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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선]원형경기장과 공부

천사요정 2019. 4. 20. 01:07

[경향신문] 권력들끼리 서로 견제시킴으로써 권력을 통제하고, 시민들의 자유를 지킨다는 구상은 인류의 위대한 발명품이다. 그것이 효과적인 만큼 그 통제장치를 회피하기 위한 권력자들의 욕구도 절실하다. 세상에 종종 모습을 드러내는 ‘내부자들’의 은밀한 결사도 바로 그런 회피의 전형이다. 정치, 검찰, 언론, 사법, 경제 등 각종 권력자들은 힘을 합쳐 통제장치를 무너뜨리고, 시민들의 자유를 저장소에 가둔다. 이 문제는 몇 명의 남용자를 처벌한다고 해서 해결되지 않는다. 권력장치의 궤도 자체를 수정해야만 해결의 출발점을 찾을 수 있다.



현재 국회에서는 선거제도와 검찰제도에 대한 논의가 진행되고 있다. 선거를 통한 심판은 권력통제 가운데 가장 근원적인 것이다. 선거의 심판을 통하여 다른 권력들의 통제를 설계할 정당한 대표를 선발할 수 있다. 하지만 우리의 선거, 특히 영호남의 선거는 지역감정과 결합하여 무능력한 권력자들에 대한 심판기능을 잃어버린 지 오래다.

그리하여 선거가 모든 권력남용과 야합의 근원으로 작용한다.


검찰의 문제도 심각하다. 권력들이 권력통제를 무력화시키는 데 사용하는 가장 직접적이고 강력한 도구가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선거와 검찰제도를 개정하여 정상화시키지 않는다면 제한된 권력이라는 민주주의의 목표는 요원하다.


이것들 말고도 중립적인 공영방송 제도, 공정한 사법제도, 그리고 최종적으로는 헌법 개정에 이르기까지 시급히 해결해야 할 수많은 문제들이 기다리고 있다.

 

그런데 이들이 한 보수정당의 집요한 반대에 가로막혀 전진하지 못하고 있다. 이 문제는 진보와 보수로 대결할 문제가 아니다. 궤도에서 이탈한 것들을 정상으로 회복시키는 문제, 서로 눈감아주며 불법을 행하는 권력의 부정을 제거하는 문제일 뿐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들의 반대는 어리석거나, 또는 영악하다.


하지만 이들의 반대 역시 이 논의가 진행되지 못하는 이유의 작은 일부에 불과할지 모른다. 우리 사회엔 무형의 원형경기장이 하나 있다. 그곳에선 연일 권력자, 유명인의 구속과 처벌이 결정된다. 승부의 매듭을 짓는 마지막 순간 칼을 든 처단자의 눈은 객석을 향한다. 분노의 환호로 그들을 고무하는 순간 모든 시민은 처단자가 된다.


불의, 특히 권력자들의 불의를 처벌하는 것은 중요하다. 하지만 함성으로 권력자들의 과오를 질타하는 것과 다시는 그런 일이 생기지 않은 사회를 만드는 것 가운데 어떤 것에 더 관심을 기울여야 할까? 구속과 처벌에 대한 열정적 관심과 달리 권력제도의 개정에 대한 관심은 아직 차갑기만 하다. 추락과 몰락, 처벌과 처형의 자극은 관객의 이성과 공부능력을 마비시키고 있는 것은 아닐까? 더욱 답답한 것은 시민들이 자유를 얻는 길, 더 바람직한 권력통제의 방법을 분석해야 할 언론마저도 여러 정치세력들의 전략과 전술, 그들 승부의 판세예측만으로 아까운 지면을 채우고 있다는 점이다.


정의롭지 않은 권력자를 링 밖으로 밀어내는 것이 지난번의 승부였다면 새로운 대결은 전혀 다른 차원이다. 이번 승부에서는 권력자를 링으로 끌어올려야 하고, 그들이 다른 권력들과 싸우도록 이용해야 한다. 어느 한편의 힘을 강하게 하면 순간 힘이 몰려 통짜 권력으로 변해버리니 예민하게 균형을 맞추어야 한다. 이 작업은 권력의 작동을 제대로 이해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해야 한다. 자칫 잘못하면 오히려 그 권력들에게 공격당하거나 이용당할 수 있으니.

시민들이 또렷한 눈동자를 회복해야 권력이 두려워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언론의 노력도 절실하다. 정치인들의 정치공학이 아닌 권력제도와 자유의 관계에 관하여 진실을 보도한다면 시민들도 그 문제를 차가운 이성으로 생각하게 된다. 훗날 “그때 그 기회를 외면했고, 그것으로 모든 비극이 시작되었다”라고 말할 수는 없다. 이제 원형경기장의 자극은 경기장의 심판에 맡기고 시민들은 더 중요한 일들에 착수해야 한다. 더 읽고, 더 생각하고, 더 공부하기.


김진한 헌법전문가·독일 에어랑엔대 방문학자


https://news.v.daum.net/v/2019041920480966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