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카에다가 주도한 9·11 테러는 CIA의 정보력에 대해 근본 문제를 제기했다. 조지 부시 전 대통령은 CIA를 누르고 새로운 정보기관인 국가정보국(DNI:Director of National Intelligence)을 만들었다. 외견상 국가정보국은 CIA를 포함한 연방수사국(FBI)·국가안전보장국(NSA) 등 15개 정보기관을 총괄하는 최고 정보기관의 임무를 맡았다. 9·11 테러 때문에 CIA는 새로 조직된 DNI의 하부 조직 정도로 전락한 것이다.
일본에 진주만을 기습당한 뒤 야심차게 창설된 CIA는 한때 화려한 영광을 누렸지만, 결국 몰락할 수밖에 없었다. 1947년 트루먼 대통령이 처음 설립한 후 CIA는 냉전 시대 소련을 중심으로 한 공산 진영과 치열한 첩보전을 벌이며 확대·성장했다. 1953년 이란의 모사테크 총리를 축출하고, 1954년 과테말라의 좌익 정부를 전복시킨 것이 바로 CIA의 작품이었다.
정보를 수집·분석하며 필요할 경우 비밀공작을 하는 일의 전반적인 과정에는 기본적으로 속임수와 술책이 동원될 수밖에 없다. 그래서 CIA는 ‘은밀한 뒷방’이 필요했고, 은밀한 뒷방에서 CIA는 살이 쪘다. CIA는 늘 음지를 고집했다. CIA의 바깥에는 공산주의라는 적이 있었고, 안으로는 국방부란 적이 상존했다.
국방장관으로서 CIA에 결정타를 날린 사람은 바로 럼스펠드(사진)였다. 9·11 직후 럼스펠드는 결국 조지 부시 대통령을 설득해 CIA를 휘하에 두는 국가정보국(DNI)을 창설했다. 그러나 9·11 이후 빈라덴을 추적하는 과정은 전 세계에 퍼져 있는 CIA의 정보 조직망이 아니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CIA를 무장 해제시킨 상태에서 빈라덴 추적에 실패하는 것은 오히려 당연한 일이었다. 조지 부시 대통령이 임명한 마이클 헤이든 CIA 국장은 2008년 오바마가 민주당 대통령 후보로 확정된 뒤 시카고로 그를 찾아갔다. CIA 국장으로부터 브리핑을 받은 (당시) 오바마 후보는 백악관 아마추어들의 ‘정보 유출’이 문제임을 간파했다.
2009년 1월 취임한 오바마 대통령은 오히려 CIA를 강화할 방안을 강구했다. 안보와 관련해서도 미국의 정보 관련 허약함은 불안했다. 취임 후 한 달 만에 오바마 대통령은 클린턴 시절 백악관 비서실장을 역임한 연방 하원 의원 출신의 리언 패네타를 CIA 국장에 임명했다. 오바마 행정부는 CIA를 신임했다. 전쟁을 수행 중인 아프간 및 이라크에 관련된 CIA 조직을 강화시켜 나갔다. 신임 CIA 국장은 대테러 전쟁에 집중했다. 그 결과 빈라덴 사살이라는 ‘대박’을 터뜨렸다. 대통령의 의지로 CIA가 부활한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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