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가 은행들의 자금 회수로 러시아 정부, 모라토리엄 선언
골드만삭스과 같은 뉴욕 월가의 은행들이 러시아 파산 과정에서 한 역할은 무엇인가.
월가 은행들은 고통이 따르는 경제 개혁이 아니라 단물이 흐르는 사탕을 러시아에 제공했다. 월가 뱅커들은 손쉽게 자금을 구할 수 있다며 크레믈린을 유혹했고, 리스크를 경고하지 않은 채 투자자를 모았다는 원죄에서 피해갈수 없다.
월가 은행들은 러시아 정부가 외국 투자자로부터 수십억 달러의 돈을 빌리도록 도와줬다. 그들은 정경유착의 러시아 재벌들에게 아첨을 하며 자신의 은행을 이용해달라고 꼬리를 흔들었다. 아무런 담보가 없는 신흥기업에도 월가 브로커들은 달려들었고, 시베리아의 동토의 농경지역을 위해 농업채권 발행을 도와줬다. 러시아가 세계에서 가장 신뢰성을 얻고 있는 미국 재무부 채권(TB)의 이자율에 조금만 더 얹은 저리의 이자로 채권을 발행하게 도와준 것이 바로 월가 은행이다. 월가 투자은행의 도움으로 러시아는 세계 유수의 채권 시장을 형성했다.
그러나 러시아에는 돈을 빌려주고 빌리는데 따른 신용 체계가 서있지 않았다. 월가 은행들은 이런 것들은 가르쳐주지 않았다. 그들은 어느날 갑자기 러시아를 철수하면서 러시아 은행제도의 문제점을 강하게 제기하는 이중적 모순을 드러냈다.
앨런 그린스펀에 앞서 미 연준(Fed) 의장을 지냈던 폴 볼커(Paul Volker)씨는 “러시아 위기의 본질은 은행들이 고객에 대해 관심을 게을리한 것”이라며 “결국 탐욕이 지배했다”고 지적했다.
월가 브로커들은 이익 추구만 했지, 만연한 부패 구조, 부채 상환 해이등 러시아 투자의 위험성을 투자자들에게 알려주지 않았다. 그들은 땅덩어리가 넓고, 부존자원이 많으므로 떼먹히지는 않을 것이라는 막연한 기대를 갖고 불신의 땅에 덤벼들었던 것이다.
월가 은행들이 러시아 금융시장에 진출한 것은 1996년 11월부터였다. 미국의 JP 모건이 스위스의 SBC-워벅과 함께 짜르 체제가 무너진이후 처음 러시아 채권시장에 문을 두드렸다. 불과 1년 9개월 남짓의 기간동안 월가 은행들은 러시아에 러시를 이루며 진출했다.
1997년 여름 모스크바에서 출발, 한여름에도 땅에 서리가 내리는 시베리아 이르쿠츠크로 가는 비행기 1등석엔 국제 뱅커들이 자리를 메웠다. 뱅커들은 가스생산회사인 이르쿠츠크 에너지회사에 채권을 발행해주기 위한 브로커들이었다. 그들은 경쟁적으로 좋은 조건을 내세웠다. 스위스 은행은 선급금 조로 5,000만 달러의 차관을 제공하고, 미국 국채(TB) 수준의 낮은 금리를 보장했다. 그런 조건이면 위험하다고 발을 빼는 외국 은행들도 있었지만, 스위스 은행은 마침내 승자가 됐다.
28개의 러시아의 기업이 뉴욕증권거래소에 상장하는데도 월가 은행들의 경쟁이 불을 뿜었다. 살로먼 스미스바니, 모건 스탠리, DLJ등이 참여했다. 그러나 이들 러시아주는 98년 8월 이후 공모가의 10~20%로 헐값에 호가됐고, 그나마 거래가 뚝 끊겼다.
미국-스위스 합작은행인 크레딧 스위스 퍼스트 보스턴(CSFB) 은행은 러시아 정크본드 시장을 개척했고, 또 파생금융상품을 팔러 다녔다.
거의 모든 월가 은행들이 러시아에서 활약했다. 골드만 삭스는 처음엔 러시아 진출을 망설였다. 1992년 로버트 루빈(나중에 미국 재무장관) 당시 회장은 옐친 정부에 막강한 로비력을 행사, 러시아 정부의 자문회사로 지명받았다. 그러나 94년엔 러시아에서 완전히 철수했다. 위험하고 이문이 남지 않는다는 판단에서였다.
그러나 96년 이후 다른 월가 은행들이 러시아에 진출, 많은 돈을 벌어오자 골드만도 다시 러시아 땅을 밟았다. 루블화 폭락 두달전의 채권발행이 바로 그것이었다.
골드만 삭스가 채권 발행에 성공한지 2주일만에 JP 모건이 다시 주간사회사를 맡아 러시아 국채 25억 달러의 발행을 대행해주었다. 또 한주일이 지나고 골드만은 64억 달러의 단기차관을 채권으로 바꿔주는(스왑) 거래를 중매했다. 한달 사이에 100억 달러의 채권이 팔려나갔고, 외국인 투자자들은 두달후 러시아가 모라토리엄을 선언할줄 새카맣게 모른 채 단지 금리가 높다는 이유로 러시아를 찾아들었다.
골드만 삭스와 JP 모건은 러시아 채권 거래에서 가격을 심할 정도로 후려쳤다. 그 것이 러시아 신인도에 심한 타격을 주었다. 골드만 삭스의 채권 발행이 성공리에 끝나고 한달후 월가 은행들은 액면가 100 달러의 채권을 80 달러에 스왑(swap)해주었다. 월가 은행들은 한달후에 액면가 100 달러 짜리 채권을 50 달러로 깎아 내렸다. 월가 은행들은 러시아 채권 물량을 홍수처럼 쏟아내도록 유도함으로써 가격 폭락을 방치한 것이다. 월가 은행들은 먹을만큼 먹고, 잽싸게 떠났고, 러시아는 달러 공황에 직면하게 됐다.
▲ 1998년 모라토리엄 선언 당시의 보리스 옐친 러시아 대통령 /위키피디아
모라토리엄 선언
1998년 8월 17일, 월요일. 러시아 정부는 더 이상 달러 유출의 압박을 이겨내지 못하고 두가지 조치를 취했다. 그 하나는 90일간의 모라토리엄 선언이고, 다른 하나는 루블화 절하였다. 옐친 정부는 1 달러당 6.3 루블에 고정시켰던 환율을 9.5 루블까지 허용하겠다고 밝혔다. 34%의 대폭적인 절하를 단행하겠음을 의미하는 조치였다. 러시아 채권 금리는 150%에서 200%로 껑충 뛰었다. (금융시장에서 사용하는 bp(0.01%)로 환산하면 2만 bp에 이르는 고금리다.)
러시아의 조치는 전세계 금융시장을 꽁꽁 얼어붙게 했다. 모리토리엄으로 지급 유예된 자금은 400억 달러에 불과하지만, 전세계 주가가 꽁꽁 얼어붙었고, 뉴욕 월가에도 러시아 북극곰이 공격해왔다.
재미있는 사실은 모라토리엄을 선언한날 러시아의 고위층이 모두 모스크바를 떠나있었다는 사실이다. 보리스 옐친 대통령, 세르게이 두비닌 중앙은행 총재는 여름 휴가중이었고, 러시아의 개혁주의자로 IMF 협상창구인 아나톨리 츄바이스도 교외에서 쉬고 있다가 부랴부랴 모스크바로 돌아왔다.
루블화 절하가 단행된지 닷새후인 26일, 러시아 신흥재벌인 보리스 베레조프스키가 츄바이스를 만났다. 그는 츄바이스에게 아마도 이번 개각에서 키리옌코 총리가 물러날 것이라고 말했다. 츄바이스는 시장 경제를 주장하는 개혁주의자로 키리옌코의 노선을 지지했지만, 정부내 권력 서열에서 밀려나 있었다. 정재계에 거간꾼으로 알려진 베레조프스키는 은근히 자신의 로비능력을 과시했고, 츄바이스도 그의 말을 조금도 의심하지 않았다. 머지않아 키리옌코가 물러나고 개혁주의 노선이 철퇴를 맞을 것임을 직감했다.
다음날은 일요일이었다. 휴가에서 돌아온 옐친 대통령은 키리옌코 총리를 조용히 자신의 별장으로 불렀다. 개각을 할 생각인데, 당신은 무엇을 희망하는가라고 물었다. 키리옌코는 조용히 쉬고 싶다고 말했다. 총리에 오른지 4개월에 불과한 36세의 총리는 자신의 목에 도끼날이 내려칠 날이 며칠 남지 않았음을 직감했다. 그의 종말은 예상보다 더 빨리 다가왔다. 옐친과 키리옌코의 만남이 있은지 네시간후 개각이 단행됐다. 키리옌코는 물러나고 전임자인 빅토르 체르노미르딘씨가 그 자리에 다시 앉았다. (체르노미르딘은 3개월후 총리직에서 또 쫓겨났다.)
키리옌코의 실각은 정치적 어려움이 있을때마다 개각을 단행하는 옐친의 교활한 정치술수에 그 원인을 찾을 수 있다. 또 경제 위기를 맞아 개혁성향의 리더를 무너뜨리려는 보수세력의 권모술수가 작용했다.
키리옌코는 권력과 유착된 독점 자본가 세력의 음모에 의해 무너졌다. 음모 세력의 중심엔 베레조프스키가 있었다.
베레조프스키는 1996년 6월 대선 당시 옐친에게 거액의 정치자금을 대준 대가로 국가안보위 서기 자리를 얻을 만큼 야심만만한 정치 성향의 인물이다. 그는 공기업 민영화 과정에서 권력과 밀착, 기업을 사고 팔아 떼돈을 벌었으며, ORT라는 TV 방송국과 네자비시마야 신문까지 보유한 러시아 최대 재벌중의 하나다. 러시아 굴지의 석유회사와 아에로플로트 항공사를 보유하고 있고, 보유 재산만도 30억 달러를 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옐친의 딸 타냐나 다이아첸코, 옐친의 비서실장인 발렌틴 유마세프등과도 친밀한 관계를 맺어왔다.
옐친이 그해 4월 은행가 출신의 개혁파 키리옌코를 총리에 지명하자, 베레조프스키는 재계를 대표해 공공연하게 젊은 총리를 비난했다. 자신이 소유하고 있는 언론을 통해서도 반개혁 성향의 논조를 확산시켰다.
그러나 키리옌코가 IMF와 170억 달러의 구제금융 협상에 성공하고, 서방 투자자들로부터 지지를 받자 일시적으로 비방을 중단, 잠시의 냉각기를 가졌다. 8월들어 주가가 폭락하고 루블화가 크게 흔들리자 그는 절호의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그동안 베레조프스키등 기득권세력들이 가장 두려워한 것은 키리옌코 총리가 권력과 내통하는 부실 은행과 기업에 대해 구제금융을 지원하지 않고, 퇴출시키려는 구상을 추진한 것. 키리옌코가 살아있는한 베레조프스키의 기업들이 살 길이 없어지게 된다. 루블화 절하조치와 모라토리엄이라는 경제 파국이 닥쳐오자 베레조프스키 무리들이 날뛰며 오히려 키리옌코를 퇴출시키기로 하고 치열한 로비를 벌였다. 옐친은 이들 기득권 세력을 등에 업고 키리옌코를 내치고 다시 체르노미르딘을 등장시킨 것이다.
키리옌코는 총리에서 실각한후 며칠후 빵을 달라고 외치는 한 광산을 찾아가 광부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여러분들, 나도 당신들처럼 실직자가 됐습니다. 나도 어디로 가야할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당신이나 나를 이렇게 만든 것은 정경유착의 경제시스템입니다. 우리는 해야할 일이 많이 남아있습니다.”
그는 웅변조로 열변을 토했지만, 그의 말은 산맥에 갇혀 맴돌았다.
출처 : 오피니언뉴스 http://www.opinionnews.co.kr/news/articleView.html?idxno=6919
골드만삭스과 같은 뉴욕 월가의 은행들이 러시아 파산 과정에서 한 역할은 무엇인가.
월가 은행들은 고통이 따르는 경제 개혁이 아니라 단물이 흐르는 사탕을 러시아에 제공했다. 월가 뱅커들은 손쉽게 자금을 구할 수 있다며 크레믈린을 유혹했고, 리스크를 경고하지 않은 채 투자자를 모았다는 원죄에서 피해갈수 없다.
월가 은행들은 러시아 정부가 외국 투자자로부터 수십억 달러의 돈을 빌리도록 도와줬다. 그들은 정경유착의 러시아 재벌들에게 아첨을 하며 자신의 은행을 이용해달라고 꼬리를 흔들었다. 아무런 담보가 없는 신흥기업에도 월가 브로커들은 달려들었고, 시베리아의 동토의 농경지역을 위해 농업채권 발행을 도와줬다. 러시아가 세계에서 가장 신뢰성을 얻고 있는 미국 재무부 채권(TB)의 이자율에 조금만 더 얹은 저리의 이자로 채권을 발행하게 도와준 것이 바로 월가 은행이다. 월가 투자은행의 도움으로 러시아는 세계 유수의 채권 시장을 형성했다.
그러나 러시아에는 돈을 빌려주고 빌리는데 따른 신용 체계가 서있지 않았다. 월가 은행들은 이런 것들은 가르쳐주지 않았다. 그들은 어느날 갑자기 러시아를 철수하면서 러시아 은행제도의 문제점을 강하게 제기하는 이중적 모순을 드러냈다.
앨런 그린스펀에 앞서 미 연준(Fed) 의장을 지냈던 폴 볼커(Paul Volker)씨는 “러시아 위기의 본질은 은행들이 고객에 대해 관심을 게을리한 것”이라며 “결국 탐욕이 지배했다”고 지적했다.
월가 브로커들은 이익 추구만 했지, 만연한 부패 구조, 부채 상환 해이등 러시아 투자의 위험성을 투자자들에게 알려주지 않았다. 그들은 땅덩어리가 넓고, 부존자원이 많으므로 떼먹히지는 않을 것이라는 막연한 기대를 갖고 불신의 땅에 덤벼들었던 것이다.
월가 은행들이 러시아 금융시장에 진출한 것은 1996년 11월부터였다. 미국의 JP 모건이 스위스의 SBC-워벅과 함께 짜르 체제가 무너진이후 처음 러시아 채권시장에 문을 두드렸다. 불과 1년 9개월 남짓의 기간동안 월가 은행들은 러시아에 러시를 이루며 진출했다.
1997년 여름 모스크바에서 출발, 한여름에도 땅에 서리가 내리는 시베리아 이르쿠츠크로 가는 비행기 1등석엔 국제 뱅커들이 자리를 메웠다. 뱅커들은 가스생산회사인 이르쿠츠크 에너지회사에 채권을 발행해주기 위한 브로커들이었다. 그들은 경쟁적으로 좋은 조건을 내세웠다. 스위스 은행은 선급금 조로 5,000만 달러의 차관을 제공하고, 미국 국채(TB) 수준의 낮은 금리를 보장했다. 그런 조건이면 위험하다고 발을 빼는 외국 은행들도 있었지만, 스위스 은행은 마침내 승자가 됐다.
28개의 러시아의 기업이 뉴욕증권거래소에 상장하는데도 월가 은행들의 경쟁이 불을 뿜었다. 살로먼 스미스바니, 모건 스탠리, DLJ등이 참여했다. 그러나 이들 러시아주는 98년 8월 이후 공모가의 10~20%로 헐값에 호가됐고, 그나마 거래가 뚝 끊겼다.
미국-스위스 합작은행인 크레딧 스위스 퍼스트 보스턴(CSFB) 은행은 러시아 정크본드 시장을 개척했고, 또 파생금융상품을 팔러 다녔다.
거의 모든 월가 은행들이 러시아에서 활약했다. 골드만 삭스는 처음엔 러시아 진출을 망설였다. 1992년 로버트 루빈(나중에 미국 재무장관) 당시 회장은 옐친 정부에 막강한 로비력을 행사, 러시아 정부의 자문회사로 지명받았다. 그러나 94년엔 러시아에서 완전히 철수했다. 위험하고 이문이 남지 않는다는 판단에서였다.
그러나 96년 이후 다른 월가 은행들이 러시아에 진출, 많은 돈을 벌어오자 골드만도 다시 러시아 땅을 밟았다. 루블화 폭락 두달전의 채권발행이 바로 그것이었다.
골드만 삭스가 채권 발행에 성공한지 2주일만에 JP 모건이 다시 주간사회사를 맡아 러시아 국채 25억 달러의 발행을 대행해주었다. 또 한주일이 지나고 골드만은 64억 달러의 단기차관을 채권으로 바꿔주는(스왑) 거래를 중매했다. 한달 사이에 100억 달러의 채권이 팔려나갔고, 외국인 투자자들은 두달후 러시아가 모라토리엄을 선언할줄 새카맣게 모른 채 단지 금리가 높다는 이유로 러시아를 찾아들었다.
골드만 삭스와 JP 모건은 러시아 채권 거래에서 가격을 심할 정도로 후려쳤다. 그 것이 러시아 신인도에 심한 타격을 주었다. 골드만 삭스의 채권 발행이 성공리에 끝나고 한달후 월가 은행들은 액면가 100 달러의 채권을 80 달러에 스왑(swap)해주었다. 월가 은행들은 한달후에 액면가 100 달러 짜리 채권을 50 달러로 깎아 내렸다. 월가 은행들은 러시아 채권 물량을 홍수처럼 쏟아내도록 유도함으로써 가격 폭락을 방치한 것이다. 월가 은행들은 먹을만큼 먹고, 잽싸게 떠났고, 러시아는 달러 공황에 직면하게 됐다.
▲ 1998년 모라토리엄 선언 당시의 보리스 옐친 러시아 대통령 /위키피디아
모라토리엄 선언
1998년 8월 17일, 월요일. 러시아 정부는 더 이상 달러 유출의 압박을 이겨내지 못하고 두가지 조치를 취했다. 그 하나는 90일간의 모라토리엄 선언이고, 다른 하나는 루블화 절하였다. 옐친 정부는 1 달러당 6.3 루블에 고정시켰던 환율을 9.5 루블까지 허용하겠다고 밝혔다. 34%의 대폭적인 절하를 단행하겠음을 의미하는 조치였다. 러시아 채권 금리는 150%에서 200%로 껑충 뛰었다. (금융시장에서 사용하는 bp(0.01%)로 환산하면 2만 bp에 이르는 고금리다.)
러시아의 조치는 전세계 금융시장을 꽁꽁 얼어붙게 했다. 모리토리엄으로 지급 유예된 자금은 400억 달러에 불과하지만, 전세계 주가가 꽁꽁 얼어붙었고, 뉴욕 월가에도 러시아 북극곰이 공격해왔다.
재미있는 사실은 모라토리엄을 선언한날 러시아의 고위층이 모두 모스크바를 떠나있었다는 사실이다. 보리스 옐친 대통령, 세르게이 두비닌 중앙은행 총재는 여름 휴가중이었고, 러시아의 개혁주의자로 IMF 협상창구인 아나톨리 츄바이스도 교외에서 쉬고 있다가 부랴부랴 모스크바로 돌아왔다.
루블화 절하가 단행된지 닷새후인 26일, 러시아 신흥재벌인 보리스 베레조프스키가 츄바이스를 만났다. 그는 츄바이스에게 아마도 이번 개각에서 키리옌코 총리가 물러날 것이라고 말했다. 츄바이스는 시장 경제를 주장하는 개혁주의자로 키리옌코의 노선을 지지했지만, 정부내 권력 서열에서 밀려나 있었다. 정재계에 거간꾼으로 알려진 베레조프스키는 은근히 자신의 로비능력을 과시했고, 츄바이스도 그의 말을 조금도 의심하지 않았다. 머지않아 키리옌코가 물러나고 개혁주의 노선이 철퇴를 맞을 것임을 직감했다.
다음날은 일요일이었다. 휴가에서 돌아온 옐친 대통령은 키리옌코 총리를 조용히 자신의 별장으로 불렀다. 개각을 할 생각인데, 당신은 무엇을 희망하는가라고 물었다. 키리옌코는 조용히 쉬고 싶다고 말했다. 총리에 오른지 4개월에 불과한 36세의 총리는 자신의 목에 도끼날이 내려칠 날이 며칠 남지 않았음을 직감했다. 그의 종말은 예상보다 더 빨리 다가왔다. 옐친과 키리옌코의 만남이 있은지 네시간후 개각이 단행됐다. 키리옌코는 물러나고 전임자인 빅토르 체르노미르딘씨가 그 자리에 다시 앉았다. (체르노미르딘은 3개월후 총리직에서 또 쫓겨났다.)
키리옌코의 실각은 정치적 어려움이 있을때마다 개각을 단행하는 옐친의 교활한 정치술수에 그 원인을 찾을 수 있다. 또 경제 위기를 맞아 개혁성향의 리더를 무너뜨리려는 보수세력의 권모술수가 작용했다.
키리옌코는 권력과 유착된 독점 자본가 세력의 음모에 의해 무너졌다. 음모 세력의 중심엔 베레조프스키가 있었다.
베레조프스키는 1996년 6월 대선 당시 옐친에게 거액의 정치자금을 대준 대가로 국가안보위 서기 자리를 얻을 만큼 야심만만한 정치 성향의 인물이다. 그는 공기업 민영화 과정에서 권력과 밀착, 기업을 사고 팔아 떼돈을 벌었으며, ORT라는 TV 방송국과 네자비시마야 신문까지 보유한 러시아 최대 재벌중의 하나다. 러시아 굴지의 석유회사와 아에로플로트 항공사를 보유하고 있고, 보유 재산만도 30억 달러를 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옐친의 딸 타냐나 다이아첸코, 옐친의 비서실장인 발렌틴 유마세프등과도 친밀한 관계를 맺어왔다.
옐친이 그해 4월 은행가 출신의 개혁파 키리옌코를 총리에 지명하자, 베레조프스키는 재계를 대표해 공공연하게 젊은 총리를 비난했다. 자신이 소유하고 있는 언론을 통해서도 반개혁 성향의 논조를 확산시켰다.
그러나 키리옌코가 IMF와 170억 달러의 구제금융 협상에 성공하고, 서방 투자자들로부터 지지를 받자 일시적으로 비방을 중단, 잠시의 냉각기를 가졌다. 8월들어 주가가 폭락하고 루블화가 크게 흔들리자 그는 절호의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그동안 베레조프스키등 기득권세력들이 가장 두려워한 것은 키리옌코 총리가 권력과 내통하는 부실 은행과 기업에 대해 구제금융을 지원하지 않고, 퇴출시키려는 구상을 추진한 것. 키리옌코가 살아있는한 베레조프스키의 기업들이 살 길이 없어지게 된다. 루블화 절하조치와 모라토리엄이라는 경제 파국이 닥쳐오자 베레조프스키 무리들이 날뛰며 오히려 키리옌코를 퇴출시키기로 하고 치열한 로비를 벌였다. 옐친은 이들 기득권 세력을 등에 업고 키리옌코를 내치고 다시 체르노미르딘을 등장시킨 것이다.
키리옌코는 총리에서 실각한후 며칠후 빵을 달라고 외치는 한 광산을 찾아가 광부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여러분들, 나도 당신들처럼 실직자가 됐습니다. 나도 어디로 가야할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당신이나 나를 이렇게 만든 것은 정경유착의 경제시스템입니다. 우리는 해야할 일이 많이 남아있습니다.”
그는 웅변조로 열변을 토했지만, 그의 말은 산맥에 갇혀 맴돌았다.
출처 : 오피니언뉴스 http://www.opinionnews.co.kr/news/articleView.html?idxno=6919
'시사교육배움 > 미국은' 카테고리의 다른 글
[4.25] 미국, $4,840억 규모 경기부양책 의회 통과 및 대통령 서명 (0) | 2020.04.26 |
---|---|
산유국들 "미국도 감산하라"… 美는 셰일석유 보호 고집 (0) | 2020.04.07 |
경제 셧다운에 개인 파산-기업 디폴트 '연쇄 쇼크' (0) | 2020.04.01 |
모터쇼 자리엔 병상…뉴욕 마비됐다 (0) | 2020.03.28 |
美 전문가들 '신뢰하는 아시아국가'…日48% 1위.한국은 9% (0) | 2020.03.2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