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경남 목사는 1980년 5·18 광주민주화운동 당시 진압군으로 투입된 특전사였다. 제11공수여단 63대대 9지역대 소속 일병으로 동료 1000여 명과 함께 5월19일 광주에 투입됐다. 이틀 뒤 5월21일 그는 전남도청 앞 집단 발포 현장을 지켜봤다.
이 목사는 1999년 5·18 광주민주화운동 19주년을 맞아 진압군 측으로서는 처음 수기를 발표했다. ‘5월의 회고-어느 특전병사의 기록’이라는 글이었다. 다음 해 전태일문학상(생활글 기록문 우수상)을 받았다. 두려움과 내부 비난을 무릅쓰고 소속 부대가 저지른 학살극을 뒤늦게 고백한 것이었다. 용기의 밑바탕에는 목회자로서의 양심이 깔려 있었다.
광주 학살에 책임이 있는 전두환 신군부에 대한 분노도 크게 작용했다. 그는 수기 말미에 “아직도 살아서 지난날의 망상을 버리지 못하고 준동하는 전두환씨를 비롯한 5공 신군부 권력자들에게 ‘이 나라에서 당신들이 아직 죽지 않고 살아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감사하며 자숙하라’는 충고를 하고 싶었다”라고 썼다.
그로부터 다시 세월이 흘러 5·18 광주항쟁 39주년이 돌아왔다. 전두환씨를 비롯한 신군부 세력이 여전히 5·18을 왜곡·폄훼하는 요즘, 이경남 목사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경기도 평택의 효덕교회에서 만난 이 목사는 “5·18만 생각하면 매우 착잡하다”라고 입을 열었다. 그는 고 조비오 신부 측에 최근 ‘귀중한 자료’를 보냈다. 조 신부의 조카 조영대 신부는 전두환씨가 낸 회고록에 대해 사자명예훼손 혐의로 고발했고 현재 전씨는 형사재판을 받는 중이다. “5·18재단의 요청을 받고 이번에 전씨 재판부에도 1980년 5월21일 도청 앞 집단 발포에 대한 진술서를 써서 보냈다.
집단 발포 현장의 목격자였던 이 목사의 증언은 중요하다. 5·18의 진실을 왜곡하는 세력의 주장을 반박하는 내용이기 때문이다. 전두환씨는 회고록에서 ‘권 일병이 시위대의 장갑차를 미처 피하지 못해 숨졌다’라고 적었다. 극우 논객 지만원씨는 “시위대의 장갑차가 지그재그로 돌진해 병사 1명을 깔아 죽였다”라고 말한다. 시위대가 훔친 장갑차로 도청 앞을 돌진하다 권 일병이 깔려 죽자 11공수여단이 자위권 발동 차원에서 집단 발포를 했다는 주장이다.
이에 대해 이 목사는 전혀 사실이 아니라고 반박한다. “정오경 차량 시위대가 화염병을 던지며 돌진해오자, 경비 중이던 우리 부대 장갑차가 당황해 급히 후진했다. 그러다 뒤에 있던 권 일병이 캐터필러 밑으로 깔렸다. 내 눈앞에서 권 일병의 몸이 궤도 아래 깔려 입으로 피를 토하며 죽어가던 모습이 지금도 생생하다.”
“시위대를 잔인하게 다루라고 교육받았다”
아버지가 목사였던 이경남씨는 일찍이 목회의 길을 택했다. 1975년 목원대 신학과에 입학한 그는 해방신학에 관심을 가졌다. 이 목사는 1979년 5월 군에 입대했다. 특전사에 배치돼 공수 교육과 대북 침투 특수전 교육을 받고 그해 9월 말 특전사 11공수여단에 배치됐다. 그를 포함한 특전사 공수부대원들의 운명은 10·26 사건으로 하루아침에 바뀐다. 박정희 대통령이 숨지고 전두환 신군부가 권력 공백을 차지하면서, 특전사는 신군부의 정치적 야망을 뒷받침하는 충성부대로 전락했다. 고된 시위 진압 훈련과 비상근무로 지친 공수대원들에게 전두환 신군부는 파격적인 대우로 환심을 샀다. “1980년부터 특전 병사들 봉급 200%와 점프수당 500% 인상을 발표했다. 일병이었던 나도 군 생활을 하면서 돈을 좀 모아 나갈 수 있겠구나 생각할 정도였다.”
1980년 5월 초 강원도 화천에 있던 이경남 일병의 11공수여단 전체가 서울 동국대학교로 이동했다. 광주 투입을 위해 대기하던 공수대원들은 특별 정신교육을 받았다. 강사는 부마 항쟁을 진압한 1공수여단의 한 대대장이었다. “1979년 10월15일 부산·마산에서 민주화 시위가 일어나자 1공수여단을 투입해 무자비하게 진압했다. ‘총검과 박달나무 곤봉을 무차별 사용하고 도시형 장갑차로 깔아뭉개듯 시위대에 질주하니 한순간에 제압되더라. 시위대는 부마 사태를 모델로 무자비하게 다루라’고 교육시켰다.”
이경남 일병의 11공수여단은 5월18일 저녁 커튼으로 창을 가린 기차를 타고 광주로 내려간다. 새벽 3시께 조선대에 도착한 병사들은 아침 일찍 완전군장 차림으로 총검을 장착한 채 트럭에 나눠 탔다. 시내를 돌며 무력시위를 벌였다. 이틀 전부터 전남대·조선대생들의 시위를 진압하던 7공수여단의 잔인한 만행에 시민의 분노가 끓었다. 5월19일 오후가 되자 200~300명씩 모여 구호를 외치는 대학생이 눈에 띄었다. 총검을 들고 진격하는 공수부대원들 앞에서 시위대는 흩어졌다.
이때부터 ‘군인 아니면 적’이라는 이분법이 나타났다. 학생들이 주택과 상가 등으로 들어가면 끝까지 쫓아갔다. 누가 시위대인지 모르니 걸리는 사람은 피범벅이 되었다. “5월19일 오후 우리 부대가 벌이는 폭력을 광주시민들이 다 지켜보고 경악했다. 앞이 보이지 않거나 들리지 않는 이들이 길을 지나가다 군인들 곤봉에 맞았다. 저녁이 되자 시민들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사태가 심각하다고 느낀 부대는 전남도청으로 들어가 자정이던 통금시간을 밤 9시로 당겼다.”
밤 9시로 갑자기 당겨진 통금시간을 넘겨 귀가를 서두르던 젊은 여성들이 특전사의 표적이 되었다. "도서관과 학원에서 뒤늦게 귀가하는 여학생들이 성폭행 대상이었을 것이다. 5·18 기간 광주에서 일어난 성폭행의 상당수는 5월19일 밤에 발생했을 것이다."
이경남 일병은 부대 동료들의 만행에 충격을 받았다. 목회자를 지망하던 신학대학생이던 그는 동료들의 난폭함과 잔인성에 무기력했다. 잠 한숨 못 자고 내려와 눈이 벌게진 상태에서 곧장 시위 진압에 투입돼, 정신교육을 받은 대로 시민을 ‘적’ 또는 ‘빨갱이’로 간주하고 폭력을 자행하는 동료들을 대놓고 막을 수도 없었다. “우리 중대원 중 대학을 다닌 사람은 나뿐이었다. 대부분 ‘민주화’ ‘유신헌법’이 무슨 말인지도 몰랐다. 특전사 군인과 시위하는 학생은 동년배였지만 그들 사이 박탈감과 반감이 컸다. 전두환이 그걸 이용했다.”
당시 신군부는 시위를 무자비하게 진압하면 부마 항쟁처럼 조용해질 줄 알았지만 오산이었다. 백주 대낮에 만행을 지켜본 시민들은 뭉치기 시작했다. “진압작전 때 진압봉으로 때리고 군홧발로 짓이겼다. 시민들이 지나가다가 혹시 당신들 공산군 아니냐고, 국군이면 어떻게 이럴 수 있냐고 묻더라.”
5월20일 도청을 제외하고 광주 시내는 분노한 시민들의 차량 시위대에 장악됐다. 공수대원들은 숙영지인 조선대학교로 복귀하는 길에 소방차량을 앞세운 시위대와 맞부딪쳤다. 시위대는 끌고 간 시위 학생들을 풀어달라고 요구했지만 군은 거절한 채 해산을 시도했다. “밤 9시인데 깜깜한 상태에서 돌이 날아오니 군인들은 시민들을 난폭하게 진압했다. 그때 한 50대 시민이 곤봉에 머리를 맞아 허옇게 뼈가 드러났다. 그대로 두면 죽을 것 같아 둘러업고 근처 교회로 데려갔다.”
교회에는 군인을 피해 온 시위 학생들과 목사가 있었다. 이 일병은 부상당한 시민을 보살펴달라고 부탁한 뒤 교회를 나왔다. 그러나 이미 거리는 시위대가 장악한 상태였다. 완전군장한 공수부대원인 그는 하는 수 없이 교회에서 밤을 지새웠다. 다음 날 새벽 복귀했다. 부대에서는 이 일병이 시위대에 잡혀가 죽은 줄 알고 있었다.
“돌아가니 중대장이 화가 나서 전체 부대원들 앞에서 개 패듯 팼다. ‘여기는 전쟁터야 정신 차려. 네가 밤새 무슨 짓을 했는지 안 봐도 알아. 아무리 신학대 출신이라지만 미친 거 아니냐. 이 상황에서 시민들 보호할 형편이냐’며 죽도록 때렸다. 아픈 것보다 다 보는 데서 맞으니 그게 더 창피하더라.”
5월21일 이경남 일병은 오전 10시부터 도청 앞 전일빌딩 입구에서 시위대와 대치했다. 전날까지 공수부대의 진압으로 시민 9명이 죽었다. 분노한 차량 시위대는 총공세를 벌였다. 11공수여단이 도청 앞에서 장갑차 2대를 선두에 배치해두고 버티던 중 협상이 결렬되자 낮 12시 넘어서 시위대 차량 돌진이 시작됐다. 돌진하던 차량에서는 화염병을 투척했다. 당황한 군 장갑차가 갑자기 후진 퇴각하다가 권○○ 일병이 깔려 숨졌다. “저지선이 무너지고, 군인은 도망가고, 장갑차가 퇴각하니 금남로가 비었다. 시위대 측에서 차량 공격을 시작하자 그때 실탄을 지급받은 지휘관들과 저격수들이 발포를 했다. 이것이 도청 앞 발포 사건이다.”
시위 대학생 총살한 뒤 암매장
발포 당시 이경남 일병은 도청 지하실에 있었다. 권 일병이 눈앞에서 부대 장갑차에 깔려 죽는 것을 보고 충격에 빠진 그를 하사관들이 도청 지하실로 데려갔다. 시위대를 향한 발포는 전일빌딩과 도청 앞 수협 옥상에 배치한 저격수들을 통해 시작됐다. 발포가 끝나고 63대대 한 하사관이 이경남 일병에게 자랑스레 말했다. “내가 장갑차에 깔려죽은 권 일병의 원수를 갚느라고 조준사격해서 쏘았다.”
도청 앞 집단 발포로 유혈 참극이 확대되자 시민들도 무장했다. 집단 발포 부대인 11공수여단은 도청을 버리고 오후 4시 조선대로 철수한 뒤 무등산 자락에 있는 주남마을로 주둔지를 옮겼다. 주남마을 뒷산에서는 땅을 파고 매복했다. 공수대원들에게 실탄·수류탄·가스탄 등이 지급됐다. 일부 부대원은 시위 현장에서 끌고 온 대학생을 총살한 뒤 암매장했다.
이경남 일병은 5월24일 주남마을을 떠나 송정리 비행장으로 이동한다. 선두에는 대대장 등이 탄 장갑차를 세우고 그 뒤로 특전사를 태운 트럭 수십 대가 이동했다. 군 차량 이동 중에도 민간인을 상대로 무차별 사격을 가했다. “군용 트럭을 타고 가면서 모내기하던 농부, 물놀이하던 어린이, 운동장에서 뛰놀던 초등학생을 쏘아 죽이는 것을 보고 어이가 없었다. 고개 숙인 채 마을을 향해 총을 쏴대는데 미친놈들이라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이날 공수부대의 사격으로 원제마을 저수지에서 수영을 하던 중학교 1학년 방광범군이 숨졌다. 열한 살 초등학교 4학년 전재수군은 효덕초등학교 부근 마을에서 놀다가 군인들이 쏜 총탄에 숨졌다.
11공수여단 병력이 송암동 마을에 이르자 약 300m 떨어진 곳에서 매복한 이들이 있었다. 광주보병학교 소속 1개 중대 병사들이었다. 이들은 공수부대를 시위대로 오인하고 선두 장갑차를 시작으로 1·2호 트럭에 무반동 포탄을 날렸다. 약 5분간 교전이 벌어졌다. "순간 정신을 잃었다가 일어나 보니까 주변에 시신이 즐비했다. 우리 대대장은 왼쪽 팔 하나가 날아갔다.” 이날 참사로 9명이 즉사하고, 병원에 이송돼 2명이 더 죽었다. 이경남 일병을 포함해 군인 40여 명이 중경상을 입고 국군통합병원으로 실려 갔다. 이경남 일병의 5·18 광주항쟁 경험은 여기서 끝난다.
1980년 5월 광주에 진압군으로 투입돼 일주일여 동안 겪은 일을 들려준 이경남 목사는 “내가 겪은 광주가 전부는 아니다. 전혀 다른 경험을 한 시민과 군인들도 있을 것이다”라고 강조했다. 이를 위해 국회에서는 그동안 5·18을 둘러싼 각종 의혹과 음해에 대해 엄정히 조사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5·18의 진실을 왜곡한 주범은 전두환씨다. 집권을 위해 수많은 시민을 학살한 사실이 드러나면 정권에 치명타이니, 보안사를 중심으로 처음부터 은폐에 나섰다. 그렇게 5·18 진실은 감춰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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