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덕윤리환경/부동산

아파트 분양권 포기하고 빌라 매매한 사람입니다

천사요정 2019. 9. 4. 23:57

[X의 오피스 살롱] 가성비, 자연, 이웃... 빌라를 선택하며 얻은 것들



퇴사는 못했지만 나만의 미래를 꿈꾸며 현재를 성실히 살아가는 낙관주의자입니다. 불안하지만 계속 나아가는 X세대 중년 아재의 좌충우돌 일상을 소개합니다.[편집자말]
 정부의 9.13 부동산 대책을 앞둔 13일 오후 서울 도심에 밀집해 있는 아파트의 모습들.
 아파트를 사기 위해 무리한 대출을 받는다면 우리의 현재를 담보로 잡아야 한다. 평소 부동산에 대해 비슷한 가치관을 가지고 있던 우리는 지금 사는 아파트를 떠나기로 했다. (사진은 기사 내용과 무관)
ⓒ 이희훈

관련사진보기

 
한국인의 다수가 아파트를 선호한다. 빌라는 전세라면 몰라도 매매는 절대 안 된다고 말한다. 그런데 나는 며칠 전 주위의 수많은 반대를 무릅쓰고 빌라의 주인이 됐다. 

늦은 나이에 결혼했지만 20대 시절과 비교해 경제 사정이 별반 나아진 것은 없었다. 직장인 월급만으로 수도권의 아파트를 사는 것은 꿈 같은 일이었고, 전세자금 마련도 쉽지 않았다. 사랑하는 사람과 결혼을 했다는 것은 행복한 일이었지만 신혼집 마련은 풀기 힘든 난제였다.

결혼을 100일 정도 앞둔 무렵 기적이 일어났다. LH에서 서민들을 위해 시세보다 낮은 보증금으로 제공하는 경기도 고양시의 한 공공임대 아파트에 당첨된 것이었다. 8년 넘게 청약통장을 지킨 보람이 있었다. 월세를 내야 했지만, 시세보다 낮은 보증금 덕분에 일단 한숨을 돌렸다. 당시 나의 자금 사정에서 찾을 수 있는 최상의 조건임은 명백했다.

그렇게 그곳에서 신혼살림을 시작했고 7년이란 세월이 순식간에 흘러갔다. 운명의 시간이 다가왔다. 이 아파트는 내년에 분양 전환이 되고, 거주자인 나에게 우선권을 주게 돼 있었다. 내가 아파트를 매매하지 않으면 퇴거해야 했다. 또다시 집에 대한 고민의 시간이 다가왔다.

아파트를 사기 위해 무리한 대출을 받는다면 우리의 '현재'를 담보로 잡아야 한다. 평소 부동산에 대해 비슷한 가치관을 가지고 있던 우리는 지금 사는 아파트를 떠나기로 했다. 그러나 우리 앞에 놓인 선택지는 많지 않았다.

아내는 신혼 초만 해도 아파트 생활에 몹시 만족했었다. 그러나 시간이 갈수록 아파트에 대한 환상이 깨졌고, 아파트 못지않게 시설이 좋은 주변 신축 빌라들을 보면서 생각이 완전히 바뀌었다. 우리는 빌라를 알아보기로 했다.

빌라의 주인이 되다

주말마다 아내와 고양시 인근 빌라들을 보러 다녔다. 우리는 주거의 개념만으로 보면 빌라도 손색이 없다는 확신을 가졌다. 더군다나 가격도 아파트보다 싸다.

처음 우리는 은행 대출을 최소화하기 위해 전세만을 생각했었다. 그런데 신축 빌라들은 전세가나 매매가나 큰 차이가 없었다. 우리의 마음은 빌라 매매로 기울고 있었다.

이런 생각을 주변에 알리자 엄청난 반대가 밀려왔다.

"빌라는 사는 게 아니라니까! 투자 가치가 전혀 없어요. 빌라를 살 돈으로 경기 남부에 20년 된 21평짜리 아파트를 사! 가격 오를 확률이 훨씬 높아."

지금 집보다 더 작고 오래된 집으로 이사를 하라고? 무엇을 위해서?   

"자연인도 아닌데 집 주변에 둘레길이나 숲이 있는지 왜 고려해? 지하철역과 얼마나 가까운지, 편의시설은 있는지, 학군은 좋은지, 같은 걸 따져야지. 그래야 빌라라도 집값이 오른다니까!"

나와 아내는 산을 좋아한다. 서울 한복판에서 회사 생활을 하는 나는 집에 있을 때만이라도 자연과 가까운 환경에서 지내고 싶다는 바람이었다. 우리와 다른 가치관과 기준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에 잠시 흔들렸지만, 우리만의 생각을 지키기로 했다. 그래서 아파트도 아니고, 역세권도 아닌, 한적한 곳에 지어진 신축 빌라를 매매하기로 했다.

이삿날 저녁, 짐정리를 하다 창문을 열었다. 도심과는 완전히 다른 맑은 공기를 느낄 수 있었다. 4차선 도로와 인접했던 이전 집에서는 느낄 수 없던 청량함이었다.

내일부터 출퇴근 시간이 더 걸릴 것이고, 아파트에서 느끼지 못했던 불편함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비슷한 평수인 아파트의 절반 가격으로 깔끔하고 쾌적한 집을 (은행과 함께) 장만했다고 생각하니 꽤 만족스러웠다.

잠시 창 밖을 보며 생각에 잠겨 있던 그때, 환기를 위해 열어놓은 안방 문이 굉음과 함께 닫히면서 잠겨 버렸다. 아파트에 살 때는 관리사무소에서 마스터키를 빌려줘서 이런 사태를 쉽게 해결할 수 있었지만, 빌라에서는 내 힘으로 해결해야만 한다. 평균 이하의 손재주를 가진 나는 몹시 당황했다.

아파트보다 조금 불편하지만 아주 따뜻한 곳
 

 만약 누가 빌라 생활 1일 차의 소회는 묻는다면 '아파트보다 조금 불편하고 아주 따뜻하다'라고 말하고 싶다. (사진은 기사 내용과 무관)
 만약 누가 빌라 생활 1일 차의 소회는 묻는다면 "아파트보다 조금 불편하고 아주 따뜻하다"라고 말하고 싶다. (사진은 기사 내용과 무관)
ⓒ 이주영

관련사진보기

 
밤 9시를 넘어가고 있었다. 오늘 밤은 소파에서 자야 하나? 옆집 벨을 누르기에는 너무 늦은 시각이다. 나는 무작정 밖으로 나갔다. 4층 아저씨와 1층 아주머니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나는 둘의 대화에 잠시 공백이 생긴 틈을 파고들었다. 오늘 이사를 왔노라고 인사를 드린 후, 내가 처한 위기 상황에 대해 간략하게 설명했다.

"아이고 저걸 어째. 잠긴 문을 여는 열쇠가 있는지는 모르겠네요. 집에 관련된 일은 우리 딸이 알고 있어서. 곧 퇴근할 때가 되긴 했는데…"

"혹시 핀이나 작은 쇠꼬챙이 같은 거로 열리지 않을까요? 우리 집 애들이 알려나?"


망연자실한 나는 집으로 다시 들어가 손재주 좋은 친구에게 전화했다. 예상대로 친구는 해결방법을 알고 있었고, 기우대로 잔소리가 이어졌다.

"이런 답답한 양반을 봤나. 아무리 기계치라고 해도 그런 것도 몰라? 방에 특별한 안전장치가 있는 게 아니라면, 젓가락을 끼워봐. 바로 열려."

나와 아내는 채 풀지 못한 이삿짐 속에서 젓가락을 찾아 바로 실행에 옮겼다. 너무나 쉽게 문이 열렸다.

그 순간 우리 집 초인종이 울렸다. 이제 막 이사 온 집에, 그것도 이렇게 늦은 시각에 누가 찾아온 걸까 궁금해하며 문을 열었다. 4층 아저씨였다.

"우리 큰아들이 젓가락으로 열면 열린다고 해서! 아직 못 열었으면 내가 잠시 들어가도 될까요?"

그때 거짓말처럼 1층 아주머니와 딸로 추정되는 분이 2층 우리 집을 향해 계단으로 올라오고 있었다.

"어? 4층 아저씨도 오셨네!"

그녀는 한 손에 젓가락을 흔들고 있었다.

만약 누가 빌라 생활 1일 차의 소회는 묻는다면 '아파트보다 조금 불편하고 아주 따뜻하다'라고 말하고 싶다.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2566513&PAGE_CD=N0006&utm_source=naver&utm_medium=newsstand&utm_campaign=top1&CMPT_CD=E0026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