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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 후기]

천사요정 2022. 9. 3. 01:16

"국민 여러분 죄송합니다. 그래도 지금처럼 살 순 없지 않습니까."

 

작가 어슐러 르 귄의 단편 판타지 소설 '오멜라스를 떠나는 사람들'의 설정은 이렇다.

유토피아에 가까운 도시 오멜라스의 풍요와 행복에는 필수 조건이 있다. 오멜라스의 지하에 갇혀 있는 어린아이가 영원히 고통을 받아야 한다. 아이의 고통이 없으면 오멜라스는 망하고 만다. ⠀

 

아이를 구할 것인가, 도시를 지킬 것인가. 도덕적 딜레마다. 소설에서 도시인들은 자신들의 행복이 아이의 고통에 기반한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이후 누구는 아이의 희생을 정당화하고, 일부는 도시를 떠난다. 하지만 끝내 아이의 생각이 어떤지는 알 수 없다. 오멜라스의 지하에 갇힌 아이는 어떤 말을 할까. ⠀

 

이번 대우조선해양 취재를 하며 계속 '오멜라스를 떠나는 사람들'의 아이가 떠올랐다. 대우조선 하청노동자들이 참고 버텨야 우리 조선업이 나아질 수 있다는데, 마치 딜레마 같은 이 굴레 속에서 '가장 낮은 곳에 있는' 하청노동자들은 어떤 마음일 것인가. ⠀ 그들은 과연 "조선업의 앞날이고 뭐고 일단 월급부터 올려야 겠다"라는 생각일까. 오멜라스의 아이도 "나만 일단 살려줘"라고 할까. 그렇지 않다.

 

영화 <다크나이트>에서 상대편 배를 터뜨려야 자신이 살 수 있던 시민들은 그 단순한 사실 앞에서도 고민하고 또 고민했다. 하물며 조선업의 문제는 더 복잡하다. ⠀

"국민 여러분 죄송합니다. 그래도 지금처럼 살 순 없지 않습니까." 하청노동자들이 내걸었던 파업 문구다. ⠀

 

조선업이 오랜만에 호황기에 접어든 지금, 배를 빨리 많이 만들어야 한다는 건 명확하다. 노동자들은 이를 막고 파업과 농성에 들어간 거다. 그래서 그들은 '죄송하다.' 어서 배를 만들어 수출을 해야 지역과 국가 경제가 좋아질텐데 자신들이 그걸 막는 것에 미안하다. 하지만 언제까지 죽음을 담보로 일하고, 월 200만 원 남짓한 돈만 벌고, 퇴직금을 떼이며, 계속 버티고 참을 순 없다. 수주 호황인 지금이 아니면 또 언제 처우개선을 요구할 수 있을까. 그래서 파업에 나섰다. "국민 여러분 죄송합니다. 지금처럼 살 순 없지 않습니까." 이 짧은 문장에는 하청노동자 개인의 울분과 공동체 일원으로서 죄책감이 섞여 있다. 당장 인간다운 삶을 요구하면서도 그것에 사회적 책임감을 느끼는 노동자들의 태도 앞에 절로 부끄러워졌다. ⠀

 

반면, 하청노동자들이 행동에 나설 수밖에 없게 만든 자들은 아무런 미안함도 없었다. 그저 하청노동자가 참았어야 한다고 할 뿐이었다. 산업은행은 팔짱만 꼈고, 대우조선 홍보팀은 "조선업이 원래 그런 구조인데 어쩌겠느냐"고 말했다.

오멜라스의 아이에게 "참으라"고 할 수 있는 사람은 아이 자신뿐이다. 대우조선은 하청노동자들에게 참으라고 할 자격이 없지만, 부도덕에 거리낌이 없었다.

 

그런 의미에서 대우조선 경영진이 파업 이후 내놓은 대국민 사과문은 기만이다. ⠀ 과거 '오멜라스를 떠나는 사람들'을 읽으며 이런 생각을 했다. 제발 오멜라스가 망했으면 좋겠다고. 그런 세상은 없어져도 괜찮다고. 그건 지금도 마찬가지다. 이런 식으로 하청노동자를 착취하며 지속될 수밖에 없는 게 한국의 조선업의 필연성이라면, 난 망했으면 좋겠다. ⠀

 

하지만 우리 현실은 '오멜라스를 떠나는 사람들'처럼 이분법의 세계가 아니다. 하청노동자와 조선업, 둘 다 살릴 수 있는 방법이 분명 있을 것이다. 길이 없는 게 아니라, 길을 찾지 않는 무책임한 자들이 책임 있는 자리에 앉아 있을 뿐이다. 그들을 더 낱낱이 기사 앞에 세우지 못해 아쉽다.

 

◎ 대우조선해양 하청 노동자들을 취재한 홍주환 기자의 취재 후기입니다.

더 자세한 내용은 아래 링크를 참고하세요!

 

👉 <파업이 끝나고 난 뒤... '불공정'의 역습

> : https://newstapa.org/article/KunR7

👉 <200만 원 노동자에 470억 손배소...'대우조선 사태 주범은 산업은행'
> : https://newstapa.org/article/IApY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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