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벌2세가 나라를 망쳤다 재벌2세가 무너지고 있다. 지난해 우리나라를 뒤흔든 대기업 부도회오리 속에 2세총수가 지배하는 재벌이 줄줄이 쓰러진데 이어 이제는 새정부가 벌이는 전방위 사정의 주된 표적이 되고 있다. 지금까지 알려진 사정대상 총수 가운데 절반이 2세총수들이다. 신흥재벌을 제외하면 전부에 가깝다. 재벌2세는 이제 한국경제를 파탓시킨 부실과 탈법경영의 대명사로 낙인찍힌 채 전전긍긍하고 있다. 박영일(53) 미도파 회장이 탈세와 재산은닉 혐의로 고발된 것은 부실·탈법경영으로 자신과 기업을 망친 재벌2세의 한 전형이라고 할 수 있다. 박 회장이 지난해 10월부터 올 3월까지 (주)미도파의 부가가치세 19억7천만원을 포탈한 것은 어려운 경영사정을 생각할 때 이해할 수도 있다. 그러나 경영난에 허덕이는 바로 그 회사에 자신의 소유주식을 비싼 값으로 팔아넘겨 139억원을 빼돌린 것은 아무리 좋게 봐주려 해도 봐줄 수가 없다. 그가 유출한 회사돈은 이것말고 또 있다. 올 들어 계열사인 (주)대농 19억7400만원을 비롯해 계열사에 44억여원을 빌려준 것이다. 미도파에서 유출된 회사돈은 이처럼 확인된 것만 해도 모두 183억여원에 이른다. 재산을 내놓기는커녕… (주)미도파는 지난 3월 171억원이 없어 부도처리됐다. 만약 박 회장이 회사돈을 빼돌리지 않았다면 미도파는 부도까지 가지는 않았을 것이라는 설명이 가능하다. 지난 89년 창업자 박용학(83)씨로부터 대농그룹을 인수한 박 회장은 모기업인 (주)대농의 적자가 늘어나는 와중에서도 건설·중공업·컴퓨터·언론 등으로 사업을 확장했다. 계열사는 그가 회장을 맡은 이후 5개에서 21개로 늘어났다. 게다가 96년에는 신동방과의 미도파 M&A분쟁에 1288억원이라는 거액을 쏟아부으면서 심각한 자금난을 겪게 됐다. 지난해 파산위기에 몰려 부도유예협약을 적용받기도 했지만, 결국 미도파 하나만 남게 됐다. 게다가 미도파도 부도나기 전에 이미 체력이 거의 소진돼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박 회장이 할일은 오직 하나, 자신의 재산을 내놓아서라도 회사를 재건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는 도리어 회사돈을 밖으로 빼돌림으로써 파멸을 더욱 재촉하고 말았다. 박영일씨와 함께 탈세혐의로 고발된 고려그룹의 이창재(47)씨, 미국으로 2억달러를 빼돌린 것으로 드러난 전 삼미그룹 회장 김현철(48)씨, 위장계열사를 통해 992억원의 회사돈을 횡령한 진로그룹의 장진호(46)씨 등도 모두 ‘실패한’ 2세재벌들이다. 이처럼 노골적인 탈법경영은 재벌 2세가 해온 부실경영의 한 단면일 뿐이다. 탈법이 아니더라도 2세가 전면에 나서 경영해온 재벌들은 대부분 한계를 드러냈다. 최근 몇년 사이 우리나라를 뒤흔든 부도회오리 속에 무너진 대기업의 상당수가 2세총수가 지배하는 재벌이라는 점은 우연으로 돌릴 수만 없다. ‘아버지의 악습’버리지 못한 2세들 재벌 2세 경영의 붕괴 조짐은 96년 우성건설(최승진)과 유원건설(최영준)이 쓰러지면서 이미 나타나기 시작했다. 지난해에는 삼미, 한신공영(김태형), 진로, 해태(박건배), 쌍방울(이의철), 삼립식품(허영선), 고려증권 등이 차례로 좌초했다. 올 들어서는 그나마 협조융자 덕분에 재벌의 대형 부도는 별로 일어나지 않았다. 그러나 협조융자로 간신히 연명해온 재벌 가운데 3차례에 걸쳐 모두 9600억원이나 받은 동아(최원석)를 비롯해 한화(김승연), 한일(김중원)그룹도 총수가 역시 2세재벌이다. 이 가운데 한일그룹의 모기업 한일합섬은 지난달 발표된 55개 퇴출기업 명단에 들어가 이달 들어 부도처리됐다. 부도처리나 협조융자까지는 가지 않았더라도 시름에 잠겨 있는 재벌도 적지 않다. 쌍용(김석원)과 삼성(이건희)이 그 대표적인 예다. 쌍용은 지난해 한해 동안 쌍용자동차 문제로 심한 홍역을 치렀다. 지난 86년 동아자동차를 인수해 설립된 쌍용자동차는 엄청난 누적 적자로 그룹 전체를 침몰 직전의 위기로 내몰았다. 대우가 쌍용자동차를 인수함으로써 파국의 위기는 간신히 넘겼으나, 쌍용은 아직도 쌍용자동차가 남기고 간 1조7천억원의 부채를 짊어지고 허덕이고 있다. 이 때문에 올 연초 4500억원의 협조융자까지 받아야 했다. 삼성도 96년부터 본격적으로 뛰어든 자동차사업으로 곤욕을 치르고 있다. 삼성자동차는 지난해까지 2조6천억원의 부채를 안고 있었다. 올 들어 은행대출을 받기 어렵게 되자 지난주까지만 무려 1조원어치의 회사채를 발행했다. 삼성은 지난 3월부터 자동차 생산을 시작했으나 요즘의 내수시장 침체에 비춰 애초 계획한 올해 판매목표 8만대를 달성하기란 쉽지 않아 보인다. 이런 추세로 계속 간다면 부채가 매출보다 더 빠른 속도로 증가할 가능성도 있다. 게다가 회사채도 잘 팔리지 않는다. 지난 7월9일 발행된 1천억원 가운데 실제로 매각된 물량은 200억원에 지나지 않는다. 이 때문에 삼성자동차는 마지막 탈출구를 기아자동차로 잡고 입찰 준비에 여념이 없다. 만약 삼성자동차가 기아자동차 인수에 실패하면 다른 탈출구가 사실상 없는 상황이다. 2세 재벌총수는 대부분 30대 안팎의 젊은 나이에 재벌을 물려받았다. 김현철 전 삼미 회장은 31살에, 김석원(53) 쌍용 회장과 김승연(46) 한화 회장은 각각 29살에 대권을 넘겨받았다. 선친들이 기업을 일으킬 때는 사업에 대한 강한 열기와 집념으로 고도성장을 이끌었다. 동시에 권력과의 유착, 탈세, 회사돈 유용 등 탈법경영도 일상화돼 있었다. 2세들은 ‘신경영’을 표방하면서도 개발연대의 ‘악습’을 과감히 버리지도 못했다. 미래 비전보다는 개인적 취미가 앞서 더욱이 이들에게는 사업의 혜안이나 탁견도 별로 없었다. 오히려 문어발식의 무분별한 확대경영에 매달렸다. 남들이 해서 잘되는 사업이다 싶으면 무엇이든지 닥치는 대로 덤벼들었다. 정상의 소주업체이던 진로는 남들이 하는 맥주사업이 잘되는 것을 보고 뛰어들어 8천억원을 쏟아부었다. 삼성의 창업자 고 이병철 회장은 미래산업 방향에 대한 심사숙고 끝에 반도체 투자를 결정해 성공했지만, 이건희 회장은 뚜렷한 비전도 없이 자동차와 유통에 뛰어들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삼성은 태평로 삼성플라자 등 4개의 점포에 4천억원을 투자하는 등 유통사업에도 뛰어들었으나 요즘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다. 유통사업에는 대농·진로·한신공영 등도 앞다퉈 진출했다가 결국 파멸했다. 금융업에도 앞다퉈 진출했다. 삼성의 삼성증권과 삼성할부금융, 한화의 한화투자금융, 쌍용의 쌍용투자금융과 쌍용할부금융 등은 모두 2세총수의 작품이다. 2세총수들은 사업확장을 위해 다른 기업 인수합병에도 왕성한 식욕을 보였으나, 그것은 결국 약이 아니라 독이 되고 말았다. 해태가 쓰러진 원인도 따지고 보면 해태중공업과 해태전자(옛 인켈)를 무리하게 인수한 데서 비롯했다. 한화가 인수한 경향신문이 그룹의 블랙홀이 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않았다. 본업이나 기업문화도 잊었다. 시멘트 제조업으로 성장한 쌍용은 자동차에 뛰어들었다가 혼쭐이 났고, 내의 생산으로 명성을 날리던 쌍방울은 레저업에 진출했다가 자멸했다. 오랫동안 형성된 기업문화가 새로운 사업을 소화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여기에는 2세총수들의 개인적 취미도 한몫했다. 자금사정에 대한 고려는 더더욱 없었다. 남의 자금으로 장사하는 것을 당연한 일로 여겼다. 진로는 부도 당시 부채비율이 8000%를 넘었고, 삼미와 대농은 자기자본이 잠식상태였다. 해태와 쌍방울은 차입금의 3분의 2가 종금사 단기자금이었다. 원로나 참모들의 의견을 별로 경청하지 않는 것도 대부분의 2세총수들에게서 나타난 공통점이다. 삼성은 오랫동안 이병철 전 회장과 동고동락한 소병해 비서실장을 내보냈고, 자동차 진출에 반대하는 내부의견에도 귀기울이지 않았다. 쌍용에서도 자동차에 대한 무모한 투자를 반대하는 임원들은 버티지 못하고 떠나야 했다. 재계의 한 인사는 “재벌총수는 1세나 2세나 마찬가지로 해당재벌에는 교황처럼 ‘오류없는 존재’나 다름없다”고 지적했다. 부실여신액 20조원 육박 1세총수의 카리스마가 2세에 와서 후퇴하면서 ‘제가’(齊家)에 실패한 것도 몰락에 일조했다. 재산상속을 둘러싸고 가족간, 형제간 싸움도 많았다. 한화의 김승연 회장은 동생과의 불화 때문에 김영삼 정권 초기 뜻하지 않은 곤욕을 치르기까지 했다. 삼성은 유통부문에서 자매재벌인 신세계와 치열한 경쟁을 벌이고 있고, 역시 자매관계인 한솔과는 개인휴대통신 사업권 다툼을 벌였다. 그럼에도 총수들은 예나 지금이나 누구도 도전할 수 없는 ‘황제’로 군림해온 것 또한 사실이다. 이처럼 2세 재벌총수는 사업에 대한 예측능력이나 경영방식 등 여러면에서 부실요인을 안고 있었다. 그 부실요인은 치유될 기회를 찾지 못했다. 김영삼 정권 때까지도 이 나라를 지배하던 고도성장 신화가 덮어주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고도성장 신화가 끝나면서 2세재벌의 한계도 여실히 드러났다. 이들의 부실경영은 자신들의 기업뿐 아니라 나라 전체를 고통으로 몰아넣었다. 2세재벌의 연쇄부도로 이들에게 거액여신을 제공한 금융기관이 부실화되고, 국가의 대외신인도가 추락했다. 삼미·진로·해태·쌍방울 등 지난해 한해 동안 부도난 2세재벌의 부실여신은 10조원에 육박한다. 이는 지난해 1년 동안 발생한 총부실여신액의 3분의 1을 차지하는 것이다. 한보·한라 등 1세와 2세가 함께 경영하다 무너진 재벌까지 합치면 20조원을 헤아린다. 쌍용·한화·동아 등 협조융자를 받은 재벌도 줄잡아 20조원 안팎의 부채를 지고 있다. 이들 재벌이 쓰러지지는 않았다 해도 금융기관과 금융시장에 부담을 주기는 마찬가지다. 쌍용자동차가 남긴 3조4천억원의 부채는 주거래은행인 조흥은행의 대외신인도 회복을 가로막고 있다. 한일은행은 지난해 일어난 기아·한보·한라 등 3대 기업의 부도사태를 모두 비켜갔지만, 한화와 한일 때문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 동아에 1조원 가량을 물린 서울은행을 비롯해 많은 은행과 종금, 리스, 투신사들도 2세재벌에 대준 돈이 ‘원죄’가 돼 혼쭐이 나거나 문을 닫고 말았다. ‘오류없는 2세재벌’의 실험은 이제 파탄지경에 와 있다. 그러나 그들이 남긴 상처는 오래도록 나라와 국민을 아프게 할 것이다. 차기태 기자 한겨레21 1998년 07월 23일 제217호 http://legacy.h21.hani.co.kr/h21/data/L980713/1p5r7d0b.html |
‘1971년의 개·돼지’…광주대단지 사건
1971년8월10일 오전 11시40분, 서울시 성남출장소(현 성남시청) 뒷산 공터. 궐기대회에 운집한 5만 군중이 술렁거렸다. 11시에 주민들과 만나겠다고 약속한 서울시장이 아무리 기다려도 나타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누군가 외쳤다. ‘서울시장은 우리를 사람으로 보지 않는다’. 외침은 다른 메아리로 돌아왔다. ‘또 속았다, 내려가자!’
흥분한 군중은 너나 할 것 없이 150m 아래 서울시 대단지 사업소로 몰려갔다. 내려가던 일부 군중은 서울시 소속의 지프를 발로 차고 몽둥이로 때리며 개울 바닥에 처박았다. 사업소로 몰려간 군중은 닥치는 대로 때려 부쉈다. 요즘 행정구역으로 경기도 성남시, 당시에는 경기도 광주면 중부면에서 발생한 이날 소요는 사회와 정치권에 충격을 안겨줬다. 박정희 정권에서 일어난 최초이자 최대 규모의 민중 봉기였으니까.
서슬 퍼렇던 3공 시절, 당시 언론은 이 사건을 보도하며 ‘광주대단지 난동’이라는 제목을 붙였다. 법정에서도 난동이라고 불렀다. 과연 광주대단지 사건은 난동이었을까. 배경과 진행 과정을 살펴보면 단순하게 난동이라고 부르기 어렵다. 최소한의 생존을 위한 기본권 투쟁의 성격이 강하다. 사건의 근본 원인은 수출주도형 경제 개발의 부산물인 철거민. 수출 가격경쟁력 확보를 위한 저임금·저곡가 정책은 대규모 이농과 도시 빈민 문제를 낳았다.
경제개발에 착수하기 직전인 1960년 서울 인구는 약 245만명. 1970년에는 554만명으로 늘어났다. 서울시 주택보급률이 46%에 불과하던 시절, 무주택가구의 절반 이상이 무허가건물에 살았다. 해방 직후부터 생긴 서울시 무허가주택은 1960년 5만5,887채에서 1969년에는 26만8,805채로 늘어났다. 서울시가 도시 미관과 위생을 위해 무허가주택, 속칭 판자촌 강제 철거에 나섰지만 자고 나면 판자촌이 생겼다. 철거반을 동원해 허름한 판자촌을 부수면 또 다시 판자촌이 들어섰다.
철거와 잠입, 추방과 재진입의 끊임없는 악순환 속에 서울시는 대책 없는 철거만으로는 판자촌 정리가 어렵다는 판단 아래 세 가지 정책 대안을 내놓았다. 무허가 주택 양성화와 서민 아파트 건립, 신도시 개발 중에서 첫째 대안은 일찌감치 접었다. 판자집은 개량 자체가 불가능할 만큼 허술했다. 결국 두 가지만 남은 가운데 서민아파트 건립을 추진했으나 이마저 물 건너갔다. 적지 않게 들던 예산이 부담이던 차에 1970년 와우아파트 붕괴사고*가 일어난 탓이다.
서울시는 신도시 건설만큼은 처음부터 끝까지 밀고 나갔다. 무엇보다 예산이 많이 들지 않는 이른바 ‘경영 사업’ 방식이 특장점으로 꼽혔다. 경영 사업 방식이란 예산을 투입하는 게 아니라 토지를 싸게 사서 입주민들에게 비싸게 팔아 개발비용을 충당하는 방식. 택지와 기반시설을 건설하지 않고 먼저 입주부터 시키는 방식이었다. 집을 짓는데 상식인 ‘선 개발, 후 입주’가 아니라 ‘선 입주, 후 개발’ 방식의 부작용 가능성에 대해 박정희 대통령이 의문을 표시하자 김현옥 서울시장은 ‘사람들이란 원래 10만명만 모아 놓으면 저희들끼리 알아서 살아갈 수 있다’며 강행했다고 전해진다.
서울시는 토지가격이 싸고 서울에서 가까운 지역으로 경기도 광주군 중부면 일대 350만평을 골랐다. 서울시는 1969년부터 청계천과 용산, 영등포 일대의 판자촌 주민 2만1,372가구를 강제 이주시켰다. 철거민들의 저항은 크지 않았다. 토지 분양과 일자리 제공을 약속받았기 때문이다. 박 대통령에게 올라간 당시 보고서에 따르면 사건 당시 광주대단지의 인구는 13만5,214명. 인구로만 보면 순식간에 웬만한 도시 하나가 생긴 셈이지만 생활 여건은 열악하기 그지 없었다.
토지 정리도 채 끝나지 않는 마당에 도로와 공공 상하수도 보급도 20%를 밑돌았다. 약속했던 일자리도 제공되지 않았다. 철거민들은 악취 속 허허벌판에 그냥 내버려졌다. 서울과 오가는 교통편도 하루에 버스 6편 뿐이었다. 서울의 무허가 판자촌에 살 때는 날품을 팔아서라도 그날 그날 먹고 살 수 있었지만 당장 끼니 해결조차 어려웠다. 인근 닭장의 사료를 훔쳐 가족들이 죽을 끓여 먹고 쓰레기 통을 뒤지는 사람도 많았다.
무엇보다 큰 문제는 개발 정보를 미리 파악한 투기꾼들이 판쳤다는 사실. 먹고 살기 어려워진 철거민들은 20평짜리 토지 분양권을 팔고 서울의 무허가촌으로 되돌아갔다. 일부 철거민이 떠난 자리에는 내 집을 싼 값으로 지으려는 일반 수요자(전입자)들이 몰려들었다. 마침 1971년은 선거의 해. 4월27일 7대 대통령 선거와 5월25일 8대 국회의원 선거 유세 과정에서 장밋빛 공약들이 쏟아졌다.
공화당 소속 차지철 후보는 토지 무상 불하와 세금 면제, 대형 공장 유치 등으로 광주대단지를 지상낙원으로 만들겠다는 공약을 내밀었다. 감언이설에 땅값은 천정부지로 치솟았다. 정부도 투기 열풍을 거들었다. 어제는 공업단지 기공식, 오늘은 상수도 통수식, 내일은 도로 준공식이 열리는 식이었다. 중심가 일부는 종로와 맞먹는 평당 20만원에 이르렀다는 신문 기사까지 나왔다.
과열은 선거가 끝나자마자 얼어붙었다. 서울시는 분양권 소지자들과 토지 매매 계약을 서둘렀다. 각종 건설공사로 재정난에 빠져 있던 서울시는 평당 약 2,000원으로 책정한 택지를 처분하지 않으면 신규투자가 전면 중단될 위기를 맞고 있던 상황. 더욱이 서울시는 입주권을 사서 들어온 전입자들에게는 평당 8,000원에서 1만6,000원씩 토지 가격을 매겼다. 계약과 동시에 땅값을 완불하라는 조항까지 곁들었다.
서울시장 명의의 토지대금 납부고지서가 발부된 게 7월 13~14일. 고지서에는 7월 말까지 ‘납부하지 않을 경우 6개월 이하 징역이나 30만원 이하 벌금에 처한다’는 경고 문구까지 붙어 있었다. 호구지책도 마련하지 못하는 주민들은 충격에 빠졌다. 분노와 실의에 빠진 주민들 사이에서 자연스레 ‘불하가격 시정 대책위원회’가 결성됐다. 7월17일 한 교회에 모인 100여명 유지들은 단지를 11개 구역으로 나눠 대표 1명씩을 선출해 이틀 뒤 다시 만나 대책을 협의하기로 의견을 모았다.
약속한 7월19일 모인 인원은 11명이 아니라 2,000명이 넘었다. 그만큼 생존과 직결된 문제였던 것이다. 대책위는 4개 요구조건을 내세웠다. ①철거민·전입자 할 것 없이 단지 내 모든 대지 가격을 평당 2,000원 이하로 할 것 ②대지 불하대금을 10년 분할상환토록 할 것 ③향후 5년간 각종 세금을 면제할 것 ④영세민 취로장 알선과 구호대책을 세울 것.
대책위는 23일 오후 주민합동회의를 열어 요구조건을 추인받아 서울시와 경기도에 전달하며 월말까지 긍정적 회신이 없을 경우 실력행사에 들어가겠다는 뜻을 밝혔다. 서울시는 여기에 대해 28일까지 아무런 회신도 보내지 않았다. 대책위는 당국의 반응이 없자 투쟁위 체제로 전환하며 집집마다 다음과 같은 구호를 담은 포스터와 삐라를 뿌렸다. ‘백원에 뺏은 땅, 만원에 폭리 말라’, ‘살인적 불하가격 결사 반대!’
불하가격은 정말 살인적이었고 서울시는 폭리를 취했을까. 그랬다. 서울시가 경기도 광주면의 토지 소유자들에게 지불한 토지 가격은 평당 평균 250원을 넘지 않았다. 지주들은 지주들대로 뿔났다. 헐 값에 사들인데다 돈이 아니라 다른 토지를 요구하는 지주에게 서울시는 가치와 환금성이 떨어지는 산비탈 부근의 땅을 대신 내주는 횡포를 부렸다.
원래부터 살던 주민에서 철거민, 전입자 등 모든 주민이 격앙된 가운데 이번에는 경기도가 건물 취득세를 내라는 고지를 발부했다. 당초 면제하기로 약속됐던 취득세 고지서는 주민들의 분노에 기름을 부었다. 서울시와 당국의 성의 있는 답변을 기다리던 투쟁위원회는 요구사항에 대한 당국의 회신 대신 날라든 세금 납부 고지서에 조롱 당하고 있다고 느꼈다. 결국 긴급 소집된 투쟁위는 8월10일 주민 궐기대회를 열기로 합의했다.
사태가 심상치 않다는 점을 뒤늦게 깨달은 현지 공무원들은 서울시 본청에 ‘현지에서 해결 불가능한 긴급 사태 발생’이라는 급전을 보냈다. 서울시는 최종완 부시장을 급히 내려보냈다. 8월9일 밤 8시 넘어 열린 투쟁위와 최 부시장과 면담을 평행선을 달렸다. 최 부시장은 요구를 듣다 ‘누가 당신더러 이 곳에 와서 살라고 했소? 여기서 살지 않으면 될 것 아니요”라고 말해 분노를 자아내기도 했다. 밤 11시를 넘도록 계속된 담판은 결렬되고 말았다. 합의 사항은 오직 하나. ‘내일(10일) 오전 11시까지 양택식 서울시장이 와서 직접 교섭한다’는 것 뿐이었다.
부시장이 떠난 뒤 마이크를 단 투쟁위 자동차가 대단지를 돌면서 소식을 알렸다. ‘시장이 내일 11시에 오기로 했다. 한 사람도 빠짐없이 참석해 우리의 단결된 힘을 보여주자’. 이윽고 8월10일 아침, 부슬비가 내리는데도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투쟁위가 예상했던 1만명보다 훨씬 많은 5만명이 이른 시간부터 모여 시장을 기다렸다. 약속 시간이 넘어도 양 시장은 나타나지 않았다.** 결국 흥분할 대로 흥분한 군중들은 출장소로 몰려갔다.
성난 군중들은 이곳 저곳으로 몰려다니며 공공건물과 기물을 부쉈다. 차량 22대도 불탔다. 일부 군중들은 ‘청와대로 가겠다’며 버스를 탈취해 단지 외곽으로 떠났다. 공무원 92명은 도주하고 성남지서 경찰관 30여명도 사라졌다. 경찰들이 증원돼 최루탄을 쏘며 저지했으나 군중이 워낙 많았다. 대치는 여섯 시간 동안 이어졌다. 오후 5시20분께, 서울시가 모든 조건을 수용한다는 소식이 알려지며 군중은 흩어졌다.
단 여섯 시간 만에 끝난 광주대단지 사건은 한국 사회에 무수한 영향을 남겼다. 정권은 최초의 민중 봉기를 심각하게 여겼다. 기밀이 해제된 청와대 문건에 따르면 당시 박 대통령은 주동자를 색출해 엄벌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적극적으로 시위에 가담한 22명이 재판 받았으나 전직 장관급 공무원을 지낸 목사 등 투쟁위의 주요 인사들은 다치지 않았다. 대신 성남지역에는 어느 곳보다 많은 경찰이 상주하며 주민들을 끊임없이 감시했다. 광주대단지 사건 3년 뒤에 성남시 숭신여중에서 국어교사로 부임했던 소설가 윤흥길은 1977년 이 사건과 경찰의 감시를 소재로 삼아 베스트셀러 ‘아홉 켤레 구두로 남은 사내’를 지었다.
광주대단지 사건 이후 수습책에 나선 정부는 대단지 사업을 서울시에서 경기도로 이전하고 광주대단지를 성남시로 승격시켰다. 공장 유치와 학교 유치, 상하수도 같은 각종 생활 시설도 뒤늦게 들어섰다. 오늘날 성남시의 모습이 이때 형성됐다. 짧은 시간의 봉기였지만 그 전후에 담긴 고통은 상상을 넘는 것이었다. 오랫동안 이런 괴담도 돌았다. ‘남편은 식량을 구하러 떠난 가운데 열흘을 굶은 임산부가 출산 후에 정신분열 증세에 빠져 신생아를 삶았다.’ 확인되지 않은 유언비어였으나 성남을 넘어 그 시대를 살았던 뇌리 속에는 고통의 기억으로 각인되어 있다.
운동권에도 이 사건은 영향을 미쳤다. 제정구와 손학규, 김문수 등 서울대 출신 운동권들이 광주대단지 사건을 계기로 도시빈민 문제에 뛰어들었다. 두레공동체 김진홍 목사도 비슷한 경우다. 헌법재판소에서 해산 결정을 받은 통합진보당의 중추였던 경기동부연합도 광주대단지 사건과 맥이 닿는다. 고립과 허기 속에 어린 눈으로 광주대단지 사건을 지켜보고 성남에 대한 왜곡된 시선을 받으며 청소년기를 지낸 뒤 대학 운동권에서 만난 성남 출신들은 경기동부연합으로 뭉쳤다.
광주대단지 사건 발생 9년 뒤 또 다른 광주에서는 비극이 일어났다. 수많은 피를 흘렸기 때문일까. 전라남도 광주의 집단기억은 광주항쟁이라는 역사의 기억으로 남았다. 경기도 광주의 집단기억은 왜곡되고 매도 당하며 흩어질 판이다.*** 단지 철거민이라는 이유로, 못 산다는 이유로 국가가 국민들을 고립시켰던 광주대단지 사건의 시제는 과거형일까. 세월은 고약하다. 분당이 성남과 다르고 싶고 남을 차별하는 의식이 개개인으로 분화, 변질되고 있으니까. 45년 전 광주가 묻는다. 국민을 개·돼지로 여기는 공직자가 이젠 사라졌나. 담 하나를 두고 임대아파트에 살면 학급 배정까지 갈리는 사회, 아이들까지 계층을 나누는 우리는 건강한가. /논설위원 겸 선임기자 hongw@sedaily.com
* 1970년4월8일, 준공 4개월 밖에 안된 마포구 창천동의 와우아파트가 무너진 사건. 입주 예정 30가구 가운데 먼저 들어온 15가구 주민 41명이 중경상을 입고 33명이 깔려 죽었다. 군림하는 관청의 ‘불도저식 행정과 부실공사’ 탓이다. 사고 발생 나흘 전, 금이 갔다는 주민들의 신고도 무시됐다. 와우아파트는 설계와 시공·감리까지 부실과 총체적 부패 그 자체였다. 쌀 한 가마니에 5,220원 하던 시절, 시공비가 평당 1만원에도 못 미쳤다. 당초 공사비는 평당 2만원 꼴이었지만 경험 없는 업체가 계약을 따내 커미션만 챙기고 시공은 무허가 업체에 맡기는 과정에서 시공비가 새나갈 수밖에 없었다.
부족한 공사비는 부실시공을 불렀다. 기둥 하나에 70개씩 들어가야 할 철근은 불과 5개만 쓰였다. 건설현장의 금기사항인 한겨울의 콘트리트 시공은 배합마저 엉망이었다. 시멘트 대신 모래가 대부분인데다 한 지게에 30~40원씩 줘야 하는 물을 아낀다고 제대로 섞지도 않았다. 자재와 자금 부족에도 와우지구 아파트단지(15개동)가 착공 6개월 만에 완공됐다는 ‘실적’은 부실시공을 기획하고 자재를 빼돌린 공무원들에게 돌아갔으나 국제적 망신을 샀다. 붕괴사건이 일어난 다음날 서울에서 아시아개발은행(ADB) 총회가 열렸기 때문. ‘한국의 발전상을 알린다’는 생각으로 유치한 국제대회에서 치부만 드러낸 꼴이 됐다.
** 다른 내용을 담은 자료도 있다. 양택식 시장이 약속보다 10분 앞서 현장에 도착했으며 많은 군중이 흥분할 것을 우려한 투쟁위가 양 시장을 제 3의 장소로 옮겨 협상을 시작했다는 것. 협상이 타결되어가던 도중에 군중들의 ‘난동이 시작돼 시장을 자리를 피했다’는 것이다.(손정목 당시 서울시 기획관리관, ‘도시 50년사’ 중 ‘광주대단지 사건’)
*** 광주대단지 사건의 재조명하려는 성남시 의회는 진상 규명과 피해자의 명예회복이라는 애초 방침과 달리 실태 파악 후 피해 지원으로 방향을 선회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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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거왕 이금열’이 철거민들의 피와 눈물로 세운 ‘황금의 제국’
철거용역업체를 13개 계열사 거느린 그룹으로 키운 비밀
계열사 사업 확장 혹은 채무 변제를 위해 계열사와 임·직원에게 손해를 입히는 ‘비정한 행태’를 이 회장은 반복하고 있다. 청구 파산과정이 가장 극단적이다. 청구는 1980~90년대 우방·보성과 함께 대구 3대 건설사로 꼽혔던 중견기업이다. 1997년 외환위기 직후 워크아웃에 들어간 뒤 8년 만인 2006년 3월 모든 빚을 털고 화인파트너스에 인수됐다. 1년5개월 만에 청구는 ‘새날’에 재인수된다. 당시지역 언론은 새날을 “화성마도산업단지를 국내 최초로 100% 민간분양한 부동산 개발 전문 기업”으로 소개했다.
당시 새날 상무 ㄷ씨는 “새날의 신용도와 자금력에 청구의 명성과 기술력이 합쳐져 얻을 수 있는 시너지 효과를 노렸다”며 “청구의 옛 명성을 되찾도록 하겠다”고 공언했다(2007년 8월26일치 <영남일보>). 공언은 허언이었다.청구는 새날에 빨릴 수 있는 모든 단물을 빨린 채 파산하고 만다. 그 선두에 이 회장 및 새날 자금담당 ㄹ씨와 공모한 ㄷ씨가 있었다.
원문보기:
http://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598657.html#csidxf9e63f5960e7ed1a7be6bf024ca1913
원문보기:
http://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598657.html#csidx8f45ad5ed476cc7a65ca5905fc608db
삼성 등 재벌가 경영권 다툼 다룬 미드 제작된다
삼성가(家)와 같은 한국 재벌가의 경영권 다툼을 다루는 미국 드라마가 제작된다.
14일(현지 시간) 할리우드 리포터 등 현지 외신은 미국 방송 NBC가 삼성과 같은 한국 재벌가의 경영권·유산 상속을 둘러싼 분쟁을 다룬 드라마를 제작할 계획이라고 보도했다. 제작자는 한인 프로듀서인 알버트 김. FOX채널의 미스터리 드라마 ‘슬리피 할로우’(Sleepy Hollow)를 연출했던 그는 새 드라마의 시나리오도 직접 쓴다고 한다.
새 드라마의 제목은 미정이지만, 아시아계 배우가 대부분 캐스팅될 것이라고 외신은 전했다.
현재까지 알려진 이 드라마의 내용는 이렇다. 미국 현지에 자회사 진출을 앞둔 한국 다국적 기업 CEO가 숨을 거두기 전 ‘이미 숨겨둔 상속자’(previously unknown heir)가 있다는 사실을 고백한다. 운명의 상속인은 자신이 재벌 가문이란 사실을 모른 채 평범한 삶을 살던 한 여성.
CEO의 갑작스러운 고백으로 혼란을 겪는 재벌가와 ‘현대판 아나스타샤’의 흥미진진한 갈등이 드라마에서 전개될 것이라고 외신은 전했다. 그러면서 미국 LA를 배경으로 제작되는 이 드라마가 ‘권력을 향한 셰익스피어풍의 투쟁(shakespearean battle)’이 될 것이라고 묘사했다.
미국 언론은 그간 현지서 관심을 두지 않았던 한국의 ‘재벌’(Chaebols)이 다뤄진다는 점, 또 아시아계 배우가 대부분 캐스팅될 것이라는 점에서 드라마 제작의 의미가 높다고 평가했다.
최근 방영되는 미국 드라마 중 아시아계 배우가 대거 캐스팅 된 드라마는 ABC의 ’프레쉬 오프 더 보트’ 뿐이다. 이는 플로리다에 이민 온 대만 가족의 사연을 다룬 드라마다.
알버트 김은 올해 개봉한 ‘그것’ ‘셜록 홈즈’(2009년) 등을 만든 중국계 제작자 린 단과 이 드라마를 제작한다. 또 워너 브라더스의 제작 지원을 받는다.
[한편 드라마 제작 사실이 알려진 뒤 알버트 김은 자신의 트위터에 “‘그들(방송국, 제작자)은 내가 만들고 싶은 쇼를 만들어보라’고 했다. 물론 난 그럴 것이다”라는 글을 올렸다.
조진형 기자 enish@joongang.co.kr
[출처: 중앙일보] 삼성 등 재벌가 경영권 다툼 다룬 미드 제작된다
요정이 생각
위 글을 링크한 이유는 앞으로 또 다시 이런 쓰나미가 몰려 올 수 있기 때문이다
과거 아픈 기억들을 떠올리며 부실회사 경영란 때문에 우리 국민은 금모으기 운동과
세금으로 어찌 어찌 막았다
우리는 미래를 담보로 정상화 되면 복직 시켜주겠다 정규직 해주겠다는 약속을 믿고
비정규직에 구조조정 대거 실업자들이 눈물을 훔치며 사인했었다
두번째는
도시화 과정에서 공무원[빅흥수]을 죽이는 사태가 일어났고 조폭동원을 해 저들이
저질렀던 만행은 상상을 초월했다 그런 그들은 다원이라는 기업을 인수.....
그 시절 함깨했던 잔챙이? 그 들은 지금 경매상권에 유치권 행사를 하고 더러운
일들을 일삼는다
신DTI 도입으로 인해 금융권과 부실 기업이 도탄에 빠질 위기에 이른다
경제.정치인들은 2015년에 신DTI 도입했을 것을 2018년 으로 미뤘다
그러면서도 건설업을 위하여 아파트에 대한 대출을 늘렸다
가난한 국민들의 피 빨아 먹는 무차별 대출로 인한 가구가 늘어났다
그러나 언론은 이 위기에 대한 기사는 간혹 올리지만 국민은 인식하지 못하는
범위로 교묘하게 어렵게 쓰고 만다
이자율이 1% 올라갈 수록 리스크는 클 것으로 보인다
가계 대출로 인한 경매대란이 일어날 것으로 보인다
이 위기를 잘 풀어 가야 할텐데 참으로 안타깝다
삼성은 국민의 한사람으로써 전 세계적으로 창피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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