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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벌 앞에 당당한 언론

천사요정 2018. 9. 6. 06:38
[창간 30년, 한겨레 보도-13]
삼성 비자금·뇌물 보도 그리고 광고 중단 사태
2007년 김용철 변호사의 삼성 비자금 양심선언을 보도한 한겨레21 표지(왼쪽)와 2017년 최순실 게이트에서 이재용 부회장과 삼성의 뇌물죄에 대해 다룬 한겨레21 표지(오른쪽).
2007년 김용철 변호사의 삼성 비자금 양심선언을 보도한 한겨레21 표지(왼쪽)와 2017년 최순실 게이트에서 이재용 부회장과 삼성의 뇌물죄에 대해 다룬 한겨레21 표지(오른쪽).

2007년, 한겨레 경제부 선임기자였던 정석구는 경기도 양평으로 출퇴근하다시피 했다. 컨테이너 박스를 사무실 삼았다. 그곳은 김용철 한겨레 기획위원이 임시로 머물고 있는 거처이기도 했다. 두 사람은 여기저기 흩어져있던 서류들을 함께 정리했다.

김용철은 ‘양심선언’을 하려고 준비 중이었다. 한국 사회를 뒤흔들 핵폭탄급 폭로가 될 터였다. 한겨레 동료이자 고등학교 동기동창인 정석구가 하나부터 열까지 도왔다.

컨테이너 주변의 낌새가 이상했다. 누군가 감시하는 느낌이 들었다. 자료들을 호텔로 옮겼다.

정석구가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는 한겨레 안에서도 보안 사항이었다. 김종구 편집국장을 포함해 편집국 핵심 서너 명만 정보를 공유하고 철저히 비밀에 부쳤다. 정석구는 기자로서 특종 욕심을 내는 대신에 양심선언이 널리 보도될 수 있는 방도를 고민했다.

“사안 자체가 중대했기 때문에 ‘한겨레만의 특종’, ‘단독 기사’ 이런 욕심을 내기보다 한국 사회와 언론 전체가 관심을 갖는 쪽으로 끌고 가야 한다고 생각했다.”

김용철이 양심선언으로 고발하려는 상대방은 한국 최대 기업인 삼성과 이건희 회장이었다. 한겨레만 단독으로 보도한다 해도, 최대 광고주인 삼성의 문제이기에 대부분의 방송사나 신문사가 외면할 가능성이 높았다.

김용철은 검사 출신 변호사였다. 삼성그룹 법무팀과 재무팀에서 7년 동안 일했다. 총수 일가와 삼성의 내밀한 속사정을 잘 알 수밖에 없는 자리였다. 2004년 8월 삼성을 그만뒀다. 기자들을 종종 만났다. 삼성에 대해 나쁜 이야기를 하고 다니지 말라는 압박이 들어왔다. 김용철은 삼성으로부터 자신을 지켜줄 방패막이가 필요했다. 몇몇 언론사의 문을 두드렸다. 하지만 모두 거절했다. 문을 열어준 언론은 한겨레가 유일했다. 김용철은 2005년 9월 한겨레 비상근 기획위원이 되었다.

2005년 9월 24일 치 한겨레에 김용철 당시 기획위원이 처음으로 쓴 칼럼
2005년 9월 24일 치 한겨레에 김용철 당시 기획위원이 처음으로 쓴 칼럼

2년 가까이 계속되었던 김용철의 평온이 깨진 것은 한겨레 기사 때문이었다.

‘삼성 편법 대물림 구조조정본부 주도.’

2007년 5월 25일 한겨레 1면에 단독 기사가 실렸다. 삼성에버랜드 전환사채 헐값 발행 사건의 항소심 선고 공판을 나흘 앞둔 시점이었다.

“이학수 삼성그룹 부회장이 2000년 말께 구조조정본부 내부 회의에서 사실상 그룹 차원으로 전환사채 발행에 개입했음을 시인하는 발언을 했다.”

삼성그룹 전직 고위임원이 한겨레 곽정수 대기업 전문 기자에게 들려준 이야기가 기사화되었다.

2007년 5월 25일 치 한겨레 1면에 나간 단독 기사. 이 기사로 인해 김용철 당시 기획위원은 기사의 배후로 지목받으며 고초를 겪게 되었다.
2007년 5월 25일 치 한겨레 1면에 나간 단독 기사. 이 기사로 인해 김용철 당시 기획위원은 기사의 배후로 지목받으며 고초를 겪게 되었다.

1996년 12월, 삼성에버랜드는 전환사채를 적정 가격의 10분의 1도 안 되는 헐값에 발행해 이재용, 이부진, 이서현 삼남매에게 넘겼다. 참여연대와 법학 교수들이 허태학, 박노빈 전직 삼성에버랜드 사장을 배임 혐의로 검찰에 고소했고, 2005년 1심 법원은 유죄 판결을 내린 터였다. 삼성의 경영권 승계에 ‘불법’ 딱지가 붙느냐, 마느냐가 항소심 판결에 달려 있었다.

한겨레 기획위원 직함을 갖고 있던 김용철 변호사가 5월 29일 몸담고 있던 로펌 대표변호사들에게 불려갔다. 삼성 쪽이 “기사의 배후에 김용철이 있다”고 지목했다면서 김용철을 추궁했다. 김용철은 로펌을 그만둘 수밖에 없었다.

김용철은 삼성에 있는 동안 보고 들은 것들을 ‘양심고백’하기로 마음먹었다. 정석구의 소개로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을 찾았다. 1987년 박종철 고문 치사 사건의 진실을 폭로해 6월항쟁의 불을 당긴 종교의 힘을 믿었다.

2008년 2월, 언론인과 학자들이 한국언론회관에 모여 한겨레에 대한 삼성 광고 중단 사태를 주제로 심포지엄을 열었다. 한겨레 자료사진
2008년 2월, 언론인과 학자들이 한국언론회관에 모여 한겨레에 대한 삼성 광고 중단 사태를 주제로 심포지엄을 열었다. 한겨레 자료사진

2007년 10월 29일, 서울 제기동 성당에서 기자회견이 열렸다. 김용철 명의로 되어있는 삼성 비자금 계좌를 공개했다. 계좌에는 50억 원이 넘는 돈이 들어 있었다. 삼성은 십수 년간 임원들의 명의를 빌려 비자금을 세탁해왔다.

한겨레는 10월 30일 신문 1면에 이러한 내용을 보도했다. 단순히 기자회견에서 발표된 내용을 나열한 보도가 아니었다. “삼성 직원이 돈 주며 ‘이자소득세 대신 내달라’”고 했다는 해설 기사, 김용철 변호사의 단독 인터뷰, ‘삼성 비자금 전모 밝힐 기회… 검찰 의지에 달렸다’는 제목의 검찰 수사 전망 기사 등 지면 4쪽을 통째로 펼쳐 다각도로 문제를 파헤쳤다. 정석구 등이 거의 한 달 가까이 전부터 미리 준비해온 기사였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한겨레만의 특종은 아니었으나, 이후에도 이 문제를 가장 열심히 파고든 것은 한겨레였다. 관련 의혹을 추적해 끈질기게 보도했다. 결국 2008년 1월 삼성 비자금의 실체를 수사하는 특검팀이 출범했다. 특검이 수사를 시작한 뒤에도 한겨레를 제외한 다른 언론들은 미적지근했다.

당시 미디어오늘이 분석한 바에 따르면 삼성 특검 출범 이후 보름 동안 한겨레는 54건의 관련 기사를 실었다. 같은 기간 경향신문은 37건, 중앙일보는 17건에 그쳤다. 다른 언론이 관련 보도를 꺼린 이유 역시 간단했는데, 상대가 한국 최고의 재벌그룹인 삼성이었기 때문이다.

“기사 쓸 때부터 삼성과의 관계가 이제 파국으로 가겠구나 직감했다. 당시 한겨레 광고 매출에서 삼성이 차지하는 비중이 역대 최고였을 때였다. 하지만 당시 대표이사나 광고국 임원들이 나한테 기사 때문에 힘들다는 말은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그게 한겨레다.”

편집국장이었던 김종구의 회고다.

실제 그 이후 삼성은 한겨레에 광고 집행을 거의 하지 않았다. 2008년 1월 삼성중공업 원유 유출 사고에 대한 사과 광고를 모든 종합일간지, 경제지에 실을 때도 한겨레만 빠졌다. 2008년 4월 삼성 특검이 끝난 뒤에도 광고 중단 사태는 2010년 초까지 계속되었다. 2년이 넘는 기간 동안 삼성이 한겨레에 실은 광고는 다섯 손가락 안에 꼽힐 정도였다. 2008년 2월 이명박 대통령 취임, 2009년 9월 국제기능올림픽 한국 우승, 2010년 2월 밴쿠버 동계올림픽 김연아 금메달 축하 광고 등 뿐이었다.

MB의 이건희 1인 특별사면을 비판한 2009년 12월 30일 치 한겨레 1면
MB의 이건희 1인 특별사면을 비판한 2009년 12월 30일 치 한겨레 1면

삼성의 한겨레 광고 탄압은 이걸로 끝이 아니었다. 9년 뒤에 똑같이 반복된다. 2017년 박근혜·최순실 게이트 때 한겨레는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의 뇌물 혐의를 가장 먼저 보도했다. 이후 삼성은 한겨레 광고 집행을 사실상 중단하는 식으로 노골적인 보복에 나서고 있다.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을 풀어준 법원 항소심 판결을 비판한 한겨레 기사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을 풀어준 법원 항소심 판결을 비판한 한겨레 기사

2008년 2월부터 한겨레에는 언론단체와 시민들의 격려 광고가 실렸다. 전국언론노조와 민주언론시민운동연합은 ‘삼성 앞에 당당한 신문, 한겨레와 경향신문 살리기 캠페인’을 벌였다.

한겨레는 창간 이후로 줄곧 정경유착이나 재벌그룹의 전횡에 대해 일관되게 비판해왔다. 특히 2000년대 중반 이후 정치권력보다 자본권력의 힘이 더 강해지면서 한겨레의 재벌 감시 및 비판 보도도 크게 늘어나게 된다.

한겨레는 2007년 4월, 김승연 한화그룹 회장이 자신의 아들이 폭행당한 것에 앙심을 품고 직접 보복 폭행에 나섰다는 사실을 실명으로 처음 보도했다. 한겨레 자료사진
한겨레는 2007년 4월, 김승연 한화그룹 회장이 자신의 아들이 폭행당한 것에 앙심을 품고 직접 보복 폭행에 나섰다는 사실을 실명으로 처음 보도했다. 한겨레 자료사진

김승연 한화그룹 회장 폭행 사건도 삼성 비자금 보도처럼 한겨레가 도화선 구실을 했다. 2007년 4월 27일, 한겨레는 1면에 김승연 회장이 자신의 아들이 폭행당한 것에 앙심을 품고 경호원을 동원해 직접 보복 폭행에 나섰다는 사실을 보도했다. 앞서 4월 24일 다른 언론들이 이미 보도한 사건이긴 했다. 하지만 당시 언론은 그룹과 회장의 이름을 익명으로 처리했다. 기사도 사회면에 작게 나가서 파장이 크지 않았다. 하지만 한겨레는 실명을 써서 1면에 보도했다. “김승연 회장이 직접 때렸다”는 목격자들의 증언도 실었다.

당시 온라인뉴스팀에 있었던 박주희 기자가 뒤늦게 제보자에게 사건의 전모를 들었고, 김종구 편집국장 등이 이러한 사실을 교차 확인 취재했다. 피해자들의 생생한 증언을 확보해 한화그룹과 김승연 회장의 실명을 박아 보도한 것은 한겨레가 처음이었다. 특히 한겨레는 경찰의 사건 은폐 시도까지도 폭로했다. 한겨레 보도 이후에 사건이 일파만파 번져나갔다. 결국 5월 11일 김승연 회장은 폭행 혐의로 구속되었다. 다른 언론이 실명 보도를 꺼린 이유는 간단했다. 재벌그룹 회장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정치권력뿐만 아니라 경제권력에도 항상 예민한 촉수를 세우고 있었던 한겨레로서는 그냥 지나칠 수 없는 일이었다.

2007년 4월 27일 치 한겨레 1면 기사
2007년 4월 27일 치 한겨레 1면 기사

한겨레는 재벌 총수들의 비리나 불법 행위 뿐만 아니라, 법망을 피해가는 경영권 승계, 중소기업·프랜차이즈 가맹점에 대한 횡포 등을 고발하는 보도에도 앞장섰다. 그렇다고 무조건 기업을 으르고 비판하려고만 하지는 않았다. 기업의 사회적 책임, 윤리책임경영, 상생경영 모델 등에 대해서도 관심을 갖고 대안을 제시하는 기사를 쓰려고 애썼다. ‘상생의 기업경영’(2004년 1월), ‘기업-사회, 상생 지속 가능의 길’(2004년 6월), ‘성장의 기본 틀 바꾸자’(2004년 8월), ‘기업과 사회의 연대’(2007년 10월) 등의 기획물이 대표적이다.



원문보기:
http://www.hani.co.kr/arti/society/archives/852217.html#csidx01bbc04faefc8f6b7b884b94827f3e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