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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수와 검사Ⅱ(한명숙) ② 사라진 증인, 빼앗긴 비망록 - 뉴스타파

천사요정 2020. 5. 12. 20:22



2011년 6월 13일 밤 11시쯤, 경기도 의왕시에 있는 서울구치소 앞에 한 기자가 나타났다. 한 시간 뒤 자정이 넘어가면 이른바 ‘한명숙 뇌물 사건’의 핵심 증인인 한만호 씨가 구치소에서 나올 예정이었다. 한만호는 요즘 말로 ‘핫한’ 인물이었다. 한 씨 출소를 기다린 기자는 오마이뉴스 소속 구영식 기자. 그는 한만호를 인터뷰하기 위해 한밤중에 이곳에 나왔다.

‘증인 한만호’는 누구인가

경기도 고양시에서 한신건영이라는 건설사를 운영하던 한만호는 2008년 부도 이후 사기죄 등으로 구속 수감됐다. 통영교도소에서 복역 중이던 한만호는 2010년 3월 갑자기 서울구치소로 이감됐다. 그리고 곧바로 검찰에 불려간다. 검찰 출정은 여러 번 이어진다. 한만호는 검찰에서 엄청난 사건을 진술하고 만다. 2007년 당시 고양시 일산 갑 지역구 국회의원이었던 한명숙 전 총리에게 9억 원을 정치자금으로 줬다는 내용이다.

 


▲ 2009년 검찰의 뇌물 의혹 수사에 대해서 한명숙 전 총리가 반박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한명숙 뇌물 사건’ 관련 검찰 수사 과정은 2010년 4월 언론에 생중계되다시피 보도된다. 당시는 6월 2일 지방선거가 다가오고 한명숙 전 총리는 서울시장 후보로 출마한 상황이었다. 결국 선거에서 한 전 총리는 불과 0.6% 포인트 차이로 여당 오세훈 후보에게 패배한다. 검찰은 광범위한 수사 끝에 선거 직후인 7월 한명숙 전 총리를 정치자금법 위반으로 기소한다.


‘한명숙 사건’의 반전은 2차 공판기일에서 벌어졌다. 검찰에서 한 전 총리에게 돈을 줬다고 진술한 한만호가 증인으로 출석했다. 당연히 검찰 측 핵심증인으로 나왔다. 이 자리에서 한만호는 검찰 조사를 받을 때 했던 진술을 완전히 뒤집는다. 한명숙 전 총리에게 ‘돈을 준 사실 없다’는 증언이었다. 검찰 조사 때 거짓말을 했다는 것이다. 이후 재판은 검찰과 변호인단의 치열한 법정 다툼으로 이어졌다.


구영식 기자가 서울구치소 앞에 간 2011년 6월 13일은 한명숙 사건 공판이 한참 진행될 때였다. 그날은 검찰 핵심 증인이었으나 법정에서 진술을 번복한 한만호가 2008년 사기죄로 받은 징역 3년 형을 마치고 출소하는 날이었다.

기자들은 오지 않았다

구영식 기자는 많은 기자들이 서울구치소 앞에서 기다리고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현장에 온 기자는 자신밖에 없었다. 구 기자도 의아하게 생각했다. 한명숙 사건에서 검찰 진술을 법정에서 뒤집은 핵심 증인을 만날 수 있는 첫 기회인데 왜 아무도 오지 않았을까. 구 기자는 당시 진보 언론들도 이미 한명숙 전 총리가 유죄일 것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에 그랬을 것이라고 해석했다.


자정이 넘어 한만호가 구치소에서 나왔다. 구 기자는 2분 38초 동안 그를 인터뷰했다. 구 기자는 취재 수첩에 이런 내용을 빼곡하게 적어놓았다. 인터뷰를 하는 동안 구치소 관계자가 옆에서 듣고 메모를 했다. 그리고 상부에 보고했다. 법무부와 검찰이 한만호를 매우 민감하게 관리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 구영식 오마이뉴스 기자는 ‘한명숙 사건’의 핵심 증인 한만호를 마지막으로 만난 기자다.




한만호는 구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자신이 법정에서 진술한 것이 진실이며, 한명숙 전 총리는 곧 누명을 벗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검찰의 수사는 “잘못된 사람의 말을 믿고 잘못 작성된 자료를 근거로, 잘못된 목적을 가지고. 당시 서울 시장 당선을 돕고, 노무현 정신을 계승한 세력을 척살하기 위해 저질러진, 잘못된 수사”라고도 말했다. 구 기자는 짧은 기사를 송고했다.


한만호의 인터뷰 중 구 기자가 쓰지 못한 대목도 있었다. 검찰이 한만호를 불러 여러 차례 ‘교육’을 시켰다는 내용이었다. 검찰이 한명숙 측 변호인 대역을 맡아 질문하고 한 씨에게 대답을 준비하게 하는 식이었다는 말이다. 한명숙 전 총리에게 돈을 전달했다는 날짜를 특정하는 방법, 상대 변호인의 질문을 피하는 방법까지 검찰이 교육했다고 한만호는 구 기자에게 말했다.


인터뷰가 끝나고 한만호의 변호인이 구 기자에게 이 부분은 쓰지 말아달라고 부탁했다고 한다. 법정에서 진술을 뒤집은 뒤 한만호는 검찰에 찍힐 대로 찍힌 상황이었고 위증 혐의로 검찰 수사도 받고 있었기 때문에 검찰을 자극하지 않기 위한 것이라고 구 기자는 이해했다.

검찰이 압수한 ‘한만호 비망록’

구 기자가 자정까지 한만호를 기다린 데는 다른 이유도 있었다. 한만호의 출소 나흘 전인 6월 9일 검찰은 한만호의 감방을 압수수색했다. 위증 혐의를 수사한다는 명목이었다. 검찰은 압수수색을 통해 한만호가 구치소에 있는 동안 작성한 모든 기록을 가져갔다. 일기, 편지, 메모, 참회록, 비망록… 한만호가 15개월 동안 쓴 두 박스 분량의 기록이 검찰 손에 넘어갔다.


구 기자는 한만호가 출소 이후 비망록을 다시 쓰지 않을까 기대했다고 한다. 하지만 한만호는 비망록을 다시 쓰지 못했다. 검찰은 2011년 7월 한만호를 위증 혐의로 기소했다. 2015년 한명숙 전 총리는 유죄가 확정되고 구치소에 수감된다. 2016년 한만호도 위증죄로 징역형을 선고 받고 다시 수감됐다. 2018년 2년 형기를 채우고 한만호는 출소했다. 구 기자는 한 씨가 출소 이후 심리적 스트레스로 술을 많이 마시고 건강이 나빠졌다는 얘기를 전해들었다고 말했다.


취재진은 한만호 씨를 만나보고 싶었다. 검찰에 압수당했던 비망록을 되찾아서 가지고 있었을 수도 있고, 지금까지 하지 못했던 말이 남아있을 수도 있다는 기대 때문이었다. 한만호의 위증죄 재판에서 한 씨 변호인을 맡았던 변호사를 찾아 연락했다. 변호인은 최강욱 변호사였다. 최 변호사는 21대 총선에서 열린민주당 비례대표로 당선됐다.


최강욱 변호사는 한만호를 처음 만났을 때를 생생하게 기억했다. 당시는 민변을 중심으로 변호인단이 구성돼 한명숙 전 총리 재판에 대응하고 있었다고 한다. 최 변호사는 한명숙 변호인단의 부탁으로 수감돼 있었던 한만호에게 접견 신청을 했다. 한만호는 감옥에 있는 동안 자신의 사업을 다른 사람들에게 다 빼앗길 수도 있다는 불안감에 초조해하다 검찰의 회유로 거짓 진술을 했다고 최 변호사에게 털어놓았다고 한다. 최 변호사는 그렇게 한만호의 변호인이 됐다.



▲ 최강욱 변호사는 2011년 한만호의 위증 혐의 사건 변호인을 맡았다.




최 변호사도 한만호가 2018년 출소 이후 어떻게 지냈는지는 정확하게 알지 못했다. 한만호가 2018년 몇 번 찾아온 적이 있는데 건강이 좋아보이지 않았다고 했다. 청와대 공직을 맡은 이후로는 연락을 하지 못했다. 그러다 사망 소식을 건너 들었다고 말했다. 가지고 있었던 가족들의 전화번호로 연락했지만 아무도 연결되지 않았다고 한다.

이제 세상에 없는 ‘핵심 증인’

한만호가 운영하던 한신건영은 2008년 폐업됐다. 한신건영의 등기부등본 주소 등을 토대로 한만호가 살던 곳들을 찾아가 봤다. 가족들이 지금도 살고 있지 않을까 기대했지만 아무도 없었다. 이웃이었던 사람은 두 아들과 함께 살던 한만호를 기억했다. 재판을 받으러 다니는 등 어려운 처지였다는 것을 어렴풋이 떠올렸다. 마지막에 집세 등을 깔끔하게 처리하지 않아서 안 좋게 마무리됐다고 말했다. 어엿한 건설업체 사장이었던 한만호는 두 번의 수감 생활을 거치면서 각박한 삶을 살았던 것으로 보인다.


한만호의 유족을 수소문했다. 한만호의 아버님이 종친회에서 임원을 했다는 풍문을 듣고 한 씨 종친회에 연락했다. 연결을 해 줄 수 없다고 했다. 경기도 고양시에서 가까이 지냈다는 지인들도 만나봤지만 허사였다. 꼬리에 꼬리를 물고 사람들을 만나다 비교적 가까운 친지와 연락이 됐다. 기자에게 한만호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을 꺼리는 눈치였지만 몇 가지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됐다.


한만호는 2018년 병원에서 사망했다고 했다. 옥살이를 2번 하는 동안 부친과 모친 모두 세상을 떠났다. 넉넉한 집안에서 자라 중견 건설업체를 운영하던 아들이 옥살이를 하게 되고 세간에서는 뇌물을 준 사람으로 낙인이 찍힌 뒤 부모는 화병에 걸렸다고 한다. 부인과는 이혼했다. 한만호는 사망한 뒤 화장을 해 선산에 있는 부친 묘소 옆에 뿌려졌다고 한다. 아무도 묘를 관리할 사람이 없어서 따로 묘를 만들지는 않았다는 게 취재진과 만난 친지의 말이다.

 


▲ 한만호의 사진을 구할 수 없었다. 뉴스타파는 관계자들의 설명을 토대로 몽타주기법으로 한만호의 모습을 재구성했다.




한만호에게는 어린 아들이 둘 있었다. 지금은 성인이 됐다. 아들에게 연락을 해 만나기로 했다. 하지만 약속 장소에 나타나지 않았다. 수소문해 집으로 찾아가 보기도 했지만 문전박대를 당했다. 아무도 한만호에 대해 적극적으로 이야기를 해주지 않았다. 혹시 한만호가 남겼을 수도 있는 유품을 확인하려는 기대는 접어야 했다. 비망록은커녕 사진 한 장 구할 수 없었다.

비망록은 어디에

강기석 뉴스통신진흥회 이사장은 1977년부터 경향신문 편집국에서 30년 넘게 기자 생활을 했다. 2011년 한명숙 전 총리 재판 당시에는 노무현 재단에서 상임 운영위원을 맡고 있었다. 재단에서 한명숙 전 총리 재판 내용을 회원들에게 알리기 위해 취재를 해야하는 상황이었는데, 당시 재단 직원 중엔 기자 출신이 강기석 운영위원밖에 없었다. 강 기자는 그렇게 빠짐 없이 한명숙 재판을 방청하고 기록하는 일을 맡게 됐다. 2015년 대법원이 한명숙 전 총리에게 유죄를 확정한 뒤 강 기자는 취재 내용을 묶어 <무죄>라는 책을 펴냈다. 일종의 재판 기록이었다. 

 



▲ 강기석 기자는 2016년 ‘한명숙 사건’의 재판 기록인 <무죄>를 출간했다.




뉴스타파 취재진은 이 책에서 한만호 비망록이 언급된 대목을 발견했다.


“검찰이 한 사장의 만기 출소 직전에 그를 소환해 위증 혐의로 수사하고 감방을 압수수색해 일기, 비망록 등을 빼앗가 간 것은 그런 다급한 상황에서 비롯된 최후의 몸부림 비슷한 것이다... 검찰의 그런 두려움은 이날 변호인단이 “압수한 한 사장의 비망록 등을 증거로 제출할 것인지 안할 것인지, 변호인단과 (그 내용을) 공유할 것인지, 말 것인지” 물어봤을 때 “우리가 먼저 다 분석해 보고 필요한 부분만 증거 제출하고 변호인단과 공유하겠다”고 답한 검찰의 억지에서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한 마디로 자신들에게 유리한 부분, 별 문제가 없는 부분만 골라서 내 놓겠다는 것이다… 이날 재판장은 검찰이 압수한 모든 문건을 변호인단과 공유해야 한다고 결정했다.”

<무죄> 116~117쪽



설사 한만호가 자기 비망록 원본을 찾아갔다고 하더라도 당시 재판부 결정에 따라 법원에는 관련 자료가 남아 있을 것이라는 판단이 들었다. 그리고 우여곡절 끝에 뉴스타파 취재진은 비록 한만호는 만나지 못했지만 그가 감방에서 쓴 비망록을 구할 수 있었다. 비망록 표지에는 ‘수인번호 3382 한만호’라는 이름이 쓰여 있었다. 노트는 재소자들이 사용하는 교정 노트. 분량은 1,200여 페이지. 이 안에는 어떤 이야기들이 담겨 있을까. 뉴스타파는 한명숙 사건의 핵심 증인 한만호의 비망록 내용을 3편에서 최초 공개한다.

 



▲ 한만호가 수감 생활을 하며 작성한 비망록 표지. 수인번호와 이름이 선명하다.




https://www.youtube.com/watch?v=hB58IUqHfNg





[LIVE] ⟪죄수와 검사⟫ 시리즈 1~10편 - 뉴스타파 몰아보기




https://www.youtube.com/watch?v=Wx2WkIBt7Z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