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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8과 미국…한국은 ‘승자’ 전두환을 따르지 않았다

천사요정 2020. 7. 3. 09:26

1980년 광주에서 미국 책임을 명확히 보여주는 ‘닉 플랫 메모’
브라운 국방장관 “한국인들 승자 따라갈 것” 발언, 미국은 공식 사과해야

 

광주MBC 다큐멘터리 <그의 이름은> 갈무리 화면. 니컬러스 플랫의 메모와 인터뷰 모습. 방송 화면 갈무리

 

김인정 광주MBC 기자는 2012년부터 2019년까지 5·18 광주민주화운동을 맡으면서 신군부의 광주 학살에 대한 새로운 자료를 발굴했다. 2017년에는 1980년 당시 미국 국방부 국제안보담당 부차관보 니컬러스 플랫(닉 플랫)을 인터뷰해 그의 메모를 확보했다. 김 기자는 2017년 이 내용을 다큐멘터리 <그의 이름은>에 담았다. 한림대 이삼성 교수에게 닉 플랫 메모 분석을 자문했다. 팀 셔록 기자는 김 기자와 함께 미국 시사지 <더 네이션>에 닉 플랫의 메모 내용을 알리는 기사 ‘한국 민주주의를 산산이 조각낸 이틀’(2 Days in May That Shattered Korean Democracy)을 실어 5월28일 공개했다. 팀 셔록 기자는 5·18 광주민주화운동에서의 미국 책임을 분명히 보여주는 ‘체로키 파일’을 폭로한 한반도 전문 기자다. <한겨레21>은 광주민주화운동에 대한 미국의 사과를 요구하는 이 기사를 요약 재구성해서 싣는다. _편집자광주 학살의 책임자는 신군부 말고 하나 더 있다. 미국이다. 당시 한국에는 군사반란으로 군을 장악한 뒤 계엄령을 선포한 군, 그리고 한미연합사령부를 운영하며 한국군을 통제하던 미국이 있었다. 정세에 영향을 미칠 두 개의 힘이었다. 이 힘이 실제 광주의 5월 안에서 어떻게 작동했는지, 미국의 책임을 어떻게 볼지는 논쟁거리였다.미국은 책임을 줄곧 부인해왔다. 1989년 5·18진상조사특별위원회(광주특위)의 질문에 대한 미국 정부의 공식 답변 성명서에 잘 드러나 있다. 미국은 아는 바가 별로 없고, 따라서 책임도 없다는 것이다. 미국은 과연, 지금껏 그들의 주장대로 한국의 민주주의를 수호하고 싶었지만 여러 한계 때문에 돕지 못한 선량한 우방이자 후견자일까. 지미 카터 미국 행정부가 광주 무력 진압 당시 전두환을 도왔는지 확인하기 위해 1980년 5월21일과 22일, 긴박했던 이틀을 들여다봐야 한다. 5월21일은 계엄군이 처음 광주 시민을 집단학살한 날이다. 하루 뒤인 22일 미국 백악관 상황실에서 국무부, 국방부, 중앙정보국(CIA), 합참, 국가안보회의(NSC) 최고위급 관계자들이 회의를 열고 최종 무력 진압을 승인했다. 전두환의 폭력적 집권보다 반독재 시민항쟁이 더 큰 위협이라고 판단을 내린 것이다. “단기적 지지”라고 표현했지만, 실상 ‘지지’에 방점이 찍혀 있었다.

광주MBC 다큐멘터리 <그의 이름은> 갈무리 화면. 니컬러스 플랫의 메모와 인터뷰 모습. 방송 화면 갈무리

빠진 퍼즐을 맞추는 듯당시 미국 안에서도 반인도적 결정이란 비난이 나왔다. 일간지 <워싱턴포스트>가 지적했듯 미국은 ‘주한미군 철수’라는 위협 카드를 가지고 있었다. 군사·경제·외교적 압력을 가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고려하지 않았다. 1996년에는 미국과 신군부 사이를 오간 비밀 전문인 ‘체로키 파일’이 폭로됐다. 미국이 한국군 공수부대 배치를 포함해 광주 상황을 상세히 보고받았다는 사실이 드러난 것이다. ‘미국 책임론’이 더욱 달궈졌다. 2017년 광주MBC가 새로 발굴한 자료 ‘닉 플랫 메모’에는 미국 책임론을 뒷받침할 새로운 사실이 나온다. 빠진 퍼즐을 맞추는 듯한 이 자료는 문제의 5월22일 백악관 회의 참석자 중 한 명인 미 국방부 국제안보담당 부차관보 니컬러스 플랫을 미국 뉴욕에서 인터뷰할 때 확보했다. 그는 당시 회의 내용을 기록하는 서기였다. 광주 상황에서 결정적 국면이던 미국의 ‘무력 진압 승인’에 이르기까지 회의 전체가 놀랍도록 상세히 기록돼 있다. 같은 해 미국 애리조나 자택에서 이뤄진 존 위컴 당시 주한미군사령관 인터뷰와 조합해보면 입체적인 재구성이 가능해진다. 새롭게 알아낸 내용은 이렇다.

광주MBC 다큐멘터리 <그의 이름은> 갈무리 화면. 니컬러스 플랫의 메모와 인터뷰 모습. 방송 화면 갈무리

1. 광주 첫 집단 발포 사상자 규모 닉 플랫 메모에는 5월21일 광주에서 60명이 군의 총격으로 죽고 400여 명이 다쳤다는 구체적인 사상자 규모가 나오고, 이를 미국이 즉각 보고받았다는 사실이 처음 나온다. 카터 백악관은 회의 전날 얼마나 많은 사람이 죽었는지 이미 알고 있었음에도, 전두환의 광주 진압을 지지하기로 결정했다는 것이다. 광주의 참상을 잘 몰랐다는 미국 정부의 공식 해명과 정면충돌한다. 사상자 수는 1988년 한국에서 새로 선출된 국회가 청문회를 열 때까지 한국 대중에게 알려진 적이 없는, 신군부 세력만이 쥐고 있던 정보였다.2. 전두환을 책임자로 즉시 거론 백악관 회의 참석자들은 자연스럽게 전두환을 무력 진압의 직접 책임자로 여러 차례 거론한다. 특히 사상자 규모와 광주의 상황이 언급된 뒤 “전두환이 사태를 악화시키며 큰 해를 끼치고 있다”(워런 크리스토퍼 국무부 차관)거나 “전두환이 골칫거리가 될 수 있다”(데이비드 존스 합참 의장)는 우려 섞인 평가도 나왔다.

광주MBC 다큐멘터리 <그의 이름은> 갈무리 화면. 니컬러스 플랫의 메모와 인터뷰 모습. 방송 화면 갈무리

국방장관이 회의를 주도한 이유3. 해럴드 브라운 국방장관의 역할 해럴드 브라운 국방장관은 강경한 태도로 회의를 주도한 주역이다. 국무부 관료 사이에서는 미약하게나마 전두환의 행위에 대한 우려와 지적이 나오지만, 브라운 국방장관은 이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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