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일 한낮의 한옥마을은 유난히 느리다. 시간마저 그만 깜빡한 것 같다. 그러나 그 느림 안에서도 일상은 살아 숨쉰다. 잡초를 뽑거나 마당을 쓸거나 빨래를 너는 일상의 소소한 리듬 안에서.
'교동보살님'이라 불리는 박순옥(82) 할머니의 집에 들어섰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잠깐, 여기서 보살이라는 칭호에 오해가 없으시길. '무릎팍도사'와 자매를 이루는 점술인으로 받아들여선 곤란하다.
나의 시어머님과 30년지기 형님 아우지간으로 오랜시간 동안 함께 절에 다니신 분이었다. 그러나 매해, 고추장과 된장, 간장, 장아찌같은 먹을거리로 주위 사람들의 입맛을 넉넉히하고 흥을 돋워 주었으니, 그만한 공덕이면 '보살급'으로 쳐도 무람하지는 않을 듯싶다.
박 할머니 음식 문화의 보고, 시할머니가 쓰던 장독대
▲ 박순옥(82) 할머니가 시할머니 시절부터 쓰고 있는 장독대. |
한옥 마루에 걸터앉아 할머니의 음식이야기를 들었다. 할머니는 음식이야기를 꺼내니 손사래를 친다. 이제는 자식들도 모두 객지로 나가고 혼자 살고 있어서 특별히 음식을 만들지 않는다는 것이다. 음식도 가족이 여럿이 북적북적 모여 살 때의 이야기란다. 그래도 철철이 장아찌며 간장 된장을 담가 주위 사람들에게 베푸는 것은 이미 다 아는 사실이다
박 할머니의 가장 큰 재산은 집 남쪽에 있는 장독대다. 그야말로 박 할머니 음식의 보고이자 절정이다. 할머니의 시할머니 시절부터 쭉 써왔다니 무려 3대째다. 지금도 장독대마다 간장과 된장, 소금, 장아찌 등 발효음식이 담겨있다.
"그때는 간장을 집에서 다 담가 먹었지. 물에 소금을 넣어서 간을 맞췄는데 이때 생계란을 넣어보면 알거든. 생계란이 가라앉으면 아직 싱겁다는 것이고 둥둥 뜨면 간이 제대로 맞았다는 증건데 간장에 뜬 계란의 표면이 백원짜리 동전만큼 되면 간이 제대로 맞은 거였어."
▲ 박할머니에게서는 오래묵은 장맛이 느껴진다. 간장 단지의 모습 |
박 할머니는 요즘도 이 같은 방법으로 간장을 담근다. 시집와서 장을 담그고 간을 맞춘 지 어언 60년의 세월. 이제 눈대중은 통하지만 그래도 할머니는 이 방법을 쓴다.
"예전에는 간장을 담기 전에 볏집에 불을 붙여 장독안을 휘휘 둘렀어. 지금 말하면 소독했던 거지. 그리고 장을 다 담고나서 그 안에 대추, 숯, 붉은 고추를 넣었어. 그땐 왜 그런지 모르고 했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그게 다 어른들의 지혜였던 거야."
간장에 비해 된장하고 고추장을 담그는 방법은 훨씬 다양하다. 집집마다 개성과 전통이 잘 나타나는 분야가 바로 된장과 고추장이다.
"고추장을 만들 때 식혜를 만들어서 하는 집, 엿기름을 걸러서 만드는 집, 그냥 쌀로 만드는 집. 별의별 집이 다 있어. 우리는 아주 옛날에 우리 시할머니가 살았을 때 이야기인데. 쌀을 그냥 물에 불려놔. 더울 때는 엿새 정도 추울 때는 열흘 정도 그냥 불려놓으면 나중에 물 위에 뭔가 하얗게 뜨거든. 나중에 그것을 걸러내고 쌀을 떡 찌듯이 시루에 쪄. 그러면 쌀이 다 삭아서 흐물흐물해져. 요즘 말로 자연숙성된다고 하데. 거기에 메줏가루 고춧가루, 소금, 간장 넣어서 담갔어."
간장 간 어떻게 맞추냐고? 생계란을 띄워봐
▲ 박할머니네 깻잎장아찌. |
옛말에 그 집의 음식 맛을 알고 싶으면 장 맛을 보라고 했다. 아니, 입맛은 물론이고 그 집이 어떤 집인가를 알고 싶으면 장 맛을 보라고 했다. 예전에는 이해할 수 없었던 그 말이 이제야 조금씩 이해된다. 장은 모든 음식의 기본이었다. 그리고 가족의 지혜와 연륜, 정성, 개성, 전통이 모두 집약된 결과물이었던 것이다.
장독대가 있는 집에 장아찌가 빠질 수 없다. 먹을 게 부족하던 시절, 입 식구는 많은데 반찬이 부족했던 그 시절 장아찌는 아주 고마운 음식이었다. 지금도 맛있어서, 그 시절이 그리워 장아찌를 찾는 자녀들을 위해 박 할머니는 장아찌를 담근다.
"장아찌는 만드는 방법이 다 비슷비슷해. 요령만 알면 나머지는 응용해서 다 만들 수 있어. 가장 많이 만들어 먹었던 게 무장아찌, 마늘장아찌, 깻잎장아찌, 고추장아찌. 수도 없이 많았지."
박 할머니의 장아찌 담그는 법은 다른 집과 크게 다르지않다. 우선 마늘장아찌 만드는 법. 물과 식초, 설탕을 넣어서 마늘을 담근다. 2~3일 담근 후, 마늘 독성을 없애기 위해 마늘을 재웠던 그 물을 버린다. 그리고 거기에 간장을 붓는다. 그리고 다시 3~4일 후, 마늘을 걸러낸 그 간장을 한소끔 끓인 뒤 식혀서 마늘을 넣어서 재운다. 고추장아찌, 깻잎장아찌, 오이장아찌, 무장아찌 등도 약간의 응용을 통해 만들 수 있다.
간장 맛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이 방법을 쓰면 되고 그냥 식초만으로 만든 마늘장아찌를 원한다면 물과 식초, 설탕을 넣어서 마늘에 재우면 된다. 박 할머니는 마늘 독성이 나쁘다하여 마늘 재운 물을 꼭 따라버렸는데 얼마 전 텔레비전에서 한 요리전문가가 굳이 버릴 필요없다고 설명하는 것을 들었단다. 설탕이 이미 마늘의 독을 해독해주기 때문에 굳이 버릴 필요가 없다는 설명을 듣고 요즘은 그 방법으로 시도해보고 있다고 했다.
젊은요리사의 설명에 요리법 과감히 수정하기도
▲ 돌로 꾹꾹 눌러놓은 고추장아찌. |
"티비에서 요리연구가 선생들이 나와서 좋은 방법을 알려주면 나도 가끔씩 따라해 봐. 내 방법이 무조건 맞다거나 최고라고 생각은 안 해. 요즘 사람들이 우리보다 더 많이 배우고 공부도 더 했으니 나아도 뭔가 더 나을 거 아니겠어?"
우연히 본 티비에서 요리전문가의 얘기를 듣고 자신의 요리법을 과감히 수정하기도 했다는 할머니의 말은 내게 신선한 충격이었다. 어찌보면 합리적이고 당연한 일 같지만 근 60년 신체의 일부와 같던 요리법을 바꾼다는 것은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박 할머니에게 이야기를 듣는데 어째 이거 난감하다. 음식조리법을 취재해야 하는데 박 할머니의 '한소끔' '약간' '적당히' '며칠'이라는 애매한 단어에서 그만 막혀버린다. 정확한 레시피가 궁금한 사람에게는 그야말로 '대략난감'한 용어다. 그들의 입장에서보면 참으로 불친절한 레시피다.
그러나 할머니도 정확한 용량과 무게를 모른다. 그 시대 할머니들이 그랫듯이 누구에게 체계적으로 요리교육을 배우거나 요리지침서를 참고한 적도 없기 때문에 할머니도 설명하라고 하면 난감한 표정을 짓는다. 할머니는 이러한 음식만드는 방법을 누구에게 배웠느냐고 묻자 어이없다는 듯 허탈웃음을 짓는다.
"누구한테 배웠느냐고? 배우긴 누구한테 배워. 그냥 혼자 배우는 거지. 옛날에는 시어머니랑 함께 살아서 장을 담그거나 음식을 할 때 항상 같이 해야 했거든. 그럴 때 어깨너머로 배우는 거지. 그냥 자연스럽게 배운 거야. 할머니들은 꼬치꼬치 물어보는 거 안 좋아해."
참으로 '불친절한' 할머니의 레시피?
▲ 박할머니네 쌈장. 메주가루와 김치국물로 만든 독특한 쌈장. 삼겹살과 상추쌈을 부르는 쌈장이다. |
그렇다. 할머니의 삶 자체가 요리다. 할머니의 손이 저울이고 할머니의 과거가 추억의 레시피 그 자체다. 하지만 이대로 박 할머니대에서 끝나야할 것인가. 요리책과 유명 요리사이트에서 전수해줄 수 없는 '옛맛'을 전수받으려면 어떻게 해야할지는 우리가 풀어야할 또 하나의 숙제다.
취재를 마치고 일어서자 박 할머니는 잠깐 기다리라고 하더니 대문과 담장에 걸쳐있던 호박덩쿨에서 신선한 호박잎과 호박을 따로 떼어내서 봉투에 푸짐하게 담아준다. 어떻게 먹어야 맛있냐고 묻자 '그냥 맛있게 먹으면 맛있지'라고 한다. 그리고 나서 '호박잎을 비비듯 씻어서 멸치푼 된장국에 푹 끓이면 돼'라고 덧붙여 주었다. 정말 맛있을 것 같은 이 느낌은 순전히 기분 탓이었을까?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1241476&CMPT_CD=P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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