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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속 오늘] 전두환 대국민담화, 29년 만에 드러난 거짓말 6가지

천사요정 2017. 11. 24. 14:53
29년 전 1988년 11월 23일 전두환 대국민담화로 사과했지만…

<한겨레> 1988년 11월 24일치 보도 내용


<한겨레> 1988년 11월 24일치 보도 내용

29년 전 오늘, 1988년 11월 23일은 전두환이 대국민 사과를 하고 백담사로 떠난 날이다. 전두환은 1979년 12월 12일 군사 반란을 일으켜 무력으로 정권을 장악했다. 1980년 5월 내란을 통해 광주민주화운동을 무력으로 제압해 수많은 국민을 무참히 학살했다. 그럼에도 전두환의 대통령 재임 기간은 1980년 9월 1일부터 1988년 2월 24일까지 만 7년 동안이나 지속했다. 1987년 민주화운동으로 정권이 바뀌었고 국민이 그에게 잘못을 묻자, 전두환은 변명과 회피로 일관하다 사과문만 남긴 채 서울을 떠났다. 당시 전두환은 국민에게 “전 재산을 국가에 반납하고, 어떤 단죄도 감수하겠다”며 속죄했다. 하지만 그의 대국민 사과는 책임지지 않은 급조된 약속으로 남았다. 대국민 사과 이후 그가 국민에게 보여준 행태를 통해 그의 ‘지켜지지 않은 약속’들을 짚었다.
 

1. 전 재산 국가 반납

백담사로 떠나기 전 연희동 자택서 기자회견 중인 전두환. <한겨레> 자료 사진.
백담사로 떠나기 전 연희동 자택서 기자회견 중인 전두환. <한겨레> 자료 사진.


전두환은 1988년 11월 23일 오전 9시 30분께 자신의 서울 서대문구 연희동 집에서 ‘국민 여러분께 드리는 말씀’이라는 제목의 대국민 사과문을 약 27분 동안 낭독했다. 이날 전두환의 사과문 낭독은 전 국민의 관심을 반영하듯 전국으로 생중계됐다. 전두환은 이 자리에서 집권 때의 과오와 친·인척 비리 등에 대한 사과의 뜻을 밝히고, 전 재산을 국가에 반납하겠다고 밝혔다.

“무슨 미련이 있겠나, 재산은 정부가 국민 뜻에 따라 처리해 달라”?

(중략 ) 저는 국민 여러분에게 속죄하는 뜻에서 이 자리를 빌어 저의 재산 모두를 밝히고자 합니다 .

제 가족의 재산은 연희동 집 안채 (대지 385평 , 건평 116.9평 )와 두 아들이 결혼해서 살고 있는 바깥채 (대지 94평 , 건평 78평 ), 서초동의 땅 200평 , 그밖에 용평에 콘도 (34평 ) 하나와 골프회원권 2건 등이며 , 금융 자산은 재산등록 제도가 처음 실시된 19 83년 총무처에 등록한 19억여원과 그 증식이자를 포함해서 모두 23억여원을 갖고 있읍니다 .

대통령직에 있으면서 축재했다고 단죄를 받는 이 사람이 더 이상 재산에 무슨 미련이 있겠읍니까 . 이 재산은 정부가 국민의 뜻에 따라 처리해 주시기 바랍니다 .

(중략 ) 요긴하게 쓸 요량으로 여당 총재로서 사용하다가 남은 돈 139억원을 관리해 왔읍니다 . (중략 ) 이 돈은 우리나라 정치발전을 위해서 국가가 관리해 주시기 바랍니다 .

하지만 전두환의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전 재산 국가 반납은커녕 대법원에서 선고받은 추징금도 납부하지 않은 채 버티고 있다. 전두환은 1995년 12월 3일 반란 및 내란 수괴와 특가법상 뇌물 혐의로 구속 수감됐고, 1997년 4월 17일 대법원에서 무기징역 및 추징금 2205억 원을 선고받았다.

<한겨레> 2003년 4월 29일 치 보도 내용.
<한겨레> 2003년 4월 29일 치 보도 내용.

전두환은 2003년 4월 28일 법정에 출석해 “전 재산이 29만 원”이라며 “추징금을 납부할 수 없다”고 말한 뒤 판사와 30분간 설전을 벌인 것으로 알려지기도 했다. 2012년 4·11 총선 때 연희동 투표소에 나타난 전두환의 부인 이순자는 “추징금은 어떻게 할 것이나”는 취재진에 질문에 “그 돈은 낼 수 없다"라며 공격적인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2. 국외 재산 도피설

“한 평의 땅, 한 푼의 돈도 국외에는 갖고 있지 않다”

“해외에 재산을 도피시켰거나 국내에 은닉해 놓은 재산이 있는 것이 밝혀진다면 그 어떠한 책임 추궁도 감수하겠다. ”

전두환은 국외 재산 도피설과 관련해서도 적극 부인했다. 그는 자신의 침묵으로 인해 의혹이 눈덩이처럼 부풀렸고, 우리 헌정사의 불행한 경험 때문에 대통령을 지낸 사람은 으레 부정으로 재산을 모아 국외로 빼돌렸다고 믿는 경향이 있어 안타깝다고 말했다.

<한겨레> 2015년 3월 7일자 보도 내용.
<한겨레> 2015년 3월 7일자 보도 내용.

하지만 국세청은 전두환의 대국민사과 뒤 25년이 지난 2013년 10월 전두환의 국외 재산 은닉을 공식 확인했다. 그로부터 1년 반이 더 지난 2015년 3월, 한-미 형사사법 공조를 통해 전두환의 은닉 재산은 일부나마 추징될 수 있었다.

3. “삼청교육대 사건 등은 시행착오였다”

사회정화라는 미명 아래 기본적 인권마저 유린당해야 했던 삼청교육대. 무고한 국민들과 민주인사들도 삼청교육대에 끌려가 갖은 고초를 당해야만 했다. <한겨레> 자료 사진.
사회정화라는 미명 아래 기본적 인권마저 유린당해야 했던 삼청교육대. 무고한 국민들과 민주인사들도 삼청교육대에 끌려가 갖은 고초를 당해야만 했다. <한겨레> 자료 사진.

“피해 당사자 한 분 한 분에게 진심으로 사과를 드린다”

(중략 ) 많은 사람들이 고통과 피해를 당한 삼청교육대 사건과 공직자 ·언론인 해직 문제 , 인권침해 사례 등의 실상들이 파헤쳐 지는 것을 저도 아픈 마음으로 보고 있습니다 .

(중략 ) 피해 당사자 한 분 한 분에게 진심으로 사과를 드리며 , 이들에 대한 적절한 보상이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
 


삼청교육대는 전두환이 1980년 5월 17일 비상계엄령을 선포한 뒤 군 부대에 설치한 기관이다. 전두환 정권의 대표적 인권침해 사례로 꼽히는 삼청교육대는 순화 교육을 명목으로 가혹한 방법의 훈련을 감행했다. 1988년 국방부 국정감사 발표를 보면, 삼청교육대 현장 사망자가 52명, 후유증으로 인한 사망자 397명, 정신장애 등 상해자 2678명 발생한 것으로 보고됐다. 하지만 이로 인해 처벌받은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

<한겨레> 1988년 12월 11일 보도 내용.
<한겨레> 1988년 12월 11일 보도 내용.

전두환은 대통령 재임기간 중 손쉬운 여론 장악을 위해 언론사 강제 통폐합 조처에 관여하기도 했다. 이 과정에서 언론인들이 대량 해직되고, 사전 검열과 ‘보도 지침’ 등을 통해 자신을 비판하는 기사 등은 배포 전 지면에서 빼기도 했다. 이로써 제 5공화국 시절 한국의 언론 자유가 크게 훼손됐다.

<한겨레> 1988년 11월 22일자 보도 내용.
<한겨레> 1988년 11월 22일자 보도 내용.

제5공화국 당시 전두환의 최측근 인사 중 한 사람이었던 허문도 전 청와대 정무비서관은 1989년에 열린 13대 문공위 청문회에서 “언론 통폐합이나 언론인 강제해직에 관여하지 않았다”고 진술했다가 위증으로 고발당하기도 했다.

4. 광주민주화운동 광주시민 학살

1980년 5월 광주민주화운동 당시 계엄군이 시민들을 무참히 폭행하는 모습. 5·18기념재단 제공.
1980년 5월 광주민주화운동 당시 계엄군이 시민들을 무참히 폭행하는 모습. 5·18기념재단 제공.

전두환은 대학생들의 민주화 운동을 진압하기 1980년 5·17비상 계엄을 확대 조처했다. 이에 항의하는 시민들의 시위를 진압하기 위해 광주에 공수특전단을 투입해 초강경 유혈 진압을 주도했다. 이 과정에서 확인된 공식 사망자만 165명, 부상 후유증 사망자는 376명에 달했다. 행방 불명자 76명은 아직도 생사를 알 수 없다.

“광주민주화운동 피해자와 유가족의 한이 풀어질 수 있다면”

“(중략 ) 80년 5월 광주에서 발생한 비극적인 사태는 , 우리 민족사의 불행한 사건이며 , 저로서는 생각만 해도 가슴이 아픈 일입니다 .

(중략 ) 그 비극적인 결과에 대해 큰 책임을 느끼고 있읍니다 . 또한 그 후 대통령이 된 뒤에 그 상처를 치유하지 못했던 점을 깊이 후회하면서 , 피해자와 유가족의 아픔과 한이 조금이라고 풀어질 수 있다면 어떤 일이라도 마다하지 않겠읍니다 .“

전두환은 백담사로 떠나기 전 대국민담화에서 광주민주화운동 피해자와 유가족에 처음으로 사과의 입장을 밝혔다. “모든 책임은 자신에게 있으며, 사건이 발생한 데 대해 깊이 후회한다”고 말했다. “피해자와 유가족을 위해서는 어떤 일이라도 마다하지 않겠다”고 덧붙였다.

하지만 전두환이 29년이 지난 2017년 펴낸 <전두환 회고록>에선 입장이 180도 바뀌었다. 그는 회고록에서 “5·18을 ‘광주사태’로 표현하고 ‘북한군에 의한 폭동’이라고 서술했다.” 그는 “‘광주 발포 명령’이란 것은 아예 존재하지도 않았다”며 “헬기 사격·폭력 진압은 없었다”고 주장했다. 또 자신을 ‘광주사태 치유와 위무를 위한 씻김굿 제물’에 비유하며 “민간인에 대한 살상 행위는 일어나지 않았다”고 역사를 왜곡하기도 했다.

5. 일해 재단·새세대 육영회·새세대 심장재단의 가족, 친·인척 비리

“많은 집안사람들이 비리로 국민의 분노를 사게 된 점에 대해 사죄”

“(중략 ) 돌이켜 생각할 때 아무리 좋은 취지의 일이라 하더라도 돈이 필요한 사업을 , 대통령 부인이 직접 맡아서 한다는 사실이 기업인들에게 무언의 압력이 되었을 것이라는 점을 미처 생각지 못했던 것은 큰 잘못이었습니다 .

일해 재단도 당초의 설립 취지대로 `아웅산 ' 사건 유가족을 돕고 자녀들의 학업을 지원하는 일에 그쳐야 했다고 후회하고 있습니다 .

(중략 ) 그러나 현직 대통령이 이 사업에 깊은 관심을 보임에 따라 , 시설을 호화롭게 꾸미게 되었으며 , 기금을 모으고 관리하고 운영하는 데 있어서 잘못이 빚어진 점에 대해서는 , 모두가 저의 불찰이며 감독 소홀의 탓임을 자책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

일해재단 청문회 증인으로 나온 고 정주영 회장. <한겨레>자료 사진.
일해재단 청문회 증인으로 나온 고 정주영 회장. <한겨레>자료 사진.

전두환은 사실상 자신의 비자금 조성을 위해 1983년 12월 재단을 설립한다. 자신의 호를 따 일해 재단이라고 이름 짓고 부인 이순자에게 운영을 맡겼다. 대외적으로는 아웅산 묘소 폭탄 테러 순직자 유자녀를 위한 장학 재단이라고 홍보했다. 하지만 대기업들에게 본격적으로 모금한 뒤 개인 주머니에 돈을 챙겼다는 의혹을 받고 있다. 대기업들로부터 강제로 모금한 금액은 598억 5000만 원에 달했다. 전두환은 일해 재단 이외에도 새세대 육영회(찬조금 235억 9900만 원, 정부 보조금 17억 5300만 원)와 새세대 심장재단(기부금 220억, 회비 2억 3000만 원, 정부 보조금 11억 원) 등을 설립했다.

<경향신문> 1991년 12월 29일자 보도내용

<경향신문> 1991년 12월 29

일자 보도내용

1988년 11월에 열린 국회 5공 비리 조사특위에서 장세동 전 대통령 경호실장이 일해 모금 관리를 시인하고 재단의 전두환 사유화 문제와 운영과정의 비리 등을 증언했다. 그러자 전두환은 장세동의 증언을 못마땅해하며 직접 법정에서 진술하겠다고 나섰다. 하지만 결국 전두환의 법정 출석은 이뤄지지 않았다.

6. "어떤 단죄도 달게 받겠다“

백담사로 간 전두환과 이순자. <한겨레> 자료 사진.
백담사로 간 전두환과 이순자. <한겨레> 자료 사진.

(중략 ) 여러분의 마음을 후련하게 풀어 드릴 수만 있다면 , 그리고 모처럼 시작된 민주화를 통해 국민의 화합을 이룩할 수만 있다면 , 저는 어떤 단죄도 달게 받아야 할 처지임을 깊이 깨우치면서 국민 여러분의 심판을 기다리겠읍니다 .

군문에 들어설 때 국가와 민족을 위한 제단에 이 한 몸을 바치기로 한 저는 이제 어떠한 고통과 시련이 닥친다 하더라도 회피하지 않을 것이며 , 더욱이 그것이 저의 과오로 인한 인과응보이고 보면 여한이 있을 까닭이 없읍니다 .

국민 여러분이 주시는 벌이라면 어떤 고행도 마다하지 않을 것이며 , 국민 여러분이 가라고 하는 곳이면 , 조국을 떠나는 것이 아닌 한 , 속죄하는 마음으로 어느 곳이라도 가겠습니다 .

<전두환 회고록>이 출간되기 일주일 전인 2017년 4월 27일 그의 부인 이순자는 <당신은 외롭지 않다>는 자서전을 출간한다. 그의 자서전 내용에는 그들의 대국민담화가 면피용 사과였음을 짐작게 하는 대목이 나온다.

“(중략) 12.12, 5.17, 5.18에 대한 편집증적인 오해와 정략적인 역사 왜곡 앞에서 나는 몇 번이고 전율했다. (중략) 이 책은 내가 그분(전두환)과 제5공화국을 향해 쏟아졌던 비난의 해일 앞에 묵직한 빗장을 지르고 앉아 신음하며 적어간 기록물이다.”

강민진 기자 mjkang@hani.co.kr



원문보기:
http://www.hani.co.kr/arti/politics/politics_general/820424.html#csidx2823240b695792ea53e6ac99f679c8c