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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1381년 농민봉기 (Peasants’ Revolt)의 전말

천사요정 2018. 2. 19. 16:53

중세 봉건제도가 붕괴되는 결정적인 계기로 작용

최초의 국민운동, 1381 농민 봉기 (Peasants’ Revolt)
 
때는 1381년 영국. 흑사병으로 부족해진 노동력은 농민들에게 어느정도의 파워를 주었고, 임금이 인상되기도 했지만, 오르는 물가에는 턱없이 부족했습니다. 
 
10살의 나이에 왕이  리차드 2 (r. 1377-99)  대신해 나라를 다스렸던 그의 삼촌곤트의  (John of Gaunt), 대법관과 수석주교 자리를 겸하고 있었던 타락한 사이먼 서드버리 (Simon Sudbury), 세금을 밥먹듯이 올렸던 재무부장 로버트 헤일즈 (Robert Hales)  농민들을 노예처럼 부리던 남작들의 횡포가 이루 말할  없었습니다.
 ‘백년 전쟁’  너무 지긋지긋하고, ‘흑사병’은 아직도 여기저기서 재발하는데, 하루하루먹을 것을 걱정해야 했던 가난한 농부들의 오막살이집과 유럽으로 양모를 수출하며 점점 부유해져만 갔던 귀족과 상인들의 우아한 저택은 너무도 차이가 났습니다. 남편을 따라 밭에서 일했던 소작농들의 부인들의 찢어진 옷과 귀부인들의 실크드레스는 너무도달랐습니다.
 
빈부의 격차가 너무 커지면 문제가 생기기 마련인데,  와중에 프랑스와의 전쟁 경비를 대기위해 인두세 (Poll Tax) 가 도 한번 징수됐는데, 벌써 세번째였습니다. 이번에는 액수도 많았을  아니라, 직급과 수입에 상관없이 14 이상이면 1년에 내는 액수가 똑같아 너무 불공평했습니다.
농민들은 더이상 참을  없었습니다. (It pushed them over the edge. ) 1381 농민 봉기(Peasants Revolt)  인간의 평등을 주장하며 근본적인 변화를 요구했던 최초의 국민운동이자 역사상 가장 중요한 폭동으로 보여집니다.
 
농민들이 런던으로 행군하며 생각했습니다,
 
‘왕에게 가자, 어린 왕이 우리의 고충을 알게 되면, 우리를 불쌍히 여겨 해결책을 마련해줄테니…’
 
 
아담이 밭을 갈고, 이브가 실을 자았을 때, 누가 고귀한 신분이였냐?
 
곡물이나 연장으로 대신할 수도 없었던 인두세를 내지 못해 숨어지내는 농민들이 생기는 상황에, 농민들이  세금을 자기 주머니에 넣고 시치미떼는 남작들이 있는가 하면, 교회는 권력과 재산에 눈이 멀어 이런 남작들의 편을 들었으니, 농민들은 대체 기댈 곳이없었습니다.
 
이때 영국의 시골에서 활동하며 ‘설교와 기도를 성도들이 알아들을  없는 라틴어로 하는 것이 말이 되냐’  성경을 영어로 번역하고, 교황과 성직자가 사람과 하나님 사이의중간 레벨이라는 것도 틀린 컨셉이라며 개혁을 추구했던  위클리프 (John Wycliffe) 목사가 이끌었던 롤라디 그룹이 있었습니다. 이 그룹 출신의   (John Ball) 목사가 ‘아담이 밭을 갈고, 이브가 실을 자았을때, 누가 고귀한 신분이였냐? (While Adam delved and Eve span, who then was the gentleman?)  라는 유명한 말을 했습니다.
아담과 이브 때에 일하지 않으며 남의 덕을 보는 사람이 없었는데,  지금 이런 현상이생기냐, 신 앞에 모두 동일하며 봉건제도는 잘못된 것이라는 말바른 소리 하는   목사는 체포되어 투옥됐지만, 이미 농민들의 자존감은 일깨워진 상태였습니다.
 
 
구석으로 몰린 농민들  ' 것이 없는데  어쩌란 말이냐!'
 
예상했던 것만큼 세금이 많이 거두어지지 않자, 왕의 섭정 곤트의   이유를 알아보라며 파견한 관리들이 에섹스 (Essex) 지역의  마을에 도착해서 세금을  사람들도  사람들의 몫까지 부담해서 다시 내라’  말했습니다
 
사람을 너무 막다른 곳으로 몰면, 싸울 자세를 취할  밖에 없게 됩니다. ‘줄 것이 없는데 어쩌란 말이냐’  농민들은 관리들을 매질하여 쫓아냈고, 에섹스에서 시작된 분노의불길은 근방의 켄트 (Kent)  다른 지역들로 번졌습니다. 성난 농민들은 성 밖의 집들을불태우고,   목사를 구해냈으며, 영주들은 농민들의 손에 죽음을 당하거나, 도망치다가 잡혀서 그들의 머슴이 되어 천한 일을 하는 치욕스러운 경험을 하게 되었습니다.
 
해방된   목사는 블랙히쓰 (Blackheath) 에서 농민들을 소집했고, 농민봉기의 총지휘자가 되었던 켄트의  타일러 (Wat Tyler)  이끄는 무리는 성벽 남쪽의 사덕(Southwark)  장악하고, 람베쓰 (Lambeth) 에서 세금, 노동계약 및 빚에 대한 모든 문서들을 파괴했습니다.
‘모든 성문을 닫으라’  시장, 윌리엄 월워쓰 (William Walworth)  명령이 떨어졌지만, 이를 어기고 성문을 열어준 구의원, 윌리엄 톤지 (William Tonge) 덕에 성벽안으로들어갈  있었던 5만여명의 농민부대는 시장도 자주 드나들었던 런던 브리지 (London bridge)  플랑드르 창녀집을 파괴하고 (창녀집에 반대해서가 아니라 플랑드르인들이싫었기에...), 플릿 감옥의 죄수들을 플어주었으며, 템플 (Temple) 지역에서 변호사들을죽이고,  많은 문서들을 파괴했습니다.
 
농민들은 마지막으로 스트랜드 (Strand)  자리했던 ‘곤트의 존’  사보이 궁전 (Savoy Palace) 으로 내려가 장식품, 커튼, 가구 하나하나에 불을 지른 다음 폭탄을 터뜨려 궁전을 무너뜨렸습니다. ‘곤트의 존’  이 때 스코틀랜드에 있었기에 죽음을 면할  있었습니다.. 민약그가 런던에 있었으면 매우 잔인하고 끔찍한 죽음을 맞았으리라는 것은 말할필요가 없습니다.
 
다음 날에는 외국인 대학살이 일어났습니다. 에섹스의  스트로 (Jack Straw)  이끌었던 무리에 의해 빈트리 (Vintry)  교회에서 35명의 플랑드르인들이 끌어내어져 목이잘렸고, 롬바르드 스트릿 (Lombard St)  많은 이탈리아 은행업자들도 죽음을 면치 못했습니다. 성문을 열어준 윌리엄 톤지처럼, 농민들의 뜻에 동정해 런던 타워 (Tower of London)  문을 열어준 사람이 있었고, 성난 농민들은 타워로 들어가 그곳에 숨어있던주교, 사이먼 서드버리와 인두세를 창시한 재무부장 로버트 헤일즈를 끌어내어 교수형에 처하고, 그들의 머리를 창에 꽂아 ‘런던 브리지’에 전시했습니다. ‘런던 타워  장악된것은 전무후무한 일로서, 타워가 갑옷입은 기사나 훈련받은 사수들의 군대에 의해서가아니고, 농민들에 의해 장악되었다는 것은 주목할만한 일입니다.
 
 
Let us go to the King, 왕에게 가게 해달라…
 
Let us go to the King and remonstrate with him 왕에게 가서 우리의 고충을 호소하게 해달라. 그는 어리고, 그로부터 호의적인 답을 얻을  있을지도 모른다. 만약 아니라면, 우리는 스스로 우리의 상황을 바꿔야 한다. 우리는 타락한 귀족들과 성직자들이 싫을뿐이지, 왕에게는 충성한다. 왕이 우리의 고충을 모르셔서 그렇지, 알게 되면 우리를 구해주실 것이다’,
 
농민들이 계속 왕을 만나게 해달라고 했으니, 목숨의 위협을 느껴 피신해 있던 리차드 2세는 더이상 가만히 있을  없음을 깨닫고, 농민들에게 마일 엔드 (Mile End) 에서 만나회담을 열자고 했습니다. 당시 14 소년이였던 리차드가  타일러와 5만 명의 날뛰는우락부락한 농민들을 만나러 가는 길이 얼마나 두려웠을지 우리는 상상만   있습니다.
 
리차드는 떨리는 심정을 숨기고 엄숙하게 말했습니다.
 
리차드 2:  그러느냐, 원하는 것이 무엇이냐.
 
 타일러와 농민들: ‘왕이시여, 저희의 고충을 들어주소서.
 
·     농노제도를 없애 주십시오. 하나님 앞에  동등한 인간 아닙니까? 귀족들만 위하지 마시고, 농민들의 권리를 인정하는 특전을 내려주소서. 구속받지 않는 농업민으로 일하고 싶습니다.
·        인두세를 폐지하고, 임금인상을 막지 마시고, 토지 임대료를 줄여주소서. 저희가  수가 없나이다.
·         교회가 타락하고 있습니다, 교회의 막대한 토지와 재산이 사람들에게 나누어줘야 합니다. 그리고 성직자들의 계급이  이렇게 복잡합니까,  마을에  명의주교만 있으면 되는  아닙니까?
·      무보수로 일 주일에 이틀까지 교회의 토지에서 일해야 하는, 교회는 점점  부자가 되고, 우리는 점점  가난해지는  제도를 폐지해 주십시오. 안그래도 가족들을 먹여 살리기가  힘듭니다.
·      타락하고 사악한 관료들을 처벌하시고 (그들은 반역자들입니다), 왕에게 충성하는 저희들은 잘못된 점을 바로 잡고 싶었을 뿐이니, 반란을 일으킨 것을 용서하여주십시오.
 
리차드 2: ‘알겠다, 너희들의 원을 들어주마. 다만 누가 반역자인지 아닌지는 내가 결정하겠노라.
 
 
역사는 승자가 쓰는 거짓말
 
 타일러가 부탁할 것이 남아있다고 해서, 다음날 스미스필드 (Smithfield) 에서 다시회담이 벌어졌는데, 이때 기고만장해진 타일러가 말에서 내리기를 거부하며 오만방자한태도로 왕을 맞이했습니다.  마실 것을 가져오라고 하며 무례하고 역겨운 태도로 입안을헹구고,  앞에 뱉었다고 전해집니다.
 오만방자한 행위를 참지못한 시장, 윌리엄 월워쓰가 타일러를 말에서 떨어트리고 칼로 찔렀고, 왕의 기사들에 둘러싸여 타일러가  보이지 않게 되자, 농민들이 우왕좌왕하여 무슨 일이냐고 외치며 화살을 들어올렸는데, 이때 14 소년왕이 용감하게 타고 있던말을 농민들이 있는 방향으로 몰아 소리쳤습니다 .
 
 ‘여러분, 당신들의 왕을  작정입니까? 당신들에게 나 외에는 대장이 없습니다, 나를따르십시오! (Sirs, will you shoot your king? You shall have no captain but me! Follow 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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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작스런 왕의 카리스마는 군중을 압도했고모든 요구를 들어주겠다는 왕을 따라 모두들 클러큰웰 (Clerkenwell)  갔지만, 왕의 수작이였습니다.
응급실로 옮겨진 타일러는 월워쓰가 끌어내어 목을 베어 끝장을 냈고, 리차드는 ‘런던 브리지’의 창에 꽂혀있던 주교 서드버리의 목을 내리고  자리에 타일러의 목을 걸었습니다. 모두들 집으로 돌아가라는 왕의 명령에, 농민봉기는 끝이 났고, 월워쓰는 그자리에서기사작위를 수여받았습니다.
 
농민들이 해산하자마자, 리차드는 영국 전역에 군대를 파견해 그들을 쫓아가서 체포하게 했습니다.  스트로를 포함한 수천명의 농민들이 재판도 없이 교수형에 처해지고,  목사는 , 드로운  쿼터드 (hung, drawn and quartered, 말의 뒤에 매달려 처형장에 끌려가, 정신이 희미해질때까지만 목이 매달아진 다음 끌어내려져, 내장이 들어내지고, 몸이 사등분되는 죽음)  맞았습니다. 남은 농민들은 두려움에 떨며 반란에 가담했던 것을 극구 부인하고 목숨만을 건지려 했습니다.
 
사실, 타일러가 왕에게 무례하게 행동했다는 것은 왕실의 기록에 의한 것이라 얼마나 공정하게 묘사된 것인지   없습니다. 역사는 승자의 거짓말, 패자의 자기기만이며, 기억력의 불완전함과 문서의 불충분함이 만나는 지점에서 생기는 확실함 이라 하지요. 
 
 
농민 봉기는 실패일까, 성공일까?
 
협박 아래 이루어진 것이라며 리차드는 약속을 지키지 않았고, 반란은 성공하지 못했지만, 실패만인 반란은 없음을 우리는 이미 AD 60, 부디카의 반란 (Boudiccas Revolt) 보았습니다.
농민봉기 이후, 겁먹은 귀족들이 농민들에게   예의를 갖추게 되었고, 인두세가 폐지되었으며, 농민들이 받는 임금 통제 시도도 주춤해지면서 봉건제도가 무너지기 시작했습니다. , 농민들이 추구했던 독립성, 평등함과 인간에 대한 기본적인 예의는 근대 ‘노동조합’의 기본사상이 되었다고   있습니다.
 
11세기 초에 ‘정복왕 윌리엄’과 함께 영국에 들어온 봉건제도는 왕의 권력이 줄어들면서일반인도 멤버가   있었던 의회의 세력이 커졌습니다. 
‘흑사병’은 죽음 앞에 누구나 동일하다는 것을 보여주었습니다. 영국 국민으로서의 자존감을 일깨워준 ‘백년 전쟁’과 농민들의 저력을 보여준 ‘농민 봉기’를 거치며, 봉건제도는 중세기 말에는 변화된 사회에 적합하지 않은 진부한 제도가 되었습니다.
주동자들이 처형되고, 왕의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지만,  정도면 실패라고만은   없습니다. 농민 봉기는 당시 농민들의 정신적, 교육적 수준과 사회적 배경과 함께 평가해봤을때,   결과와 영향을 가져오기는 힘들지 않았을까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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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민들의 위가 향상된 이 때, 파워가 세지고 있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길드  불렸던 중세기 장인들의 동업조합이 세력을 떨치게 되면서 귀족 집안들조차 돈많은 상인/장인집안과 결혼하고 싶어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이제 그들의 도움없이 왕은 전쟁도  없었습니다. 과연  ‘길드’ 장인들은 누구였을까요?
<본 칼럼은 칼럼니스트 개인의 견해임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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