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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도 법도 국민도 속인 9년 전 약속

천사요정 2017. 12. 19. 16:46

[국내이슈] ‘이건희 차명계좌’ 금융실명법 논란



이건희 회장 차명계좌 놓고 실명계좌냐 실명재산이냐 해석 분분… 금융실명법 재정비 시급
 
2008년 4월 조준웅 삼성 특별검사의 발표로 공개된 4조원대의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 차명계좌가 뜨거운 화두로 떠오르고 있다. 당시 누락된 세금과 남은 돈을 모두 사회에 환원하겠다던 삼성 쪽 약속은 9년 만에 실속 없는 헛된 말로 드러났다. 이 회장의 차명계좌 논란은 금융실명법을 둘러싼 여러 법적 미비점을 부각하기도 했다. 차명계좌는 실명계좌인지 비실명계좌인지, 이 계좌의 자산소득은 실명자산소득인지 비실명자산소득인지 등을 놓고 혼란이 여전하다.
 
김경락 <한겨레> 기자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과 삼성그룹은 대한민국에서 가장 많은 견제를 받는 인물이고 기업이다. 이들은 막강한 자금력을 바탕으로 대한민국 사회를 쥐락펴락해 ‘삼성공화국’이란 말까지 나올 정도다. 그렇기에 국회와 언론, 시민단체 등 수많은 감시자가 눈을 부릅뜨고 지켜본다. 이런 탓에 현대자동차와 에스케이(SK), 엘지(LG) 등 다른 재벌그룹과 그 총수들이 상대적 안락을 누린다는 평도 나온다.
 
2017년 10월 국회 정무위원회 국정감사에서 진행된 ‘한 편의 드라마’는 이런 인식이 잘못됐다는 것을 보여줬다. 모두가 눈을 부릅뜬다고 구멍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그 구멍 때문에 이건희 회장은 수십년 동안 남의 이름으로 굴린 차명재산 4조4천억원을 세금 한 푼도 내지 않고 빼갈 수 있었다. 더구나 돈을 빼간 지 거의 9년이 지나도록 누구도 눈치챈 사람이 없었다. 이 글은 그 ‘구멍’에 대한 이야기다.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이 2008년 4월 서울 중구 태평로 삼성본관 국제회의실에서 삼성 특별검사 수사 결과에 따른 삼성그룹의 경영쇄신안을 발표하고 있다. 차명 계좌의 사회 환원 약속은 결국 지켜지지 않았다. 연합뉴스
 
9년의 기이한 침묵
2017년 10월16일치 <한겨레> 1면에는 ‘이건희, 차명계좌 실명 전환 않고 4조4천억원 싹 빼갔다’라는 머리기사가 실렸다. 김용철 전 삼성그룹 법무팀장의 양심고백과 조준웅 삼성 특별검사 수사로 확인된 차명재산을 이건희 회장이 2008년 말 세금을 내지 않고 찾아갔다는 내용이 기사에 담겼다. 이 회장이 돈을 찾아간 시점에서 무려 9년 만에 그 사실이 세상에 공개되는 순간이었다.
 
2008년이 어떤 해인가 되짚어보면, 이 사실이 9년 가까이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것 자체가 매우 기이하다. 이 회장이 특검 수사를 받는 등 삼성그룹은 말 그대로 여론의 표적이 돼 있을 때였다. 대다수 언론은 삼성을 비호하기 위해서든 문제점을 짚어내기 위해서든 눈에 불을 켜고 이 사안을 취재했다. 참여연대 등 시민단체들도 검찰의 발표 내용을 빠지지 않고 모니터링했다. 삼성을 둘러싼 사회적 감시망이 어느 때보다 촘촘한 국면이었다.
 
2008년 4월 이건희 회장의 대리인이자 삼성그룹 2인자였던 이학수 전략기획실장이 대국민 사과를 하며 밝힌 내용은 이렇다. “특검에서 조세포탈 문제가 된 차명계좌는 과거 경영권 보호를 위해 명의 신탁한 것으로, 이번에 이건희 회장 실명으로 전환하게 됩니다. 이에 대해 이 회장은 누락된 세금 등을 모두 납부한 후 남는 돈을 회장이나 가족을 위해 쓰지 않겠다고 하며 유익한 일에 쓸 수 있는 방도를 찾아보자고 하였습니다.” 삼성 스스로 차명계좌의 실명 전환을 약속했고, 누락된 세금을 내겠다고 밝힌 것이다. 약속 이행 검증이 언론의 기본 취재 대상임을 떠올려보면 지난 9년 동안 그 누구도 이 회장이 실명 전환은커녕 세금도 내지 않았다는 점을 알지 못한 건 의아하다.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일까. 삼성그룹의 막대한 로비력에 모든 언론이 입막음을 당한 것일까. 알 수는 없지만 그럴 가능성은 낮아 보인다. 외려 이건희 회장이 세금을 내지 않고 돈을 찾아간 사실이 드러난 과정을 보면, 그 원인은 ‘금융실명 거래 및 비밀 보장에 관한 법률’(이하 금융실명법)에서 찾을 수 있다. 매우 모호한 법 규정과 해당 법률의 해석권을 가진 금융위원회가 정확한 법률 해석을 하지 않은 것이 사달이다.
 
2008년 이건희 회장의 비자금 사건이 끝난 뒤에도 사후 처리에 대한 검증 내지 확인 작업은 이뤄졌다. 그중 하나가 2009년 말 경제개혁연대가 금융감독원에 보낸 질의였다. 질문의 요지는 이 회장의 차명계좌에 과징금을 부과했느냐는 것이었다. 답변은 차명계좌는 실명계좌이기 때문에 과징금 부과 대상이 아니라는 요지였다. 차명계좌라 하더라도 실명계좌라는 설명을 일반인은 형용모순으로 느낄 수 있으나, 현재도 금융 당국은 이런 견해를 유지하고 있다.
 
즉, 차명계좌는 실소유주의 실명계좌는 아니더라도 타인의 실명으로 만들어진 계좌라는 얘기다. ‘과징금은 비실명계좌에만 부과되기 때문에 차명계좌도 실명계좌인 이상 과징금을 부과할 수 없다’는 금융 당국의 논리는 어색하지만 현행 법의 올바른 해석이라는 것이 그동안 정부는 물론 시민단체들도 공유하던 인식이다. 이런 인식이나 해석을 받아들이면 이 회장의 차명계좌도 임직원의 실명으로 개설된 실명계좌다.
 
2014년 금융실명법을 개정한 배경도 바로 기존 금융실명법이 차명계좌를 규율할 수 없다는 사실에 바탕을 둔다. 애초 ‘차명계좌 모두를 불법 계좌로 규제해야 한다’고 안철수·민병두 의원이 법안을 발의했으나, ‘선의의 차명계좌까지 제재할 수 없다’는 정부의 주장이 수용돼 조세포탈이나 자금세탁 등 불법 목적을 가진 차명계좌 개설만 금지하는 쪽으로 법이 개정됐다. 물론 이 법은 소급 적용이 되지 않기 때문에 이건희 회장의 경우처럼 2014년 이전에 개설된 차명계좌는 ‘입법 불비’(법이 없어서 규제할 수 없는 상황)의 문제로 받아들여졌다.
 
반전의 드라마는 2017년 국회 정무위 국정감사 때 시작됐다. 박용진 더불어민주당 의원의 김성영 보좌관은 금융실명법 제5조에 주목했다. 제5조는 비실명자산소득의 차등 과세를 다루는 조항이다. 이에 따르면, 비실명자산소득에 대해선 차명계좌 개설 뒤 발생한 이자나 배당소득에 90% 세율로 과세하도록 한다. 김 보좌관이 착안한 대목은 차명계좌에 든 자산을 비실명자산소득으로 볼 수 있는지였다.
 
이런 궁금증을 갖고 박용진 의원은 2017년 10월16일 금융위원회를 대상으로 한 국정감사에서 이 사안을 질의했다. 당시 최종구 금융위원장은 ‘차명계좌도 실명계좌이며 과징금 부과 대상이 아니다’라는 답변만 내놓은 채 비실명자산소득인지에 대해선 정확한 언급을 하지 않았다. 하지만 최 위원장의 발언에 담긴 뜻은 차명계좌도 실명계좌이기에 금융실명법 제5조가 적용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최종구 금융위원회 위원장이 2017년 10월30일 국회 정무위원회 종합감사에서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의 차명계좌 문제를 다시 점검하겠다는 뜻을 밝히고 있다. 이 회장의 차명계좌 논란으로 금융실명법의 보완이 시급하다는 목소리가 크다. 연합뉴스
 
풀어야 할 과제
금융실명법 어디에도 ‘비실명자산소득’의 정의가 담겨 있지 않다. 실명계좌이면 거기서 나온 소득도 실명자산소득으로 봐야 한다는 근거가 법률 어디에도 없다는 점을 김성영 보좌관은 집요하게 파고 들었다. 이 과정에서 장하성 청와대 정책실장이 금융위원회에 정확한 유권해석의 필요성을 요구했고, 김태년 더불어민주당 정책위의장도 나서며 상황이 반전됐다.
 
금융위는 장 실장 등의 요구에 따라 금융실명법과 관련 판례 등을 종합 검토한 뒤 그 결과를 2017년 10월30일 국정감사장에서 공식 발표했다. 그 결과는 이건희 회장의 차명계좌는 실명계좌지만 삼성 특검에 적발된 차명계좌라는 점에서 그 계좌에 든 자산은 비실명자산소득이며, 그에 따라 차등 과세 대상이라는 것이었다. 금융위는 이후 보도자료를 내어, 객관적으로 확인된 차명계좌에 한해 그 계좌에 든 자산은 비실명자산으로 봐야 한다는 견해를 재차 천명한다. 국세청도 금융실명법 유권해석 기관인 금융위의 판단에 따라 이건희 회장에 대한 과세 검토에 착수하게 된다. 현재 국세청은 징세 소멸시효(최대 10년) 등을 고려해 이 회장에 대해 머잖아 추징에 나설 계획이다.
 
박용진 의원의 문제제기로 9년 만에 이건희 회장의 차명재산에 대한 과세가 눈 앞에 다가왔지만, 이번 반전 드라마를 계기로 금융실명법이 안고 있는 한계점들 역시 드러났다.
 
먼저 차명계좌를 실명계좌로 보면서도 비실명자산소득으로 간주할 수 있는지 의구심이 남는다. 금융위는 수사 당국과 금융감독원, 국세청, 감사원 등 정부기관에 의해 객관적으로 확인되는 경우에 한해서만 실명계좌라 하더라도 실소유자의 명의가 아니면 비실명자산소득으로 간주한다. 이런 해석에 대해 당장 국세청부터, 계좌의 실명 여부는 실명계좌로, 계좌에 든 자산은 비실명자산으로 서로 다른 해석을 하는 게 맞는지 의문을 제기한다. 하나의 계좌에 해석이 서로 엇갈린다는 이유 있는 반박이다. 이런 모호성을 해소하려면 금융실명법에 비실명자산소득을 정의하는 조항이 새로 포함돼야 한다.
 
둘째는 좀더 본질적 문제다. 과징금 부과와 관련된 사항이다. 금융위는 비실명자산소득으로 차등 과세를 할 수 있더라도 과징금 부과 대상은 아니라고 밝힌다. 이는 금융실명법이 금융실명제가 도입된 1993년 이전에 개설된 비실명계좌에 대해서만 과징금(계좌 자산의 50%)을 부과토록 하기 때문이다. 즉, 이건희 회장의 사례처럼 금융실명제 이후에 개설된 차명계좌에는 과징금을 부과하고 싶어도 할 수 없다.
 
이는 금융실명법 자체가 역차별적 요소를 가졌다는 의미가 된다. 가령 이건희 회장이 1993년 이전에 문제의 계좌를 개설했다면 그 계좌에 든 자산에서 발생한 이자와 배당소득의 90%를 세금으로 추징당할 뿐 아니라 이자와 배당소득을 낳은 자산(투자 원본) 자체의 절반을 과징금으로 내야 한다. 조세포탈이나 재산은닉 같은 부정한 목적으로 차명계좌를 운용해도 개설 시점에 따라 과징금 부과 대상이 되기도, 되지 않기도 하는 식으로 정한 것이다. 금융실명법에 큰 구멍이 있는 셈이다. 김남근 민주사회를위한변호사모임 부회장은 “비실명자산의 정확한 정의를 세우고, 과징금 부과 기준 등에 대해 전면적 재검토를 거쳐 금융실명법을 개정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 이코노미 인사이트 2017년 12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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