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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세인을 키운 것은 키신저와 럼스펠드였다" - 프레시안/ "빈 라덴-후세인은 레이건의 자식들" - 오마이뉴스

천사요정 2019. 3. 10. 22:31

"후세인을 키운 것은 키신저와 럼스펠드였다"


김재명의 뉴욕통신 <26> 미 기밀서류로 본 미국-후세인 유착


1년 전 3.20 침공으로 미국은 사담 후세인 정권을 무너뜨렸다. 그러나 1970년대와 80년대 미국은 이라크와의 관계 정상화에 노력했고, 후세인의 권력강화를 도왔다. 특히 호메이니 혁명으로 1979년 이란의 친미왕조가 무너진 뒤 미국은 이라크를 완충지대 삼아 이란이 미국의 중동 이해관계(석유 공급선의 안정과 이스라엘 안보)에 끼치는 위협을 막으려 했다. 위와 같은 사실들은 미 조지워싱턴대 부설기구인 국가안보기록보존소(The National Security Archive)가 비밀해제된 미국 정부의 문서들을 내놓음으로써 밝혀졌다.

(사진) 최근 공개된 미 정부 기밀서류는 미국과 후세인의 끈끈한 유착관계를 잘 드러낸다. (@ National Security Archive) 

이 기밀문서들은 1970년대 포드행정부 시절 헨리 키신저 전 국무장관(1973-1977년)이 그의 고위 보좌관들과 나눈 대화록, 키신저 국무와 이라크 외무차관과의 회담기록, 런던주재 미 대사관이 국무부에 보낸 비밀전문(電文), 레이건 특사 럼스펠드에 보낸 슐츠 미 국무의 훈령 등이다. 이들 문건들은 1970년대 중반에서 1980년대 중반에 걸쳐 사담 후세인과 유착하려는 미국의 노력을 비롯한 미-이라크 양국 관계의 비화들을 전하고 있다.

미국은 이란-이라크 전쟁(1980-1988년) 초기엔 중립을 선언했었다. 그러나 이라크가 이란에 밀리기 시작하자, 걸프만 일대의 미 석유이권을 지키려면 이란을 견제해야 할 필요성이 커졌다. 레이건 행정부 고위관계자들은 1983년 11월26일 ‘국가안보 결정지침(National Security Decision Directive), 약칭 NSDD 114 문건으로써 이란-이라크전쟁과 관련한 미국의 중동정책을 새로이 다듬었다. 

그 주요내용은 ▷미국의 이권이 걸린 중동 석유지대를 지키기 위한 군사적 협력을 강화하고, ▷걸프만에서의 미군 작전능력을 높이는 조치를 취하며, ▷미 국무와 국방, 그리고 합참의장이 함께 걸프만 일대의 긴장이 높아 가는 데 맞서 적절한 조치를 취하도록 하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1970년대 포드 행정부에서 국방장관을 지낸 도널드 럼스펠드(당시 다국적 제약회사 Searle 회장, 현 미 국방장관)가 레이건 대통령의 특사로 이라크에 파견돼, 사담 후세인과 회담을 가진 것도 중동지역 미국 이권을 지키기 위한 포석이었다.

1983년 12월20일 럼스펠드는 이라크 바그다드 대통령궁에서 후세인을 만나 악수를 나누었다. 두 사람은 90분 동안에 걸쳐 우호적인 분위기 속에 밀담을 나누었다. 당시 레이건 행정부는 럼스펠드에게 “미국은 이란의 승리를 막기 위해 필요한 모든 지원을 아끼지 않겠다”는 점을 후세인에게 분명히 밝히라는 지침을 내리고 있었다. 후세인을 만났을 때 럼스펠드는 이라크가 이란군에 대해 화학무기를 사용하고 있는 점을 전혀 비난하지 않았다. 럼스펠드의 이라크 2차방문은 3개월 뒤인 다음해 3월에 이뤄졌고, 이라크 외무장관 타리크 아지즈를 만났다. 바그다드로 향하는 럼스펠드에게 당시 국무장관 슐츠는 비밀전문을 보내 “미국의 이라크 지지를 강조하라”는 지침을 다시 한번 강조했다. 

2차에 걸친 럼스펠드의 바그다드 방문이 이뤄졌을 무렵, 이라크는 국토면적에서나 인구에서 대국인 이란군의 공세에 밀려 마즈눈 유전지대를 빼앗기는 등 고전하고 있었다. 미국은 군사정보와 물자를 비롯해 물심 양면으로 후세인 정권을 지원했다. 미 백악관과 국무부는 수출입은행을 비롯한 국제금융기관들에 압력을 가해 이라크의 전쟁비용을 대주도록 했다. 1982년 미 국무부는 국제테러리즘 지원국가 명단에서 이라크를 뺐다. 럼스펠드 방문이 있은 지 1년도 못돼 미-이라크는 닫혔던 외교관계를 텄다(1984년11월).

당시 이라크는 이란-이라크 전에서 화학무기를 사용함으로써 국제법을 잇달아 어기고 있었다. 미국은 형식적인 비난성명을 발표했을 뿐, 이라크 지도자들에겐 후세인 정권 지지를 분명히 거듭 밝혔었다. 이는 2003년 3.20 이라크침공 때 이라크의 대량살상무기(WMD)를 침공명분의 하나로 삼았던 것과는 너무 대조적이다. 1970년대 포드 행정부, 1980년대 레이건 행정부로 이어온 미 공화당 정권의 대이라크 유화정책(appeasement policy)을 보여주는 문제의 기밀서류들을 살펴본다.(이 글은 <월간중앙> 3월호에 실린 것을 다시 정리한 것임).

***<기밀서류 1> 키신저 국무와 하마디 이라크 외무의 대화록(1975년 12월17일)**

***“미국은 쿠르드족 문제에 개입하지 않겠으니, 걱정 마라”**

1975년 말 양국 외무장관(헨리 키신저 미 국무-사둔 하마디 이라크 외무)이 프랑스 파리 주재 이라크대사관저에서 만났다. 두 사람의 회동이 있기 전까지 양국 외무장관급 대화는 여러 해 동안 이뤄지지 않았었다. 1967년 6일전쟁 뒤, 특히 1973년 중동전쟁에서 미국이 이스라엘을 적극 밀어 전쟁의 승패에 영향을 끼쳤다. 이로 인해 이라크는 다른 이슬람권 국가들과 마찬가지로 미국과의 관계를 닫고 있었다. 키신저 국무는 미국의 이슬람권 관계 정상화 노력의 일환으로 이라크 외무장관과의 면담을 요청했다. 

▶키신저 국무= 최근 몇 년 동안 양국은 접촉이 없었다. 우리의 만남이 앞으로 양국 간에 더 빈번한 교류의 기회로 삼자. 국가이익 측면에서 미-이라크 관계를 가로막는 기본적인 걸림돌이 있다고 보지 않는다. 당신의 견해는 다르겠지만... 

▶하마디 외무= 물론 다르다. 양국 사이에 접촉이 드물었던 까닭을 우린 서로 잘 알고 있다. 이라크는 아랍의 일원이다. 우리는 미국이 오늘의 이스라엘이 있도록 만든 주역이라 믿는다. 1948년 독립국가를 이룬 이래 미국의 도움 없이는 오늘날까지 살아남지 못했을 것이다. 오늘날 이스라엘은 이라크의 안보를 직접적으로 위협 중이다. 미국은 보다 정교한(sophisticated) 무기들을 이스라엘에 대줘왔다. 이는 아랍세계를 심각하게 위협하는 처사다. 미국은 이스라엘을 중동지역에서 군사강국으로 만들고 있다. 이스라엘은 지금 핵무기를 지닌 군사강국이면서도 아랍세계에 어떤 변화가 일어나기만 하면, 그것이 이스라엘의 안보를 위협한다고 주장한다. 이스라엘은 현재의 국경선에 만족하지 않고 기회다 싶으면 늘 분쟁을 일으켜 바깥으로 팽창하려 든다. 경험적 사실들이 이를 말해준다. 특히 우리는 회교도와 기독교도들의 충돌로 내전상태인 레바논사태를 핑계로 이스라엘이 군사적 개입을 하지 않을까 걱정하고 있다.(이스라엘의 레바논 침공은 3년 뒤인 1978년에 일어났다-역자 주).

▶키신저 국무= 당신의 말뜻을 이해한다. 미국은 군사개입은 안 된다고 이스라엘에 강력히 경고했다. 이스라엘의 레바논 사태 개입은 또 다른 10만명의 아랍인들을 이스라엘 지배 아래 몰아넣을 뿐 중동 평화를 더 어렵게 만들뿐이다. 그렇지만 이스라엘이 아랍세계에 언제까지나 위협이 되리라 보진 않는다. 어떻게 인구 3백만 국가가 위협이 될 수 있겠나? 내 생각엔 10년이나 15년 뒤 이스라엘은 레바논처럼 아랍세계에 이렇다 할 영향력도 없이 생존에 급급한 작은 나라로 머물 것이다. 미국은 이스라엘의 생존을 바랄 뿐, 중동지역을 이스라엘이 지배하는 걸 바라지 않는다. 솔직히 말하자면, 지금 이스라엘은 나를 국무장관 자리에서 몰아내고 싶어한다. 

▶하마디 외무= 언론보도를 보면, 미국이 이라크 북부의 친이란계 쿠르드(Kurd)족에게 무기를 대줬다고 한다. 쿠르드 족 문제는 어떻게 보는가? 

▶키신저 국무= 지난날 이라크가 소련의 위성국가라고 여길 때는 이란이 쿠르드 지역에서 활동하는 것을 미국은 반대하지 않았다. 지금은 이란-이라크가 쿠르드족 문제를 놓고 타협을 봤으므로 미국이 개입할 이유가 없다. 내가 약속하지만, 미국은 이라크의 현 국경선에 영향을 미칠 어떤 형태의 개입도 하지 않을 것이다.(쿠르드족 분리독립문제에 관한 한 미국은 이라크 정부를 지지하겠다는 약속이다-역자 주). 

▶하마디 외무= 그렇다면 이라크도 미-이라크 두 나라 관계 개선에 반대할 이유는 없다. 두 나라는 서로의 국내문제엔 간섭하지 말아야 한다. 이라크에 들어와 활동하는 몇몇 미국 기업들은 아주 공평한 대접을 받고 있다. 끝으로 쿠르드족 문제는 우리 이라크로선 매우 중요하다는 점을 다시 한번 강조하고 싶다. 

▶키신저 국무= 미국의 대이라크 정책이 냉담한(unsympathetic) 것은 아니다. 걱정하지말고 지켜 봐달라. 

***<기밀서류 2> 조지 슐츠 미 국무가 럼스펠드에게 보낸 비밀 훈령(1984년 3월24일)**

***“미국이 이라크 지지한다는 걸 확신시켜라”** 

미 국무장관 조지 슐츠는 1984년 3월 바그다드 2차 방문길에 나선 럼스펠드 앞으로 비밀전문(電文)을 보냈다. 럼스펠드가 바그다드에서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가를 담은 일종의 훈령이었다. 럼스펠드의 이라크 방문 직전 미국은 이란-이라크 전쟁에서 이라크가 화학무기를 사용했던 점을 비난하는 성명을 발표, 이라크 쪽으로부터 강력한 항의를 받았다. 그런 앙금과 긴장은 럼펠드의 이라크 방문 당시까지도 이어졌다. 슐츠 국무는 그 비밀전문에서 이라크 권력 1인자인 사담 후세인이나 타리크 아지즈 외무장관을 면담하는 것이 중요하며, 이들을 만났을 때 ‘미국이 미-이라크 양국관계 증진을 바란다는 점을 확신시키라’는 훈령을 내렸다. 그 이틀 뒤 럼스펠드는 6시간 동안의 짧은 이라크 방문 일정 속에서 아지즈 외무장관을 만났다. 아래는 국무부 비밀전문의 요약. 

지난 12월 럼스펠드 당신이 이라크를 방문한 뒤로부터 3개월 동안에 두 가지 사건이 바그다드 분위기를 악화시켰다. 첫째, 이라크는 이란의 대공세를 제대로 물리치지 못하는 상황이다. 전략적으로 중요한 마즈눈 유전지대를 이란에 빼앗겼고, 많은 사상자를 냈다. 둘째, 지난 3월5일 미국이 이란군을 향해 이라크군이 화학무기를 썼던 사실을 비난하는 성명을 내자, 미-이라크 양국 사이는 급격히 얼어붙었다. 이 같은 두 측면을 감안할 때, 이라크 지도자들과의 면담에서 그들은 아랍-이스라엘 분쟁이나 레바논 사태 등에 대해 별로 관심을 보이지 않을 것이다. 전황(戰況)이 더욱 나빠지면서 그들은 살아남느냐의 문제에 매달려 있다. 이런 긴급상황에서도 사담 후세인이나 타리크 아지즈가 당신을 접견한다면, 그것은 이라크 정부가 미-이라크 관계증진에 관심을 갖고 있고, 미국이 이란-이라크 전쟁에서 이라크를 얼마나 도울 것인가에 관심을 갖고 있다는 점을 뜻한다. 

지난 3월15일 워싱턴에서 나(슐츠 국무)와 이글버거 국무차관이 이라크 외무차관 이스메트 키타니를 만났다. 우리 두 사람은 미국이 낸 화학무기 비난성명은 생화학무기 사용을 엄격히 반대하는 미국의 정책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점을 키타니에게 설명했다. 아울러 미국은 첫째, 이란-이라크 전쟁에서 이란이 승리하는 것을 바라지 않고, 둘째, 미-이라크 관계를 증진시키길 바란다고 강조했다. 우리는 또한 미 부통령이 타리크 아지즈 외무장관을 워싱턴으로 초청한다는 말을 전했다. 그러나 키타니는 미국의 화학무기 비난성명을 납득할 수 없다는 태도를 보였다. 당신의 이라크 방문 길에도 그 비난성명에 대한 이라크 쪽의 거센 항의가 다시 이어질 것이다. 

이란 호메이니를 겨냥한 미국의 적대적인 정책, 그리고 이와는 대조적으로 이스라엘, 요르단, 이집트에 대한 우호정책을 지켜보면서 이라크 관리들은 미국의 중동정책에 혼란을 느끼는 듯하다. 이글버거 차관은 미 우방국들의 무기들이 이란으로 유입되는 것을 막기 위한 조치들을 이라크 키타니 외무차관에게 구체적으로 설명했다. 미국의 한결같은 이라크 지지정책을 확신시키려는 뜻에서였다. 이라크 지도부는 이런 사실들을 잘 알고 있을 것이다. 이라크는 이스라엘이 이란에 계속 무기들을 수출하지 못하도록 미국이 제동을 걸어주길 바라고 있다. 당신은 이라크 지도자들을 만난다면, “미국은 이스라엘 당국에 이란으로의 무기수출이 지닌 문제점을 다시 한번 지적했다”고 강조하길 바란다. 

***<기밀서류 3> 럼스펠드의 후세인 면담 보고서(1983년 12월21일)**

***“후세인, 레이건 대통령 친서 받고 크게 만족”** 

영국 런던 주재 미 대사관이 미 국무부로 보낸 ‘럼스펠드의 임무; 1983년 12월20일 이라크 대통령 사담 후세인과의 면담’이란 제목의 비밀전문. 레이건 대통령의 특사 자격으로 이라크를 방문한 럼스펠드는 바드다드 대통령궁에서 사담 후세인을 만나 레이건의 친서를 전달했다. 두 사람은 90분 동안에 걸쳐 레바논, 팔레스타인 문제, 그리고 이란-이라크 전쟁에서 이라크가 열세에 몰린 상황을 둘러싼 미-이라크 공동관심사와 미국의 대(對)이란 무기유입 차단노력을 둘러싼 대화를 나누었다. 럼스펠드는 그 자리에서 이라크가 화학무기를 이란-이라크 전쟁에서 사용해선 안된다는 말을 하지 않았다. 

럼스펠드는 이란군의 공세로 페르시아만 석유 수출길이 위협받고, 시리아(이란의 동맹국)로 통하는 송유관이 막힌 상황에 내몰린 후세인에게 송유관 건설을 제안했다. 요르단 남부 홍해 지역의 아카바 항구로 통하는 송유관 건설 아이디어였다. 후세인은 ‘이스라엘의 위협으로부터 송유관의 안전을 미국이 보장해준다면...’하며 긍정적으로 검토할 뜻을 비쳤다. 이란-이라크 전쟁에서 고전하는 후세인 지원 방안 협의와 더불어, 이라크 유전지대와 요르단 남부항구 아카바를 잇는 송유관 건설은 럼스펠드의 바그다드 방문 목적 가운데 중요한 안건이었다. 여기에는 조지 슐츠 미 국무와 관련이 깊은 미 건설회사 벡텔 그룹의 로비가 숨어있다.(슐츠 국무는 벡텔 그룹 회장 출신). 미 국무부는 럼스펠드-후세인 회담을 가리켜 미-이라크 관계 증진을 위한 이정표(milestone)를 세웠다는 평가를 내렸다. 다음은 영국 런던 주재 미 대사관의 기록 요지. 

럼스펠드를 접견하면서 사담 후세인은 레이건 대통령의 친서를 건네 받은 데 이어 럼스펠드로부터 “미-이라크 양국관계를 회복하는 데 걸림돌이 무엇이든 모두 제거됐다”는 말을 듣자, 아주 만족스런 표정을 지었다. 면담은 이라크 외무장관 타리크 아지즈와 통역자가 배석한 가운데 90분 동안 이어졌다. 우리 내부의 판단으로는 이번 럼스펠드-후세인의 만남은 미-이라크 관계발전에 도움이 되는 획기적 사건이며 중근동 지역에서의 미국의 입장에 크게 도움이 될 것으로 보인다. 

그 날 면담에서 사담 후세인과 타리크 아지즈는 모두 군복 차림에 허리엔 권총을 차고 있었다. 두 사람은 활기차고 자신감에 넘치는 표정이었다. 후세인은 럼스펠드에게 세가지 측면에서 기쁘다고 말했다. “첫째, (럼스펠드와) 진지하고 솔직한 정치적 논의를 하게돼 기쁘다. 둘째, 이란-이라크전쟁의 의미와 (이란이 승리할 경우의) 위험성을 지적한 레이건 대통령의 친서를 받아 기쁘다. 셋째, 미국이 이라크와 관계증진을 바란다는 점을 확인하고 기쁘다”고 말했다. 

***“미친 놈들이 서로 할퀴도록 놔둬라”** 

대화 주제를 아랍국가들 쪽으로 바꿔, 후세인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아랍세계엔 매우 부자인 나라들과 매우 가난한 나라들이 섞여 있다. 그런데 서방국가들은 아랍국가들이 소련의 영향력 아래 머물러 있길 바라지 않는다. 우리 아랍국가들도 동서 양진영 슈퍼 파워 어느 쪽 그늘에도 머물길 바라지 않는다. 미국, 영국, 프랑스, 일본 등은 중동의 가난한 국가들이 소련의 영향력으로부터 벗어나게 하려면 그들을 재정적으로 도와야 할 것이다”

후세인은 미국의 대중동정책을 비판했다. “미국은 시리아의 레바논 침공(레바논의 기독교세력과 이슬람세력이 내전을 벌이자, 1976년 시리아가 군사 개입한 것을 가리킴-역자 주)이나 걸프전쟁(이란-이라크전쟁을 뜻함-역자 주)에 처음부터 강건너 불구경하듯 관심이 없었다. 마치 ‘이 미친 놈(lunatics)들이 서로를 할퀴도록 내버려 두라’는 투였다. 시오니스트(이스라엘)들도 그 불이 오히려 더 커지길 바래왔다. 만약 이라크가 나서지 않으면 누가 그 불을 끄겠나? 만약 시리아와 (1978년 레바논을 침공한) 이스라엘이 레바논을 나눠먹는 걸 미국이 막지 않는다면 독립국가로서의 레바논은 사라질 것이다. 미국은 이스라엘에 압력을 가해 레바논에서 철수하도록 만들고, 우리 아랍국가들도 시리아에 마찬가지로 철수 압력을 가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어느 국가든 약소국들을 침략해 차지하고픈 유혹을 느끼게 될 것이다”

이어 후세인은 현재 진행중인 이라크-이란 전쟁이 빨리 끝나길 바란다고 말했다. “이라크-이란 전쟁도 마찬가지다. 남들이 가만히 구경만 하고 있던 지난 4년 동안, 우리 이라크는 군사적으로 어려운 고비를 맞이했었으나 이제 극복하는 단계다. 지금은 언제 전쟁이 끝날 것인가는 시간문제일 뿐이다. 이라크는 전쟁이 오래 끄는 걸 반기지 않는다” 이에 럼스펠드는 “이라크 대통령과 더불어 서로의 생각을 나눌 기회를 만들어 줘 감사 드린다”고 말했다.

이어 럼스펠드는 이란-이라크전쟁에서 미국이 이란으로 무기가 선적되는 것을 막으려 노력하고 있음을 상기시켰다. “미국은 이라크-이란 전쟁으로 중동지역이 더욱 큰 불안정 속에 빠져드는 것을 바라지 않으며, 더구나 이라크가 전쟁으로 약해지거나 이란이 이익을 챙기고 야망을 키우는 것을 바라지 않는다. 미국은 이라크의 주권이 지켜지고 이란의 세력이 커지지 않는 선에서 전쟁이 평화적으로 매듭지어지길 바라고 있다. 이란과 시리아의 세력이 커지는 걸 막아야 한다는 점에서 미국과 이라크는 공통의 이해관계에 있다. 미국은 다른 국가들이 이란으로 무기를 수출하지 말라고 촉구해왔고, 미국의 통제(control) 아래 있는 제3국들의 대이란 무기송출을 성공적으로 막아왔다” 

***럼스펠드의 송유관 건설 제안 뒤엔?** 

후세인은 이란군 공세와 시리아의 적대적 행위로 석유 수출이 어렵다는 점을 언급했다. “이라크-이란 전쟁이 날로 커져가고 있는 점과 관련, 이란이 이라크의 인내심을 오해하지 말았으면 한다. 전쟁 중에도 이란은 계속 석유를 수출하지만, 이라크는 페르시아 만으로나 시리아 쪽으로 이어지는 송유관이 폐쇄되는 바람에 석유수출길이 막혀 버렸다. 교전국 쌍방이 페르시아 만 지역에서 군사적 균형을 유지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그럼으로써 이란은 물론 이라크도 페르시아만 지역으로 석유를 수출할 수 있도록 하자는 것이 후세인의 희망사항이었다.-역자 주). 

후세인의 이 말을 받아 럼스펠드는 “이라크 석유가 안정적으로 수출돼야 한다는 후세인 대통령의 견해에도 전적으로 동의한다. 아지즈 외무장관과 어제 저녁 요르단 남부 아카바로 통하는 새로운 송유관 건설에 대해 논의했다”고 밝혔다. 이어진 후세인의 발언. “지난날 이라크는 레바논으로 이어지는 송유관 건설에 그다지 관심을 두지 않았다. 이스라엘의 방해와 위협이 걱정됐기 때문이다. 이제 미국 정부와 미국 기업들이 아카바 송유관 건설에 관심을 둔다면, 우리는 이를 다시 검토해보겠다. 이라크와 미국의 이해관계가 일치한다면, 미국이 (이스라엘의 위협으로부터) 송유관의 안전을 보장해줄 수 있지 않겠는가”

(이란-이라크 전쟁에서 고전하는 후세인 지원 방안 협의와 더불어, 이라크 유전지대와 요르단 남부항구 아카바를 잇는 송유관 건설은 럼스펠드의 바그다드 방문 목적 가운데 중요한 안건이었다. 사담 후세인이 ‘미국기업이 관심을 갖고 있다면...’하고 언급한 미 기업은 바로 2003년 미국의 이라크 침공 뒤 대형 건설수주를 독차지하고 있는 건설회사 벡텔 그룹이다. 1984년 당시 벡텔 그룹은 아카바 송유관 건설사업에 큰 관심을 갖고 로비를 벌이고 있었다. 럼스펠드를 바드다드로 파견했던 조지 슐츠 미 국무는 1974년부터 무려 8년 동안 건설회사 벡텔 그룹의 회장을 지낸 인물이다. 여기서 이른바 정실자본주의의 한 단면을 보게된다-역자 주). 

<관련링크> http://www.gwu.edu/~nsarchiv/NSAEBB/NSAEBB107/index.htm
http://www.gwu.edu/~nsarchiv/NSAEBB/NSAEBB82/ 



http://www.pressian.com/news/article/?no=43863#09T0



"빈 라덴-후세인은 레이건의 자식들"


[오마이뉴스 김태경 기자]

로널드 레이건 전 대통령의 장례가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9일(현지 시각) 수도 워싱턴의 국회 의사당에 안치된 그의 관은 11일까지 34시간동안 조문객에 공개된다. 레이건 대통령의 열렬한 팬인 조지 부시 대통령은 연일 레이건에 대해 찬사를 보내고 있다. 미 공화당은 레이건에 대한 미국민들의 향수가 올 11월에 열리는 대선에 도움이 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그러나 오늘날 미국의 우환거리가 된 오사마 빈 라덴과 사담 후세인이 성장할 수 있는 자양분은 사실 레이건 정권이 제공했다.


미 워싱턴포스트는 "테러와의 전쟁을 벌이고 있는 미국에 최대 위협으로 간주되고 있는 오사마 빈 라덴과 한때 임박한 위협으로 간주됐던 사담 후세인의 이라크는 지난 80년대 초반과 중반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 시절이 남긴 유산"이라고 9일 보도했다.


무자헤딘 적극 지원 무자헤딘과 오사마 빈 라덴은 지난 1980년대 소련군의 아프가니스탄 침공 무렵 미국의 지원으로 성장했다.


지난 1978년 아프가니스탄에 좌익 군부 쿠데타가 일어나 아프가니스탄 인민민주당이 정권을 잡았다. 이들은 마르크스주의에 입각한 개혁을 단행했다. 아프가니스탄 여성들의 권리가 가장 강했을 때가 바로 이 때였다. 그러나 이런 개혁은 이슬람 전통과 정면으로 배치됐고 전국적인 저항이 일어났다. 인민민주당 정권은 급격하게 쇠약해졌고 1979년에는 하피줄라 아민이 다시 정권을 잡았다. 그러나 그는 소련의 간섭을 거부했다.


아프가니스탄은 소련에게 전략적 요충지였다. 1979년 소련은 국경을 넘어 침공했고 이슬람 전사들의 저항이 시작됐다. 아프가니스탄인들 뿐만 아니라 전 세계 각국에서 무자헤딘들이 몰려들었다.

그러나 처음에 무자헤딘들은 소련군의 상대가 안됐다. 이런 소련 군에 큰 타격을 준 것이 바로 미국이 지원한 무기들이었다. 소련군 무장헬기는 미국이 무자헤딘들에게 공급한 휴대용 지대공 미사일 "스팅어"에 속속 격추되기 시작했다.


레이건 정권은 그 자신이 "악의 제국"으로 불렀던 소련을 아프가니스탄에서 패퇴시키기 위해 막대한 지원을 했다. 1982년에 3500만달러였던 지원금은 1987년 6억달러로 늘어났다. 미 CIA와 특수부대 요원들이 직접 무자헤딘들에게 군사 훈련과 무기 조작법을 가르쳤다. 지하드를 위해 아프가니스탄에 왔던 오사마 빈 라덴도 이때 미 CIA와 관계를 맺었다.


미국의 도움이 없었으면 무자헤딘들이 소련군에게 그토록 타격을 줄 수 없었을 것이다.

피투성이 소련군 서방 TV에 방송당시 서방 기자들도 무자헤딘들의 환영을 받았다. 서방 기자들은 무자헤딘과 동행해 이들이 소련군을 공격하는 장면을 촬영해 방송하기도 했다. 무자헤딘들의 로켓포를 맞고 불타는 장갑차, 이 장갑차 안에서 팔 다리가 잘려나간 채 신음하고 있는 소련군의 모습이 방송되기도 했다.


아프가니스탄은 소련에게 "베트남"이 되어갔다. 경제난에 봉착한 소련은 더 이상 아프가니스탄 전쟁을 끌고 갈 수 없었다. 결국 소련군은 1989년 1만4500명의 전사자를 남긴 채 철수했다.


부시 정권의 대 테러전쟁 자문관인 리처드 클라크는 최근 발간한 "모든 적에 대항하여"라는 책에서 "오사마 빈 라덴을 포함한 "아랍군"(무자헤딘)을 도왔던 것은 레이건 정권이 저지른 4개의 큰 실수 가운데 하나"라고 말했다.


소련군이 1989년 철수한 뒤 아프가니스탄은 군벌간의 극심한 내전 상태에 들어갔다. 그러던중 지난 1994년 탈레반이라고 불리는 학생운동 출신 강경파 이슬람 세력이 등장했고 결국 정권을 잡게 되었다.


럼스펠드는 후세인의 한 때 최고 국빈사담 후세인도 마찬가지다. 지난 1979년 2월 아야톨라 호메이니가 주도하는 이슬람 혁명이 이란에서 발생해 친미 팔레비 정권을 타도했다. 호메이니는 여기에 그치지 않고 이슬람 혁명의 수출을 공언했다. 이는 친미 왕정이 집권하고 있던 사우디 아라비아, 쿠웨이트 등 걸프 연안국들에게 큰 위협이 됐다.


그런데 1979년 정권을 잡은 후세인은 "페르시아의 경찰" 이란을 제끼고 아랍의 맹주가 되고 싶었다. 친미 걸프 연안국들은 이란의 이슬람 혁명 수출을 막아야 했다. 물론 이란의 혁명 수출을 막는 것은 미국의 최고 관심사이기도 했다.


지난 1980년 9월 이라크가 이란을 침공해 전쟁이 발생했다. 겉으로는 양국의 국경지역인 샤트 알-아랍(Shatt al-Arab)수로에 관한 영유권 문제가 원인이었다. 그러나 그 이면에는 이제 막 탄생한 이란 호메이니 정권을 약화시키려는 의도가 있었다. 이는 친미 걸프 연안국들이 그동안 친 소국가였던 이라크를 지지한데 비해, 시리아, 리비아 등의 친 소 국가들이 인종이 전혀 다른 이란을 지지한데서도 드러난다. 이란-이라크 전쟁 때 걸프 연안국들 가운데 가장 많은 지원을 한 나라가 바로 쿠웨이트였다.


미국도 이라크를 막대하게 지원했다. 1982년 2월 미 국무부는 테러 지원국 명단에서 슬그머니 이라크의 이름을 빼 이라크에 대한 지원 장애물을 없앴다.


케네스 폴락은 최근 저서에서 "곧이어 미국은 군사 위성으로 얻은 정보를 이라크에 제공하기 시작했다"며 "예를들어 알-바스라를 보호하고 있는 요새의 치명적인 약점을 이라크군에 제공했고 이 때문에 이란군은 곧 이어 벌어진 전투에서 패배했다"고 전했다.


현재 국방장관인 도널드 럼스펠드는 당시 중동특사로 1983년 12월 이라크를 비밀리에 방문해 막대한 지원을 약속했다. 미국은 UH-1H 및 500MD 헬리콥터를 이라크에 사실상 무상으로 팔았다. 겉으로는 민수용이었지만 순식간에 군용으로 전용될 수 있는 장비였다. 무기 외에 식량까지 제공하기 시작했다.


이라크군은 이란군에게 뿐만 아니라 내부의 쿠르드족에게도 화학무기를 사용했다고 알려져 있다. 지난 1983년과 1987년에 이를 사용했음이 대단히 구체적으로 확인되고 있다. 그러나 미국은 당시 이에 대해 전혀 비판하지 않았다. 지난 1991년 이전에 이라크가 보유하고 있던 대량살상무기는 프랑스와 독일의 기술은 물론, 더 나아가 기술을 수출한 미국 때문에 가능했다고 알려져있다.


/김태경 기자 (gauzari@ohmynews.com)

https://news.v.daum.net/v/20040610031321764?f=o




"후세인, 미국의 '어두운 비밀' 안고 잠들다"




2007.01.02 12:15:00

지난 달 30일 교수형에 처해진 사담 후세인 전 이라크 대통령이 과거 정권을 잡고 이란과의 '8년전쟁'에서 승리하는 과정에는 미국과 영국 등 서방의 든든한 지원이 배경으로 작용했다는 것은 공공연한 비밀이다.

미국은 특히 이란의 팽창을 저지하고 중동 내 공산주의의 확산을 차단하기 위해 이라크에 각종 군사정보를 제공하기도 했다.

영국 일간 <인디펜던트>의 중동 전문기자 로버트 피스크는 "1991년 걸프전쟁 직전까지 미국 군수지원의 전말을 알고 있는 후세인이 영면(永眠)함으로써 이 은밀한 거래가 세간에 알려질까 초조해 했던 워싱턴 인사들이 안도의 한숨을 쉬고 있다"며 후세인의 집권에서부터 시작된 미국과의 은밀한 거래를 재조명했다.
 

피스크는 특히 미국은 후세인 정권이 테러 조직을 비호했고 대량살상무기를 보유하고 있다며 2003년 이라크를 침공했지만 사실은 80년대부터 후세인 정권의 화학-생물학 무기 보유를 지원해 온 장본인이 미국이며 이라크가 미사일 시스템을 구축하는 데에도 미국의 원조가 상당부분 기여했다고 꼬집었다. 

다음은 후세인이 교수형을 당한 이튿날인 31일자 <인디펜던트>에 실린 기사의 전문이다.

<사담 후세인, 공모자들과 함께 영면> 

▲ 로버트 피스크 기자는 "미국과의 은밀한 관계 전말을 알고 있는 후세인이 교수형을 당함으로써 워싱턴은 안도의 한숨을 쉴 것"이라고 평가했다. ⓒ로이터=뉴시스


우리가 그의 입을 막았다. 어제(30일) 바그다드의 사형 집행관이 후세인 목에 달린 끈을 조이는 순간 워싱턴의 비밀은 안전해졌다. 이로써 10년이 넘도록 미국과 영국이 은밀하게 후세인 정권을 군사적으로 지원해 왔던 사실은 그저 '터무니없는 이야기(terrible story)'로 남게 됐다. 물론 미국의 대통령들과 영국의 총리들도 이 이야기가 잊혀지기를 원했을 터이다. 그렇게 후세인은 자신이 갖은 악독한 독재를 저지를 수 있도록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자신을 꾸준히 후원해 준 서방세계의 이면을 모두 비밀로 안은 채 죽고 말았다. 

이라크 내 공산당을 해체할 목적으로 미 중앙정보국(CIA)의 지원했던 후세인이 죽었다. 후세인이 권력을 잡자 미국의 정보기관은 그의 부하들에게 바그다드를 비롯한 이라크 전역에 살고 있는 공산주의자들의 주소를 넘겨줬다. 소련의 영향력이 이라크에 미치는 것을 방해할 요량이었다. 후세인의 무하바라트(혁명세력을 감시하는 이라크 정보국) 요원들은 주소에 적힌 집들을 일일이 찾아가 공산주의자들을 체포하고 그의 가족들을 학살했다. 많은 일반인들이 반역을 공모했다는 죄목으로 교수형에 처해졌으며 많은 공산주의자들이 사형이 집행되기 전까지 아부그라이브 교도소에 갇혀 극단의 고문에 시달려야 했다.

후세인이 1980년 이란을 침공하기 전 미국 고위관료들을 접촉한 사실은 아랍세계에 공공연하게 알려져 있다. 미국 정부와 후세인은 모두 이라크의 군대가 이란을 무너뜨릴 수 있으리라 생각했고, 그래서 펜타곤은 이라크에 군장비를 지원하라는 지시를 받았다. 1987년의 한 추운 겨울날 나는 쾰른에서 한 독일인 무기상을 만난 적이 있다. 그는 자신이 미국의 요구를 받고 워싱턴과 바그다드 간 연결선 역할을 했다고 주장했다.

"이라크와 이란 간의 전쟁이 막 시작됐던 1980년 9월, 나는 펜타곤으로부터 초대를 받았습니다. 거기서 이란 군의 최전선이 표시돼 있는 최신판 위성사진을 전달받았지요. 그 사진에선 모든 것을 알아볼 수 있었습니다. 아바단(이라크 국경과 인접한 유전도시)이나 호람샤르(이란 3대 도시 중 하나) 내 포의 위치라든지, 쿠란강 동쪽 편을 따라 이어진 참호의 위치, 수 천 개 방벽까지 그 어떤 군대도 이보다 더 자세히 적의 정보를 갖고 있을 수 없었을 겁니다. 나는 이 지도를 들고 워싱턴에서 프랑크푸르트로 건너와 다시 비행기를 타고 바그다드로 갔습니다. 지도를 받아 든 이라크 인들이 얼마나 고마워했던지…."

이라크가 이란을 침공할 때 나는 후세인의 특공대원들과 함께 있었다. 바스라 국경을 지키고 있던 이란의 방벽은 이라크 탱크군단에 금세 뚫려 일주일 만에 쿠란 강 쪽 진로를 내주고 말았다. 당시 탱크군단의 지휘관은 어떻게 이란의 수비가 허술한 곳을 쉽게 알아냈느냐는 내 질문을 유쾌하게 무시했었다. 2년 후 우리가 암만에서 다시 만났을 때 그는 장군이 돼 있었다. 워싱턴이 제공한 정보로 공로를 인정받아 안락하게 승진을 한 셈이다.

이란 측의 공식기록은 사담 후세인이 1981년 1월 13일 처음으로 화학무기를 사용했다고 밝혔다. <AP>통신의 바그다드 특파원이었던 모하메드 살람은 바스라 지역에서 이라크 군대가 승리를 거뒀던 순간을 생생히 기억하고 있었다. 

"걷고 또 걸어도 사막뿐인 땅에서 우리는 숫자를 세었다. 700까지 세면 머리가 멍해져서 처음부터 다시 세야 했다. 이라크는 그때 처음으로 신경가스와 겨자가스를 혼합해 사용했다. 신경가스는 그들(이란 군인들)의 온 몸을 마비시켰고 겨자가스는 폐에 물이 차도록 했다. 그래서 그들은 피를 토했다." 

이란은 사담이 이 '가스 칵테일'을 미국으로부터 받아왔다고 주장했다. 물론 미국은 그 사실을 부인했지만 이란의 주장은 틀리지 않았다. 

"쿠르드인 5000명 죽인 독가스, 사실은 미국의 원조" 

이 모든 것을 알고 있는 사담이 죽음으로써 이라크 독재에 공조해 온 미국과 이라크 간의 긴 밀월관계는 비밀로 남게 된 것이다. 도널드 럼스펠드 전 국방장관은 당시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이 이런 작업을 하는 데 대표 교섭창구로 이용했던 인사기도 하다. 그래도 1985년 작성된 '미국의 이중용도 생화학 무기의 이라크 수출과 걸프전 결과에 미친 영향'에 관한 비공개 보고서는 미국계 회사들이 정부의 승인을 받아 이라크에 탄저균과 대장균을 포함한 다량의 병원체를 선적해 왔다고 증언하고 있다. 이와 관련한 상원의 보고서도 "미국은 이라크 정부가 화학적, 생물학적 무기뿐 아니라 미사일 시스템까지 개발할 수 있을 정도의 이중용도 물품을 지원해 왔다"고 밝혔다. 

펜타곤에서 이라크의 화학무기 사용의 범위를 몰랐던 것도 아니다. 예를 들어 1988년 사담은 미국의 국방정보국 요원인 릭 프랑코나 중령이 이란으로부터 탈환한 파오 반도를 방문할 수 있도록 허가했다. 프랑코나 중령은 이란 군의 배치나 전술 전략, 피해 정도 등에 관한 정보를 빼내 이라크 군에 전달한 60여 명의 미군 관료 중 한 사람이었다. 이라크 방문 후 워싱턴으로 돌아 온 프랑코나 중령은 이라크가 승리한 데에는 화학무기의 공이 컸다고 보고했다. 그의 보고를 받은 워터 랑 대령은 "이라크가 전쟁 중에 가스를 사용한 것이 전략상 문제 될 것은 없다"고 답했다. 

그러나 나는 그 결과물을 봤다. 전장에서부터 테헤란으로 돌아온 긴 환자수송 열차에서는 수백 명의 이란 병사들이 피를 토하고 폐에 찬 점액을 뱉어 냈다. 기차 안에는 악취가 너무 심해서 창문을 열어야만 했고 병사들의 팔과 얼굴은 종기로 뒤덮여 있었다. 나중에는 그 종기에 기포가 생기더니 불에 덴 듯한 상처가 남았다. 

1988년 할라뱌에서 쿠르드인 5000명을 죽인 독가스가 바로 이 가스였다. 사담이 이란에 맞서기 위한 전쟁에서뿐 아니라 이라크 내 반대 종족을 학살하기 위해서도 이 가스를 사용한 것이 그리 놀랄 일은 아니다. 

우리는 미국이 이라크에 얼마나 많은 지원을 해 왔는가를 정확히 알지 못한다. 사담이 죽었으니 앞으로도 영영 알 수 없을지 모른다. 일단 초반에 요르단이나 쿠웨이트에서 미국의 무기를 구매한 양은 얼추 3억 달러 수준이다. 그리고 1987년까지 사담은 약 10억 불의 지원을 약속받았다. 그로부터 사담이 쿠웨이트를 침공하기 전인 1990년까지 미국과 이라크 간의 교역량은 매년 35억 불까지 치솟았다. 타리크 아지즈 이라크 외무장관은 미국의 계속된 지원을 압박했고 제임스 베이커 당시 국무장관은 10억 불짜리 새 보증서를 발급하기도 했다.

1989년에는 은밀하게 군사적 지원을 제공했던 영국도 사담에게 2억5000만 파운드 가량의 보증서를 발급했다. 파자드 바조프트가 스파이 혐의로 체포된 직후였는데 바조프트는 미국에서 보내 온 화학물질을 사용한 힐라 지역의 한 공장을 조사했다는 혐의로 교수형을 당했다. 바조프트가 체포된 지 한 달 만에 윌리엄 월드그레이브 당시 외무장관은 "우리가 외교적 수완만 잘 발휘한다면 영국이 이보다 더 좋은 자리를 차지할 수 있는 상황이 또 있었을까. 바조프트가 일을 그르치고 말았다"고 말했다. 

이보다 더 경멸스러운 경우는 제프리 하우 부총리가 영국 무기의 이라크 수출에 대한 통제를 무력하게 한 일이다. 그는 자신의 결정에 대해서는 일언반구도 하지 않고 있다. "쿠르드인들을 가혹하게 다룬 문제에 대해 분노를 표출하자마자 무기 수출에 대해서는 좀더 유연한 조치를 취한다는 것이 비웃음을 사기에 충분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사담은 1987년 5월 17일 돌연 이라크 제트기가 미국 항공모함을 공격하게 된 배경에 대해서도 잘 알고 있을 터이다. 미국은 이란 선박을 공격하려던 것이었다는 사담의 설명은 물론이고 당시 공격을 맡았던 이라크인 조종사에 대한 탐문수사에 대한 거부도 그대로 받아들였다. 

이 모든 것에 대한 진실은 사담 후세인과 함께 바그다드에 잠들었다. 워싱턴과 런던의 많은 이들은 사담이 영원토록 진실을 지키게 된 데 대해 안도의 한숨을 쉴 것이 분명하다.

http://www.pressian.com/news/article/?no=51165#09T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