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9년 조인된 북대서양조약을 기초로 미국, 캐나다, 유럽 10개국 등 12개국이 참가해 발족시킨 집단방위기구이다. 본부는 벨기에 브뤼셀에 위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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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대서양조약기구 전략개념 변천사
북대서양조약기구(나토)는 냉전시대 구소련을 중심으로 한 동구권의 위협에 대항하기 위해 1949년 창설한 미국과 서유럽의 집단방위기구이다. 1990년 구소련의 붕괴 이후 그 존재 이유가 빈약해졌지만, 전통적인 방어 개념에서 벗어나 ‘범유럽 안보기구'로 역할을 재설정해 현재에 이르고 있다.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는 1949년 미국 워싱턴에서 조인된 북대서양조약을 기초로 미국, 캐나다와 유럽 10개국 등 12개국이 참가해 발족시킨 집단방위기구다. NATO는 창설 당시 냉전 체제하에서 구소련을 중심으로 한 동구권의 위협에 대항하기 위한 집단방위기구(회원국 일방에 대한 공격을 전 회원국에 대한 공격으로 간주)로 창설되었다. 그러다 1990년 구소련이 해체되고 1991년 바르샤바조약기구가 해체되자 이에 대응하던 NATO 체제를 변화시키는 문제가 핵심 쟁점으로 대두되었다. 이후 NATO는 미국의 주도로 지역 분쟁에 대처하는 유럽 안보기구로서의 신전략을 채택해 현재에 이르고 있다.
냉전시대
나토 설립 초기에는 공산권의 바르샤바조약군에 대항한 집단방위에 목표를 두고 상당히 방어적 전략을 수립했다. 냉전기 전략은 ▷서독에 주력부태를 배치해 기습공격에 대비하는 ‘전방전개전략’과 ▷단거리핵무기로 바르샤바조약군의 보급로를 공격하고, 중거리핵으로 재래식전력의 열세를 보완하며 핵무기 사용 가능성을 열어놓는 ‘유연반응전략'의 두 가지 축으로 운용됐다.
냉전 해체 후 영역 확장
1991년 바르샤바조약기구의 해체와 냉전 종식으로 공산권에 대항한 집단방위라는 존재 이유가 사라진 나토는 활동 영역의 확장을 시도했는데, 이는 유럽 일부 지역에서 발생하는 불안정이 회원국들 전체에 위협이 될 수 있다는 논리였다. 나토는 유럽의 변화된 안보환경에 대응하기 위해 ▷정치불안 ▷경제적 붕괴 ▷대량무기 확산 ▷민족갈등 ▷테러리즘을 새로운 안보위협으로 설정했다. 또 역내방어능력 확보 이외에 ▷평화 확보 ▷동맹국 안보를 위협하는 위기관리 ▷전쟁 예방 등을 위한 군사능력 확보 전략을 수립했다.
이에 따라 1995년에는 유엔의 위임을 받아 보스니아의 평화협정 이행 여부를 감시하기 위한 ‘다국적평화이행군(IFOR)’이 조직되었다. 그리고 1999년 3월에는 미국을 주축으로 영국·독일 등 다국적군으로 구성된 나토군이 유엔의 위임 없이 창설 이후 최대의 군사작전인 '코소보 공습'을 벌였다. 1999년 4월 열린 창설 50주년 나토특별정상회의에서 나토는 보스니아 내전이라는 선례와 코소보 개입을 정당화한다는 차원에서, 유럽과 대서양지역에 대한 '역외개입'을 명문화하는 쪽으로 역할을 확대하는 '신전략'을 구체화하였다.
신속배치군(RDF) 창설 합의
2001년 9·11 테러 이후 미국은 나토가 더욱 적극적인 군사행동을 해야 한다고 주장해왔으며, 결국 2002년 NATO정상회담에서 도널드 럼스펠드 미국 국방부장관이 제안한 2만 명 규모의 '신속배치군(RDF)' 창설이 합의되었다. ‘신속배치군(RDF)'은 긴급사태 발생 시 1주일 안에 병력을 출동시키기 위한 것으로, 유럽과 미국이 참여하는 다국적군이 2004년 출범하였다.
[네이버 지식백과] 북대서양조약기구 전략개념 변천사 (시사상식사전, pmg 지식엔진연구소)
옐친, 러시아공 나토 가입 희망 뜻 밝혀[송재종] 옐친, 러시아공 나토 가입 희망 뜻 밝혀[송재종] 입력 1991-12-20 | 수정 1991-12-20
유럽의 평화를 위해서 나토가입하겠다는데 미국이 반대
북한이 미국 에게 수십년 평화협정 하자고 하는 것과 같네
푸틴 왜 '나토 가입' 말했나
2000년 3/7 중앙일보 기사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 직무대행 겸 총리(사진)가 5일 한 외국 언론사와의 인터뷰에서 러시아의 북대서양조약기구(나토) 가입 가능성을 시사했다.
2000년[중앙일보] [푸틴 왜 '나토 가입' 말했나] https://www.joongang.co.kr/article/3887686#home
트럼프, 북미 종전선언 집착했지만…아베가 막았다" (한경 : 2020.06.22)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2018년 6월 북미정상회담에서 미국과 북한의 종전을 공식 선언하려고 했지만, 일본이 반대하며 영향력을 행사한 것으로
콘돌리자 라이스 미 국무장관 "호주ㆍ일본은 '동맹', 한국은 '파트너"' (중앙일보: 2008.6.10) 일본과 호주는 ‘민주적 동맹(democratic alliance)’으로 표현한 반면, 한국은 ‘글로벌 파트너’(global
이번에 한미일 연합훈련하자고 미국이 제안했다. 그러나 문정부에서 거절했다. 그러나 윤 때 걱정이다.
5월 9일은 러시아가 2차 세계대전에서 승리한 '전승 기념일'이다.
러시아 전승기념일이고 문 대통령 임기 마지막날
미국 조지워싱턴대의 국가안보문서고(National Security Archive)가 입수한 비밀 해제 문서들을 바탕으로 진실을 추적해보자. 주 서독 미국대사관은 겐셔의 제안은 동유럽의 나토 가입에 반대할 뿐만 아니라 "독일이 통일된 이후에도 나토의 군사력이 동독에는 주둔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워싱턴에 보고했다. https://m.pressian.com
제임스 베이커 미국 국무장관 역시 2월 초순에 걸쳐 미하일 고르바초프 소련 공산당 서기장 등 지도부에게 "나토가 1인치도 동진하는 일은 없을 것"이라는 점을 거듭 약속했다. 그는 특히 이 약속은 "나뿐만 아니라 대통령도" 보장하는 것이라는 점을 강조했다. 베이커는 소련 지도부뿐만 아니라 헬무트 콜 서독 총리에게도 같은 입장을 전달했다. 이는 콜이 고르바초프를 만나 독일 통일에 대한 동의를 받아내는 데에 결정적인 사유가 되었다.
5월 30일 워싱턴에서 고르바초프를 만난 조지. H.W 부시 대통령은 "우리는 어떤 형태로도 소련을 해롭게 할 의도도 생각도 없다"며 "나를 믿어달라"까지 말했다. 정상회담에 동석한 베이커는 나토 확대 자제를 포함한 9가지 보장을 거듭 밝혔다.7월 17일 부시도 고르바초프와의 전화통화에서 이와 유사한 입장을 전했다. 독일 통일과 나토의 미래에 대해 "당신이 나와 다른 사람들에게 표한 우려를 유념하겠다"
https://m.pressian.com/m/pages/articles/2022012610345590045#0DKW
헨리 키신저 ==진실은 중요하지 않다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하는 지가 중요하다
동의의 조작 프로파간다
에드워드 버네이스(1891~1995)는 지그문트 프로이트의 조카이며 현대 자본주의의 고유한 현상인 홍보 및 선전 분야의 개척자이다. 그의 주요 저작으로는 ‘공공 여론을 결정화하기’(1923) ‘PR 자문’(1927) ‘프로파간다’
독일 나치 선전 장관인 괴벨스는 나치의 악명 높은 유대인 박멸 캠페인을 해가는 버네이스의 책 ‘공공 여론을 결정화하기’를 기초로 삼았다고 밝힌 바 있다. / 에드워드 버네이스(1891~1995) https://m.hankookil
"김구는 죽을 만하며..." 미국대사가 보낸 보고서
"나는 정보에 밝았다. 미국 정보원으로 서청원들이 많이 활약하고 있어서, 미국 사람들이 백범을 싫어하는 것도 알았다. 언젠가는 미국의 비밀자료에서 백범 제거계획 같은 것이 나올지도 모른다. 당시 가장 골칫거리가 백범이었으니까.
지금으로부터 70년 전인 1949년 6월 26일 암살된 백범 김구는 한국인들이 가장 존경하는 독립운동가다. 그를 좋아하지 않는 한국인들도 적지 않다. 보수적 관점에 치우쳐 무정부주의나 공산주의 독립운동을 올바로 평가하지 않았다거나, 주로 암살 등의 방식으로 독립운동을 했다는 점 때문에 그를 높게 평가하지 않는 한국인들도 있다.
한편, 그에 대해 충분히 조명되지 않은 부분도 있다. 그가 독립운동가일 뿐 아니라 통일운동가이기도 했다는 점은 제대로 다뤄지지 않고 있다.
그런데 이처럼 시대 과제에 충실하다 보니, 그가 피할 수 없었던 결정적 불이익이 있었다. 바로 미국의 미움을 샀다는 점이다.
미국은 김구를 싫어하기 이전에 무시한 것으로 보인다. 그와 임시정부의 역량이 제한적이라는 이유에서였다. 1986년에 브루스 커밍스 워싱턴대 교수가 집필하고 김자동 전 조선일보 기자가 번역해 펴낸 <한국전쟁의 기원>에는 이렇게 나온다.
"국무성은 임정 지도자들이 개인적으로 야심적이며 어느 정도 무책임하다고 생각했으며, 그 지지자의 수가 망명자들 사이에서도 제한되어 있었다고 보았다."
▲ 경교장. ⓒ 김종성
김구가 미국의 무시에 이어 미움까지 샀다는 점은 <월간조선> 1984년 7월호 및 8월호에 연재된 '안두희 고백'에서도 나타난다. 이 인터뷰에서 백범 암살자 안두희는 이렇게 말했다. 아래의 '서청'은 이북 출신 극우 청년단체인 서북청년단의 약칭이다.
"나는 정보에 밝았다. 미국 정보원으로 서청원들이 많이 활약하고 있어서, 미국 사람들이 백범을 싫어하는 것도 알았다. 언젠가는 미국의 비밀자료에서 백범 제거계획 같은 것이 나올지도 모른다. 당시 가장 골칫거리가 백범이었으니까."
미국이 김구를 싫어했다는 점은, 백범 암살 2주 뒤 주한미국대사관이 국무부에 보낸 비밀 문서에서도 알 수 있다. 정병준 목포대 교수의 논문 <미국 자료를 통해 본 백범 김구 암살의 배경과 미국의 평가>에 따르면 이 비밀 문서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담겨 있다.
"칼로 흥한 자는 칼로 망한다. 주중 한국 임시정부의 주석을 지낸 김구는 6월 26일 오후 12시 20분 한국군 장교가 미제 권총으로 쏜 4발의 총격을 받고 사망했는데, 애국자로서 그의 명성은 무명의 일본인을 제거하는 데 성공함으로써 부분적으로 획득된 것이었다."
이 문서에 나온 "칼로 흥한 자는 칼로 망한다"라는 말은 김구의 독립운동 방식을 폄하하는 발언으로 볼 수 있다. 이 말은 1932년에 이봉창 의사를 파견해 히로히토 일왕 암살을 시도했다가 미수로 그치고, 같은 해에 윤봉길 의사를 보내 상하이 홍커우 공원에서 일본 장군과 일본 외교관에게 폭탄을 던진 일을 계기로 김구가 국제적으로 유명해지고 독립운동 지도자로 급부상한 사실을 지칭하는 것으로 보인다.
김구가 비극적 최후를 맞이한 마당에 그런 식으로 폄하하는 문건이 주한미국대사관과 국무부 사이에서 교환됐다는 것은 평소 미국이 김구를 어떻게 바라봤는가를 보여주는 대목이라 할 수 있다.
이 대목에서 유의해야 할 점이 있다. 김구를 저평가하는 비밀 보고서를 국무부에 제출한 주한미국대사 존 무초(John J. Muccio,1900~1989)가 원래부터 김구와 악연이 있었다는 것이다.
윤봉길 의거 당시 현장에 있었던 미국대사
▲ 김구 암살 2개월 전인 1949년 4월 20일 이승만 대통령에게 해리 트루먼 대통령의 사진을 증정하는 존 무초(왼쪽). 위키백과 ⓒ 김종성
성에서 느낄 수 있듯이 무초는 본래 이탈리아인이었다. 21세 때인 1921년 미국인으로 귀화해 브라운대학에서 철학을 전공했다. 1924년부터 독일 함부르크에서 외교관 생활을 했고, 1926년에 영국령 홍콩에 파견됐다가 1931년 상하이에 파견됐다.
바로 그 이듬해, 홍커우 공원에서 열리는 일왕 생일 및 상하이 점령 기념식에 참석한 무초는 하마터면 31세를 일기로 인생을 끝마칠 뻔했다. 한국 청년 윤봉길이 폭탄을 던졌기 때문이다.
무초도 일본 장군들과 함께 귀빈석에 앉아 있었다. 무초도 윤봉길의 폭탄에 죽을 뻔했던 것이다. 만약 무초의 신변에까지 이상이 생겼다면, 윤봉길 의거의 의미가 어느 정도 퇴색되는 것은 물론이고 김구의 위상에도 일정 정도 부정적 영향이 생기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런 악연이 있었으니, 무초 입장에서는 윤봉길 배후의 김구에 대해 좋은 감정을 갖기 힘들었을 것이다. 김구 암살 뒤 김구에 관한 부정적 보고서를 작성한 데는 그런 악연도 적지 않게 작용했으리라고 볼 수 있다.
무초는 김구를 폄하하는 데 그치지 않고 좌파와 연결짓기까지 했다. <백범일지>에서 김구는 사회주의에 매료된 청년들을 상대로 "청년들은 정신 좀 차릴지어다"라는 말까지 했다. 그 정도로 사회주의를 싫어했던 김구를, 무초는 좌파와 연결지어 본국에 보고했다. 무초의 증오심은 8월 9일자 비밀문서의 다음과 같은 표현에서 절정에 달한다.
"김구는 그의 명성에도 불구하고 죽을 만하며, 안 소위는 그 결과 영웅으로 석방되어야 한다고 믿는 일련의 조작된 감정뿐만 아니라 현재 (그것을 뒷받침할 만한) 상당한 진실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 김구 시해 소식을 듣고 경교장에 달려와 통곡하는 서울시민들(1949. 6. 26.) ⓒ 백범기념관
무초만 김구 암살을 그렇게 봤던 것은 아니다. 미국 뉴욕주 제1군사령부 정보참모부 운영과장인 조지 실리(George E. Cilley) 소령도 '실리 보고서'로 약칭되는 1949년 6월 29일자 '김구 암살 관련 배경 정보'에서 김구 암살의 불가피성을 지적했다.
보고서에서 실리는 김구가 반(反)이승만파 군인들과 함께 쿠데타를 계획했었다고 말했다. 김구 암살로 인해 그런 위험성이 사라졌으므로 미국의 남한 관리가 편해졌음을 강조하는 보고서였다.
이처럼 김구는 어느 정도는 미국의 조소와 '환영' 속에서 생을 마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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