이 어려움을 겪는 이유 가운데 하나는 지도부 인사들이 통합 후 자신들의 위치, 영향력, 지지층 확보 등에 연연하기 때문이라는 주장이 있다. 따라서 모두 기득권 자리에서 물러나되 다 같이 출발선에서 공정하게 경쟁하는 모습을 보여야 한다. 전 변호사 말대로 친박·반박 다 빼면 누가 당을 이끌고 가겠는가?”
눈에 잘 띄지 않지만 매우 중요한 대목이 들어 있습니다. 보수 통합의 전제 조건으로 “탄핵에 관여한 측의 공개적 사과와 친박 측의 대승적 수용”을 제시한 것입니다. 쉽게 말해 김무성 전 대표, 김성태 원내대표, 김용태 사무총장 등 복당파가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은 잘못된 것이라고 공개적으로 사과하고 친박들이 이를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박근혜 전 대통령에 대한 탄핵이 잘못됐다는 태극기 부대의 논리 그대로입니다.
문재인 대통령에 대해서는 이런 내용도 있습니다.
“'문재인 대(對) 반(反)문재인'의 전선(戰線)이 형성되는 것이 중요하다. 문 대통령은 지금 몇 번의 정상 외교를 치르면서 북한과 김정은에 경도 내지 심취해 있는 것 같다. 그의 머리에는 북한뿐이고, 김정은뿐이고, 대북 제재 완화뿐이다. 문제는 그가 대한민국의 장래를 갖고 위험한 '도박'을 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우리의 문제의식은 대한민국의 미래가 과연 한 사람(비록 그가 우리가 선출한 대통령이고 그의 믿음이 선의에서 나온 것이라 해도)의 검증되지 않은 신념과 의지에 따라 도박판에 올라도 되는가 하는 것이다.”
‘문재인을 대통령 자리에서 끌어내리자’고 외치는 태극기 부대의 주장과 별로 다르지 않습니다. 김대중 고문의 이런 논지는 상식적으로 좀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2012년 대선에서 박근혜 후보를 찍었던 유권자들도 2017년 3월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에는 찬성 여론이 더 높았습니다. 국회의원 300명 가운데 234명이 탄핵소추안에 찬성표를 던졌는데, 당시 탄핵소추 찬성 여론 78%와 거의 일치하는 숫자였습니다.
헌법재판소 탄핵심판 선고가 내려진 다음 날 3월 11일 치 <조선일보> 사설을 찾아보았습니다. ‘분열 대립 멈추고 나라를 생각해야 한다’는 제목입니다.
헌재는 재판관 8명 전원일치로 결정을 내렸다. 이정미 소장권한대행은 결정문에서 대통령에 대해 “국민의 신임을 배반” “헌법수호의 관점에서 용납될 수 없는 중대한 법 위배 행위”라고 했다. 소수의견 없이 이 판단에 8명 모두가 동의했다. 일부 쟁점에 대한 보충 의견만 첨부됐다. 전원일치의 의미는 가볍지 않다. 파면 결정에 헌법적·법률적 이론의 여지가 없다는 것으로 모든 논란의 종지부라는 뜻이기도 하다.
헌재는 박 대통령이 최순실과 함께 774억원 미르·K스포츠 재단 설립과 운용을 주도했다고 보았다. 최순실의 사익을 위해 대통령의 지위와 권한을 남용했다고 했다. 예상대로 결국 이 문제가 결정적 탄핵 사유가 됐다. 헌재는 “(이런) 위헌·위법 행위가 재임기간 중 지속적으로 이뤄졌다”면서 '최순실 국정 개입 사실을 철저히 숨긴 점' '언론의 의혹 제기를 오히려 비난한 점' '검찰과 특검 조사를 거부한 점' 등을 들어 “헌법 수호 의지가 드러나지 않는다”고 했다.
헌법재판소 결정이 옳고 이 결정을 받아들여야 한다고 주장한 것입니다.
그랬던 <조선일보>의 주요 논객이 이제 와서 탄핵의 부당성을 주장하고 탄핵을 추진했던 자유한국당 정치인들의 공개적 사과를 요구하는 이유가 뭘까요?
태극기 부대의 압력을 받은 것일까요? 정치 지형이 바뀌었기 때문일까요? 문재인 정부에 대한 증오로 판단력이 흐려진 것일까요? 무척 궁금합니다.
또 한 가지 궁금증은 자유한국당이 과연 김대중 고문의 ‘조언’을 받아들일지 여부입니다. 김무성 전 대표, 김성태 원내대표, 김용태 사무총장 등 복당파 정치인들이 탄핵에 대한 공개 사과를 할까요? 하지 않을까요?
제가 보기에는 사과하지 않을 것 같습니다. 그 사람들은 각자 자신의 정치적 생명을 걸고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에 나섰던 것입니다. 이제 와서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이 잘못된 것이었다고 사과를 한다면 아예 정치를 그만둬야 할 것입니다.
영화 얘기로 돌아가겠습니다. 영화 ‘127시간’의 주인공 아론은 자신의 팔을 끊어내는 고통, 살과 근육뿐만 아니라 뼈까지 잘라내는 고통을 감수하고서야 목숨을 건질 수 있었습니다.
자유한국당이 과연 태극기 부대와의 정치적 결별을 결단하고, 뼈를 자르는 극심한 고통을 견뎌낼 수 있을까요? 그래서 합리적 보수, 건강한 보수, 집권 가능한 대안 보수로 거듭날 수 있을까요?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성한용 선임기자 shy99@hani.co.kr
https://news.v.daum.net/v/201810231656042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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