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19의 국내 상륙 8개월 째. 누구도 예상치 못한 감염병이 국민의 생명과 건강을 위협하는 것은 물론 경제 활동까지 마비시키면서 수많은 이들의 일자리가 사라져가고 있다. 멀지 않은 미래에 4차 산업혁명으로 일자리가 급감할 위기가 도래할 것이라는 다소 막연했던 전망이 갑작스런 감염병의 습격으로 눈앞의 현실이 되어 버린 것이다. 뉴스타파는 자영업자와 특수고용직 등 코로나19로 생계 위협에 처한 이들의 실태와 정부의 대응 과정을 짚어보고, 향후 감염병의 일상화와 4차 산업혁명에 따른 일자리 급감 및 공동체 붕괴 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대안으로 정치권에서 뜨거운 논쟁이 일고 있는 ‘기본소득론’의 구체적 내용과 현실화 가능성을 점검하는 기획을 마련했다. |
코로나19 상륙 8개월…사라져가는 일자리
① 거리에서 사라진 사람들...황폐화된 자영업
서울 명동 거리. ‘외국인 관광객들의 성지’라는 표현은 이미 옛말이 된 지 오래다. 코로나19가 국내에 상륙한 지난 1월 말 이후 서울 명동에는 외국인들의 발길이 뚝 끊겼다. 내국인들 역시 대면접촉을 꺼려 거의 찾지 않는다. 하루 아침에 사람들이 사라져 버리자 음식도, 옷도, 화장품도, 기념품도 팔 수 없는 건 당연하다.
행인들이 사라지자 더 잘 눈에 띄는 상점의 출입문에는 휴업과 폐업, 임대를 알리는 안내문들이 덕지덕지 붙어 있다. 상점 다섯 곳 중 한 곳 꼴로 장사를 접고 매장을 비웠다. 남은 임대 기간을 채워야 권리금이라도 건질 수 있으리라 기대하는 업주들만 자리를 지키고 있다. 한 기념품 매장 업주는 “요즘 하루 매출이 2만 원 남짓”이라며 “매장 임대 기간이 내년 5월까지인데 그때까지 이렇게 버틸 순 없을 것 같다”며 한숨을 쉬었다.
▲ 행인들이 사라진 서울 명동 거리 (지난 9월 7일 오후)
대형 빌딩들로 가득한 서울 광화문에서는 회사원들이 사라졌다. 기업들이 직원들의 코로나19 감염을 우려해 순환 재택근무를 시행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자 회사원들을 상대로 식사와 술을 팔던 인근 요식업소들이 직격탄을 맞았다.
한 대기업 계열사 건물 지하층에서 일식집과 중식집을 운영하고 있는 강보서(47세) 씨도 영업 7년 만에 최대 위기를 맞았다. 평소 점심시간이면 줄을 서서 점심을 먹던 손님들의 숫자가 지난 2월 기업들의 재택근무가 본격화되면서 절반 가까이 줄었기 때문이다. 강보서 씨는 매출 감소에도 불구하고 그동안 가족처럼 함께 일하던 직원들을 차마 해고할 순 없어 지금까지 7천 만원의 빚을 지며 억지로 버티고 있다.
하지만 그는 최근 정부가 결정한 2차 긴급재난지원금도 받을 수 없다. 지난해 매출 4억 원 이하 자영업자가 지급 대상인데, 지난해 강 씨의 일식집은 4억 1천만 원, 중식집은 4억 2천 만 원의 매출을 올렸기 때문이다.
그는 당장도 위기지만 앞으로가 더 걱정이라고 말한다. “이번에 재택근무를 시행한 기업들이 앞으로 이런 근무 패턴을 계속 유지하면 이 자리에서 음식업 장사는 접을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실제로 한국경영자총연합회가 최근 100대 기업에 설문조사를 벌인 결과, 재택근무의 생산성이 정상근무와 대비할 때 큰 차이가 없었다는 응답이 많았다.
② 하루 아침에 ‘셧다운’...PC방의 눈물
서울 남영동에서 PC방을 운영하는 김창겸(45세) 씨는 지난 8월 18일 청천벽력 같은 문자 메시지를 받았다. 코로나19의 수도권 재확산에 따라 PC방이 고위험시설에 포함돼 영업을 중단해야 한다는 구청의 통보였다. 평소 80만 원 수준이던 하루 매출이 지난 2월부터 60만 원 아래로 떨어진 상황에서 날벼락을 맞은 것이다.
영업이 중단된 한 달 동안 매출은 전혀 없이 매장 임대료만 나갔다. 언제 다시 문을 열 수 있을지 기약이 없는 상황에서 절박한 마음에 오토바이 배달에 나섰다. 하지만 초보 배달부에겐 고되고 위험하기만 할 뿐 벌이는 얼마 되지 않았다.
지난 9월 14일 PC방이 고위험시설에서 제외되며 다시 영업을 할 수 있게 됐다. 하지만 매출의 40%를 차지하는 음식 판매와 손님의 30%를 차지하는 미성년자 입장이 금지됐다. 영업 재개 이후 하루 매출은 고작 15만 원 내외. 김 씨는 “정부의 조치는 손발 다 잘라서 물에 던져 놓고는 ‘난 널 죽이지 않았어’라고 말하는 것으로 밖에 해석이 안 된다”고 말했다. 이런 상황이 계속되면 PC방을 운영해봐야 빚만 늘어갈 게 뻔하기 때문이다. 김 씨는 “이대로라면 7년 동안 임대료 한 번 밀리지 않고 유지해온 PC방 영업을 접을 수밖에 없다”며 한숨을 쉬었다. 김창겸 씨와 같은 PC방 업주는 전국적으로 1만여 명에 달한다.
③ 열리지 않는 교문…농부가 된 방과후강사
경기도 이천에서 25년 동안 초등학생 방과후 음악강사로 일하던 강연희 씨. 새 학년 개학이 코앞이던 지난 2월 말 갑자기 모든 방과후수업이 취소됐다는 통보를 받았다. 모든 학교의 정규 수업이 마비된 상황이었으니 방과후수업을 할 수 없는 건 당연했다.
5월 이후 코로나19 감염자 숫자가 점차 줄어들자 2학기에는 아이들이 정상 등교할 수 있으리라는 희망이 생겼다. 그러나 8월들어 수도권을 중심으로 코로나19 감염이 확산되자 학교는 2학기에도 계속 온라인 수업 체제를 유지했다.
처음엔 코로나19 사태가 이렇게 길어질 줄 몰랐다. 강연희 씨는 아이들과 다시 만날 날을 기다리며 동료 강사들과 모여 온라인 음악회 준비도 하며 시간을 보냈다. 하지만 실업급여도 받지 못하는 특수고용직인 탓에 오래 버틸 수는 없었다. 동료 강사들은 하나둘 씩 생계를 위해 일터로 나갔다. 누구는 물류센터 일용직으로, 누구는 학교 방역 도우미나 온라인 수업 도우미로, 또 누구는 거리의 쓰레기를 줍고 공중 화장실을 청소하는 공공근로에 나섰다.
강연희 씨도 새로운 일을 찾아야 했다. 지인의 도움으로 밭을 얻고 특수고용노동자 지원금으로 나온 얼마간의 돈으로 깻잎과 고추, 고구마 종자를 사서 뿌렸다. 일단 농사를 지으며 앞으로 어떤 일을 하며 살아갈지 고민하고 있다. 강연희 씨는 “악기를 한 사람들은 전문직이고 경제적 어려움에 처해본 적도 별로 없는데, 이렇게 한 순간 실업자가 되고 나니 마음을 바로잡지 않으면 버텨내기가 쉽지 않다”면서 “가계에 큰 도움이 되진 않더라도 이렇게 농사를 지을 수밖에 없는 이유”라고 말했다. 강연희 씨처럼 전국 초등학생들의 특기적성교육과 방과후 돌봄 기능을 함께 수행해온 방과후강사는 12만 명에 이른다.
④ “저녁 있는 삶이 생겼는데 돈이 없네요”...학습지교사의 한숨
25년차 학습지교사 유득규 씨는 지난 2월부터 출근 시간이 늦어지고 퇴근 시간이 빨라졌다. 방문지도를 하는 학습지교사의 특성상, 아이들과의 접촉을 꺼리는 학부모들이 많아 맡은 과목 수가 크게 줄었기 때문이다.
또 유 씨의 일터인 서울 방화동 지역에는 공항에서 근무하던 학부모들이 많아 코로나19 여파로 인해 실직한 경우가 많았다. 경제 사정 때문에 학습지를 중단하는 가정까지 늘다보니 전체 과목 수가 올해 초의 절반까지 떨어졌다. 학습지교사 역시 특수고용직이어서 과목 당 수수료가 개인 수입이다. 결국 코로나19로 수입이 반토막 난 것이다.
과거엔 보통 밤 10시 넘어 일이 끝났다. 그래서 ‘9시 뉴스를 보면서 저녁 먹기’가 꿈이었던 적도 있었다. 그런데 코로나19로 일이 줄면서 ‘저녁이 있는 삶’이 갑자기 찾아 왔다. 그런데 그 저녁을 누릴 수 있는 돈은 사라졌다. 매일 쓰는 차량 기름값을 충당하기도 어려운 처지다. 학습지교사로 일하는 동안 1997년 외환위기를 겪고 2008년 세계금융위기도 겪었지만 이번처럼 힘든 적은 없었다고 한다.
유 씨를 더 불안하게 하는 것은 이같은 상황이 언제까지 이어질 지 알 수 없다는 점이다. 이대로라면 다른 직업을 찾아보는 게 합리적이지만 차마 용기가 나지 않는다고 했다. 유 씨는 “다른 전문 기술을 갖고 있다면 모를까, 25년 동안 아이들만 가르쳐온 나로선 어차피 아이들과 만나는 일을 찾아봐야 하는데 지금 상황에서 그런 일자리가 어디 있겠느냐”고 말했다. 유 씨와 같은 학습지교사는 6만여 명으로 추산된다.
4차 산업혁명의 ‘고용 절벽’ 세상, 코로나19가 앞당기다
코로나19 팬데믹으로 우리나라 뿐만 아니라 전세계적으로 대면 접촉이 필수인 일자리들이 사라지고 있다. 방역에 실패한 미국에선 지금까지 1,100만 명이 일자리를 잃은 것으로 집계됐다. OECD의 고용 전망 보고서는 올해 37개 회원국의 실업률이 12.8%까지 치솟을 수 있다고 전망했다. 8천만 명의 일자리가 사라질 수 있다는 의미다.
그런데 이같은 ‘고용 절벽’은 사실 코로나19 사태 이전부터 예견됐었다. 인공지능과 로봇 기술의 발달 등 4차 혁명으로 인한 일자리 감소 추세가 속도를 내왔기 때문이다.
▲ 구글이 개발하고 있는 자율주행 자동차 ‘웨이모’
현재 구글이 개발 중인 자율주행 자동차 ‘웨이모’는 이미 누적 주행거리 3만 2천 킬로미터를 넘기며 성능을 급속히 끌어올리고 있다. 완전한 자율주행 차량이 상용화 단계에 접어들 경우 택시기사나 대리운전기사 같은 직업은 사라질 수 있다. 마찬가지로 현재 세계 여러 곳에서 시험 가동되고 있는 배달 로봇이 노동자들을 대체하는 것도 시간 문제다. 이미 로봇이 서빙하는 식당, 로봇이 룸서비스를 하는 호텔, 로봇이 만들어 판매하는 원두커피점 등이 늘고 있다.
하지만 사람의 일자리를 뺏는다고 비판만 하기엔 인공지능과 로봇 기술의 긍정적 측면도 상당하다. 치킨을 튀겨주는 로봇 설비는 인건비를 줄여줄 뿐만 아니라 170도의 기름 앞에서 언제든 화상의 위험을 감수해야 할 아르바이트 직원들에게 고마운 존재다. 무게 센서와 비전카메라, 자동 결제 시스템으로 운영되는 무인 편의점은 야간 시간대 홀로 매장을 지키다 범죄의 표적이 될 가능성을 낮춰 주기도 한다.
▲ 우리나라의 로봇 밀도는 2018년 1위, 2019년엔 싱가포르에 이어 2위다.
이미 제조업 현장에서는 패널 절단이나 용접 등의 위험한 작업들을 로봇이 도맡아 하고 있다. 우리나라의 로봇 밀도(제조업 노동자 만 명당 로봇 설비 대수)는 수년 째 세계 최상위를 다투고 있다.
▲ 2018년 LG경제연구원의 ‘인공지능에 의한 일자리 위험 진단’ 보고서
인공지능과 로봇기술의 발달은 결국 일자리 감소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 재작년 한 민간 경제연구소가 내놓은 보고서는 향후 우리나라 423개 직업 가운데 43%가 인공지능과 로봇으로 대체될 위험이 크다고 전망했다. 특히 사무직의 86%인 395만 명, 판매직의 78%인 238만 명, 기계조작 종사자의 59%인 185만 명이 일자리를 잃을 가능성이 높다고 봤다. 가장 위험한 직업 상위 20개 가운데는 회계사와 세무사 등 전문직도 포함돼 있다.
고용 절벽 시대의 해법 찾기...코로나 1차 긴급재난지원금과 기본소득
코로나19와 같은 감염병 때문이든 곧 도래할 4차 산업혁명의 결과이든 일자리가 급격히 감소하면 소비가 위축되고 경기는 침체된다. 기업은 투자와 고용을 줄일 수밖에 없어 악순환은 반복된다. 과거 세계 경제 위기가 주로 공급 과잉에서 발생한 것이었다면 앞으로는 수요 측면에서 위기가 촉발될 가능성이 높아진 것이다.
기본소득론은 바로 이같은 미래의 고용 절벽 상황을 극복하기 위한 대안으로 고안됐다. 즉, 일자리가 없는 사람에게도 최소한의 소비 생활을 영위할 수 있는 돈이 있어야 경제가 선순환해 사회적 공존이 가능해 진다는 것이다.
기본소득의 정의는 모든 개인에게 선별 과정 없이 보편적, 정기적으로 지급하는 현금을 의미한다. 현재까지 기본소득을 제도화한 국가는 없으며, 거의 흡사한 형태를 가진 사례만 일부 있다. 미국 알래스카주의 경우, 매년 석유 수출로 발생한 이익을 6개월 이상 거주한 내외국인에게 똑같이 배당하는 퍼머넌트 펀드(Permanent Fund)를 운용하고 있다. 지급액은 1인당 연간 우리 돈으로 100~200만 원 정도. 그리 큰 액수는 아니지만 알래스카주가 미국에서 가장 빈곤율이 낮고 빈부 격차가 작은 지역이 된 데에는 이 펀드가 핵심 역할을 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우리나라에서도 지난 5월 국가가 모든 국민들에게 현금을 지급하는 사상 초유의 일이 있었다. 4인 가구 기준 100만 원씩 모두 14조원을 지급한 1차 긴급재난지원금이다. 이 정책의 효과는 어떻게 나타났을까.
통계청의 2분기 가계동향 조사에 따르면, 1차 긴급재난지원금이 지급된 2분기 동안 2인 이상 가구의 근로소득과 사업소득, 재산소득은 코로나19 여파로 모두 하락했다. 그러나 1차 긴급재난지원금이 포함된 이전소득(연금, 수당, 사적채무 이자 등)이 80%나 늘면서, 총소득이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4.8% 늘었다.
일반적으로 이전소득의 부가가치유발 효과는 0.3 미만이다. 즉, 1만 원이 생기면 3천 원 정도만 소비에 사용하고 대부분은 저축이나 재투자에 쓴다는 것이다. 그런데 국회 예산정책처 분석 결과 1차 긴급재난지원금의 부가가치 유발효과는 0.65~0.78 수준이었던 것으로 분석됐다. 예상보다 2배 이상 소비활성화에 기여했다는 뜻이다.
▲ 지난 2분기 2인이상 가구 소득은 긴급재난지원금의 지급으로 총소득이 4.8% 증가했다.
게다가 소득 격차 완화 효과도 나타났다. 통계청 조사에 따르면 2분기 균등화 처분가능소득 5분위 배율은 4.23배로 지난해 같은 기간 4.58배보다 0.35배포인트 개선됐다. 5분위 배율은 상위 20%의 균등화 처분가능소득을 하위 20%의 소득으로 나눈 것으로 이 배율이 낮을수록 소득 격차가 줄어든 것으로 해석된다. 1차 긴급재난지원금을 포함한 공적 이전소득을 제외할 경우 2분기 균등화 처분가능소득 5분위 배율은 8.42배로 지난해 같은 기간 7.04배보다 크게 악화됐을 것으로 조사됐다.
▲ 긴급재난지원금 지급으로 소득 격차 완화 효과가 나타난 것으로 분석된다.
물론 1차 긴급재난지원금은 엄밀한 의미에서 기본소득과는 다르다. 지원 대상을 선별하지 않고 보편적으로 지급하긴 했지만 개인별 지급이 아닌 가구별 지급이었고, 정기적이 아닌 1회성 지급이었다. 또 사용 기간도 3개월로 제한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본소득 도입을 주장해 왔던 이들에겐 의미가 적지 않다. 기본소득당 용혜인 의원은 “국가가 전 국민에게 현금을 지급한다는 것은 과거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지만 코로나19라는 미증유의 상황에서 현실이 됐다. 이런 정책이 가능하고 충분한 효과도 있다는 점을 전 국민이 체감하게 되었다는 점에서 향후 기본소득 논의의 지평을 더 넓힐 수 있는 계기가 될 것이다”라고 말했다.
정치권, 기본소득 방안 경쟁적 제시...각각의 철학과 구체적 방안은?
실제로 1차 긴급재난지원금에 대한 긍정적 효과가 나타나면서 정치권에서는 여러 형태의 기본소득 방안이 경쟁적으로 나타나고 있다.
먼저 여당에선 이미 청년배당과 같은 기본소득형 정책을 실험하고 있는 이재명 경기도지사가 논의를 주도하고 있다. 소수에게 집중돼 있는 토지에 대해 보유세를 걷어 15조 원의 재원을 마련하면 모든 국민에게 매년 30만 원의 기본소득 지급이 가능하다는 구상이다. 불로소득에 대한 과세는 물론 국민의 90%는 자신이 내는 세금보다 돌려받는 돈이 많아져 소득 양극화 개선에도 기여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 이재명 경기도지사는 토지보유세 15조 원을 신설해 매년 기본소득 30만 원을 지급하자고 주장한다.
소수정당인 시대전환 조정훈 의원은 최근 기본소득 법안을 발의했다. 2022년부터 전 국민에게 매달 30만 원씩 지급하는 방안을 담았다. 이를 위해 약 187조 원이 필요하다. 현재 고소득자일수록 세금에 대한 감면 혜택이 많은 구조인데 이걸 없애서 83조 원을 마련하고 여기에 지방정부의 세계잉여금에서 69조 원, 아동수당과 기초노인연금 등 현금성 복지 재원 22조 원 등을 더해 별도의 증세없이 재원 마련이 가능하다고 밝히고 있다.
▲ 조정훈 시대전환 의원은 전 국민에 매달 30만 원 지급을 내용으로 하는 기본소득 법안을 발의했다.
기본소득당 용혜인 의원은 더 큰 그림을 그리고 있다. 전 국민에게 매달 60만 원을 지급하는 게 목표다. 올해 기준 1인 가구의 생계급여가 52만여 원인 만큼 60만 원은 되어야 기존 복지제도의 현금 급여들을 대체할 수 있다는 판단에서다. 이를 위해선 해마다 360조 원 넘는 재원이 필요해 과감한 증세가 필요하다. 먼저 근로소득세와 종합소득세, 법인세 등 모든 개인과 법인의 소득세에서 15%를 시민재분배 기여금으로 회수하고, 이재명 지사의 주장처럼 토지보유세와 기후위기에 대응하는 차원의 탄소세를 신설해 재원을 마련하겠다는 구상이다.
▲ 용혜인 기본소득당 의원은 전 국민 매달 60만 원 지급안을 제안한다.
여기에 전통적으로 선별적 복지를 주장해 왔던 보수 야당도 기본소득을 정강정책에 포함시키며 논의에 가세했다.
국민의힘 경제혁신위원회가 지난달 발표한 기본소득 정책 방안의 뼈대는, 중위소득의 50%인 88만 원을 기준선으로 잡고, 이보다 소득이 적은 계층에게 부족한 금액을 정부가 채워주는 방식이다. 대략 21조 원 정도 필요한데, 기존 저소득층에게 지원하던 기초생활보장급여와 기초연금, 근로장려금, 자녀장려금 등을 모두 통폐합하면 세금을 더 걷지 않고도 시행할 수 있다는 계산이다.
▲ 국민의힘의 기본소득 정책은 중위소득의 50%인 88만 원보다 소득이 적은 계층에 모자란 금액을 지급하는 것이다.
하지만 국민의힘 방안은 기본소득의 핵심 원칙을 지키지 못한 것이라는 비판도 있다. 용혜인 의원은 “기본소득은 조건 없는 지급이 핵심 원칙 중 하나인데 국민의힘 방안은 여전히 개인의 소득 수준을 선별해서 지급하겠다는 것으로 사실상 기본소득이라고 부를 수 없다”고 말했다.
국민의힘 기본소득안을 제외한 다른 방안들에는 필요한 재원을 마련하는 원칙과 철학에서 공통점이 존재한다. 더 부유한 사람과 기업 혹은 공공재에 대해 더 많은 책임을 가진 사람과 기업에게 더 많은 세금을 거둬 모든 사람들에게 똑같이 나눠주자는 것이다. 장기적으로는 각 개인의 데이터를 모아 수익을 창출한 IT기업으로부터 데이터세를, 인간의 일자리를 대체한 로봇으로 돈을 번 회사로부터 로봇세를 거둬 기본소득 재원으로 쓸 필요도 있다는 주장이다.
전통적 복지국가론, “사각지대 보완이 우선”...관건은 ‘증세’의 현실화
이 같은 기본소득론의 대척점에는 전통적 복지국가론, 특히 경제적 취약 계층을 집중 지원하는 복지시스템을 옹호하는 이들이 있다. 이들도 기본소득론의 기본 취지에는 공감한다. 전통적 복지국가 프로그램은 더 필요한 사람에 더 충분히 지원할 수 있다는 강점이 있지만 21세기 들어 비정규직과 단기 근로, 플랫폼 노동 등으로 고용 형태가 다원화되면서 지원 대상을 엄밀하게 선별해 내지 못해 광범위한 ‘사각지대’의 문제를 낳게 됐는데, 기본소득은 사각지대 딜레마를 원천적으로 해소할 수 있는 강점을 지니고 있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본소득은 막대한 재원을 투입하는데 비해 효율성이 떨어지는 방안이라는 것이 복지국가론 측의 관점이다. 따라서 현재로서는 기존 복지시스템의 사각지대를 줄여나가는 노력이 우선되어야 한다는 입장이다. 예컨대 전국민 고용보험의 경우, 과거엔 고용 데이터에만 의존하다 보니 비정규직과 자영업자, 플랫폼 노동자 등을 대상으로 삼기 어려웠지만, 국세청 전산망을 활용해 소득 데이터를 기준으로 하면 빠짐없이 가입시킬 수 있다는 식이다.
▲ 우리나라의 GDP 대비 사회복지 지출 비중은 OECD 평균의 절반 수준에 머물고 있다.
그런데 복지 사각지대를 메워나가는 작업에도 추가 재정이 필요하다. 현재 우리나라의 GDP 대비 복지재정 지출 규모는 OECD 평균(20.1%)의 절반 수준(11.1%)에 불과해 평균 수준까지만 맞추려 해도 상당한 규모의 증세가 필요한 실정이다. 결국 ‘증세의 불가피성’이라는 지점에서 복지국가론과 기본소득론의 고민은 일치하고 있다. 오건호 내가만드는복지국가 운영위원장은 “기본소득론이 제안하는 강력한 토지보유세, 데이터세, 탄소세 등은 국민적인 증세 논의를 촉발시키는 마중물 역할을 할 수 있다는 점에서 긍정적이라고 본다”고 말했다.
그러나 국민들은 자신의 세금이 의미 있게 사용된다는 확신이 서지 않으면 증세에 반대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결국 기본소득론과 복지국가론이 각각의 정책을 다듬어 국민들의 지지를 얻어낼 수 있을 때만 그에 상응하는 수준의 증세도 가능하다는 뜻이다. 이상민 나라살림연구소 수석연구위원은 “역사적으로 모든 증세 시도가 저항에 부딪쳐 좌초됐던 건 아니다. 예컨대 아동수당의 경우 국민들이 필요성에 공감했기 때문에 이 정책의 실현을 위해 자신의 세금이 더 나가는 것에 동의한 것으로 봐야 한다. 기본소득론과 복지국가론 모두 건전한 정책 경쟁을 통해 증세 문제에 정면으로 도전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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