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실은밝혀진다/서북청년당하나회

‘서북청년단 재건' 우리는 알고 기억하고 후세에 알려야 한다

천사요정 2020. 10. 20. 03:05

인터뷰 이창우 서북청년단 상임부총재

 

해방공간에서 대표적인 극우 청년단체였던 서북청년단이 2014 1128일 재건총회를 열었다. 서북청년단이 1946 1130일 서울 종로 YMCA에서 창립을 했으니 꼭 68년만이다. 이들은 세월호 추모리본 철거를 시도하면서 처음 존재를 드러냈고 250여명 회원을 모아 정식으로 총회를 열면서 큰 주목과 비판을 받았다. 해방공간(1945~1948)에서 반공우익 테러의 선봉에 섰던 서북청년회를 다시 재건한 이유는 무엇이며 이들은 어떤 생각을 갖고 있나?

 

 

서북청년단 깃발

 

해방공간에서 서북청년단의 활약상

 

먼저 서북청년단의 활약상을 되짚어보자. 1946, 38선 이북에는 소련군이 진주했고 북은 그해 331일 토지개혁 완료를 선언한 상태였다. 북의 지주들은 저항보다 월남을 택했다. 월남한 북쪽 지주의 자제들이 남쪽에서 결성한 정치단체가 서북청년단이다. 함북(咸北)청년회, 북선(北鮮)청년회, 황해도회(黃海道會)청년부, 평안(平安)청년회 등 서북지역 청년단체들은 연합 성격의 청년단 이름을 서북청년회로 지었다. 하루아침에 기반을 잃고 고향을 등진 이들에게 공산주의자들은 큰 증오의 대상이었다.

서북청년단이 활동하던 2년은 갓 해방된 국가에서 온갖 정치세력이 나선 시기였다. 정치세력은 서서히 좌우익으로 양분되기 시작했는데 국가의 기틀은 물론 공권력의 개념조차 불확실한 때여서 좌우익 대립은 무력충돌로 번질 때가 잦았고 서로에 대한 테러도 빈번했다. 이 시기 서북청년단은 우익 진영의 선봉을 담당했다.

특히 서북청년단 단원들은 공산주의자로 의심되는 자에게 무조건적인 공격을 가했다. 대표적으로 이들이 제주도 4.3 사건에서의 무차별한 양민학살로 제주도 인구의 10%에 달하는 3~4만여명을 살해하기도 했다. 또 서북청년단 단원인 안두희 당시 소위가 통일국가노선을 견지했던 김구를 암살한 사실도 잘 알려져 있다.

2014년 재건된 서북청년단은 과거의 그 악명 높은 이름으로 세상을 놀라게는 했으나 규모와 활동내용은 미약하다. 배성관 사무총장이 처음으로 인터넷 커뮤니티 일간베스트에 모집 글을 올린 915일 이후 연 첫 모임에는 15명이 나왔다. 현재 카페 회원 수는 80명이 채 안 된다. 서북청년단 회원명단부에 이름을 올린 사람은 250명 수준이다.

서북청년단을 운영하는 주축은 3명이다. 맨 처음 서북청년단 재건발기인 모임을 제안한 배성관 사무총장(68), 이창우 상임 부총재(61), 정함철 구국결사대장(41)이다. 배성관 사무총장은 육군사관학교 25기로 2000년 대령으로 제대했다. 이창우 부총재는 전 한양대 건축공학과 겸임교수로 현재는 무궁화사랑운동본부 중앙회장을 맡고 있다.

 

해방공간으로 돌아간 듯 한 인터뷰

 

영화 <태백산맥>의 염상구(태흥영화사)

 

조정래 작가의 소설 <태백산맥>의 주인공인 염상구는 대동청년단 감찰부장이다. 지리산 빨치산과 이른바 빨갱이에 대한 증오로 똘똘 뭉친 인물이다. 그와 청년단원들은 빨치산들을 잔인하게 죽이고 그 가족들도 괴롭힌다. 2000년대 중반 소설의 무대가 된 벌교의 대동 청년단 사무실 건물을 방문한 기억이 오버랩되면서 2014년의 끄트머리에 서북청년단 사무실에 가는 길은 역사와 소설의 상상력을 동원시키기에 충분했다.

해방공간의 반공청년이 떠들썩하게 무용담을 얘기할 것 같다는 엉뚱한 상상을 하며 들어선 사무실은 자금이 부족하기 마련인 여느 시민단체의 그것과 비슷했다. 건축설계 사무소를 함께 운영하고 있는지, 혹은 미처 치우지 못한 짐인지 사무실 곳곳에 건축모형과 도면이 있었다. 도면과 모형만큼 곳곳에 박근혜 대통령의 사진, 감사패 등도 걸려있었다 

응접실로 안내받아 가는 길에 언론에 크게 보도된 해골문양이 박힌 서북청년단 깃발을 지나쳤다. 해방공간의 그 많던 반공청년 대신 환갑이 넘은 이창우 부총재와 배성관 사무총장이기다리고 있었다. 인터넷신문 <사이버 뉴스24> 발행인을 겸하고 있는 배성관 사무총장은 한창 홈페이지를 관리하던 중이었다. 이창우 부총재와 2시간 동안 이야기를 나눴다.

이 부총재는 2014년 현재가 해방공간(1945~1948)과 비슷하다고 보고 있다. 해방공간에서 좌·우익이 치열하게 대립한 것처럼 현재도 좌·우익이 치열하게 대립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는 해방공간의 시대상과 서북청년단의 역할에 오랫동안 설명했다. 그는 수없이 많은 백색테러를 저질렀던 서북청년단의 활약을 대부분 긍정적으로 설명했다. 다음은 이창우 부총재와의 인터뷰를 재구성한 것이다.

 

이창우 서북청년단 부총재

 

-서북청년단은 해방공간에서 어떤 역할을 했는가?

 

이창우 부총재(이하 이 부총재)= 한마디로 서북청년단은 해방공간에서 자유민주주의를 수호하고 공산주의를 배격하는 단체였으며 건국에 가장 큰 공을 세운 단체다. 서북청년단이 있어서 남한에서만이라도 자유민주주의를 할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해방직후에는 아이러니하게도 북한보다 남한에 공산주의자들이 많았다. 이를테면 해방공간에 김구, 김일성, 이승만이 있었다. 그런데 생각이 다 달랐다. 김구는 민족국가를 만들고 싶었고 김일성은 공산국가를 원했다. 이승만은 민주주의 사회를 만들고 싶었다.

그런데 그 중에 김구가 상해임시정부를 만들고 2년 뒤 해방이 됐는데 그 2년 동안 임시정부가 한 일은 거의 없다. 또 임시정부는 세계적으로 인정을 못 받았다. 또 김구가 독립운동을 한 것은 분명하지만 그는 건국에는 반대를 했다.

바로 그 시점에 북한이 공산화되니까 지주계급(반공세력)100만 명이 남한으로 내려왔다. 이때 내려온 청년들이 보니 남한에도 공산주의가 있었던 것이다. 그들이 공산주의자들을 나쁘게 본 건 당연하다.

-서북청년단은 민족통일국가를 염원했던 김구를 암살한 안두희 소위가 속한 테러 단체로 기억된다.

이 부총재= 김구에 대해서 냉정하게 판단해야한다. 김구는 성시백이라는 공산주의자의 꼬임에 넘어가 김일성을 만나러 간 사람이다. 아직 살아있는 이철승씨도 김구의 평양행을 말렸지만 김구는 고집을 부렸다. 그렇게 평양에 가서 남북협상 회의를 하니 이미 짜여진 각본이 있었고 김구는 본인의 뜻을 펴지 못하고 빈손으로 내려왔다.

이승만은 김구의 암살에 대해 경고했다. 그런데 슬슬 김구가 이승만을 제거하려 한다는 소문이 나는 것이다. 암살을 감행한 안두희는 포병 소위로 원래 김구가 당수로 있던 한국독립당 당원이다. 그리고 입대 이전에는 서북청년단 단원이기도 했다.

좀 복잡한 이력을 가진 사람인데 당시 재판기록을 보면 안두희는 김구를 존경하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김구가 자꾸 공산주의에 물들어가는 느낌이 들었던 것이다. 안두희는 존경하는 분을 죽인 것에 대해 괴로워했다.

- 뿐만 아니라 서북청년단은 제주 4.3 사건에서의 무차별적인 양민학살과 수많은 백색테러로 기억된다.

 

영화 <지슬> 화면 갈무리. 제주도민들은 4.3 사건 당시 무차별적인 학살을 피해 동굴로 숨어들었다. (설문대영상)

 

이 부총재= 서북청년단이 했던 활동을 테러라고 하는데 그건 그걸 싫어하는 좌파들이 테러라고 부르는 것이다. 되묻고 싶다. 민주주의를 만들기 위해 공산주의를 쳐부순 게 테러인가? 해방공간에서 잘못하면 한반도 전체가 공산화가 될 뻔 했다. 제주도 4.3 사건도 큰 틀에서 보면 공산주의를 배격하기 위한 것이었다. 서북청년단이 그러지 않았다면 나라가 존재했겠느냐를 따져 봐야한다. 양민들이 많이 죽었다고 하는데 그 상황, 그 시점에서는 빨갱이들 주변에 있는 사람들은 양민이 아니다. 양민이면 왜 거기에 있겠느냐는 것이다.

- 앞으로 어떤 활동을 해나갈 생각인가?

이 부총재= 오늘의 현실에 맞는 전략으로 접근하겠다. 공권력이 약하다. 경찰들이 두드려 맞는다. 폴리스라인도 무시한다. 선진국은 국회의원이라도 폴리스라인을 넘고 공권력을 무시하는 행동을 하면 잡혀간다. 공권력이 살지 않으면 나라가 살 수 없다. 민주주의를 지켜야한다. 우리가 공권력이 못하는 걸 할 것이다. 그러면 시위대로 공권력을 존중해야함을 알게 될 것이다. 그 중간역할을 우리가 하겠다.

 

풍문에 기댄 판단, 흔들리는 가치관

 

인터뷰 도중 이 부총재는 소문에 가까운 이야기를 자주 꺼냈다. 김구 암살에 대한 정당성을 논할 때는 당시 김구가 김일성에게 충성을 맹세했다는 소문이 돌았다라고 말했다. 김진태 새누리당 국회의원이 법조계에 김일성 장학금 받은 판·검사 1800명 있다라는 주장과 황장엽 전 북한 노동당 비서가 북한을 추종하는 간첩이 5만 명 있다라고 한 증언을 언급했다.

근거를 물으니 그 사람들이 괜히 그런 말을 하겠나? 그 자리에서 알 수 있는 정보가 있다라고만 답할 뿐이었다. 그는 현 정부 조직조차도 좌파가 장악했다고도 말했다. 그는 박근혜 정부는 우파정부지만 공무원 중에 실장, 국장들은 김대중·노무현 좌파 정부에서 심어놓은 사람들이 다하고 있다 김대중 정부에서 안기부 직원 280명을 내보낸 것이 대표적이다라고 말했다.

그의 종북 개념은 간단했다. 그는 좌파들은 한국정부가 조금이라도 잘못하는 거 있으면 한국정부를 박박 긁는데 그들은 북한 인권에 대한 얘기 하나 없다라며 불만세력이라는 건 내것도 내거 네 것도 내 것이라고 하는 세력이다. 그들은 자기 것만 챙기고 나라 걱정은 안하고 북한에 대해서는 한마디 말도 안 한다라고 비판했다.

그렇게 이른바 좌파에 대한 비판이 이어지는가 싶었는데 그는 의외로 좌파에 대한 긍정적인 평가를 내리기도 했다. 그는 좌파가 예전부터 애국을 많이 했다. 이를테면 관직에 있는 사람들을 우파, 평범한 사람들을 좌파라고 치자 관직에 있는 사람들보다 오히려 평범한 사람들이 애국을 했다라고 평가했다. 그는 임진왜란에 들고 일어선 의병을 예로 들었다. 또 그는 일본 공산당은 멋있는 공산당이다. 극우에 반대하는 멋있는 공산당이다라고 치켜세우기도 했다. ·우 개념과 민족의식이 혼재된 것으로 보였다.

그에게 그렇다면 어떤 좌파를 척결하겠다는 것인지 물었다. 그는 정도라는 게 있다. 국가를 흔들고 대통령을 흔드는 건 세월호를 정치적으로 이용하겠다는 것뿐이다. 예를 들면 우리가 밥을 지어서 한 명이 대표로 밥을 푸는데 좀 잘 못 풀 수도 있다. 그럴 때 격려를 해야지 밥통을 엎으면 되나?”라고 말했다. 그는 , 국민들이 박근혜 대통령을 뽑은 거 아니에요? 그렇다면 일단 믿고 맡겨야지. 반대를 위한 반대를 해서는 안 된다라고 말했다.

그의 대답에서 노무현 전 대통령에 대한 당선무효소송과 탄핵이 떠올랐다. 서북청년단은 국가를 흔들었던 대표적인 두 사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었다. 

이 부총재는 잠시 머뭇거리더니 그때는 탄핵당할 정도로 말을 잘못 했을 수 있다라며 노 대통령이 얼마나 말실수를 많이 했나. 그래서 당시 사람들도 대통령감이 아니라고 판단했다. 그런데 지금 가만히 열심히 일하는 대통령에게 그럴 이유가 없다라고 짧게 대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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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이창우 서북청년단 상임부총재

 해방공간에서 대표적인 극우 청년단체였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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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북청년단 재건’ 파문…도대체 어떤 단체였길래

당신이 서북청년회에 대해 알아야 할 5가지
김구 암살한 안두희가 간부…제주 4·3 때 ‘주민 학살’
KKK·네오나찌·재특회 등과 맥락 같이 하는 극우단체

 

‘서북청년단 재건 준비위원회’를 자처하는 극우단체들이 서울광장에 설치된 ‘노란 리본’을 철거하려던 사실이 알려지면서 이들이 재건하려는 ‘서북청년회’(약칭 서청)에 대한 관심이 커지고 있다. 서북청년회는 어떤 조직이고, 이 같은 극우단체를 대처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

 

■ 서북청년회는 언제, 왜 결성됐나?서북청년회는 해방 뒤 월남한 서북 지방 청년들을 중심으로 1946년 11월30일 서울에서 결성된 극우반공단체다. 이들은 주로 지주, 기독교계 인사, 민족주의자나 일부 친일파 등 북한의 탄압을 피해 도망온 젊은이들이었다. 이들은 강령으로 조국의 완전자주독립의 전취(戰取), 균등사회의 건설, 세계평화에 공헌 등을 내세웠다. 하지만 이들이 주로 한 일은 좌익세력에 대한 ‘백색 테러’였다.이들은 1947년 삼일절 기념식을 따로 가진 좌·우익이 시가 행진을 하다 남대문에서 충돌한 사건을 비롯해 부산 극장사건, 조선민주애국청년동맹 사무실 점령사건, 정수복 검사 암살사건 등에 관여했다.

 

후지이 다케시 성균관대 동아시아연구원 연구실장은 <한국일보>와 한 인터뷰에서 “서북청년회가 정식 명칭인데 서북청년단이라는 명칭을 사용한 것을 보면 조직에 대한 정확한 이해 없이 대공 투쟁이라는 막연한 이미지만 있는 듯하다”며 “세월호 유가족들을 때려잡아야 할 빨갱이로 규정하고 반공 프레임을 노골화할 것”이라고 말했다.

 

■ 안두희도 서북청년단 간부였다

 

김삼웅 전 독립기념관장은 올해 6월26일 백범 암살 65주기에 맞춰 <안두희, 그 죄를 어찌할까>(책보세 펴냄)를 펴냈다. 김 전 관장은 안두희의 삶과 행적을 추적하면서 백범 김구 암살의 진실을 추적했는데, 그 책에 따르면 안두희는 서북청년회 간부였다.

 

김 전 관장이 정리한 안두희의 이력은 이렇다. ‘1917년 3월 신의주에서 40여리 떨어진 평북 용천군 산골마을에서 태어났다. 미쓰비시 등 일제 기업들 제품을 취급하며 돈을 벌어 신의주 호상이 된 그의 아버지는 토지측량기사 자격까지 딴 뒤 도정업에 손을 대고 쌀 군납까지 하면서 평안도에서 몇 손가락 안에 드는 거부가 됐다. 아버지 덕에 상업학교를 나와 만주로, 베이징으로 흘러다니며 허랑방탕한 세월을 보냈고, 금융조합 서기 노릇도 했다. 일본 유학까지 다녀왔으나 해방과 함께 진주한 소련군이 재산을 몰수하자 47년 단신 월남해 이북 출신 반공우파 조직인 서북청년단에 들어가 종로지부 총무까지 올라간다. 육사 8기생으로 입대해 이승만의 사조직이라 할 친일·친미파 소굴 ‘8·8구락부’의 정예요원으로 간택받아, 소위 임관 뒤 3개월 남짓 만에 백범을 암살한다.’ -

<한겨레> 2014년 7월22일치(▶ 바로 가기 : “백범 죽인 안두희는 이승만 하수인에 불과해” )

 

사진출처 제주의 소리.

 

■ 제주 4.3 항쟁 때 주민 학살

제주 인터넷 신문인 <제주의 소리>에 연재되고 있는 ‘김관후의 4·3칼럼’을 보면, 서북청년회가 ‘4·3 항쟁’에서 시민 학살에 앞장섰던 장면이 나온다. ‘제주 4·3 사건 진상 규명 및 희생자 명예 회복에 관한 특별법(4·3 특별법)’에 따르면, 제주 4.3사건이란 1947년 3월1일을 기점으로 해 1948년 4월3일 발생한 소요 사태 및 1954년 9월21일까지 제주도에서 발생한 무력 충돌과 진압 과정에서 주민들이 희생당한 사건을 말한다.

 

제주 4·3 항쟁의 발발과 전개과정에서 서북청년회 또는 서북청년단(서청)은 ‘인간이 과연 어느 정도까지 잔혹해질 수 있는가’를 보여준다. 1949년 초 당시 국방부 장관 신성모는 어느 한 자리에서 “서북청년회원 등 육지의 사람들이 경찰·상인·관리 등이 되어 도민을 괴롭혔기 때문에 4·3 폭동이 난 줄 안다”고 말했다.서청은 “우리는 이북에서 공산당에게 쫓겨왔다. 빨갱이들은 모두 씨를 말려야 한다”면서 제주도에 들어왔다. 미군정·이승만 등 집권세력은 ‘제주도 학살’의 최선봉에 서청을 세웠다. 그들은 소련 군정에 의해 박해를 받아 월남한 지주세력으로, 그 트라우마에 의해 반공주의자로 바뀌었다. 한마디로 정부 대신 손에 피를 묻혀주는 우파 민병대였다. 군과 정부 고위직을 장악하였고 대구노동자파업, 보도연맹사건, 거창양민학살사건, 제주4.3사건에 개입하여 20만~40만명 이상의 좌파로 의심되는 민간인과 비기독교인들을 학살하였다.-

 

<제주의 소리> 2014년 05월 14일 (▶ 바로 가기 : ‘김관후의 4·3칼럼- (23) 서북청년단, 제주도 학살 최선봉에 서다’ )

 

■ 다른 나라에서의 ‘백색 테러’는?

서북청년회의 일련의 테러는 ‘백색 테러’(white terror)로 일컬어진다. 백색테러는 정치적 목적 달성을 위해 암살·파괴 등을 수단으로 하는 것으로, 좌파에 의한 적색 테러(Red Terror)와 대척점에 있다.‘백색’을 사용하는 것은, 프랑스혁명 중 1795년 왕당파가 혁명파에게 보복한 사건에서 비롯됐다. 백색은 프랑스 왕국의 상징이었던 백합의 색에서 나왔다. 프랑스에서 백색이란 왕권이나 왕당파를 의미하는 색으로 통했다.현대에서도 백색테러는 그치지 않고 있다. 미국의 악명 높은 인종차별 테러단체인 KKK단이 현대의 대표적인 백색 테러 단체다. 유색인들을 상대로 폭력을 행사하는 독일의 네오나찌 등도 마찬가지다.일본에서 ‘재일 특권을 허용하지 않는 시민 모임’(재특회)도 백색 테러 단체로 손꼽힌다. 재특회의 혐오 집회로 최근 일본 도쿄 내 ‘한류의 거리’라 불렸던 신오쿠보의 대표적인 한식당인 ‘대사관’이 지난달 15일을 끝으로 영업을 중단하기도 했다.

 

대사관이 문을 닫은 원인은 지난 2010년께부터 본격화된 ‘재일 특권을 허용하지 않는 시민 모임’(재특회) 등의 반한 집회(헤이트 스피치) 때문이다. 재특회 등은 도쿄의 한류 거리라 불리는 신오쿠보나 아키하바라 등을 중심으로 2012년 여름께부터 반한 집회를 시작했다. 그러나 업소에 더 큰 피해를 준 것은 집회가 끝난 뒤 이뤄진 이른바 ‘산보’였다. 재특회 회원들이 집회 뒤 ‘산보’라는 명목으로 한류 업소를 돌아다니며 욕설을 하고 간판 등을 발로 차는 등 난동을 부렸기 때문이다. 

-<한겨레> 2014년 9월18일(▶ 바로 가기 :‘재특회’ 혐오집회에 스러지는 도쿄의 ‘한류 거리’

 

지난해 3월31일 한류거리로 불리는 일본 도쿄 신오쿠보 거리에서 일본 우익단체 회원들이 ‘한국인이 텔레비전에 나오지 않도록 하라’는 구호를 쓴 손팻말 등을 들고 시위를 벌이고 있다. 정남구 기자 jeje@hani.co.kr

 

■ 그들의 광기에 어떻게 대처해야 하나

우리나라의 일간베스트 저장소(일베)는 일본 재특회와 쌍둥이처럼 닮았다. 그동안 온라인에서만 활동하던 그들이 최근 오프라인으로까지 나오고 있다.일베를 비롯한 극우단체들이 백색 테러를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한귀영 한겨레사회정책연구소 연구위원은 “강자와 권위주의에 대한 맹목적 복종과 약자에 대한 폭력성이라는 측면에서 일베 현상은 파시즘과 상당히 유사하다”며 “ ‘인정받고 싶은 욕구’ ‘소속감 및 친밀감에 대한 강한 갈구’가 일베의 주요 동기”라고 진단했다. 

 

그렇다면 왜 이들은 일베를 하는가? 결국 상처 때문일 것이다. 강자와 권위주의에 대한 맹목적 복종과 약자에 대한 폭력성이라는 측면에서 일베 현상은 파시즘과 상당히 유사하다. 에리히 프롬은 파시즘에 대해 고독과 무력감을 견디지 못한 개인들이 강자에게 도피하는 것으로, 빌헬름 라이히는 약자에게는 군림하려 하고 강자에게는 굴종하려는 대중의 권위주의적 성격 구조로 설명한 바 있다. 20세기 초반 자본주의의 독점화 과정에서 독일의 중간계급 대중은 몰락해갔고, 그들은 상처받은 자존심을 강자에 대한 무한한 복종과 약자에 대한 거친 폭력으로 보상받으려 했다. 약자에 대한 폭력은 상처받은 자존심을 치유하고 자신의 존재를 인정받으려는 행동이었던 것이다. 범죄심리학자 표창원 박사도 ‘인정받고 싶은 욕구’ ‘소속감 및 친밀감에 대한 강한 갈구’가 일베의 주요 동기라고 설명한 바 있다.한국보다 넷우익 사정이 심각한 일본의 상황은 일베 현상을 이해하는 데 시사적이다. 일본의 르포작가 야스다 고이치가 쓴 <거리로 나온 넷우익>에 따르면, ‘재일 특권을 용납하지 않는 시민 모임’(재특회) 등 일본 넷우익들의 존재 이유 역시 인정 욕망에 있다. “솔직히 우리는 부모에게도, 세상에서도 좋은 평가를 못 받고 있잖아요. 그런데 활동할 때 동지들은 반드시 저를 인정해주었어요”라는 재특회 회원의 말이 이를 잘 보여주고 있다. 역시 인정욕망이 중요한 것이다. 인간은 그저 생물학적·경제적 존재만은 아니다. 정말 돈만 있다고 살아갈 수 있는 건 아니다. 누군가로부터 인정받고 있다는 자존감은 생존의 필수적 요소다. 

-<한겨레21> 2013년 6월10일(▶ 바로가기 :일베, 상처받은 이들의 인정욕망

 

그렇다면 이들의 광기에 어떻게 대처해야 할까?

증오를 녹이는 데 마법 같은 치료제는 없다. 대신 전문가들은 증오의 원인과 결과를 먼저 직시하라고 한다.

 

증오를 녹이는 데 마법 같은 치료제는 없다. 증오의 원인과 결과를 직시하는 것이 먼저라는 건 공통된 의견이다. “가장 먼저 할 일은 증오, 증오의 대상인 가해자, 그리고 증오의 결과에 대해 책임감을 갖는 것이다. 우리가 증오의 결과를 인정하고 받아들일 수 있다면, 우리는 증오에 맞서 그것을 사라지게 할 수 있다.” <우리는 어쩌다 적이 되었을까>의 저자 로버트 스턴버그는 이렇게 적었다. 박해광 교수는 다음과 같이 제안했다. “일베와 같은 젊은 세대들은 특히 5·18을 다른 인종, 다른 영토의 사건처럼 받아들입니다. 우리의 역사이고 우리의 영토 안에서 벌어진 일이라는 걸 환기할 수 있는 사회적 반성이 반드시 있어야겠고요. 역사 교육만이 아니라 총체적으로 사회가 젊은 세대에 정의로움을 교육할 필요가 있겠습니다.” 결국 증오라는 원시적 감정을 조절하는 것은 정의와 합리라는 고등 신경계의 사고를 통해서만 가능할 것이다. 인간은 그러기 위해 진화한 것 아닐까.  

-<한겨레21> 2013년 3월10일(▶ 바로 가기 : 혐오에 찬 너의 말, 그게 인종주의다

 

정혁준 기자 june@hani.co.kr



원문보기:
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657339.html

 

‘서북청년단 재건’ 파문…도대체 어떤 단체였길래

당신이 서북청년회에 대해 알아야 할 5가지 김구 암살한 안두희가 간부…제주 4·3 때 ‘주민 학살’ KKK·네오나찌·재특회 등과 맥락 같이 하는 극우단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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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로 보는 서북청년단, 대체 어땠길래?

[언론네트워크] <김관후의 4·3칼럼> 서북청년단, 제주도 학살 최선봉에 서다

출처: https://www.pressian.com/pages/articles/120520?no=120520#0DKU 프레시안(http://www.pressian.com)

 

역사로 보는 서북청년단, 대체 어땠길래?

최근 일부 보수성향 인사들이 반공조직인 '서북청년단'을 재건하겠다고 나서 논란을 일으키고 있다. 소위 '서북청년회 재건 준비위원회'라는 이름을 내 건 일군의 사람들이 세월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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