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사 100년의 혈사와 통사 28회] 민족 분단이라는 비극은 어이없이, 국제열강의 이해 다툼에서 비롯돼
제2차 세계대전이 막바지로 치닫고 있을 때 미국에서는 한국과 일본 점령을 비롯한 전후처리에 대한 은밀한 전략이 수립되었다.
고려의 삼한통일 이후 1,300여 년을 운명공동체로 더불어 살아온 한민족이 해방을 앞두고 다시 분단의 위기를 맞게 되었다. 식민지를 함께 겪고 독립운동을 함께 하면서 막상 그토록 희구했던 해방을 맞아 분단의 비극을 앉게 된 것이다. 그것도 우리 민족의 성원들이 원해서가 아니라 외세의 작용때문이었다.
1943년 12월 1일 "조선인민의 노예상태에 유의하여 적당한 시기에 조선을 자유 또는 독립케 할 것을 결정한다"라는 카이로선언에도 불구하고 조선(한국)은 엉뚱하게 분단의 기로에 서게 되었다.
우리는 독일처럼 전범국가도 아니고, 베트남처럼 이데올로기 대립 때문도 아니고, 중국처럼 내전의 결과도 아닌, 그야말로 순전히 해양세력(미국)과 대륙세력(소련)의 이해관계로 국토의 절반을 가르고 민족의 허리를 쪼개어 둘로 나누었다.
따지고 보면 한반도 분단의 원죄는 일본에 있었다.
그런데 전범국가 독일과는 달리 같은 전범국가 일본은 멀쩡하고 엉뚱하게 한국이 분단되고 한민족은 피맺힌 고난의 세월을 살아야 했다. 그리고 아직 통일의 전망은 까마득하다.
〈JWPC 358-1〉
이 암호문 같은 문건은 제2차대전 말기 한반도를 네 쪽으로 분할하려는 미군부의 비밀보고서 제목이다. 하마터면 한반도는 미국과 소련에 의한 남북분단이 아니라, 영국과 중국까지를 포함한 4대국에 의해 4분할 될 뻔하였다.
미국의 원자폭탄 투하로 일본이 예상보다 빨리 투항함으로써 미함참본부의 작전계획이 대폭 수정되고 당초 한반도와 일본을 4분할시켜 점령하려던 전략은 한반도의 분단으로 마무리되었다. 일본이 항복의 시점을 절묘하게 택함으로써 분단을 모면하고 엉뚱하게 한반도가 두 동강나게 되는 운명을 겪게 된 것이다.
〈JWPC 358-1〉은 미국 합동참모부 내에 설치된 '합동전쟁계획위원회(Joint War Plans Committee)'의 약칭에 358-1이란 비밀번호를 달아서 작성한 한반도와 일본문제의 기밀보고서이다.
전후에 한반도를 미ㆍ소ㆍ영ㆍ중의 4강이 분할점령하여 일정 기간 동안 신탁통치를 시행한다는 것이 이 비밀보고서의 핵심내용이다. 제2차대전 후 유럽에서 오스트리아를 4분할 점령했던 것과 유사하다.
〈JWPC 358-1〉 비밀보고서는 당초 한반도와 함께 일본도 4대국이 분할점령한다는 계획을 담고 있었다. 이 보고서의 〈부록A - 일본의 주요 도서와 한국에 대한 연합군 장악과 최종적인 점령군 계획 초안〉에 따르면 일본 점령계획이 상세히 수립되어 있다.
제1단계 일본점령을 위해 소요되는 병력으로는 23개 사단, 25육군항공대, 45개 해군 및 해병비행중대 등 모두 85만 명과 3만 5천 명의 해안배치 병력을 투입시킨다는 계획이었다.
이와 함께 영국군 16만 5천 명, 중국군 13만 명, 소련군 21만 명이 투입되어 170만 명의 일본 육군과 320만 명의 준군사력을 무장해제시킨다는 복안이었다.
합동전쟁계획위원회는 제2단계에서 일본을 4개 점령지역으로 분할하여 미국은 도쿄지역ㆍ나고야 지역ㆍ오사카 지역을, 소련은 훗카이도와 동부 혼슈, 영국은 서부 혼슈와 규슈, 중국은 오사카 지역과 4대 도서지역을 각각 관장한다는 것이다. 전쟁이 끝난 후에는 소ㆍ영ㆍ중 3개국이 각기 1개 사단씩 도쿄에 파견하여 미군의 도쿄점령을 지원하도록 하고 있다.
만약 이 계획이 그대로 시행되었다면 일본은 미ㆍ영ㆍ중이 하나의 서 일본을 형성하고, 소련군이 훗카이도와 동북 혼슈를 동일본으로 적화시켰을 것이고, 도쿄도 독일 베를린처럼 '동도쿄'와 '서도쿄'로 분단되었을 것이다.
한반도와 일본의 4대국 분할점령을 기본으로 하는 〈JWPC 358-1〉기밀보고서는 급박한 정세 변화로 내용을 크게 수정하게 되었다. 1945년 8월 6일 히로시마에, 9일 나가사키에 투하된 원자폭탄으로 일본이 무조건 항복할 기미를 보인데다가 소련이 9일 일본에 선전포고를 하고 남하하면서 중국에 있는 일본 관동군을 격파하면서 급속히 북한지역으로 진주해옴에 따라 이 군사작전계획서는 전면적으로 수정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미국의 합동전쟁계획위원회는 8월 13일 긴급회의를 열어 〈JWPC 358-3〉이란 비밀보고서를 다시 만들었다. 이 보고서는 '일반명령 제1호'에 맞춰 미ㆍ소군에 의해 한반도를 분할점령한다는 것으로 수정되었다.
합동전쟁계획위원회는 이어 9월 22일〈일본과 한국을 위한 점령군〉이라는 제목의〈JWPC 358-5〉비밀보고서를 작성했다.
이 보고서는 한반도에 대한 미ㆍ소 점령군의 분할선은 인위적인 38선보다 경기도와 강원도의 행정구역 경계선과 황해도와 함경남도의 경계선간을 따라 그어져야 한다고 건의했다. 그렇지만 이 건의서는 채택되지 않았다.
제2차대전 말기 미국이 가장 두려워했던 상대는 중국에 있는 일본관동군이었다. 미국은 오키나와 등을 결국 점령하기는 했지만 점령 과정에서 상당히 많은 희생을 치렀다. 그러다 보니 중국에 있는 일본관동군의 엄청난 병력이 두려웠던 것이다.
그래서 미국은 한반도를 자기들이 군사력으로 다 점령하기 어려우니 소련의 병력을 요청한 것이다. 당시 일본군 16만 병력이 한반도에 주둔하고 있었다. 하여 소련군은 38도선 이북에서, 미군은 38도선 이남에서 일본군을 무장해제하게 된다. 한민족의 장래에 대해서는 세계열강 어느 나라도 관심이 없었다.
미국은 한국의 역사적 맥락 등은 전혀 감안하지 않고 단지 일본군 무장해제와 전후 처리 일환으로 한반도를, 그것도 미국 육군 대령 두 사람이 30분 만에 획정한 38도선으로 가른 것이다. 미국은 오로지 전후 소련을 어떻게 효과적으로 봉쇄할 것인가에만 관심이 있었다.
북위 38도선을 기준으로 남북을 가르니까 소련 측에서는 깜짝 놀랐다. 자기들은 별로 한 일이 없으니 북위 40도 이북만 줘도 감지덕지라고 생각했는데 '38도선'으로 가르니 놀랄밖에.
소련으로서는 순순히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호조건이었다. 놀랍기는 미국도 마찬가지였다. 소련이 이토록 쉽게 승락한다는 말인가, 소련의 역량으로 봐서는 더 내놓으라고 할 수도 있었다는 것이다.
결국 우리 민족은 열강의 패권 다툼에서 희생양이 되고 말았다. 마치 도마 위에 놓인 생선의 운명이 된 것이다. 민족 분단이라는 비극은 이처럼 어이없이, 국제열강의 이해 다툼에서 비롯되었다.
일본은 한반도가 분단될 것을 기대하면서 항복 시점을 고르다가 8월 10일 스웨덴 대사관을 통해 미국에 항복 의사를 전했다. 그리고 15일 항복을 선언했다.
1945년 8월 6일 히로시마에 원자폭탄이 떨어졌다. 이어서 나가사키에도 원자폭탄이 투하된다. 이때 25만 명이 희생되었다. 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이 투하되고 12시간이 지난 뒤 소련이 일본에 선전포고를 했다.
두 차례 원자폭탄 투하로 자국민 25만 명이나 희생되었는 데도 일본 정부는 왜 곧바로 항복을 하지 않고 굳이 소련군의 참전을 기다렸는가. 그리고 소련이 선전포고를 하고 만주를 통해 북한으로 병력을 이동할 시점에 항복을 했는가.
일본이 즉각적으로 항복하지 않은 이유는 이렇다. 소련이 참전하기 전에 항복을 해버리면 소련이 개입할 여지가 없으므로 한반도가 분단될 이유가 전혀 없었다. 이걸 일본정부 전략가들이 내다 본 것이다. 소련이 참전해서 북한에 진주하면 미국과 소련이 한반도를 분할할 것으로 예상한 것이다.
역사적으로 이것을 뒷받침하는 선례가 있다. 일본은 임진왜란 당시 전세가 불리해지자 명나라에 제안을 한다. 지금의 분단 지형과 상당히 비슷한데, 조선8도 중 남쪽 4개 도를 일본이 차지하고 북쪽 4개 도는 명나라가 차지하자는 것이다.
러일전쟁 때에도 비슷한 제안을 했다. 일본은 한반도의 역사적ㆍ지정학적 맥락을 너무 잘 알고 있었다. 몽골의 일본 침략 이후 한반도는 대륙 세력이 일본을 침략하는 발판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오래 전부터 알고 있었기 때문에 항상 위기의식을 갖고 있었다.
그래서 임진왜란 당시부터 어떻게든 한반도를 분단시키려고 했는데, 마침내 그 순간이 온 것이다. 며칠만 버티면, 소련이 이미 참전하겠다고 했기 때문에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자폭탄 세례를 받으면서도 소련의 참전을 기다린 것이다. 소련의 참전을 계기로 한반도가 분단될 것이라고 확신했기 때문이다. 일본의 한반도 분열책은 현재진행형이다.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2514541#dvOpinion
제2차 세계대전이 막바지로 치닫고 있을 때 미국에서는 한국과 일본 점령을 비롯한 전후처리에 대한 은밀한 전략이 수립되었다.
고려의 삼한통일 이후 1,300여 년을 운명공동체로 더불어 살아온 한민족이 해방을 앞두고 다시 분단의 위기를 맞게 되었다. 식민지를 함께 겪고 독립운동을 함께 하면서 막상 그토록 희구했던 해방을 맞아 분단의 비극을 앉게 된 것이다. 그것도 우리 민족의 성원들이 원해서가 아니라 외세의 작용때문이었다.
▲ 북위 38도선 | |
ⓒ NARA |
우리는 독일처럼 전범국가도 아니고, 베트남처럼 이데올로기 대립 때문도 아니고, 중국처럼 내전의 결과도 아닌, 그야말로 순전히 해양세력(미국)과 대륙세력(소련)의 이해관계로 국토의 절반을 가르고 민족의 허리를 쪼개어 둘로 나누었다.
그런데 전범국가 독일과는 달리 같은 전범국가 일본은 멀쩡하고 엉뚱하게 한국이 분단되고 한민족은 피맺힌 고난의 세월을 살아야 했다. 그리고 아직 통일의 전망은 까마득하다.
〈JWPC 358-1〉
이 암호문 같은 문건은 제2차대전 말기 한반도를 네 쪽으로 분할하려는 미군부의 비밀보고서 제목이다. 하마터면 한반도는 미국과 소련에 의한 남북분단이 아니라, 영국과 중국까지를 포함한 4대국에 의해 4분할 될 뻔하였다.
미국의 원자폭탄 투하로 일본이 예상보다 빨리 투항함으로써 미함참본부의 작전계획이 대폭 수정되고 당초 한반도와 일본을 4분할시켜 점령하려던 전략은 한반도의 분단으로 마무리되었다. 일본이 항복의 시점을 절묘하게 택함으로써 분단을 모면하고 엉뚱하게 한반도가 두 동강나게 되는 운명을 겪게 된 것이다.
〈JWPC 358-1〉은 미국 합동참모부 내에 설치된 '합동전쟁계획위원회(Joint War Plans Committee)'의 약칭에 358-1이란 비밀번호를 달아서 작성한 한반도와 일본문제의 기밀보고서이다.
전후에 한반도를 미ㆍ소ㆍ영ㆍ중의 4강이 분할점령하여 일정 기간 동안 신탁통치를 시행한다는 것이 이 비밀보고서의 핵심내용이다. 제2차대전 후 유럽에서 오스트리아를 4분할 점령했던 것과 유사하다.
〈JWPC 358-1〉 비밀보고서는 당초 한반도와 함께 일본도 4대국이 분할점령한다는 계획을 담고 있었다. 이 보고서의 〈부록A - 일본의 주요 도서와 한국에 대한 연합군 장악과 최종적인 점령군 계획 초안〉에 따르면 일본 점령계획이 상세히 수립되어 있다.
제1단계 일본점령을 위해 소요되는 병력으로는 23개 사단, 25육군항공대, 45개 해군 및 해병비행중대 등 모두 85만 명과 3만 5천 명의 해안배치 병력을 투입시킨다는 계획이었다.
이와 함께 영국군 16만 5천 명, 중국군 13만 명, 소련군 21만 명이 투입되어 170만 명의 일본 육군과 320만 명의 준군사력을 무장해제시킨다는 복안이었다.
합동전쟁계획위원회는 제2단계에서 일본을 4개 점령지역으로 분할하여 미국은 도쿄지역ㆍ나고야 지역ㆍ오사카 지역을, 소련은 훗카이도와 동부 혼슈, 영국은 서부 혼슈와 규슈, 중국은 오사카 지역과 4대 도서지역을 각각 관장한다는 것이다. 전쟁이 끝난 후에는 소ㆍ영ㆍ중 3개국이 각기 1개 사단씩 도쿄에 파견하여 미군의 도쿄점령을 지원하도록 하고 있다.
만약 이 계획이 그대로 시행되었다면 일본은 미ㆍ영ㆍ중이 하나의 서 일본을 형성하고, 소련군이 훗카이도와 동북 혼슈를 동일본으로 적화시켰을 것이고, 도쿄도 독일 베를린처럼 '동도쿄'와 '서도쿄'로 분단되었을 것이다.
▲ 나가사키 시립 원폭자료관에 전시된 영상자료. 영상에서는 원자폭탄이 터지는 장면이 흘러나오고, 그 옆에서 원자폭탄이 떨어진 시간이 표시되어 있다. | |
ⓒ 오마이뉴스 장재완 |
미국의 합동전쟁계획위원회는 8월 13일 긴급회의를 열어 〈JWPC 358-3〉이란 비밀보고서를 다시 만들었다. 이 보고서는 '일반명령 제1호'에 맞춰 미ㆍ소군에 의해 한반도를 분할점령한다는 것으로 수정되었다.
합동전쟁계획위원회는 이어 9월 22일〈일본과 한국을 위한 점령군〉이라는 제목의〈JWPC 358-5〉비밀보고서를 작성했다.
이 보고서는 한반도에 대한 미ㆍ소 점령군의 분할선은 인위적인 38선보다 경기도와 강원도의 행정구역 경계선과 황해도와 함경남도의 경계선간을 따라 그어져야 한다고 건의했다. 그렇지만 이 건의서는 채택되지 않았다.
제2차대전 말기 미국이 가장 두려워했던 상대는 중국에 있는 일본관동군이었다. 미국은 오키나와 등을 결국 점령하기는 했지만 점령 과정에서 상당히 많은 희생을 치렀다. 그러다 보니 중국에 있는 일본관동군의 엄청난 병력이 두려웠던 것이다.
그래서 미국은 한반도를 자기들이 군사력으로 다 점령하기 어려우니 소련의 병력을 요청한 것이다. 당시 일본군 16만 병력이 한반도에 주둔하고 있었다. 하여 소련군은 38도선 이북에서, 미군은 38도선 이남에서 일본군을 무장해제하게 된다. 한민족의 장래에 대해서는 세계열강 어느 나라도 관심이 없었다.
미국은 한국의 역사적 맥락 등은 전혀 감안하지 않고 단지 일본군 무장해제와 전후 처리 일환으로 한반도를, 그것도 미국 육군 대령 두 사람이 30분 만에 획정한 38도선으로 가른 것이다. 미국은 오로지 전후 소련을 어떻게 효과적으로 봉쇄할 것인가에만 관심이 있었다.
북위 38도선을 기준으로 남북을 가르니까 소련 측에서는 깜짝 놀랐다. 자기들은 별로 한 일이 없으니 북위 40도 이북만 줘도 감지덕지라고 생각했는데 '38도선'으로 가르니 놀랄밖에.
소련으로서는 순순히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호조건이었다. 놀랍기는 미국도 마찬가지였다. 소련이 이토록 쉽게 승락한다는 말인가, 소련의 역량으로 봐서는 더 내놓으라고 할 수도 있었다는 것이다.
결국 우리 민족은 열강의 패권 다툼에서 희생양이 되고 말았다. 마치 도마 위에 놓인 생선의 운명이 된 것이다. 민족 분단이라는 비극은 이처럼 어이없이, 국제열강의 이해 다툼에서 비롯되었다.
일본은 한반도가 분단될 것을 기대하면서 항복 시점을 고르다가 8월 10일 스웨덴 대사관을 통해 미국에 항복 의사를 전했다. 그리고 15일 항복을 선언했다.
▲ 나가사키 원폭 피해의 폐허와 참상을 상징했던 우라카미 천주당. 수많은 시민이 보존을 외쳤지만, 결국 나가사키시는 철거와 재건을 강행해버렸다. | |
ⓒ 미육군병리학연구소 반환사진(나가사키시 홈페이지 |
두 차례 원자폭탄 투하로 자국민 25만 명이나 희생되었는 데도 일본 정부는 왜 곧바로 항복을 하지 않고 굳이 소련군의 참전을 기다렸는가. 그리고 소련이 선전포고를 하고 만주를 통해 북한으로 병력을 이동할 시점에 항복을 했는가.
일본이 즉각적으로 항복하지 않은 이유는 이렇다. 소련이 참전하기 전에 항복을 해버리면 소련이 개입할 여지가 없으므로 한반도가 분단될 이유가 전혀 없었다. 이걸 일본정부 전략가들이 내다 본 것이다. 소련이 참전해서 북한에 진주하면 미국과 소련이 한반도를 분할할 것으로 예상한 것이다.
역사적으로 이것을 뒷받침하는 선례가 있다. 일본은 임진왜란 당시 전세가 불리해지자 명나라에 제안을 한다. 지금의 분단 지형과 상당히 비슷한데, 조선8도 중 남쪽 4개 도를 일본이 차지하고 북쪽 4개 도는 명나라가 차지하자는 것이다.
▲ 원자폭탄이 떨어진 일본 규슈 나가사키시의 폭심공원. 이곳 상공 500미터에서 폭탄이 터졌다. 당시 이곳은 주택가였으며, 현재는 공원으로 꾸며졌다. 사진을 찍는 순간에도 한 시민이 찾아와 희생자들을 추모하는 묵념을 하고 있었다. | |
ⓒ 오마이뉴스 장재완 |
그래서 임진왜란 당시부터 어떻게든 한반도를 분단시키려고 했는데, 마침내 그 순간이 온 것이다. 며칠만 버티면, 소련이 이미 참전하겠다고 했기 때문에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자폭탄 세례를 받으면서도 소련의 참전을 기다린 것이다. 소련의 참전을 계기로 한반도가 분단될 것이라고 확신했기 때문이다. 일본의 한반도 분열책은 현재진행형이다.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2514541#dvOpin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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