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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런던...유대인을 추방하고 다시 불러들인 이유

천사요정 2018. 2. 19. 16:22

유대인들에게 '지구의 끝' 이였던 중세 런던

글 | 미셸라이브 회계사/작가




유대인들에게 '지구의 ' 이였던 중세기 런던
 
유대인.  서러운 이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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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란색 펠트 천의 유대인 배지]
유대인
 박해는 히틀러의 나치때 시작된 것이 아닙니다. 중세기 런던을 유대인들은 ‘지구의 끝’이라 표현했고, 영국은 유럽에서 가장 처음으로 유대인들에게 노란색 펠트 천으로 만든 별표 모양의 배지를 옷에 실로 꿰매어 달게  나라였습니다. 후에 나치스에 의해 부활되었던  수치의 배지는 당시 영국의 반유대감정을 적나라하게 드러냅니다.
 
1066 ‘정복왕 윌리엄’ 때부터 프랑스의 노르망디와 루앙 지방에서 건너온 유대인들은 오늘날의뱅크  (Bank station)  얼드게이트 (Aldgate station) 근처의 올드 쥬리 (Old Jewry), 칩사이드 (Cheapside)  쥬리 스트릿(Jewry St)  정착해 살고 있었습니다 (거리의 이름들에서 유대인들이 커뮤니티를 형성했던 곳들임을   있습니다). 런던뿐 아니라, 유대인들은 요크 (York), 링컨 (Lincoln), 캔터버리 (Canterbury), 옥스포드 (Oxford), 노리치 (Norwich), 윈체스터 (Winchester), 윈저 (Windsor)  영국의 여러 지역에 정착했고, 프랑스에서 영토를 확장했던 헨리 2세 때 영국으로 이주하는 유대인들의 수가 증가했습니다.
 
중세기 런던의 금융시장을 쥐고 있었던 유대인들
 
가톨릭교는 높은 이자를 받고 돈을 빌려주는 고리대금업 (usury)  엄격하게 금지하였는데, 유대인을 제외한 전국민이 카톨릭을 믿고 있었던 이때, 이것은 유대인만이 채울 있는 빈자리였습니다.  빈자리를 메꾸며 유대인들은 많은 돈을   있었습니다. 
런던의 금융시장을 쥐고 있던 유대인들의 저력은 엑스체커 롤스 (exchequer rolls)’ 하는 둘둘 말은  양피지에 기록된 당시 왕실의 세금과 빚에 대한 문서를 보면   있습니다. 중세기의 수많은 전쟁들 (백년 전쟁, 장미 전쟁, 십자군 원정 )  필요한 자금을 충당하기 위해 당시 유대인들이 냈던 세금을 보면 인구의 1%  안되었던 그들이 영국 전체 재산의 ¼ 이상을 가지고 있었던 사실 드러납니다.
 
봉건제도 아래, 농민들은 그들의 영주에게 속해 있었는데, 농업에 종사하지 않았던 유대인들에게는 다른 법이 적용되었습니다. 이들은 영주에 속하지 않은 왕의 직속이였습니다. 왕의 직속,  왕의 ‘소유물’ 이란 것은,  영주에 매이지 않는다는 장점이 있었지만, 왕의 변덕과 횡포가 중간에서 신하들이나 의회에 의해 걸러지지 않고 그대로 내려온다는 단점이 있었습니다. 예를 들면, ‘마그나 카르타’에 의해 세금의 징세는 의회의 승인을거쳐야 했는데, 유대인들에게는 이것이 적용되지 않아, 왕은 유대인들로부터는 기분 내킬 때마다 필요한만큼 세금을 거둘  있었습니다.
 
세금도 모자라, 왕들은 유대인들에게 많은 돈을 빌렸고, 유대인들과의 돈거래를 관리하는 부서가 따로 생길 정도로 이들은 왕실에게 없어서는 안될 존재였습니다. 이름있는 유대인 재정가, ‘링컨의 아론 (Aaron of Lincoln)’  왕보다도  많은 재산을 가지고 있었고, 아론이 죽고 그의 재산이 왕에게로 갔을 때, 뜻밖의 횡재를  왕이 유대인들의 재력이 실제로 어느 정도인지 알게되어  후로  많은 돈을 착출하려 했다고 합니다.
1194, ‘사자심장왕 리차드(Richard the Lionheart)’가 신성로마제국 황제의 포로로 잡혀 있었을때 요구된 몸값을 리차드의 어머니, 엘레오노르가 세금을 걷어 마련했던 것을기억하시나요? 이때 가장  기여를  사람들도 유대인들이였습니다.
 
반유대감정  약아빠진 고리대금업자들, 예수님을 죽인 악마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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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대인 재정가들의 성공에 대한 시기는 반유대감정 (anti-semitism)  시초가 되었고, 십자군 원정은 유대인을 향한 증오를  커지게 했습니다.
 
 ‘약아빠진 고리대금업자, 예수님을 죽인 악마 유대인들은 신에게 바치는 의식을 위해 아이들을 서슴치 않고 살인하며, 유월절에 아이들을 죽여 피로 무교병 (유대인들이 전통적으로 유월절에 먹는 비스킷같은 )  만든다
 
유대인을 음해하는 소문이 퍼졌고, 여기저기서 십자군 군인들에 의한 유대인 학살이 일어났으며, 유대인 혐오를 테마로  많은 그림이 그려지고글이 쓰여졌습니다. ‘엑스체커 롤’ 에도 악마가 두명의 유대인 남자의 코를 꼬집고 있는 그림이 그려져 있고, 방랑하는 유대인 (the Wandering Jew)  전설은 세계적으로 유명합니다.
 예수님이 십자가를 짊어지고 골고다 언덕으로 끌려가시는 도중, 극도의 피곤으로 쓰러지실  같은 몸을 이끌고 어느 처막에서 잠시 쉬어가려 하셨을때,  한모금은 커녕 심한 욕설과 돌을 던지며 예수님을 쫓아버렸던 유대인 처막 주인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은그에게 ‘내가  세상에 다시 나타날때까지 방랑하리라’ 라는 한마디를 남기고 떠나셨고, 이후로 아르페르스라는 이름의  죽지 않는 처막 주인은 눈에 보이지 않는 누군가의 힘에 쫓겨 최후의 심판 날까지 한시의 쉼도 없이 끊임없이 유령처럼 세상을 방랑하고 있다고 합니다.
오랫동안 조국없이 떠도는 유대민족의 상징이 되어 ‘영원한 유대인’ 이라고 불리기도 하는 아르페르스는 괴테와 외젠쉬 등 많은 작가들에게 영감을 주었고, 1602년에는 네덜란드에서 실제로 아르페르스를 만났다는 사람이 나타나, 다시 세계적인 이슈가 되었습니다.
           
서민들만 유대인을 증오했던 것이 아니고, 유대인들에게 빌린 돈을 갚지 않으려는 왕들의 횡포도 이루 말할  없었습니다.  예로, 1130  유대인 의사가 병든 사람을 고치지 못하자, ‘유대인이 사람을 죽였다’ 라는 누명을 씌워 2,000 파운드를 벌금으로 내게했는데,  액수는 “우연의 일치”  왕이 유대인 재정가들에게 지고 있던 빚과 똑같은 금액이였습니다.
 
억지라 할지라도, 왕이 요구하는 돈을 내지 않는 유대인은 살아남기 힘들었고, 1177년까지 유대인을 묻을  있는 묘지는 런던의 크리플게이트 (Cripplegate) 에만 있어서 죽은 사람을 사망후 24시간 안에 묻어야 했던 유대인들은 교통이 발달하지 않았던 당시에, 수레에 시신을 싣고 몇백 킬로미터가 되는 길을 걸어야 했습니다.
 
유대인 학살에 우울했던 '사자심장왕 리차드'  대관식
 
1189, ‘사자심장왕 리차드’  대관식은 우울했습니다. 새로운 왕에게 경배를 표하러찾아온 유대인 고위인사들을, 경비원들이 들여보내기는커녕, 문밖에서 야유하며 모욕을주고, 옷을 벗기고 채찍으로 때렸습니다. 이에 모여있던 중들이 선동되어 주위에 있던유대인들에게 돌을 던지고, 때리고 짓밟아 죽이는 일이 벌어졌기 때문이였습니다.
 왕이 유대인들을 죽이라고 명령했다는 거짓 소문이 돌아, 폭군들은 쥬리 (Jewry)  있는 유대인들의 집에 불을 지르고, 유대인 가족들을 산채로 불속으로 던졌고, 이때 죽은유대인들중에는 프랑스에서 런던을 방문하고 있던 저명한 랍비 (유대교의 율법학자), ‘올린스의 제이콥 (Jacob of Orleans)’  있었습니다. 요크에서   유대인 성직자는 목숨을 건지고 싶으면  자리에서 카톨릭교로 개종하라는 압박을 받아 그렇게 했지만,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부상으로 죽었고, 지방으로 퍼져나간 폭동에 요크에 남아있던 그의 부인과 아이들도 죽음을 면치못했습니다.
 
‘사자심장왕 리차드’는 폭동 주도자들을 처형하고, 강제로 기독교의 세례를 당한 유대인들이 다시 유대교로 돌아가는 것을 허락했으며, 유대인들을  가만히 내버려 두라는 공문도 내렸지만, 이후에도 유대인의 학대는 계속되었습니다.
경기가 좋을때는 유대인이던 누구던  하든지 상관없었지만, 상황이 조금만 안좋아져도, 유대인들을 비롯한 이방인들이 폭동의 타겟이 되었습니다.
‘흑사병’이 창궐할 때 원인을 찾지 못했던 사람들이 유대인들이 우물에 독약을 넣었다며그들을 학살했던 것을 우리는 보았습니다.
 
유대인은 안되고, 이탈리아인들이 하는 고리대금업은괜찮은가요?
 
12세기 중반부터 이탈리아의 롬바르드 (Lombard, 한때 이탈리아의 북부를 정복했던 게르만계의 사람들) 인들이 런던으로 건너와 은행업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유대인들은 얄밉지만, 파스타 먹고 와인 마시는 낭만적인 이탈리아인들이 하는 고리대금업은 괜찮아, 이때부터 유대인들의 필요성이 줄어들었습니다. 유대인 학대에 대한 왕의 보호도 줄어들어, 그들의 삶은 더욱더 힘들어지게 되었습니다.
 
유대인들의 예배당, 시나고그 (synagogue)  파괴되고, 700명이상의 유대인들이 학살되었고, 탈무드 (유대교의 율법, 전통, 민간전승 등을 총망라한 유대인들의 정신적, 문화적 유산)  모든 사본이 불태워졌으며, 유대인들의 집에서 띄어온 돌로 성벽의 러드게이트와 얼드게이트 성문이 보강되었습니다. 금과  동전의 가장자리를 떼어 녹여 팔았다는 증명되지 않은 죄로 수백명의 유대인이 교수형에 처해졌고, 주로 유대인들에게 빚을지고 있던 사람들이 주동했던 폭동때 많은 빚문서들이 불태워졌습니다.
 
1275, 에드워드 1세때 공포된 유대인 법령 (Statute of Jewry)’  고리대금업을 금지하고 유대인들에게 장인, 상인, 농부, 군인등으로 직종을 바꾸기를 강요했습니다. 하지만, 상공업의 독점권을 쥐고 있던 길드 (guild) 들이 유대인들을 받아들일리 없었고, 영주들도 이들을 고용하지 않아, 유대인들은 결국 불법 고리대금업이나 의학으로 돌아갈 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고리대금업은 못하게 하지, 의사하면 사람죽인다 하지, 농사도못짓고 장인도 못하게 하지, 이래저래 곤란하고 서러웠던 그들입니다.
 
쫓겨나는 유대인
 
결국 1290, ‘유대인들은 손에   있는 것들만 가지고 나라를 떠나라’  추방령이내려졌고, 16,000 여명 유대인들의 대이동이 일어났습니다.
 
가난한 유대인들은 그들의 두루마리 법전을 들고 무작정 해안을 향해 걸었고, 돈있는 유대인들은 배를 타고 나가려다가 강어귀에서 익사당했습니다. 유럽대륙으로 건너가는 것에 성공한 유대인들은 프랑스 해안에서 거지가 되거나 프랑스, 이탈리아, 스페인, 폴란드의 유대인 공동체들에게 흡수되었고, 런던에 남아있는 유대인들의 소유물은  값에 팔리고, 유대인들에게 졌던 빚들은 모두 탕감되었습니다.
 
 나라 전체에서의 유대인 추방은 이때 영국에서가 처음이였으며, 이것이  프랑스, 오스트리아, 스페인, 독일, 포르투갈, 러시아 등 80 여개 국가에서 있었던 유대인 추방의전례가 되었음은 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왕실과 도시의 물주 역할은 이탈리아의 롬바르드인들에 의해 대체되었고, 그들이 모여있던 롬바르드 스트릿 (Lombard St)  오늘날런던의 금융의 중심지가 되어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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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ld Jewry 에 유대인들의 ‘시나고그’가 있었던 자리를 기념하는 플라크] [Lombard St 사인]

고리대금업을 했던 유대인들도 문제지만, 고리대금업이든 무엇이든 수요가 없으면 공급이 있을수 없고, 왕까지 이용했던 서비스인데, 본인들이 만들어준 그들의 부에 질투가 참을  없어했던 사람들입니다.
 
유대인들의 컴백홈
 
쫓겨난 유대인들은 350여년이 지난 올리버 크롬웰의 공화국때가 되서야 다시 돌아올 있었습니다.
 시간이 흘러 19세기에는 상황이 바뀌어, 영국이 세계에서 핍박받는 유대인들의 피난처가 되었고, 러시아, 폴란드, 루마니아 등지의 동유럽에서의 박해를 피해 새로운 삶을 찾아 영국에 들어온 유대인들은 배에서 내린 곳과 가까운 런던 이스트 엔드 (East End) 정착하여 새로운 공동사회를 이루었습니다.  이때 이곳에서 많은 유명한 유대인 상인, 배우, 미술가와 음악가들이 나왔고, 지금 영국에 살고 있는 유대인들은 이때의 ‘이스트 엔드’ 이민자들의 후손이라고   있습니다.
 
 1930/40년대의 나치스의  박해 때, 런던에 도착한 유대인들은 가난한 ‘이스트 엔드’를떠나, 런던 북부의 골더스 그린 (Golders Green)  북동쪽의 핵니 (Hackney) 지역으로이주했습니다. 
인간의 마음 속에는 무의식이 존재하며, 최면술과 대화로 내면에 억압되어 있는 마음의상처를 치료할  있다  주장했던 심리학자, 지그문트 프로이드 (Sigmund Freud) 1939 오스트리아에서 망명해  유대인  한명이였습니다 (핀칠리 로드  (Finchley Road Station) 근처에 그의 박물관이 있습니다). 오늘날에도 유대인들은 남아프리카공화국, 인도, 이라크 등지에서 영국으로 건너오고 있고, 현재 런던에는 20 만명이 넘는 유대인들이 공동체를 이루어 살고 있습니다.
 
잘나면 '리더'  되거나 ''  된다.
 
시대과 나라를 불문하고 핍박받는 유대인들. 왜일까요?
 
그들은 운이 없는 결백한 희생자들인가요, 아니면 ‘한 사람이 너를 당나귀라 부르면 무시하고,  사람이 너를 당나귀라 부르면 안장을 사라’  속담이 있듯이, 이렇게 여러 사람들이 계속하여 싫어할때는 이유가 있는 것일까요?
 
기원 전부터 나라를 잃고 떠돌이 신세가 되어 여기저기 다른 나라에 정착했던 유대인들은 항상 그곳의 산업과 상업을 장악하여  나라 사람들에게 두려움을 주었고, 부정직한비즈니스를 하며 노동력을 착취한다는 비난을 받았습니다. 유대인들은 고리대금업뿐 아니라 조직범죄, 노예무역, 공산주의, 포르노 산업 등과도 연결지어지고, 이들의 ‘하나님의 선택받은 민족’ 이라는 우월감은 사람들에게 거부감을 줍니다.
금융과 재정뿐 아니라 유대인들은 과학, 예술, 정치에도 뛰어난 두각을 나타내어 (아인슈타인도 유대인이였습니다), 유대인들이 받은 노벨상의 수는 그들의 인구수에 비례하지 않게 많으며, 세계인구의 1% 정도 밖에 안되는 그들이 세상의 부와 언론과 학문을 좌우하니, 시기를 받을  밖에 없는 것일까요?
 
 잘난 사람에게는 두가지 결과가 있는 것 같습니다  존중받아 ‘리더’가 되거나 증오받아‘따’가 됩니다.
 
하지만, 유대인이라고  부자인 것은 아닙니다. 사람들은 유대인들이 그들만의 공동체를 이루면 거만하다고 싫어하고,  사회에 융화되려고 하면, 꺼리며 받아주지 않습니다... they just cant win.
 
로마인들도 유대인들과 같이 예수님을 죽음으로 몰고갔고, 예수님께서도 그들 (유대인)  용서하라, 본인들이 무엇을 하는지 모르니라’  하셨지만, 기독교인들에게  용서는 힘든 일입니다. 천재적이거나 성공하는 사람들은 유대인 외에도 많고, 나쁜 일들도유대인만 하는 것이 아니며, 인간의 잔인성과 광기가 어디까지   있는지 보여준 나치스의 유대인 학살을 정당화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인간은 약자에게 강해지므로, 본국없이 떠돌아 다니는 유대인들은 희생양이 되기 쉽고, 이상하게도 유대인들은 개척적인 자본가이자 세계를 지배하는 뛰어난 인종이지만 가까이 하거나 사회에 끼어줄  없는 열등한 자들입니다.
 
기원 전 1200년, 모세에게 인도되어 이집트에서의 노예생활을 벗어난 유대인들은 40년의 광야생활 , 약속받은 가나안 땅에 들어가 하나님의 보살핌 아래 다윗왕과 솔로몬 왕때 전성기를 누렸습니다. 하지만, BC 586년 바빌론의 침략에 솔로몬의 성전이 무너지면서 전세계로 분산되어 떠돌기 시작한 그들에게 나라가 있었더라면 상황이 달랐을텐데요...그래서 지금 그들은 그렇게 나라를 되찾으려 하는 것일까요, 받은 것을 그대로 돌려주면서라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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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나면 리더가 되거나, 따가 된다고 했는데, 리더가 되는 것은 지식보다 태도에 달린 일일  있습니다. 테드 베이커에서 쇼핑하다가,  사실을 다시한번 느꼈죠. 다음번에 말씀드릴께요 
<본 칼럼은 칼럼니스트 개인의 견해임을 밝힙니다.>

http://pub.chosun.com/client/news/viw.asp?cate=C03&mcate=m1005&nNewsNumb=20140615070&nidx=995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