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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년 [뉴시스] 우병우 처가는 어떻게 거부(巨富)가 됐나…장인 이상달 누구?

천사요정 2017. 11. 23. 22:42

http://www.newsis.com/ar_detail/view.html/?ar_id=NISX20160808_0014273251


등록 2016-08-11 15:10:22  |  수정 2016-12-28 17:29: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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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대 건설 붐 당시 업계 뛰어들어 승승장구  경남 합천 출신…전두환 전 대통령과 동향 배경  경찰 고위직 일일이 챙겨…'발로 뛰는 로비스트'  작년 추모식에 전 헌법재판관, 법무차관, 병무청장 참석

【서울=뉴시스】임종명 기자 = 우병우 청와대 민정수석을 둘러싼 각종 의혹은 대개 우 수석 처가의 막대한 재산에서 촉발된 것이다.

 '우병우 사태'의 시발점이 된 넥슨과의 서울 강남 부동산 거래에서는 매매가액이 1300억원대에 이르는 처가 보유 건물이 등장해 세간을 놀라게 했다.


우 수석의 처가는 토지와 상가 건물 등 재산이 수천억원대에 달한다.

이 재산은 대부분 우 수석의 장인인 고(故) 이상달 전 정강중기 회장이 물려준 것이다.

 우 수석 사태가 여전히 현재진행형인 가운데 그의 장인이 어떻게 그렇게 엄청난 부를 축적해 유산으로 남겼는지에 대해서도 관심이 쏠리고 있다.

 이상달씨에 대한 공적 기록은 지난 1990년대 언론 보도와, 이씨가 오랫동안 몸담았던 대한건설기계협회의 회보 등을 통해 접할 수 있다.

 이에 따르면 이씨는 경남 합천 출신이다. 전두환 전(前) 대통령의 동향임을 내세워 1981년부터 제5공화국 내내 경찰 수뇌부의 후원자 역할을 하면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그는 1970년대 국내 건설 경기 붐이 일었을 즈음 업계에 뛰어들었다. 재일교포인 이씨의 형이 불도저를 사준 것이 계기가 됐다고 한다.

 이씨는 1969년 약수건설을 경영한 데 이어 서울 은평구에 토공전문업체인 삼강중장비를 설립함으로써 사업의 발판을 마련했다. 하지만 당시엔 이씨를 이끌어 줄 마땅한 후원자가 없는 상태였다.

 그러다 1980년 전두환 전 대통령이 등장하자 동향 출신 인사들을 통한 로비로 고액 건설사업을 따내기 시작한다. 건설토목공사에서 골프장 건설공사로 사업 방향을 튼 것도 이 무렵이라고 한다.

 이때부터 이씨는 현 경찰청의 전신인 치안본부 고위 간부들과 각별한 사이를 유지하며 경찰 인사에까지도 개입한 것으로 알려졌다.

 1993년 보도된 한 기사에는 "이씨는 골프사업장 관계로 역대 경찰청장과 막역한 사이로 지내고 있으며 경정급 이상이면 경찰에서는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발이 넓다"는 내용이 포함돼 있다. 당시 기흥컨트리클럽 운영사인 삼남개발의 공동대표이사였던 옥기진 전 치안감 발언이었다.

 또 이씨는 이른바 '장래성' 있는 인사들에게 수시로 접근해 친분 관계를 쌓은 뒤 요직에 앉으면 인사에 개입하거나 자신의 사업에 비호세력으로 이용해왔다는 후문이다.

 예컨대 퇴직한 고위직이 있으면 자신이 스폰서가 돼 부부 동반으로 유럽여행을 다녀오기도 했고 경찰 일이라면 투자를 아끼지 않았다는 것이다. '발로 뛰는 로비스트' 였던 셈이다.

 일각에서는 이씨가 경찰 고위 간부 출신이라서 경찰 관련 사업에 접근하기 쉬웠고 이를 토대로 재산을 축적했다고 말한다.

 하지만 뉴시스 취재결과 이러한 가설은 가능성이 희박한 것으로 파악됐다.

 우선 프로필을 살펴보면 이씨는 1939년 출생으로 1962년 경희대 법대를 졸업했다. 이후 1969년부터 약수건설을 운영했다.

 대학 졸업 후 경찰 조직에 입문했을 가능성도 있다. 방법은 두 가지다. 순경 공채거나 간부후보생으로 경위 입직한 경우다.

 졸업 후 약수건설 경영까지의 기간은 최대 7년이다. 졸업과 동시에 입직했다해도 순경으로 입문했을 경우 7년 만에 간부인 경위까지 승진하기 어려웠을 것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또 경위로 입직했다하더라도 7년 만에 고위 간부로 승진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며, 아무리 옛 시절이더라도 경찰 조직에 몸 담고 있으면서 건설사 운영을 병행하는 행위 역시 불가하다는 게 경찰 관계자들의 설명이다.

 잘 나가던 이씨에게도 큰 고비가 있었다. 그는 1993년 5월께부터 기흥골프장 운영권 양도비리 사건으로 경찰 조사를 받았다. 본래 해당 골프장의 운영권은 퇴직 경찰관들 조직인 대한민국재향경우회(경우회)가 가지고 있었는데, 이씨가 이를 양도받는 과정에서 전직 치안총수들에게 거액의 로비자금을 전달했다는 혐의였다. ==김영삼대통시절 전두환 쳤을때

  또 골프장 진입로 공사비용을 이중으로 계산해 총 112억원을 챙긴 혐의와, 경우회장의 도장을 도용해 약 200억원의 공사비를 300억원대로 속인 혐의도 받았다.

 이씨가 운영해오던 삼강중장비는 같은 해 6월8일 부도가 났다. 은행에 2650만원의 어음 결제를 하지 못했다는 이유다.

 수백억원을 가로챈 혐의를 받았던 이씨가 불과 2000만원대의 돈을 갚지 못해 회사를 부도처리한 것이다. 비리 관련 수사가 시작되고 난 직후의 일이라 미심쩍은 대목으로 꼽힌다.

 이후 검찰은 이씨에 대해 지병이 악화돼 수감생활을 하기 어렵다는 등의 이유로 불구속 기소했다. 이 부분도 이례적인 처분으로 당시 법조계 안팎에서 회자됐다. 당시 사건을 맡았던 부서는 서울지검 특수3부였으며 특수3부장은 정홍원 전 총리[박근혜정부]였던 것으로 파악됐다.

 업계에서 이씨에 대한 평가는 대체로 긍정적이었다. 평소 친화력이 뛰어났으며 대한건설기계협회(대건협) 회장을 내리 다섯 차례나 지낼 정도로 사람들을 잘 챙기고 우호적인 관계를 이어나갔다는 전언이다.

 이씨는 대건협이 출범한 1994년부터 초대 회장직을 맡았다. 대건협 회장의 임기는 3년인데 이씨는 1997년 제2대 선거에서도 회장으로 선출됐다.

 2000년부턴 제3대 회장으로 지냈다. 특히 2003년 제4대 회장 선거에서는 다른 출마자가 없어 참석 대의원 만장일치로 회장직에 뽑혔다. 이후 2006년 제5대 회장까지 지냈다.

 2007년 1월 협회 신년사를 보면 그는 "가능한 방법을 통해 사업자들의 부담을 덜고자 지난해 사업자들의 염원이던 공제조합을 설립키로 했다" "사업자들이 협회를 통해 뜻을 실현할 수 있도록 최대한 지원하는 방안을 마련해 나갈 것" "협회의 의지가 효과적으로 실현될 수 있도록 사업자들이 적극 참여해달라" 등의 발언을 했다.

 건설기계업자들을 위한 체계를 갖춰 혜택을 나누고 사업자들의 참여를 이끌어내는 능력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신년사에는 또 "악화된 여건을 개선코자 영업용 건설기계 등록을 제한하는 내용의 수급조절방안을 추진 중" "지난 연말 법제화될 것으로 예상됐으나 국회 일정 상 실현되지 못하고 올해 일정에 따라 법제화될 것"이라는 내용이 있어 국회에서의 법제화 부분도 자신있게 밝힐 정도로 정무적 수완이나 인맥이 상당함을 드러냈다.

 이씨의 영향력이나 위상은 사후(死後)에도 확인된다.

 지난해 6월 진행된 이씨 7주기 추모식에는 유족 및 추모객 300여명이 참석했는데, 사회는 유명 탤런트 길용우씨가 맡았고 정동기 전 법무부차관이 추모사를 읽었다.

 탤런트 강부자씨도 참석해 추모 노래를 불렀으며 정경식 전 헌법재판관, 신용욱 전 병무청장, 이상윤 전 중앙대 부총장 등이 하객으로 나타나 눈길을 끌었다.

 jmstal01@newsis.com


정치깡패의 역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