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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썰] 독재가 사랑한 백골단·대공분실… 윤석열 정부가 소환한 악몽

천사요정 2022. 7. 3. 05:57
‘민중의 몽둥이’와 ‘고문·조작 공장’의 상징
내무부의 치안본부 직할체제가 낳은 흑역사
행안부에 ‘경찰국’ 설치 노리는 윤석열 정부
법 조문 아전인수, 무모하고 위험한 ‘역주행’
[논썰] 독재가 사랑한 백골단·대공분실… 윤석열 정부가 소환한 악몽. 한겨레TV
 

 

이번 <한겨레 논썰> 89화에서는 백골단과 대공분실에 대해 말씀드려보려고 합니다.
저 단어들을 들으면 귀에 선 분도 계시고, 회상에 잠기는 분도 계실 겁니다. 아마도 세대차가 핵심 변수일 텐데요. 그럼, 제가 왜 지금 백골단과 대공분실에 대해 말씀드리려고 하느냐…. 윤석열 정부가 행정안전부 안에 경찰국을 설치하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이 문제로 경찰청장이 사의를 밝히는가 하면 일선 경찰관들도 크게 반발하고 있습니다. 경찰이 왜 반발하는지도 살펴봐야겠지만, 우리 국민 삶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예민하게 따져보고 경계하는 게 더 중요하다고 봅니다.
백골단과 대공분실. 1980년대와 90년대 청년기를 보낸 세대의 기억을 소환하는 이 역사적 유물에서, 윤석열 정부가 아무리 ‘경찰국’이라고 써도 ‘경찰 통제’ 또는 ‘경찰 장악’이라고 읽을 수밖에 없는 사정이 드러납니다. 나아가, 막강한 물리력을 가진 경찰이 누구에 의해, 어떤 시스템에 의해 작동되고 통제돼야 하는지를 판단할 수 있게 해줍니다.

 

[논썰] 독재가 사랑한 백골단·대공분실… 윤석열 정부가 소환한 악몽. 한겨레TV
 
신분은 경찰, 하는 짓은 용역 깡패
 

 

허연 해골 무리! 백골단의 이름을 풀면 그렇습니다. 1980년대, 90년대 시위대나 파업농성 노동자들에게는 치 떨리는 대상이었습니다. 하는 짓은 용역 깡패나 조폭 같은데, 신분은 경찰이었습니다. 다시 말해 국민 세금으로 운영하는 폭력집단이었습니다.정식 명칭은 ‘사복 체포조’였는데요.
그렇다면 백골단이라는 이름은 왜 붙었느냐. 머리에 오토바이 안전모처럼 생긴 흰색 헬멧을 썼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난폭, 잔혹, 야만, 무자비한 폭력 같은 이미지도 함께 담겨 있었다고 봐야 할 겁니다.
백골단의 복장을 좀 더 살펴보죠. 반드시 흰색 헬멧만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앞뒤로 흰색과 파란색으로 나눠 칠한 헬멧도 흔했고, 주황색, 진청색도 있었습니다. 단체로 스키 헬멧처럼 생긴 걸 쓰고 있는 자료사진도 남아 있습니다. 그래도 흰색 헬멧이 집단기억으로 남아 있는 건, 역시 그들한테서 허연 해골의 섬뜩함이 연상됐기 때문이지 않을까요.

 

[논썰] 독재가 사랑한 백골단·대공분실… 윤석열 정부가 소환한 악몽. 한겨레T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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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썰] 독재가 사랑한 백골단·대공분실… 윤석열 정부가 소환한 악몽. 한겨레TV
 

 

옷차림은 야전상의 모양의 청재킷과 청바지가 대표적입니다. 하지만 이 또한 색깔과 디자인이 각양각색이었습니다. 통일된 기준조차 없는 이런 특성이 말해주는 건 뭘까요. 정복 경찰과는 하는 일이나 조직 성격이 전혀 다르다는 것입니다. 그만큼 음성적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들은 기동성이 중요하기 때문에 일반 전경과 비교해 복장이 가벼웠습니다. 대나무로 엮은 다리 보호대를 차고, 대체로 검은색 장갑을 꼈습니다. 최루탄이 난무하던 시절이라 방독면은 필수였지요. 방독면 가방은 크로스백처럼 사선으로 맸습니다. 그리고 몽둥이와 방패에다 ‘사과탄’이라고 부르던 투척용 최루탄도 들고 다녔습니다.

 

서울시장과 내무부 장관 명의로 공채
 

 

백골단은 언제부터 존재했을까요? 1985년 8월1일에 처음 뽑았다는 게 정설입니다. 그날 서울시장 명의로 ‘특별경비부서 요원’ 경찰 채용 시험이 치러졌는데요. 응시 자격은 태권도 유도 검도 합기도 등 무도 2단 이상의 유단자였습니다.
그 다음에는 1986년 1월28일 내무부 장관 명의로 시행한 경찰 채용 시험이었습니다. 무도 초단 이상 공인단증 소지자가 응시할 수 있었는데, 채용 공고에 ‘합격자는 소정의 교육 이수 후 3년간 강폭력 전담 형사요원으로 근무한다’고 돼 있었습니다.
‘특별경비부서 요원’이나 ‘강폭력 전담 형사요원’이라고 뽑아놓고 사복 체포조 일을 시킨 겁니다. 속아서 들어왔다고 불평하는 사람들도 있었다고 합니다.한편, 신입 공채 말고도 여러 입직 경로와 소속 등이 있었습니다.

 

[논썰] 독재가 사랑한 백골단·대공분실… 윤석열 정부가 소환한 악몽. 한겨레T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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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째, 전경이나 의경 제대자입니다. 의무복무를 마친 다음에 순경으로 채용한 경우입니다.
둘째, 아직 제대하지 않은 전투경찰 가운데 체격이나 탁월한 신체능력을 가진 사람으로 구성한 경우입니다.
셋째, 일선 경찰서에서 근무하는 경찰관 가운데 무술실력을 갖춘 사람들로 구성한 ‘특기중대’입니다.
시위가 급박할 때만 현장에 동원됐습니다.넷째, 일반 전경 기동중대에서 일하는 전경인데, 시위 상황에 따라 사복체포조 복장과 전투경찰 진압복 복장을 바꿔 입는 경우입니다.규모도 대단했습니다. 전국적으로 구성돼 있었는데, 서울시경에만도 1850명이 넘었습니다.
1989년 2월 <한겨레> 기획보도를 보면, 당시 서울시경은 무술경관 공채 출신 7개 중대 800여명, 전·의경 제대자 250여명, 전투경찰 선발자 600여명, 특기중대 200여명 등이었습니다. 그나마 1050여명을 헤아리던 무술경관 출신 가운데 2개 중대 250여명을 1988년 말 일선 경찰서에 배치해서 줄어든 규모가 그 정도였습니다.
그렇다면 백골단은 언제 사라졌을까요? 1991년 4월26일 명지대생 강경대 열사가 백골단의 쇠파이프에 무자비하게 구타를 당하고 숨지자 범국민대책위가 5월4일 ‘백골단 해체의 날’을 선포하고 거리시위를 벌인 적도 있었는데요. 공식적인 해체나 해단은 끝내 없었습니다. 2000년대 들어와 시위 양상이 변하고, 경찰의 진압 방식이 바뀌는 과정에서 규모가 줄어들다가 일반 기동대 안으로 스며 흩어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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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고 긴 죽음의 그림자
 
백골단은 시위 현장에서 주동자급을 체포하는 게 주요 임무였습니다. 미리 대상자를 점 찍어 뒀다가 쏜살같이 시위대 옆으로 치고 들어가 체포하는 식이었습니다. 체포 과정에서 몽둥이질은 말할 것도 없고, 날아차기, 머리채 잡기, 넘어뜨려 짓밟기 같은 살벌한 퍼포먼스를 선보였습니다. 입에 담기 어려운 욕설과 함께 동공이 열릴 때까지 무차별 폭력을 휘두르는 것이 기본값이었죠.
집 안으로 문을 부수고 들어가거나 영업장 안을 발칵 뒤집어서 학생을 잡아가는 일도 비일비재했습니다.
백골단은 거리 시위 현장뿐 아니라 파업 현장 같은 데도 수시로 투입됐고, 압수수색에 동원되기도 했습니다. 1989년 7월12일, 안기부가 <한겨레>의 방북 취재 계획을 빌미로 리영희 논설고문을 구속한 뒤 한겨레신문사 본사를 강제 압수수색할 때 백골단을 대동했습니다. 1990년 KBS 파업 때도 백골단이 여의도 본사로 들어가 노조원들을 폭행하고 100명 넘게 연행하기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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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골단에게 시위 군중이나 파업 노동자는 시민이 아니었습니다. 범죄자를 넘어, 적으로 간주했습니다. 죽음의 그림자가 따라다닌 건 필연이었는지도 모릅니다. 앞에서 말씀 드린 강경대 열사 타살이 대표적입니다. 그해 5월 성균관대생 김귀정 열사도 시위 도중 백골단의 폭력으로 죽임을 당했습니다. 1996년 3월에는 연세대생 노수석 열사가 백골단의 ‘토끼몰이’ 진압 과정에서 희생됐습니다.
심지어 죽은 자를 두번 죽이는 일도 서슴지 않았습니다. 1991년 5월7일 백골단은 의문사한 한진중공업 노조위원장 박창수 열사의 빈소로 쳐들어가 영안실 벽을 깨부수고 주검을 탈취했습니다. 그리고 당국은 박 열사를 일방적으로 부검해버렸습니다. 백골단은 한마디로 독재정권이 ‘민중의 지팡이’여야 할 경찰을 자기 손에 틀어쥐고 마음껏 휘두른 ‘민중의 방망이’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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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조작 공장, 대공분실
 
백골단이 백주대낮의 폭력집단이었다면 대공분실은 어둠 속의 폭력집단이었습니다. 백골단이 몽둥이질과 주먹질·발길질이었다면 대공분실은 온갖 기묘하고 잔혹한 고문이었습니다.
경찰청이 외청으로 독립하기 전 내무부 치안본부 산하에 있었습니다. 대공분실 하면 1987년 1월14일 박종철 열사 고문치사 사건부터 떠오릅니다. 이 사건으로 인해 비로소 세상에 존재가 알려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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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참극이 벌어진 ‘남영동 대공분실’은 그뒤 2005년 7월부터 2018년 12월까지 경찰청 인권센터로 운영되다, 지금은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가 건물을 운영하고 있으며, 내년에 민주인권기념관으로 정식 개관할 예정입니다. 1976년 당시 김치열 내무부 장관이 발주해서 지어졌습니다. 이 건물은 한국을 대표하는 건축가 김수근이 설계한 걸로도 유명합니다. 고문의 심리적 효과를 극대화하기 위한 목적에 맞춰 외관부터 내부 구조까지 온갖 건축적 요소를 치밀하게 설계했다는 비판을 받기도 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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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공분실은 이곳뿐만 아니라 전국에 산재했습니다. 2012년 2월 백재현 민주통합당 의원 요청으로 경찰청이 공개한 대공분실은 전국에 20여곳이 있었습니다.대공분실에 한번 끌려들어가면 멀쩡하게 나오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신체적, 정신적 고문 등 인권유린이 자행됐습니다. 민주화운동가들부터 납북어부들까지 수많은 인사들이 고문을 받은 끝에 거짓 자백을 하고 ‘빨갱이’로 내몰려 감옥으로 가야 했습니다.
1985년, 23일 동안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고문 기술자 이근안으로부터 물고문과 전기고문을 받았던 김근태 민청련 의장은 훗날 이런 기록을 남겼습니다.“남영동 5층 구석방에서의 23일, 이것은 지옥이었다. 독가스 대신 전기고문과 물고문이 설치는 나치 수용소였다. 시간이 종국적으로 멈춰 버린 영원한 저주의 세계였다.
”국회의원을 지낸 김 의장은 2011년 12월 타계할 때까지 고문 후유증에 시달려야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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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찰청 인권센터에 따르면, 대공분실의 뿌리는 1948년 10월 대간첩 수사 업무를 위해 발족한 치안국 특수정보과 중앙분실입니다. 그 뒤 1970년 10월 정보과 공작분실로, 1976년 5월 치안본부 대공과 대공분실로 바뀌었고, 전두환 군부독재 시절인 1983년 12월 좌경의식 수사 업무를 흡수하고 제4부 대공 수사단으로 통합되었습니다.
경찰의 물리적 폭력으로 버틴 전두환 정권
 

 

전두환 치하의 대공분실, 더 나아가 대공분실을 관장하던 대공수사처의 위세는 대단한 것이었습니다. 영화 <1987>에도 나오는 박처원 처장이 우두머리였는데요. 제가 당시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 2차 수사를 담당했던 전직 검사를 인터뷰하면서 들은 얘기는 참으로 인상적이었습니다.<1987>에 나오는 당시 최환 서울지검 공안2부장의 지시로 서울 시내 한 호텔 객실에서 열린 ‘관계기관대책회의’에 따라갔다가 박처원 처장을 처음 보고는 속으로 ‘아, 저분이구나’ 하고 감탄했다는 겁니다.
경찰 수사를 지휘하는 검사가 경찰 소속인 박 처장을 보고 그런 생각을 한 것이 의아해 물었더니, 그 시절에 경찰은 검찰보다 힘이 셌다고 하더군요. 전두환 정권이 경찰의 물리적 폭력에 기대고 있었기 때문이라는 거였습니다.
‘책상을 탁 치니 억 하고 쓰러졌다’는 경위서를 버젓이 낼 수 있는 힘이 어디에서 나왔는지 짐작해볼 수 있는 대목입니다. 최환 부장검사도 훗날 퇴임 뒤 “그 경위서는 누가 보더라도 고문사였다”고 여러차례 말했고, 김용갑 당시 청와대 민정수석은 2007년 언론 인터뷰에서, 경찰의 보고 내용에 대해 수석비서관 회의에서 다들 ‘못 믿겠다’ ‘어처구니없이 우긴다’는 반응이었다고 전하기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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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가 하면 박종철 고문치사로 실형을 살았던 한 남영동 대공분실 출신 경찰관은 사건 30주년이 되던 2017년 1월 <한겨레>에 이렇게 말합니다.“1986년에는 대공사건에서 의문사가 생겨도 이슈화된 적이 없다. 그땐 우리만 문제가 돼서 불만도 없지 않았다.”그 시절에 은폐된 고문치사 사건이 더 있었음을 시사하는 저 발언은 충격적입니다. 전두환이 틀어쥔 치안본부 대공분실은 온 국민을 공포에 떨게 하는 ‘고문·조작의 공장’이었습니다.
경찰청 독립은 ‘권력으로부터의 독립’
 

 

지금까지 말씀 드린 백골단과 대공분실 이야기에서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주체가 어딘지 눈에 띄십니까? 내무부입니다. 지금의 행정안전부죠. 경찰 조직의 정점은 치안본부였고, 치안본부는 내무부 장관의 직접 지휘를 받았습니다. 최고 권력을 쥔 독재자는 그런 구도 속에서 거대한 경찰 조직을 사조직처럼 거머쥐고 ‘민중의 몽둥이’와 ‘고문·조작 공장’으로 써먹은 겁니다.지금의 경찰청은 이렇듯 어둡고 아픈 역사에 대한 반성과 대안으로 경찰 조직을 1991년 내무부 직할 본부에서 외청으로 분리시켜 나온 결과입니다. 경찰청 독립은 한마디로 권력으로부터의 독립이었던 겁니다.
구성원이 14만명이나 되는 경찰은 군을 제외하면 국가의 가장 큰 물리력 단위입니다. 군이 자국민에게 총을 쏘고 대검을 휘둘렀던 5·18 같은 암흑의 역사가 있지만, 군의 물리력은 기본적으로 외부의 적을 향합니다. 전시가 아닌 한 국민에게 직접 물리력을 행사할 수 있는 조직은 경찰 말고 없습니다.그 물리력이 국민을 보호하는 데 쓰이느냐, 국민을 탄압하는 데 쓰이느냐는 무엇보다 정치권력에 대해 제도적으로 얼마나 튼튼하고 높은 방화벽을 치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최고권력자의 선의는 그 다음 문제입니다. 경찰 조직이 최고권력자에게 제도적으로 예속된다면 물리력이 악용될 가능성도 커질 수밖에 없는 구조입니다. 내무부 장관 명의로 백골단을 뽑고, 대공분실 공사를 발주한 것은 상징적입니다.

 

윤석열 정부의 속 보이는 속도전
 
그런데 윤석열 정부는 경찰청을 다시 행안부 장관 휘하에 두려고 광속의 속도전을 펼치고 있습니다. 윤 대통령의 고등학교·대학교 후배인 이상민 행안부 장관이 직접 ‘경찰제도 개선 자문위원회’를 꾸리고, 행안부 차관을 공동위원장으로 앉힌 다음, 불과 네번의 회의 만에 ‘권고안’을 발표하더니, 8월 말에 행안부 안에 경찰국을 출범시키겠다고 전격적으로 발표했는데요.민주화 과정에서 어렵사리 진전시킨 경찰청 독립에 대한 몰역사적인 인식도 문제지만, 논리비약은 더욱 심각합니다. 이유를 대는 게 하나하나 가관입니다.
첫째, 행안부 장관이 직접 지휘·감독하지 않으면 경찰은 아무런 지휘나 견제 기관 없이 사법부, 입법부, 행정부에 이어서 제4의 경찰부가 될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는 건데요.‘국가경찰과 자치경찰의 조직 및 운영에 관한 법률’(경찰법)에 따라 경찰 감독기구로 국가경찰위원회를 두고 있는 건 뭐란 말입니까.
둘째, 윤석열 정부의 원칙은 헌법과 법률에 합치되게 내각을 운영하는 것이라면서, 행안부가 경찰청을 직접 통제하는 것이 거기에 해당한다고 주장합니다.그렇다면 지난 30년 동안 경찰청의 독립을 보장해온 것이 헌법과 법률에 어긋난다는 뜻인가요.
법 조문 아전인수하는 판사 출신 장관
 
이상민 장관은 지난 27일 브리핑에서 ‘치안에 관한 사무를 관장하기 위하여 행정안전부 장관 소속으로 경찰청을 둔다’는 정부조직법을 근거로 “행안부 장관이 정부조직법상 치안 사무를 관장한다”고 주장했는데요. “국어를 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여기서 이 사무 관장의 주체가 누구인가는 바로 명백하게 나타난다고 할 것이다”라고까지 말했습니다.
그러나 1990년말 개정된 정부조직법 조문에는 “치안 및 해양경찰에 관한 사무를 관장‘하게 하기 위하여’ 내무부 장관 소속하에 경찰청을 둔다”고 명시돼 있었습니다. 치안 사무 관장의 주체를 경찰청으로 못 박은 거죠. 또한 당시 정부조직법 개정 이유는 “민생치안역량 강화와 경찰행정의 중립성 보장을 위하여 치안본부를 경찰청으로 개편함”이라고 돼 있습니다.다만 1998년 표현이 어색한 법조문을 재정비하기 위해 정부조직법을 개정했는데요. 이때, 여러 외청 관련 조항에 들어 있는 ‘하게 하기 위하여’를 ‘하기 위하여’로 일괄적으로 바꿨습니다.
이 장관은 이런 역사적 맥락과 사실관계를 지운 채 ‘행안부가 치안 사무를 관장한다’고 자의적으로 해석한 겁니다. 다른 사람도 아닌 판사 출신 장관이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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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안부는 ‘소속청에 대하여는 중요정책수립에 관하여 그 청의 장을 직접 지휘할 수 있다’는 정부조직법을 근거로 “행안부 장관이 경찰청장을 직접 지휘할 수 있다”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행정법 전문가이자 전 국가경찰위원장인 박정훈 서울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한겨레>에 “정부조직법엔 ‘장관의 소관사무로서 통할권이 있는 소속청일 경우’라는 단서가 있다”며 “행안부 장관이 치안 사무를 소관하지 않는 현 상황에서 해당 규정을 근거로 경찰청장을 지휘할 수 없다”고 지적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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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마디로, 법 조문에 자꾸 상상력을 불어넣지 말고, 단서 조항 빠뜨리지 말고, 있는 그대로 읽으라는 얘깁니다. 행안부 장관의 직접 통제가 정히 필요하다면 정부조직법을 개정하라, 이런 얘기기도 하죠. 자꾸 억지 주장만 하니까 의도를 더욱 의심받는 거 아닙니까.
경찰에 필요한 건 ‘민주적 통제’ 강화
 
다만 경찰의 독립은 필요조건일 뿐 충분조건은 아닙니다. 경찰청 독립 이후에도 용산 참사, 백남기 농민 사망 사건 같은 경찰의 과도한 물리력 행사와 국정원 댓글 조작 같이 정권에 불리한 사건에 대한 왜곡 수사가 근절되지 않았습니다.
2015년 11월 서울 광화문 일대에서 열린 민중총궐기대회가 끝난 다음, 당시 강신명 경찰청장이 대회 주최 쪽에 ‘소요죄’를 적용하겠다고 망발을 하기도 했죠.여전히 정치권력의 눈치를 본 측면도 있고, 경찰이라는 거대한 물리적 조직이 스스로도 얼마나 위험해질 수 있는지를 보여준 측면도 있습니다. 지금보다 훨씬 수준 높고 실질적인 민주적 통제가 이런 문제를 제어하기 위한 충분조건이라 할 수 있습니다.
국가경찰위원회의 권한을 강화해 경찰에 대한 통제력을 높이되, 위원 구성의 민주성과 다양성도 동시에 강화하는 것이 하나의 대안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경찰을 권력의 지배로부터 더 확실히 보호할 수 있는 길이기도 합니다. 윤석열 정부가 경찰 권한의 비대화를 진정으로 우려한다면, 괜한 짓 해서 의심을 사지 말고, 이 일부터 해야 할 것입니다.<한겨레 논썰>이었습니다.

https://www.hani.co.kr/arti/SERIES/1717/

 

윤석열 정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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