낮은 항우울제 처방률이 문제⋯모든 병원에서 감기처럼 우울증 치료해야
1980~90년대까지만 해도 한국의 자살률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중 낮은 편에 속했다. 그런데 국내 자살률은 2000년 이후 급격히 증가했고, 지난 17년 동안 OECD 국가 중 1위를 유지하고 있다. 특히 2001년부터 2011년까지 약 10년 동안 국내 자살률은 100% 이상 증가했다. 통계청에 따르면 국내 자살률은 2001년 인구 10만 명당 14.4명에서 2011년 31.7명으로 늘어났다. 실제 자살자 수는 같은 기간 6911명에서 1만5906명으로 증가했다.
지금도 국내 자살률은 다른 나라에 비해 매우 높다. OECD의 2020년 발표 자료에 따르면, 한국의 자살률은 인구 10만 명당 24.6명으로 OECD 평균 11.3명의 2배 이상이다. 참고로 일본은 14.9명, 미국은 14.5명, 스웨덴은 11.4명, 덴마크는 9.5명, 터키는 2.6명 등이다. 한국에서는 덴마크보다 3배가 많은 36명이 매일 스스로 생을 마감하는 셈이다.
더 심각한 문제는 자라나는 우리 아이들의 자살이다. 10대(10~19세)의 사망 원인 1위가 자살이다. 교통사고로 인한 사망보다 자살하는 10대가 3배나 많다. 자살은 20대와 30대의 사망 원인 1위이기도 하다. 40·50대 사망 원인 1위는 악성신생물(암 등 정상보다 빠른 속도로 자라나는 비정상적인 조직)이고, 2위가 자살이다.
이처럼 국내 자살률이 2000년대 들어서면서 급격히 증가하는 동안 외국은 대부분 자살률이 감소했다. 도대체 한국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가 국제 의료계의 관심사로 떠올랐다. 홍승봉 삼성서울병원 신경과 교수는 “대다수 국가의 자살률은 떨어졌고, 자살률이 상승하는 몇몇 국가가 있었지만 우리처럼 10년 만에 100% 상승한 사례는 없었다. OECD는 무슨 이유로 한국의 자살률이 급등했는지를 파악해 2가지 결론에 도달했다. 우울증 치료율이 다른 국가보다 현저히 낮은 점과 심리치료가 거의 없는 점이다. 감기처럼 우울증을 아무 병·의원에서나 조기에 치료받을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한국은 세계에서 우울증 치료를 가장 받기 어려운 나라”라고 말했다.
국내 우울증 치료율은 미국의 66.3%에 비하면 6분의 1 수준인 11.2%다. 그나마 가벼운 우울증은 제외하고 중등도 이상(중등도·심함·매우 심함)에 대한 치료율만 따진 것이다. 중등도 이상은 일상생활에 지장을 받을 정도로 치료가 꼭 필요한 우울증을 말한다. 매우 심한 우울증 치료율은 7.6%밖에 되지 않는다. 총기를 소유할 수 있는 미국보다 우리나라의 자살률이 훨씬 높은 이유다.
또 국내 자살률이 상승한 시기는 출생률이 하락한 시기와 일치한다. 국내 출생률은 1995년부터 낮아지기 시작했는데 그즈음 자살률도 상승세를 탔다. 홍승봉 교수는 “과거에도 돈이 없어 결혼을 포기하거나 자식을 적게 낳기는 했으나, 지금처럼 출산율이 크게 떨어지는 정도는 아니었다. 따라서 단순히 아이를 낳아 키울 경제력이 부족하기 때문만이 아니라, 우울증 치료를 적기에 하지 못한 탓도 있다고 본다. 성인 인구 3명 중 1명이 우울증이면 부부 모두 또는 한쪽이 우울증 환자일 가능성이 큰데, 어떻게 출산을 생각하고 실천하겠는가. 한국의 경제력이 세계 10위권이라고 하지만 우울증 치료 성적은 낙제 수준이다. 경제력이 145위인 르완다도 우리보다 우울증 치료 성적이 좋다”고 지적했다.
항우울제 ‘60일 처방 제한’이 문제
국내 우울증 치료율이 이처럼 낮은 이유는 무엇일까. 한국의 우울증 치료 수준이 외국보다 낮은 것이 아니라 항우울제(SSRI·선택적 세로토닌 재흡수 억제제) 처방이 매우 적기 때문이다. 일정 기간 항우울제를 복용하면 우울증 대부분은 치료된다. 그러나 정부는 항우울제 처방에 제동을 걸었다.
국내 자살률이 급격히 오르기 시작한 2002년 정부는 비(非)정신과(정신건강의학과 이외의 진료과) 의사가 항우울제를 처방할 수 있는 기간을 60일(2개월)로 제한했다. 표면적인 이유는 보험 재정 부담 때문이었다. 정신건강의학과 의사는 항우울제를 자유롭게 처방하지만 나머지 진료과 의사는 이 약을 처방하되 60일까지만 처방할 수 있게 됐다. 미국과 유럽 등 세계 대다수 나라에서는 모든 의사가 항우울제를 기간 제한 없이 처방할 수 있다. 이 규정 때문에 한국의 항우울제 사용량은 2020년 현재까지 OECD 국가 중 꼴찌에서 두 번째로, 최하위권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홍승봉 교수는 “정부가 당시 두 차례 회의만으로 비정신과 의사가 항우울제를 처방할 수 있는 기간을 60일로 제한했다. SSRI 항우울제가 도입된 지 얼마 되지 않아 과잉 처방도 없고 의사가 판단하지 못할 부작용도 없는데 말이다. 항우울제를 60일만 복용해서는 우울증을 치료하기 어렵다”고 말했다.
우울증은 6개월에서 1년 이상 치료가 필요한 질환이다. 그러나 항우울제 ‘60일 처방 제한’ 규정 때문에 우울증 환자는 동네 내과나 가정의학과 등 일반 진료과 의원에서 우울증 치료를 제대로 받을 수 없게 됐다. 항우울제 치료를 2개월간 받은 후에는 정신건강의학과로 가서 다시 치료를 시작할 수밖에 없다. 일부 환자는 정신건강의학과에 대한 편견 등으로 임의로 치료를 중단한다. 홍승봉 교수는 “SSRI 항우울제 복용을 갑자기 중단하면 우울증이 더 심해지고 자살 위험도 커진다. 그래서 60일 처방 후 SSRI 항우울제 사용을 중단하라는 규정은 어느 의학 교과서나 학술지에도 없다. 또 우울증은 재발하기 때문에 SSRI 항우울제를 2개월 복용하고 증상이 호전된 것 같아도 6개월에서 1년 이상 지속적으로 사용해야 한다. 이 약을 1년 미만으로 사용할 때 우울증 재발률은 약 50%지만 1년 이상 복용하면 재발률이 10%로 떨어진다. 우울증은 재발할수록 치료가 어려워 약을 끊지 못한다. 우울증이 3차례 이상 재발하면 평생 약을 먹어야 한다”고 설명했다.
4%의 의사가 항우울제의 80% 처방
‘60일 처방 제한’ 규정 때문에 2002년 이후 항우울제 처방은 오롯이 정신건강의학과 의사가 떠맡아왔다. 2021년 1~6월 보건복지부 보험약제과 자료를 보면, 정신건강의학과 의사가 처방하는 항우울제 사용량이 전체의 80%를 차지한다. 전체 의사 중 정신건강의학과 의사는 약 4%를 차지한다. 나머지 96%의 비정신과 의사는 항우울제 ‘60일 처방 제한’ 규정에 묶여 우울증을 적극적으로 치료하지 못한다.
홍승봉 교수는 “국내 정신건강의학과 의사가 한 해 진료하는 환자 수가 약 250만 명이다. 여기에는 조울증·조현병·알코올 중독·공황장애 등 수많은 정신질환 환자가 있고, 그중 약 50만 명만 우울증 환자다. 치료가 반드시 필요한 우울증 환자를 최소로 잡아 500만 명이라고 할 때 450만 명은 제대로 치료받지 못하는 셈이다. 만일 96%의 비정신과 의사가 항우울제를 자유롭게 처방하면 우울증 환자 대부분을 치료할 수 있다. 정신건강의학과 의사 수보다 내과 의사는 15배, 가정의학과 의사는 2배 많다. 이들이 우울증을 치료하면 국내 자살률은 현저히 떨어질 것이다. 정신건강의학과는 일반 진료과에서 치료할 수 없는 심한 우울증을 치료하면 된다”고 지적했다.
이와 같은 의료계의 의견으로 최근 ‘60일 처방 제한’ 규정에 변화가 생겼다. 건강보험심사평가원은 2021년 11월 비정신과 의사가 항우울제 처방을 60일씩 반복할 수 있도록 했다. 사실상 항우울제 60일 처방 제한을 푼 셈이다. 보건복지부의 최종 결정만 남은 상황이다. 그러나 보건복지부가 공론화 등을 이유로 최종 결정을 차일피일 미룬다는 것이 의료계의 지적이다.
동네 병·의원에서도 우울증 치료해야
이런 배경으로 인해 우리나라의 우울증 유병률은 세계 최고 수준이다. OECD 자료에 따르면, 한국의 우울감·우울증 유병률은 36.8%로, 우울증 유병률이 높다는 스웨덴(30%), 호주(27.6%), 멕시코(27.6%), 미국(23.5%)을 제치고 1위다.
국내 고혈압 환자는 약 1200만 명, 당뇨병 환자는 약 500만 명이며 우울증 환자는 1000만 명을 헤아린다. 우울증 환자 1000만 명 중 20세 이상 성인은 860만 명이고 10~19세 청소년이 117만 명이다. 이 정도면 고혈압·우울증·당뇨병은 3대 국민병이라고 할 만하다. 강재헌 강북삼성병원 가정의학과 교수는 “우울증은 고혈압이나 당뇨병과 유병률이 비슷한데도 정신건강의학과 외 다른 진료과에서는 우울증 치료에 제한이 있었다. 특히 우울증은 자살과 연결되므로 일차 의료기관에서부터 치료해야 한다. 고혈압이나 당뇨병을 내분비내과 외 모든 진료과에서 치료하는 것처럼 우울증도 모든 진료과에서 치료할 수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동네 병·의원이 우울증을 치료하면 우울증 치료 접근성은 좋아진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않다. 어떤 의사든 모든 환자에게 고혈압과 당뇨병을 앓고 있는지를 묻지만 우울증이 있는지는 확인하지 않는다. 홍승봉 교수는 “우울증 환자는 대부분 신체 증상을 호소하므로 처음부터 정신건강의학과를 찾는 것이 아니라 비정신과를 방문한다. 실제로 우울증 환자가 처음 방문하는 진료과는 내과가 약 64%로 가장 많다는 일본 자료가 있다. 우리나라도 이와 비슷할 것으로 예상된다. 비정신과 의사들이 항우울제를 처방할 수 있게 돼 우울증 치료율은 높아질 것으로 예상된다. 미국의 ‘불안 및 우울증협회’ 연구 결과를 보면, 미국에서도 항우울제를 가장 많이 처방하는 진료과는 가정의학과, 소아·청소년과, 산부인과, 정신과 순”이라고 강조했다.
우울증·자살 예방에 의사 2만 명 참여
이에 따라 비정신과 의사들이 국내 우울증 치료에 적극적으로 나서기로 했다. 신경과, 가정의학과, 산부인과, 마취통증의학과, 노인의학회 의사들이 주축이 돼 4월26일 대한우울자살예방학회를 설립했다. 이 학회의 최우선 목표는 현재 한국의 OECD 최저 우울증 치료 접근성(4%)을 50% 이상으로 높이는 것이다. 국내 정신건강의학과 의사 수는 3886명이다. 여기에 신경과(2000명), 가정의학과(7000명), 산부인과(5900명), 마취통증의학과(5000명), 대한노인의학회(1000명)가 우울증을 치료하면 국내 우울증 치료 접근성은 지금보다 6.4배 확대된다는 것이 학회의 추산이다. 내과(1만7000명)와 소아·청소년과까지 동참하면 우울증 치료 접근성은 12.4배로 불어난다.
초대 회장을 맡은 홍승봉 교수는 “정신건강의학과가 학회 창립에 참여하지 않아 아쉽지만 코로나19로 더욱 피폐해진 국민의 정신건강을 회복하고, 국민 생명을 지키기 위해 많은 다학제 의사가 행동에 나서기로 한 것은 매우 의미 있는 일이다. 국민이 어느 병·의원에서든 우울증을 조기에 치료받도록 하는 것은 의사의 책임이자 사명이다. 또 우울증 환자가 숨지 않고 자신의 상태를 주위에 알리고 도움을 받을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야 한다. 외롭거나 스트레스가 많거나 힘든 처지에 있는 주변 사람에게 혹시 자살 생각을 하고 있는지도 물어봐야 한다. 자살 생각을 물어보고 그들의 말을 들어주는 것이 자살 예방의 시작이다. 그래서 학회는 ‘대화합시다(let’s talk)’ 또는 ‘우울감, 자살 생각 물어보기’ 등과 같은 캠페인을 진행할 예정”이라고 말했다.
우울증 치료율을 높이면 국내 자살률은 낮아질 전망이다. 학회는 OECD 1위 자살률(10만 명당 24.6명)이 OECD 평균(11.3명) 수준으로 낮아질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이를 더 낮추기 위해서는 우울증 치료에 심리치료를 포함해야 한다. 강재헌 교수는 “아직 동네 병·의원의 항우울제 60일 처방 제한이 풀렸다는 사실을 많은 이가 잘 모른다. 이를 적극적으로 알려 많은 환자가 모든 병원에서 우울증을 치료받도록 해야 한다. 또 큰 병원에서 항우울제 치료와 함께 심리치료도 하는 것처럼 모든 병원에 우울증 환자를 위한 심리치료 프로그램이 도입돼야 한다”고 지적했다.
홍승봉 교수도 “항우울제 처방과 심리치료 프로그램을 병행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실제 심리치료 프로그램도 있다. 그런데 심리치료 대부분은 보험 적용을 받지 못해 유명무실하다. 앞으로 이 부분도 학회 차원에서 해결할 계획이다. 그렇게 되면 작은 병원이든 큰 병원이든 심리치료 상담이 가능한 체계를 갖추게 될 것이다. 그러면 국내 자살을 상당 부분 예방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https://www.sisajournal.com/news/articleView.html?idxno=238338
출처 : 시사저널(http://www.sisajourna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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