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로부터 해방된 지 70여년. 우리 현대사는 유례없이 빠른 경제성장을 일구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권력을 소유한 이들의 학살, 내란, 부정선거, 고문과 각종 인권유린으로 점철된 오욕의 역사이기도 하다. <오마이뉴스>와 '반(反)헌법행위자열전 편찬위원회'는 뒤틀린 우리 역사의 문제점을 되짚어 보고, 역사의 정의를 다시 세우기 위한 운동을 촉구하는 기획 인터뷰를 연재한다. [편집자말] |
저 죽음을 응시해주기 바란다.
저 죽음을 끝내 지켜주기 바란다.
저 죽음을 다시 죽이지 말아주기 바란다.
태양과 죽음은 차마 마주볼 수 없다는 명언이 있다는 건 나도 안다.
태양은 그 찬란한 눈부심으로, 죽음은 그 참담한 눈물줄기로, 살아 있는 자의 눈을 가린다.
그러나 서울대학교 언어학과 3학년 박종철군, 스물한 살의 젊은 나이에 채 피어나지도 못한 꽃봉오리로 떨어져 간 그의 죽음은 우리의 응시를 요구한다.
우리의 엄호와 죽음 뒤에 살아나는 영생의 가꿈을 기대한다."
- 1987.01.17, 김중배 칼럼.
6월 항쟁의 도화선이 된 박종철의 고문사에 "저 죽음을 응시하라"고 외쳤던 대기자(大記者) 김중배. 언론인들의 영원한 선배이자 우리 사회의 '어른'이다. 1983년부터 <동아일보>에 연재했던 '그게 이렇지요-김중배 세평'(1985년 이후에는 '김중배 칼럼')은 독재의 서슬이 퍼런 시절, 그나마 숨통을 틔워준 명칼럼으로 회자됐다.
시대를 관통한 촌철살인을 쏟아내던 그는 오늘의 시대를 어떻게 해석하고 있을까? 굴욕적인 한일협상이 시대를 넘어 반복된 지난 2015년 12월 30일, 서울 종로구 종각역 인근에 위치한 반헌법행위자열전 편찬위원회 사무실에서 그를 만났다.
"박정희는 급성 쿠데타, 박근혜는 만성 쿠데타"
▲ '대기자' 김중배 1980년대 '김중배 칼럼'으로 억눌린 시대에 대한 촌철살인을 쏟아내던 김중배는 언론계의 어른으로 꼽힌다. 고령의 나이에도 민주주의와 언론개혁을 위해 활발할 활동을 펼치고 있다. 김소망 | |
- 요즘도 바쁘게 지내시는 것 같습니다. 2015년 한해를 정리한 감회가 어떠십니까?
"2015년 연말에 언론계 후배들과 송년회를 했어요. 여러 단체가 모였는데 격려의 말을 해달라고 하니까 문득 '패션(Passion)'이라는 말이 생각나더라고요. 이게 흔히 '열정'으로 번역하는데, 사실 예수가 고난을 겪으며 십자가까지 가는 길을 패션이라고 불렀어요.
나는 크리스찬은 아니지만 속된 사람으로서 번역을 해보면, 고난과 고통 속에서 열정이 피어나고 거기서 출구를 찾는다는 의미가 아닌가 싶어요. 그래서 (올해) 고난과 고통을 겪었으니 당연히 새해에는 패션의 해가 될 것으로 기대한다는 말을 했어요."
- 고난과 역경이 넘쳤던 2015년이라지만, 선생님께는 좋은 일도 있었습니다. 11월에 심산상을 수상하셨는데 2006년 리영희 선생님 이후 8년 만입니다(2007년부터 2014년까지는 수상자가 없었다).
"그것 참, 이게 무슨 노벨상도 아니라서 거부할 수도 없는 건데... 상을 받자니 내가 참 뻔뻔하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만일 심산 선생이 살아 계셨다면 '앉은뱅이가 되면서, 그렇게 고통 받으면서, 가꾸고자 했던 나라가 과연 이런 나라였습니까?'하고 묻고 싶은 심정입니다. 막상 심산 선생님은 '야 이놈아, 너도 이런 세상 만드는 데 일조하지 않았냐?'라고 하실 것 같아요. 그런데도 상을 받았으니 참 뻔뻔하지요(웃음)."
김중배 선생은 지난해 11월 13일 독립운동가 심산 김창숙(心山 金昌淑, 1879.07.10.~1962.05.10.) 선생의 뜻을 기리는 '심산상'을 수상했다. 일제에 나라를 빼앗긴 식민지 시절, 유학자였던 심산 김창숙은 독립선언문을 낭독한 33인 중 유학자가 한 명도 없음을 통탄하면서 모든 것을 버리고 망명길에 올랐다.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부의장으로 활동하는 등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했고, 나석주 열사의 동양척식회사와 식산은행 폭탄 투척 사건의 배후로 체포되어 모진 고문 끝에 앉은뱅이가 되었다. 해방 이후에는 성균관대학교 설립을 주도했지만 이승만 독재에 항거해 세 번이나 하야 권고문을 발표했던 지사(志士)형 선비였다. 결국 자신이 세운 성균관대학교에서마저 쫓겨난 심산은 영업용 택시 기사로 일하던 아들이 주는 돈으로 궁핍하게 살다 1962년 사망했다.
그의 뜻을 기리기 위해 1986년 제정된 심산상은 송건호 <한겨레> 초대 회장을 시작으로 고 김수환 추기경과 백낙청, 강만길 교수 등 독재시절 민주화를 위해 헌신했던 인사들에게 상을 수여했으며, 김중배의 수상은 2006년 리영희 선생 이후 8년만이다. 심산 김창숙연구회는 김중배가 80년 초·중반 '김중배 칼럼'을 통해 독재정권에 펜으로 맞서면서 민주화에 대한 희망을 일깨운 것을 선정사유로 제시했다.
- 뻔뻔하다는 말씀은 지나친 겸손 아닌가요?
"내가 그래도 평생 글을 써온 사람인데, 모국어가 이렇게 훼손되고 왜곡되고, 심지어 전복되고 있는 이 시점에 이런 상을 받아도 되나 싶어요. '비정상의 정상화'에서부터 시작해서 '혼이 비정상'이라는 말도 나오잖아요? '어떤 사람'은 '언어 해석기'까지 나왔다고 하더라고요. 참담합니다. 정치와 민주주의가 말로 소통하는 것인데 단어의 뜻이 다른 사람과 어떻게 소통이 되겠습니까? 모국어가 이 지경이 된 상황에서 평생 글을 써온 사람이 이런 상을 받으니 뻔뻔한 거지요."
- 민주주의 국가에서 권력자가 소통능력이 없다는 건 상당히 치명적인 문제네요.
"정치권력만 그런 건 아니에요. 언론으로 한정해서 보면 종편하고 조·중·동, 그리고 <한겨레>와 <오마이뉴스>, <프레시안>이 쓰는 언어는 서로 의미가 달라요. 이런 게 만성화되어 있어요. 일각에서는 진영 대결이니까 그럴 수 있다고 하는데, 과연 그럴 수 있는 겁니까? 예전에는 입장이 달라도 최소공약수적인 개념과 지적인 권위가 있었어요. 규범까지는 아니더라도 서로가 존중하고 인정할 수 있는 기준이나 준거가 있어야 하는데, 지금은 그것마저 무너진 느낌이에요."
- 개념이나 준거를 잡아주는 것은 학계의 역할일 텐데, 학계 상황도 별반 다르지 않은 것 같습니다.
"우리 사회처럼 대학교수를 명예롭게 생각하는 나라가 드물어요. 심지어 의학박사들이 종편이 나와서 의사가 아니라 교수라고 하잖아요? 그런데 종편에 나오는 교수라는 사람들 이야기를 들어보면 무엇을 근거로 그렇게 판단하고 있는지 의아해 하지 않을 수 없어요. 그런 작태를 날마다 보고 있어요. 입장이 달라도 최소한 공유할 수 있는 근거는 있어야 하잖아요?
예전에는 서로가 공유하는 기본적인 근거가 있어서 이걸 토대로 이야기를 주고받았는데, 지금은 (이게 없으니까) 서로 말도 안 통하는 상황까지 왔어요. 저널리즘이 제구실을 못하고 있으니 학계에서 지적인 분들이 뭔가 좀 체계를 잡아줘야 하지 않겠나 싶어요."
- 어쩌면 지금은 소통만이 아니라 소통이 가능한 조건마저 사라진 시대 같습니다. 정말 심산 선생님이 살아계셨다면 통탄하실 것 같습니다.
"심산은 독립운동하면서 앉은뱅이가 되었고, 이승만이 선거부정으로 영구집권을 하려고 하니까 세 차례에 걸쳐 하야 권고문을 발표했어요. 심산상 수상 강연에서 '만일 심산이 오늘날 그랬다면 종북좌빨로 몰렸을 것'이라고 이야기했어요. 역사의 진전이 이렇게 없는가, 역사의 지체가 너무 심하지 않은가 하는 생각을 떨칠 수 없어요."
"민주주의 퇴행 아니다, 완전한 '반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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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근혜 대통령이 지난 10월 13일 오후 청와대에서 열린 대통령주재 수석비서관회의에서 모두발언하고 있다. | |
ⓒ 청와대 |
- 말씀하신 것처럼 최근 세상이 급변하고 있다는 느낌입니다. 박근혜 정부에 대해서도 민주화 이전으로 되돌아갔다는 평가가 나오고 있습니다.
"요즘 '민주주의의 퇴행이다', '유신으로의 회귀다' 같은 표현들이 회자되고 있는 것 같은데요, 제가 보기에는 좀 정밀하지 못한 것 같아요. '민주주의에 대한 반동'이 좀 더 정확한 것 아닌가요?
박근혜 정부가 출범하고 나서 전교조 법외 노조화, 통합진보당 해산, 역사교과서 국정화, 노동법 개악, 민주노총 무력화, 국회 무시 등등... 이런 일들이 계속되고 있어요. 박정희의 5.16 쿠데타를 굳이 표현 하자면 급성(急性) 쿠데타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지금은 만성(慢性) 쿠데타가 진행 중인 것이 아닌가 싶어요.
어떤 교수는 소프트 쿠데타가 진행 중이라고 하는 모양인데, 이게 꼭 소프트웨어적인 것만도 아니에요. 민중총궐기 때 백남기 선생이 저렇게 쓰러진 것은 물론이거니와 참가자들도 폭도로 몰고, 소요죄를 들고 나오고... 이건 단순한 퇴행이 아니라 완전히 반동적인 행위예요. 헌법은 말할 것도 없고, 하위법인 형법을 의도적으로 오남용하고 있어요."
- 박근혜 정부의 성격이 '반동'이라면, 2015년에는 역사 문제에서 특히 그랬던 것 같습니다. 교과서 국정화도 그렇고 최근의 한일 위안부 협상 문제도 그렇습니다.
"박근혜 정권은 접근법 자체가 샤머니즘(어떤 현상이 신에 의해 일어나는 것이라고 보면서 무당을 통해 문제를 해결하려는 신앙 - 기자 말)적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교과서 국정화를 주장하면서 '어떤 대목이 문제냐'고 질문하면 '그런 기운이 돈다', '혼이 비정상이다' 이렇게 대답해요. 진짜 샤머니즘을 하시는 분에게는 실례가 될 수도 있는데, 굳이 말하자면 '선무당'쯤 될까? 샤머니즘 역시 나름의 가치를 가지고 있는데, 이 정권에서도 무언가에 집착하고 있는 것 같아요. 어떤 프로그램이 착착 진행 중이라는 심증이 있어요."
- 일각에서 이야기하고 있는 장기집권 프로젝트를 말씀하시는 겁니까?
"정치권력의 장기집권을 넘어서 영구집권을 의도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우려가 커요. 이를테면 사이비 애국주의에서 시작해서 세월호 참사에서도 보듯이 허울뿐인 국가로 나아가고 있는데, 이 과정에서 '신자유주의적 인간형'이라고 할까? 효율성이라는 우상을 떠받들고 있어요. 민주적이고 절차적인 정당성은 나중 문제로 치부하고 효율성만 중시하는 인간형을 만들어 내고 있는 거예요. 세월호도 경기가 나쁘니까 빨리 정리하자고 하고, 노동법도 통과 안 되면 역사의 심판을 받을 거라고 하고, 낙오자가 발생해도 개의치 않아요. 저는 이게 '민주 대 반민주'의 구도가 아니라 '인간 대 반(反)인간'의 대립구도라고 봐요.
- 이런 결과가 벌어지고 있는 데에는 언론의 책임도 큰 것 같습니다. 평생을 언론인으로 살아오셨는데, 오늘날 언론의 모습은 어떻게 보십니까?
"난 자유언론이라는 말보다 '민주언론'이라는 말을 써요. 현재 언론 자유를 가장 많이 만끽하고 있는 것이 누굽니까? 종편이에요. 신자유주의에서 자유란 것은 한 우리에 늑대와 병아리를 넣어 두고 서로 경쟁하라는 것과 다르지 않아요. 그게 자유언론의 실체예요. 그렇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새로운 저널리즘을 위해 노력하는 젊은이들이 많이 있다는 것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얼마나 고군분투하고 있습니까? 이런 노력조차 없는 것으로 치부하는 건 대단히 비과학적인 겁니다."
- 선생님도 서슬 퍼런 독재시절에 그런 노력을 기울이신 대표적인 언론인이셨습니다. 날카로운 칼럼으로 많은 사람들의 속을 시원하게 해주셨지만, 고초도 많이 겪으셨습니다.
"나야 뭐... 그때는 죽은 사람도 많았고, 나보다 더 혹독하게 당한 사람도 있는데요, 뭘. (김)근태도 그때 너무 혹독하고 잔인하게 당해서 나보다 훨씬 젊은데도 벌써 죽었잖아요."
김근태 전 보건복지부 장관은 1985년 8월 서울대 민주화추진위원회 배후조종 혐의로 연행되어 남영동 대공 분실에서 잔인하게 고문당했다. 1995년 정계에 입문해 활발할 활동을 펼쳐왔으나 2011년 고문 후유증으로 얻은 뇌정맥혈전증으로 사망했다. 인터뷰를 한 12월 30일은 고 김근태 전 장관의 4주기였다.
"우리가 언론사 생활할 때는 통제가 일상적이었어요. 박정희 정권 때는 중앙정보부 요원이 아예 편집국에서 살았어요. 기자들이 모여서 '중정 요원 출입금지'라고 써붙여 놓으면 좀 잠잠하다 또 들어오고 그랬어요. 그때는 보도해야 할 것을 보도하지 못하고, 말해야 할 것을 말하지 못하는 시대였어요. 그래도 편집국에는 '우리가 해야 할 일을 못하고 있다'는 자책감이 공유되어 있었어요. '언젠가는 제대로 일을 할 수 있게 길을 열어 놔야지'하는 생각으로 매일 술 먹으면서 참고 버텼지요."
- 선생님도 요주의 인물로 집중 감시 대상이셨을 것 같은데요?
"우리가 중정이나 안기부를 연구하는 것 못지않게 거기서 나온 사람들도 저널리즘과 김중배를 연구했어요. 제가 매주 칼럼을 썼는데, 칼럼 패턴하고 주요 사건을 쭉 연구해서 내가 다음 주에 뭘 쓸지 예측해서 연락을 해요. 전화해서 '뭐 쓸 거지요?' 이러는데, 맞출 때가 많았어요. 철저하게 연구한 거지요. 난 또 거짓말 하면 안 되니까 '맞다. 그거 쓴다'고 하고..."
- 그렇게 감시를 받으셨으면서도 할 말은 꼭 하셨습니다.
"그때는 비겁하게 썼지요. 우회해서. 예를 들면 '바둑을 두다가 잘 안 되면 판을 엎어야 한다' 뭐 이런 식으로.(웃음) 그러니까 안기부 사람들이 '이거 세상 뒤집자는 거 아니냐'고 찾아오고. 저도 남산 지하실로 끌려가서 군복도 입어보고, 엄청 맞기도 했어요. 내가 잡혀가면 회사에서 직원들이 농성하면서 기다리니까, 끌고 갔다가 집으로 데려다 줘요. 마누라가 두들겨 맞았다고 울면 괜히 '안 맞았다'고 거짓말하고 그랬지요. 나를 끌고 가서 때리는 건 참을 수 있었는데, 가족한테 그러는 건 정말 못 참겠더라고요."
- 가족까지 협박했습니까?
"가장 가슴 아픈 게 그거예요. 제 자녀가 2남 1녀에요. 전에 2층 집에 살았는데, 아침에 일어나니까 중학교 다니는 딸아이가 눈이 퉁퉁 불어 있어요. 왜 그러냐고 물어보니까, 어떤 사람이 전화해서 '너희 애비 어미는 물론이고 너희들까지 다 죽여 버리겠다'고 했다더군요. 게다가 차마 입에 담을 수 없는 이야기까지... 그건 정말... 내가 당하는 건 참으면 되는데, 정보기관이라는 곳에서 가족까지 협박을 하니까... 딸에 대한 기억은 잊혀지지가 않아요. 그때도 '민주 대 반 민주'가 아니라 '인간 대 반 인간'이었어요. 감히 인간이 못할 짓을 그렇게..."
- 그런 협박을 이겨 내고 6월항쟁으로 민주화가 시작된 이후 <동아일보> 편집국장이 되셨습니다. 그런데 언론에 대한 자본의 통제를 비판하면서 1년 만에 사표를 쓰셨습니다.
"<동아일보> 편집국장을 해보니까 광고주의 압력이 막강하다는 걸 느꼈어요. 낙동강 페놀 유출 사건이 터졌는데, 관련된 업체가 신문사 대광고주였어요. 광고주가 소속된 회사를 공격할 수 있느냐는 말이 노골적으로 나왔어요.
자본주의가 지속되는 한 자본의 압력은 영구적이고 원천적일 것 같아요. 민주화 이후 자본에 종속된 언론은 자유를 얻었을지 몰라도, 그게 민주언론은 아닌 거죠. 광고주라는 협소한 지형만이 아니라 기업 일반, 경제 동향과 연동해 보면, (이제 언론이) 권력에 대해서는 저항할 수 있어도 자본에 대해서는 (저항하는 것이) 더 어려워진 것 아닌가 해요. 씁쓸하죠."
"회개하는 마음으로 반헌법행위자 기록한다"
▲ 김중배 선생은 박근혜 정부가 박정희의 급성 쿠데타와 달리 만성쿠데타를 진행하고 있다고 신랄하게 비판했다. 효율성만을 중시하는 신자유주의적 인간형을 떠받드는 민주주의에 대한 반동이라는 것이다. 김소망 | |
오랫동안 몸담았던 <동아일보>를 박차고 나온 김중배는 1992년 <한겨레> 이사, 1993년 <한겨레> 사장, 1998년 언론개혁시민연대 공동대표, 1999년 참여연대 공동대표, 민주방송법쟁취국민운동본부 공동대표, 2000년 국가보안법폐지 국민연대 공동대표, 2001년 문화방송 사장, 2004년 언론광장 상임대표 등 언론개혁과 민주주의를 위해 활발하게 활동했다.
그리고 2015년에는 대한민국 정부수립 이후 민간인 학살, 고문, 간첩조작, 부정선거 등 진짜 우리 헌법을 유린해온 이들을 기록하자는 '반헌법행위자열전 편찬위원회' 공동대표를 맡았다.
- 2015년에 출범한 '반헌법행위자열전 편찬위원회' 공동대표를 맡으셨습니다. 특별한 의미가 있습니까?
"반헌법행위자열전이 기록하려는 게 바로 내가 살았던 시대입니다. 그 시대를 살았던 자로서 회개록을 쓰는 것이라고 할까요. 참회록이 아니라 회개록입니다. 속죄라는 건 참회하면 그만이지만, 회개는 참회한 것을 고쳐야 합니다. 그렇게 한다고 해서 내가 살던 시대의 죄책이 씻어지는 것은 아니지만, 내가 (기자로) 살았을 때 누더기가 된 헌법의 모습을 조금이라도 바로 잡는 데 일조할 수 있다면 그것으로 위안을 삼고 눈을 감을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 지금도 '회개'를 요구해야할 일들이 너무 많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지금 벌어지고 있는 일들도 다 반(反)헌법적인 행위들 아닙니까? 아이들을 포함해서 304명이 죽었어요. 생명과 인간의 존엄, 행복하게 살 권리가 다 헌법에 보장되어 있는데 국민에게 주권을 위임받은 정치권력이 지켜 줬습니까? 교육도 (헌법에는) 중립적이어야 한다고 되어 있는데 교과서 국정화로 훼손했고, 노동문제도 일반해고와 취업규칙 변경을 쉽게 함으로써 헌법에 보장된 노동 3권을 지켜주지 않는 거잖아요?
박근혜 대통령은 헌법을 준수하고 국민의 자유와 복리를 증진하기 위해 사명을 다하겠다고 선서를 했어요. 우리 헌법 조항에서 대통령 선서 부분이 유일하게 경어체로 되어 있어요.(헌법 제69조에는 대통령 선서의 문구가 적시되어 있다. 이 부분은 헌법 조문 중 유일하게 '엄숙히 선서합니다'로 끝나는, 경어체로 되어 있다. - 기자 말) 그런데 어떻게 되고 있습니까? 그래서 권력을 가지고 우리 헌법을 파괴해온 사람들을 기록하는 일은 과거사면서도 현재의 일이고, 또 미래의 일입니다."
- 열전에 기록될 사람들에게 회개를 요구해봤자 회개는커녕 속죄라도 할지 의문이라는 분들도 많습니다.
"예전에 국사편찬위원장을 하셨던 이만열 선생님이 '공자가 춘추를 쓰니 난신적자(亂臣賊子)들이 두려워했다'고 하시면서 이 열전이 나오면 반헌법행위자들이 두려움에 떨게 될 거라고 하셨어요. 그런데 전 조금 다르게 생각합니다. 그 사람들이 춘추를 보고 두려워할 감각의 소유자가 아니죠. 그것보다는 그들이 정말 두려워하게 만들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어떻게 확장성을 가진 시민의 역량으로 힘을 보여줄 것인가? 그게 중요한 질문 같아요.
반헌법행위자들을 기록하는 일은 나같이 나이든 분들, 나보다는 나이가 적지만 세월을 오래 사신 분들이 간절한 마음으로, 우리가 살아온 시대에 정말 있어서는 안 될 잔인무도한 이들이 많았다는 걸 생각해서 우리가 우리 후손만큼은 그런 일을 다시 겪지 않도록 벽돌 한 장씩 쌓는 심정으로 해야 해요. 물질적으로 기여하기 어려운 젊은이들도 여기에 뜨거운 정신과 뜨거운 입김을 불어 넣어준다면 큰 힘이 될 것 같아요."
- '벽돌 한 장'보다 '선생님의 글 한 편'을 기대하는 사람들이 더 많은 것 같습니다. 오랫동안 글을 안 쓰셨는데, 다시 펜을 잡을 생각은 없으십니까?
"사실 지난해(2014년)에 세월호 사건이 터졌을 때 너무 큰 충격을 받아서 글을 써야겠다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한 10여 년 동안 글을 안 쓰다 보니 늙어서 기력도 없고, 지적인 시스템이 붕괴되었는지 몇 번을 시도해도 잘 안 되더라고요. 그렇지만 계속 노력 중입니다. 진심으로 쓰고 싶습니다."
올해 83세의 나이에도 수많은 곳을 다니며 수많은 사람을 만나고 수많은 이슈에 대한 직격탄을 쏟아내고 있는 영원한 대기자 김중배. 희망을 찾기 어렵다는 이들이 여전히 그의 옛 칼럼을 꺼내 읽는 이유는 당시의 정론과 직필이 여전히 우리에게 유효한 메시지를 던지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과연 그의 말처럼, 2016년은 고난과 역경을 견딘 후에 우리 앞에 모습을 드러내는 열정(passion)의 해가 될 것인가?
"때문에 나는 거듭 깨어 있으면서, 거듭 말하고자 한다.
민초(民草)여, 끝내 새벽은 열린다.
희망을 상실하면, 희망의 새벽은 열리지 않는다. 희망이 깨어 있으면, 희망의 새벽은 열리고야 만다."
- 1984년, 김중배 <민은 졸인가> 책머리 글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