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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촘촘해진 '일감 몰아주기' 레이더망, 떨고 있는 기업들

천사요정 2019. 11. 30. 08:33

[커버스토리] 공정위 지침 공개, 10여개사 긴장


공정거래위원회가 최근 기업 총수 일가의 ‘일감 몰아주기’를 제재하는 규제의 구체적 심사 지침을 내놓았다. 연내에 시행되는 이 지침은 계열사 등을 동원한 일감 몰아주기에 적용해온 공정거래법 23조 2항 ‘특수관계인에 대한 부당한 이익 제공 등 금지’ 조문을 보다 구체화했다. 법 해석의 모호성 문제를 해소한다는 긍정적 평가가 나온다. 하지만 재계에서 공정위 심사 기준이 더 깐깐해졌다는 볼멘소리도 제기된다. 공정위는 지난해까지 대기업을 중심으로 일감 몰아주기 조사를 본격화했다. 올해는 자산 규모 5조원 미만의 중견기업까지 공정위 표적에 들어가면서 상당수 기업이 긴장을 늦추지 못하고 있다.

“뺄 건 빼고, 잡을 건 잡겠다”

이번 공정위 심사 지침은 ‘잡을 건 잡고, 뺄 건 빼주겠다’로 요약할 수 있다. 공정위는 먼저 ‘부당한 이익 제공 행위’의 주체와 객체부터 명확하게 했다. 주체는 공시 대상 기업집단 소속 회사로, 객체는 총수나 6촌 이내 친족이 30% 이상 지분(상장사 기준)을 보유한 기업이다. 비상장사의 경우 지분 기준이 20%로 더 높다.

공정위 지침에서 총수 일가의 사익편취 심사 기준은 더 세졌다는 분석이다. 기존에는 일반 시중 가격과 거래 조건의 차이가 7%를 초과하는 거래만 들여다봤다면 새 지침에서는 연간 거래 총액 50억원 이상이라는 금액 기준을 추가했다. 아울러 일감 몰아주기 심사 대상에 계열사를 통한 직접 거래뿐 아니라 간접 보유 회사나 간접 거래도 포함했다. 기업 어음이나 부동산을 활용해 제3자를 거쳐 이뤄지는 사익 편취도 제재 대상에 명시한 것이다.

다만 법규 위반의 판단 기준을 유형별로 세분화했다. 공정위는 공정거래법 23조 2항 중 ‘상당히 유리한 조건의 거래’의 저촉 기준을 판가름하는 정상 가격 산정 기준을 마련했다. 특수관계가 없는 독립된 자와 거래한 사례가 있으면 그 거래 가격을 정상 가격으로 보되, 그런 사례가 없으면 유사 사례를 찾거나 국제조세조정에 관한 법률 5조 ‘정상 가격 추산 방법’ 규정을 준용키로 했다.

‘사업 기회 제공 행위’ 조항과 관련해서도 ‘현재 또는 가까운 장래에 상당히 이익이 될 수 있는 사업 기회’로 명시하고 사전에 예측 못했거나, 사후에 이익이 됐거나, 미래에 이익이 발생할 것으로 예상되는 경우는 포함하지 않기로 했다.

사진=게티이미지


법규 중 ‘합리적 고려·비교 없는 상당한 규모의 거래’라는 조항의 경우 공정위는 합리적 고려·비교의 기준을 시장조사 등 시장 참여자에 대한 정보수집 행위 여부, 시장 참여자로부터 제안서를 받는 등 비교 행위 여부, 합리적 사유에 따른 거래 상대방 선정 여부로 특정했다. 경쟁 입찰을 거치면 합리적 고려·비교가 있었던 것으로 간주키로 했다. 또 효율성 증대 효과가 명확한 거래나 보안성이 요구되는 거래, 일본의 수출규제 등 긴급성을 요하는 거래의 경우는 예외적으로 심사를 면제해주기로 했다.
떨고 있는 기업들

공정위가 새로운 지침을 공개하자 조사 대상에 올라간 기업들은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올해 들어 공정위로부터 일감 몰아주기 의심 사례로 조사받은 것으로 알려진 기업은 최소 10여곳이다. 물류, 건설, 증권, 식품, 화장품, 미디어 등 업종도 다양하다.

일감 몰아주기 의혹으로 공정위 제재를 앞둔 곳은 아모레퍼시픽과 미래에셋그룹이다. 아모레퍼시픽은 지난해 그룹의 100% 자회사인 에스트라 매출 76.8%를 그룹 계열사 일감으로 채웠다고 알려졌다. 50% 초과 지분을 보유한 자회사가 계열사와 200억원 혹은 매출의 12% 이상을 내부거래하면 일감 몰아주기 규제 대상에 들어간다.

미래에셋은 박현주 회장 일가가 90% 이상 지분을 가진 미래에셋컨설팅에 그룹 계열사가 출자한 사모펀드에서 운영하는 호텔과 골프장 운영 수익을 몰아줬다는 혐의를 받고 있다. 금융감독원 전자공시에 따르면 미래애셋컨설팅이 계열사와의 거래로 올린 매출 규모는 2017년 71억원, 지난해 42억원가량이다. 이 회사의 지난해 내부거래 매출은 공정위 총수 일가 사익 편취 심사 기준액(50억원)보다 낮기 때문에 일감 몰아주기 규제를 피할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일감 몰아주기 규제 기준을 피했다고 해서 공정위의 제재를 아예 회피할 수 있는 건 아니다. 공정위는 지난 3월과 5월 LG그룹 물류 계열사 판토스, 현대자동차그룹 물류 계열사 현대글로비스를 현장조사했다. 물류 계열사에 정상 가격보다 높은 가격에 일감을 몰아줬는지 들여다보기 위해서였다. 이들 계열사는 총수 일가 지분 등을 감안하면 일감 몰아주기 규제에서 벗어나 있다. 현대글로비스의 경우 정몽구 회장 등 총수 일가 지분이 29.9%로 사익 편취 규제 기준(상장사 30%)에 못 미친다. LG그룹 역시 구광모 회장 등 총수 일가가 지난해 판토스 지분 19.9%를 모두 매각해 지분 관계가 없다.

그렇지만 공정위는 특정 회사에 대한 부당 지원은 총수 일가 지분 유무와 관계없이 공정거래법 23조 1항에 따라 제재할 수 있다고 판단한다. 다른 법규를 적용해서라도 물류 업체나 시스템통합(SI) 계열사를 통한 대기업의 일감 몰아주기 관행을 끊겠다는 의지다.

대신 공정위는 길을 터놨다. 새로운 심사 지침에서 효율성, 보안성 등과 관련해 기업이 규제 예외 필요성을 입증하면 예외를 인정해주기로 했다. 그동안 기업들은 물류 계열사나 SI 계열사를 활용한 내부거래의 이유로 효율성, 보안성을 내세워 왔다.

‘공정위 레이더’에는 중견기업도 들어와 있다. SPC그룹, SM엔터테인먼트 등이 대표 사례다. 공정위는 SPC그룹이 샤니, 호남샤니 등 총수 일가 지분이 높은 계열사를 중심으로 내부거래를 해 총수 일가에 이익 제공을 했다고 의심한다. SM엔터테인먼트도 이수만 회장이 지분을 지닌 라이크기획에 연간 영업이익과 맞먹는 100억원대의 돈을 지급해 일감을 몰아줬다는 의혹을 받고 있다. 조성욱 공정거래위원장은 지난달 국회 국정감사에서 “일감 몰아주기 규제 적용은 쉽지 않지만, 투자자 보호 측면에서 새롭게 접근해야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세종=이종선 기자 remember@kmib.co.kr

https://news.v.daum.net/v/2019113004020284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